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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 - 색슨 잉글랜드, 7왕국[영국 역사]

Jobs9 2020. 9. 2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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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 - 색슨 잉글랜드

앵글로 - 색슨 족의 침입과 정착

당대에 쓰여 가장 확실하게 시대상을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는 저술은 오직 켈트계 수도사인 길더스(Gidas)의 기록인 『브리튼의 멸망과 정복』(De excidio et conquestu Britanniae)이 유일한데, 기실 길더스의 기록에서도 직접적인 실제 사건의 묘사는 그리 많지 않다. 길더스는 540년에 이 저작을 작성했는데 이는 당시의 악폐를 가장 맹렬한 폭언으로 고발하기 위함이었다. 이 450년경에서 600년 경 미지의 150년에 대해 활용할 수 있는 주요 문헌 사료는 8세기 노섬브리어의 수도사 비드(Bede)가 쓴 『잉글랜드인들의 교회사』(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와 9세기 위대한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의 치세에 기록되기 시작한 『앵글로 - 색슨 연대기』(The Anglo-Saxon Chronicle)가 있다.

 어찌되었건 앵글로 - 색슨 고유의 당대에 가까운 자료는 사실상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초기 행적은 다만 적대적인 원주민의 눈을 통해서든가, 아니면 사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의 눈을 통해서, 또는 희미하게 기억되는 전승에 의거해서 엿볼 수 있을 뿐이다. 6세기 말까지의 브리튼 역사는 남아있는 기억의 파편들을 안내문도 없이 짜맞추는 일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문헌 기록 부재의 '암흑시대'는 실상 격동의 브리튼 역사상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시기다. 소위 앵글로 - 색슨족은 브리튼 섬으로 쳐들어와 저지대를 장악하고 성공적으로 정착한 반면, 기존의 켈트인들은 치열하게 격렬한 저항 끝에 마침내 패배하고 말았다. 그 일부는 정복자들 사이에서 동화되어 살아남았으나 대부분은 데번, 콘월, 웨일즈, 그리고 스트래스클라이드(strathclyde) 등 북서부 산악 지대로 쫓겨났다. 다른 일부는 바다를 건너 갈리아 북서부의 아르모니카(Armorica)로 옮겨갔고, 브리튼 섬의 절반가량은 앵글인들의 땅, 즉 잉글랜드(england)가 되었다. 이후 브리튼 역사의 향방(向方)은 일부 켈트계나 다른 소수 종족이 섞이기는 했지만, 대체로 앵글로 - 색슨계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 앵글로 - 색슨 족의 브리튼 침입은 4 ~ 6세기 300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진행되었던 게르만족 대이동 물결의 일부였다. 허나 고트족(Goths), 프랑크족(Franks), 롬바르드족(Lombards), 부르군드족(Burgundians) 등 대부분의 게르만족이 북동부 유럽에서 서유럽의 로마제국 영토 안으로 육로를 통해 물밑듯이 밀려온 것과 다르게, 앵글로 - 색슨 족은 대륙에서 떨어진 브리튼 섬으로 바닷길을 통해 쳐들어왔다. 또한, 그들의 침입은 다른 게르만족의 침입보다 시기적으로 뒤늦었다. 바꿔 말하면 다른 게르만족들이 긴 이동의 시간 동안 로마의 문화와 어느정도 접촉하고 있었던 반면, 앵글로 - 색슨 족은 로마와 거의 접촉하지 않아 실로 게르만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600년 이전의 사건 서술량은 앞서 말한 문제로 인해 그리 많지 않다. 일단 가장 확실한 당대인인 길더스에 의하면, 로마가 물러난 400년대 초반의 주요인물은 보티건(Vortigern)이었다. 그러나 보티건의 브리튼 통치는 남부 브리튼에 제한되었을 뿐이다. 서부 해안에서는 아일랜드인들이, 북부는 픽트족이, 동부 해안은 색슨족들의 습격과 약탈이 끊이지 않아서 브리튼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침략에 시달린 브리튼 주민들은 446년 이른바 '브리튼인들의 신음'(the groans of the britons)을 로마에 제출하여 구원을 요청했으나 이는 부질없는 행위였다. 골치 아픈 상황에 놓인 보티건은 이들 침략자들을 막아내기 위해 대륙의 용병을 고용했다. 이들은 주트족(Jute)이었고 그들의 주도자는 헹기스트(Hengist)와 호르사(Horsa) 형제였다. 비드의 말에 따르자면 주트족은 유틀랜드 북부에 정착해 있던 게르만족이었다. 

 이들 용병들은 켄트의 사네트 섬(Isle of Thanet)을 정착지로 받은 후 동쪽 해안으로는 같은 동족인 게르만족의 침략을 막아내었고 서쪽으로는 아일랜드에서 건너오는 켈트족의 침략을 방어했다. 하지만 그들의 고용주인 보티건과 연합하고 있던 브리튼의 켈트 주민들은 차츰 그의 통치력에 의문을 가졌으며, 따라서 식량 자원과 세금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눈치챈 헹기스트 형제는 보티건에게 압박을 가했다. "우리의 보수를 올려주시오.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을 지켜주기 위해 우리 목숨을 맡길 수는 없지. 만약 우리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못하겠다면 이 칼끝이 당신 목을 겨냥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소."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권력을 유지하고 싶었던 보티건은 통제불능의 용병들을 막아낼 또다른 용병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사태를 주도면밀하게 지켜보던 헹기스트는 보티건을 위한 연회를 베풀고 자신의 아름다운 딸로 하여금 보티건의 시중을 들어 그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 헹기스트는 이후 왕국의 절반을 양도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헹기스트와 그 부족들은 지금의 켄터베리를 거점으로 확실하게 정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브리튼 주민들과의 직접적인 대립은 결국 피할 수 없었는데, 보티건이 브리튼계 부인으로부터 얻은 자식인 보티머(vortimer)가 사병을 조직한 다음 켄트의 주트족을 공격하여 사네트 섬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보티머는 사네트와 본토 사이에 있는 리치보로의 원썸 해협 근처에서 벌어진 위페스플레오트(Wippedsfleot)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패배 이후 주트족은 사네트 섬에서 5년 동안 갇히게 되었는데, 권토중래를 노리며 455~456년경에는 사네트 섬을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티건은 헹기스트의 딸인 부인을 내세워 왕국을 분할하는 조약을 맺음으로서 사태를 수습했지만, 이는 켄트에 명실상부한 주트족 왕국이 들어서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보티건은 이후 내부의 반란으로 거주하던 성이 화염에 휩싸여 불에 타 죽었고 헹기스트는 켄트 주변 지역들을 평정하며 자신의 왕국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488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인 애쉬가 왕위를 이어받았고, 애쉬는 24년 동안 왕국을 다스렸다.

 주트족이 세운 켄트 왕국이 세력을 넓혀나가면서 주변의 토착 켈트인들은 의도하지 않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했다. 하나는 서쪽으로 쫓겨나가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주트족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었다. 이때 서쪽으로 밀려난 켈트인들은 나중에 색슨족들로부터 이방인으로 불리우는 기이한 운명에 직면했다. 하기야 제3의 방안이 하나 남아 있기는 했다. 대륙으로 건너간 일부는 브리타뉴(britany)라고 일컫어진 왕국을 세웠다.

 켄트 왕국의 무용담은 필시 다른 게르만 부족들을 자극시키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대거 브리튼 섬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는데, 477년 남부 유틀랜드 반도에 거주하던 색슨족의 전사 엘레(Aelle)는 세 척의 배에 세 명의 아들과 부하를 싣고 브리튼 남부 해안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불과 14년만인 491년, 그는 브리튼인들을 몰아내고 남부 지역에 서식스(Sussex) 왕국을 세웠다. 이 서식스 왕국의 첫 군주는 브레트왈다(Bretwalda)로 불리웠는데, 이는 '브리튼의 군주' 라는 의미였다. 495년에는 또 다른 색슨족의 족장인 체르디크(Cerdic)가 서샘튼 하구쪽으로 5척의 배를 이끌고 상륙했다. 그들은 햄프셔와 월트셔로 진격하여 그곳의 브리튼인들을 몰아내고 웨식스(Wessex) 왕국을 세웠다. 이 외에 동부 지방에 정착한 색슨인들이 세운 마지막 왕국은 에식스(Essex) 였다.

 

 

 색슨족은 강력한 전사임과 동시에 난폭함과 야만성을 갖추고 있었고 이는 선주민인 켈트인들에게는 재앙이 되었다. 그들의 싸움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와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지면 해안 일대의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침략자들은 분탕질과 약탈, 겁탈과 살육을 자행핬다. 비드는 이렇게 묘사했다. "잔인하게 살해된 사람들을 매장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언덕에서 붙잡힌 불쌍한 몇몇 생존자들은 한꺼번에 몰살당했으며, 그 외의 사람들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기어 나와 먹을 것을 구걸하며 적에게 투항했다. 그들은 당장의 살육은 면했지만 평생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졌다. 곤궁을 피해 해외로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고향 땅에 눌러 있으면서 비참하고 공포 어린 삶을 견뎌나갔다." 

 그러나 색슨족의 침입은 서서히 진행되었으며, 또한 이 과정에서 브리튼인들의 완강한 저항을 겪어야만 했다. 길더스에 의하면 결말이 나지 않은 전쟁이 수없는 세월에 걸쳐 이어지다가 (아마) 500년 경에 오늘날 위치를 알 수 없는 몽스 바도니쿠스(Mons Badonicus)라는 곳에서 브리튼의 영웅인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Ambrosius Aurelianus)는 앵글로 - 색슨족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안겼다.

 우리는 이 무렵 브리튼을 수호하려 싸우던 영웅에 대한 일대기를 알고 있다. 온갖 전설과 민담, 엶게 남은 전승의 기억이 뒤섞인 아서 왕(King Arthur)이 이 몽스 바도니쿠스의 싸움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인물인지, 그가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인지, 다른 어떠한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이름과 관련되어 수집된 대부분의 전설은 12세기 이후에야 낭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허나 과거의 로마 지배 영역이 무너져 마침내 브리튼과 앵글로 - 색슨의 여러 나라로 분립되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통일을 (어느정도 성공적이었을지는 둘째치더라도) 기도했던 영웅왕은 있을 법도 하다. 이 시기 주요 정치사건에 대한 기록의 부재와 우리의 무지는 너무나 커서 더이상 추론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한편 가장 늦게 브리튼 땅에 들어선 앵글 족은 슐레스비히 근처에 근거지를 둔 게르만인이었다. 이들은 5세기 말에 브리튼에 들어와 동앵글리아(East Anglia), 머시아(Mercia), 그리고 중북부 지방에 노섬브리아(Northumbria)를 세웠다. 이들 중에서도 이다(Ida)에 의해 통치된 노섬브리아는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7세기 초까지 브리튼에 정착하여 자리를 잡은 주트 - 앵글로 - 색슨족의 주요 게르만 왕국들은 켄트, 서식스, 웨식스, 에식스, 이스트 앵글리아, 머시아, 노섬브리아의 7개 왕국이 되었다. 

 

 7왕국(Heptarchy)

 문헌상 기록의 부재로 그 온갖 난립과 전쟁의 혈전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서남부 구릉지대의 성채의 재건은 수 년간의 결판나지 않은 소규모 전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발굴된 고분이 증명하듯이, 이 시기 내내 침공자들은 이스트 앵글리아에서는 서쪽으로, 웨식스에서는 북쪽으로 멀리 내륙지방으로 밀고 들어와 템즈 계곡에까지 이르렀다. 그 세기의 말이 되었을때 이 침공자들은 섬의 절반을 장악하였고, 더 이상 '침공자' 가 아닌 섬의 '주민' 이 되었다. 

 그렇다면 '선주민' 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스코틀랜드에서는 여전히 픽트족이 우세하였고, 다만 서해안의 아일랜드인(이후의 '스코트족') 거주지는 정착된 왕국, 달리아더(Dalriada)를 창건했다. 수백 년 후 달리아더의 한 왕이 통일된 스코틀랜드의 형성을 주도하게 되었다. 북쪽에는 세 개의 왕국이 있었다. 덤바튼(Dumbarton)에 중심을 둔 스트라스클라이드, 솔웨이 만의 레기드(Rheged), 그리고 리즈(Leeds) 지역의 엘미트(Elmet)가 그들이다. 이 중 스트라스클라이드는 살아남았으나 레기드와 엘미트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사이에 노섬브리아에 의해 병탄되었다. 

 브리튼 섬의 가장 외진 곳은 물론 웨일즈였다. 동쪽에서 온 피난민들은 그 곳 인구를 몰아내었다. 브리튼 왕국들은 이곳에서 잔존하여 그리 인상적이지 못한 삶을 이어갔다. 현재 영국의 남서부 주 지역에 대한 공격은 838년 콘월이 정복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미 6세기 말엽에 웨스트 색슨족은 연이어 거둔 승리로 웨일즈의 브리튼인들과 데번 및 콘월의 브리튼인들을 분리시켰고, 노섬브리아는 7세기 초엽 체스터에서 브리튼인들을 패배시킴으로서 웨일즈인들과 컴브리어(Cumbria)의 브리튼인들을 분리시켰다. 따라서 서로 떨어진 켈트족 거주 지역은 분리되었으며, 앵글로 - 색슨족에 맞서 효과적인 방어를 하기는 어려운 형국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앵글로 - 색슨족의 브리튼 정복은 과거 로마인들의 브리튼 정복보다 훨씬 더 결정적이며 항구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정복된 전지역에서 영어가 사용되었으며 언어의 변화는 생활양식의 변화 자체를 의미했다. 그러나 야만인에 대한 문명인의 침공이었던 로마의 정복이 피지배 지역인 북서부에도 영향을 미친데 비하여, 문명인에 대한 야만인의 침공이었던 앵글로 - 색슨족의 정복은 그렇지 못했다. 요컨대 앵글로 - 색슨족의 정복 여파는 로마인들보다 훨씬 강력했지만, 지리적으로 그것이 미친 범위는 제한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교

 이 7왕국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이교적인 침입자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것과 여러 왕국들이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되어간 것인데,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잉글랜드가 정치적 통일을 이룰 역량이 없을때 교회는 잉글랜드 전체에 하나의 통일 조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통일된 교회는 통일된 왕국을 향한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었다.

 당초 게르마니아의 여러 신을 섬긴 앵글로 - 색슨족에게는 뚜렷한 윤리 체계가 없었다. 그들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어떠한 대답이나 인간 존재의 신비를 설명하는 어떤 우주관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물음에 답을 해주었다. 천국과 지옥의 개념을 제공하고, 영생에 대한 약속을 제시했으며, 믿음과 순종이 그 약속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이는 정복자의 시대를 끝내고 정착된 농업 사회에 필요한 사회적인 규율을 제공했다. 교회는 폭력을 반대했고, 성의 문란함을 비난하여 혼인의 신성함을 옹호하고, 상속권을 규정하고, 이 세상에서 순종할 것을 권장했다.

 잉글랜드의 왕들에게, 국왕의 권위에 순종하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분명 환영할만한 것이었다. 유일신을 믿는 그리스도교와 통일된 교회는 이교도의 많은 신들에 비해 왕정에 더 잘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스도교를 원하는 앵글로 - 색슨족들은 두가지 경로를 통해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첫번째 방법은 로마 교회를 통한 형식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는 로마의 성 안드레아스(St. Andreas) 수도원장 아우구스티누스를 켄트에 파견했다. 597년 40여명의 일행과 함께 켄트에 도착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켄트의 왕 애설버트 (Aethelbert)는 이들 일행을 친절하게 받아들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일행의 행운은 애설버트가 이미 그리스도교화 한 갈리아와 접촉을 했고, 프랑크의 왕녀와 결혼한 후에는 두려워 하던 이방인의 '마법' 에 감동하여 전도를 허락하고 이내 자신도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애설버트는 켄터베리(Canterbury)에 수도원을 세웠고, 아우구스티누스는 601년 최초의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초대 대주교와 수도사들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켄트, 에식스, 이스트 앵글리아 등 잉글랜드 남동부 일대의 앵글로 - 색슨족들에게 전도했다. 이리하여 7세기 중반에 이르러 잉글랜드 남동부 일대는 영구적으로 그리스도교화 되었다.

 반면 북부에서는 로마 교회를 통하지 않은 독자적인 켈트적 교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아일랜드에는 이미 로마시대부터 그리스도교가 들어와 있었고, '아일랜드의 사도' 성 패트릭(Saint Patrick)의 공헌에 힘입어 그 기반을 쌓았다. 로마화 되었던 브리튼 관리의 아들 패트릭은 소년 시기에 아일랜드 해적에게 납치되어 얼스터로 끌려갔다가 몇 년 후 탈출하여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에서 공부했다. 이후 그는 432년 주교로 임명되어 아일랜드로 돌아온 이후 30년 가까이 아일랜드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로마식의 주교제적 교회 조직을 세워 나갔다.

 성 패트릭의 사후 주교제적 조직은 쇠퇴했고, 수도원들은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을 주도했다. 왕이나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세운 수도원에서는 중앙 조직이 없고 통일된 규율도 없이 수도사들인 마음대로 수도원을 옮겨다녔는데, 그들은 황량한 외딴곳에 자리 잡은 오두막집들을 벌집처럼 한군데 모아놓은 수도원 안에서 금욕족 수도 생활을 했다. 이처럼 로마 교회와 단절된 아일랜드 교회는 수도원 체제하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이 켈트적 교회는 6세기 동안 뛰어난 학자와 성자, 전도사들을 배출하여 스코틀랜드로 나아가 픽시족들을 개종시켰으며, 스코틀랜드 서해안 헤브러디즈 제도(Hebrides)의 아이오우너(Iona) 섬에 563년 수도원을 세웠다. 로마 교회의 잉글랜드 전도의 중심지가 켄터베리가 된 것처럼 잉글랜드 북부에서 켈트 교회의 중심지가 된 수도원은 바로 이 수도원이었다.

 이들은 성공적으로 북부 잉글랜드를 개종시키기 시작했다. 허나 노섬브리아에 그리스도교를 도입시킨것은 로마 교회가 먼저였다. 이는 에드윈(edwin)의 치세 당시로, 우연찮게도 에드윈은 625년 켄트의 군주 애설버트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고, 이 신부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앙을 게속 지켜나갈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파울리누스라는 주교를 대동하고 남편의 나라로 왔고, 이 영향으로 에드윈 역시 곧 세례를 받았다. 최초의 요크 대주교가 된 파울리누스는 험버 강 이남의 땅에서 전도사업을 펼쳐 노섬브리아인들을 속속 개종시키기 시작했다.

 632년 에드윈이 머시아의 이교도 왕 펜더(Penda)에게 패배하여 살해되자 노섬브리아는 잠시 이교로 되돌아갔지만, 오스왈드(Oswald)의 시대에 다시 그리스도교가 회복되었다. 이후 오스왈드가 초빙한 수도사들은 자신이 한때 피난한 적이 있었던 아이오우너 수도원의 켈트 교회 선교사들이었다. 아이오우너 수도원은 에이던(Aidan)이라는 수도사를 파견했고, 에이던은 홀리 아일랜드(Holy Island)의 린디스판(Lindisfarne) 수도원을 기점으로 노섬브리아의 개종에 주력했다. 

 이리하여 7세기와 8세기의 노섬브리아에서는 켈트계와 로마계의 두 그리스도교가 맞서게 되었다. 이 두 교회는 그렇게까지 적대적이지는 않았지만, 양자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로마 교회의 선교사들은 당연하게도 교황을 최고의 권위로 삼았지만 켈트계 수도사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지상에서 최종적 중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로마계 교회는 철저한 질서와 규율을 중시했지만 켈트계 교회는 열성적인 복음 전도를 강조했다. 심지어 로마계 수도사들이 머리 윗부분을 원형으로 면도한 데 비하여 켈트계 수도사들은 두 귀 사이를 띠 모양으로 면도질 했다. 부활절을 춘분 후 만월 뒤의 첫 일요일로 잡는다는 점에서 양측은 일치했으나, 로마계는 춘분을 3월 21일로 정했던 것과 달리 켈트계는 3월 25일로 정하고 있었다.

 노섬브리아의 군주 오스위(Oswiu)는 당혹스럽게도 자신의 부인이 로마계 교회의 영향을 받고 있던 켄트의 공주였기에, 한 나라의 왕과 왕비는 서로 다른 부활절을 기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스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63년 양측의 대표를 불러 회의를 소집했다. 아이오우너 수도원에서 파견된 켈트계의 대표 코울맨(Coleman)은 그들의 주장의 근거가 전대의 성인인 성 콜롬보에게 있다고 주장했고, 로마계의 대표 윌프리드(Wilfrid)는 자신들의 주장이 천국의 열쇠를 지니고 있는 성 베드로(Saint Peter)의 권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전승에 의하면, 오스위는 코울맨에서 그리스도가 천국의 열쇠를 성 베드로에게 주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물었고, 코울맨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내가 천국의 문 앞에 갔을때 문을 열어줄 삼아 잆어서는 안될 일이니, 로마 쪽을 택해야겠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승이야 어떻든 이는 영국 역사상 중요한 결정으로 개인적 인상에 의존한 켈트 교회 대신 통일적 주교 조직에 기반을 둔 로마 교회를 선택한 것은 잉글랜드의 통일 왕국의 성립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로마 교회는 이후 티도오어(Theodore)가 669년 대주교에 임명되어 부임한 이후 절정을 맞이했다.  

 

 앵글로 - 색슨의 통일 과정

7세기 초 잉글랜드에 등장한 큰 왕국들은 7왕국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와 같이 명확하지 않다. 소왕국들은 혼돈 상태에서 서서히 등장하고 있었다. 기실 600년 무렵 영국의 왕들은 수십 명을 훌쩍 넘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웃 왕들에게 복종을 요구할 수 있을 만큼 유력한 왕들은 군소 왕들을 임명하거나 그들에게 공납을 요구 할 수도 있었다. 이 같은 종주왕(宗主王)은 브레트왈더(Bretwalda)라고 일컫어졌다. 

 최초의 브레트왈더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켄트의 애설버트였다. 이 당시 켄트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문명화되고 인구가 많은 나라였고, 애설버트 사후에는 이스트 앵글리아의 레드윌드(Redwald)가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7세기 전반기는 노섬브리아가 가히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노섬브리아의 군주 에드윈은 험버 강 이남의 거의 모든 왕국의 브레트왈더로서 이전의 어느 앵글로 - 색슨 군주들보다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그러나 에드윈의 위세는 그위네드(Gwynedd)의 왕 카드월론(Cadwallon)이 머시아의 펜더와 연합하여 노섬브리아에 쳐들어왔고, 에드윈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에드윈의 뒤를 이은 오스월드는 이듬해 카드윌론을 패배시켜 다시 노섬브리아 왕국의 지배권을 수복했지만, 이제 머시아의 펜더라는 강력한 적수가 남아 있었다. 펜더는 오스월드를 패배시킨 후 중부 잉글랜드의 여러 부족들을 하나의 연합국가 내에 통합시켰고, 활발한 대외확장을 벌였다. 그러나 오스월드의 뒤를 이은 오스위에게 패배하며 살해당하면서 패권은 노섬브리아에 넘어갔다. 하지만 오스위 사후 다시 머시아가 세력을 잡았다. 

 8세기 후반 머시아의 군주가 된 오퍼(Offa)는 알프레드 대왕 이전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군주였다. 그는 머시아의 세력을 험버 강 이남까지 확대하여 켄트, 에식스, 서식스, 이스트 앵글리어, 그리고 런던까지 판도 안에 넣었다. 그는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고 내치에 힘써 정부 기구를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했으며, 은화를 주조하고 잉글랜드산 모직물을 적극적으로 수출하려 했다. 그리고 스스로 '영국 왕(Rex Anglorum)' 이라는 칭호를 사용함으로서 자신을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와 동일한 반열에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오퍼도 9세기에 이르러 웨식스 왕가가 대두함에 따라 잉글랜드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지는 못했다. 오퍼 사후 브레트왈더의 지위는 웨식스의 왕에게 넘어갔다.

 웨식스의 에그버트(Egbert)는 825년 머시아인들을 물리친 후 서식스, 켄트, 에식스, 이스트 잉글리어 등으로 부터 브레트왈더로 인정받았다. 이와 동시에 그는 콘월의 켈트인들을 복속시켜 남부 잉글랜드 전역을 단일한 왕국의 테두리 안에 넣었다. 하지만 여러 왕국의 연합은 느슨했다. 중앙정부가 없었으며, 해외에서는 가공할 적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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