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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천재 작가 '뭉크'

Jobs9 2020. 9. 22.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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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1893)

에드바르트 뭉크

<불안>(1896)

 

노르웨이 출신의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는 극심한 우울증 환자였다. 우울증의 근본 원인은 상실감이었는데, 그 상실감은 유년 시절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여러 번 겪은 데서 비롯되었다. 뭉크 나이 5세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했고, 13세에는 두 살 위 누이가 같은 폐병으로 죽었다. 여동생 중 하나는 우울증으로 인한 착란 증세로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그 후 아버지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남동생마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족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뭉크는 생애 내내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의 싸움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질병, 광기, 죽음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고 느꼈으며, 인간에게 가장 힘들고 괴로움을 주는 두 가지 질병인 폐병과 정신병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병든 아이>(1896), 결핵으로 죽은 누이 소피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임종의 자리에서(열병)>(1896)

그는 사랑에서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 뭉크의 우울함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사랑하는 여자들은 모두 뭉크를 떠났다. 처음 좋아한 여자는 자신의 후원자인 해군 군의관의 부인이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보헤미안 기질의 여자는 뭉크가 감당할 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뭉크는 그녀와 사귀면서 끝없는 의심과 질투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여자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갖기 시작하였다. 뭉크는 후원자의 부인을 메두사로 표현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고향 후배를 사랑하였지만 그녀는 스트린드베리(스웨덴 출신의 소설가), 스타추(폴란드 출신의 작가)와 삼각관계를 유지하다가 갑자기 스타추와 결혼해버렸다. 뭉크는 이 후배를 첫사랑의 실패에서 얻은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여인으로 생각했으나 이마저도 배신당하고 나서 여성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뭉크는 이 후배를 모델로 <마돈나>라는 작품을 완성하였다. 마돈나로 여겼던 여자가 살로메나 메두사로 변한다는 뭉크의 생각이 반영된 작품이다.

어느 정도 유명세를 가지게 되었지만 영혼은 피폐한 상태였던 뭉크에게 나이 34세에 세 번째 사랑이 찾아온다. 상류층 여성인 튤라가 바로 그 상대였다. 뭉크는 튤라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오는 등 차츰 마음의 문을 열고 행복한 연애를 하는 듯하였으나 그와의 결혼을 원했던 튤라를 그는 매몰차게 거절해버린다. 그 이전의 관계에서 기인한 상처 때문에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마돈나>(1894)

<마돈나> 석판화

<손(The Hands)>(1893)

<뱀파이어>(1893)

뭉크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의 자택 2층에서 발견된 많은 양의 작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유화 1008점, 드로잉 4443점, 실크스크린 1만5931점, 석판화 378점, 에칭화 188점, 목판화 148점, 석판화용 석판 143점, 동판 155점을 비롯해 수많은 사진과 일기가 수북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뭉크는 유언에서 평소 생각대로 이 모든 것을 아무 조건 없이 오슬로시에 양도하였다. 1963년 오슬로시는 그 작품들을 소장하기 위해 뭉크 미술관을 열었다. 뭉크는 자기 작품이 자신을 떠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여 한 점이 팔리면 똑같은 작품을 한 점 더 그렸다. 그래서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멜랑콜리>(1894)

<다리 위의 소녀들>(1899)

한편 그동안 많은 의문을 가지게 했던 뭉크의 <절규> 그림에 묻은 하얀색 점액질의 정체가 123년 만에 풀렸다. 한때는 이 점액질이 야외에서 그리기 좋아하는 뭉크가 그림 그리는 동안 새의 분비물이 떨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벨기에 앤트워프 대학 연구진이 특수 개발된 엑스레이로 연구한 결과 뭉크의 작업실에 있던 초에서 떨어진 촛농에서 묻어난 밀랍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풍요Ⅱ(FertilityⅡ)>(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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