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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익상 의사

Jobs9 2020. 9. 22.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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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3대 의거의 독립운동가들

육삼정 의거(1933년 3월 17일)를 기획한 백정기 의사, 훙커우 의거(1932년 4월 29일)를 거행한 윤봉길 의사, 황포탄 의거(1922년 3월 28일)의 김익상 의사.

상하이의 항구, 황포탄(黃浦灘). 사연이 많은 곳은 으레 향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황포탄은 그런 곳이다.

피천득은 30년대 황포탄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했다. ‘유태인, 백계(白系) 노서아 사람, 서반아 사람, 인도인들’, 그리고 ‘실직자, 망명객 같은 대개가 불우한 사람들’이 고국을 그리면서 ‘기억을 밟고’ 서성이는 곳. 한결같이 ‘영창에 비친 소나무 그림자를 회상’하면서 향수병을 달래고 있는 곳. ‘친구와 작별하던 가을 짙은 카페, 달밤을 달리던 마차, 목숨을 걸고 몰래 넘던 국경’의 모습이 아련히 살아오는 곳, 황포탄의 모습이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의 애절한 향수를 달래주던 황포탄, 그러나 여기에도 어김없이 조선 사람들의 조국해방 투쟁은 향수병을 뒤덮었다. 은밀히 달빛을 밟으면서 상해로 잠입한 조선인 자객들에게 향수는 언감생심,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투철한 의기(義氣)만이 있을 뿐이었다.

1922년 3월 28일

3월의 상하이 날씨는 섭씨 13도를 오르내리는 약간 추운 날씨다. 그러나 이 날은 너무나 화창한 날씨였다. 오후 3시반 태양이 기울기 시작할 무렵 화사한 날씨와 총탄 소리가 쾌활한 상해 부두를 뒤흔들었다.

이날은 후에 일본 수상(1927-1929)이 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육군대장이 이곳 황포탄을 방문하는 날이다. 다나카는 일본 남작으로서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던 도중 중국 시찰을 위해 상해에 도착하여 오후 3시 반에 이 곳 황포탄 선착장에 도착할 것이다.

조선침략과 동양평화를 위협하는 ‘이 가증스런 원흉’을 제거하기 위해 상해로 모여든 조선 자객들, 그들은 오성륜(吳成崙), 김익상(金益相), 이종암(李鍾巖)이었다. 오성륜과 이종암은 가명으로 더욱 유명하다. 한 떨기 꽃잎으로 무너져 내려야 할 운명인데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조국의 이름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나 하나의 이름쯤이야! 그들의 각오다. 도무지 그들에게 이름이 있을 수 없었다. 오직 ‘조국’이라는 이름만이 있을 뿐.

다나카가 배에서 내리는 순간 그를 맞이하려는 각 국의 영접객들과 화창한 봄나들이를 나선 수많은 군중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따. 이때 무리를 뚫고 오성륜의 육혈포가 불을 뿜었다. 순간 그 사이로 벽안(碧眼)의 금발여인이 스치듯 지나갔다. 순간을 포착할 틈도 없이 오성륜은 세 발을 발사하고 만세를 외쳤다.

일제의 수상을지내기도 했던 다나카 기이치는 중국에 대한 강경책을 주도했다. 사진은 일본 국회도서관

제2선을 맡은 김익상이 이를 보고 “잘못 쏘았다”고 외치면서 다시 다나카를 향해 육혈포를 놓았다. 다나카의 표현대로 ‘신의 도움으로’ 총알은 모자를 꿰뚫고 지나갔다. 동시에 그는 육혈포를 왼손으로 옮겨 쥐고 품속에서 폭탄을 꺼내 던졌으나 불발이었다.

다나카는 혼비백산하여 재빨리 대기중이던 자동차에 뛰어들어 내달렸다. 이때 제3선을 지키고 있던 이종암이 골목에서 튀어 나오면서 폭탄을 던졌으나 또 불발이었다. 바닥에 나뒹굴던 폭탄은 끝내 불꽃마저 일으키지 못하고 근처의 영국인(또는 미국 해병)의 발길질로 바다에 빠져 버렸다.

1922년 4월 15일자 ꡔ독립신문ꡕ의 표현대로 ‘창천(蒼川)이 불우(不佑)하고 시운(時運)이 불리(不利)하야’, 그들은 동양평화의 원흉 다나카 저격에 실패하고 말았다. 나라를 통째로 빼앗긴 민족에게 모든 것이 전쟁 상태다. 그 때문에 ‘암살, 방화, 전쟁은 혁명사업진행상 불가무(不可無)의 방법이라. 암살할 놈 암살하고, 방화할 데 방화하고 전쟁할 때 전쟁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독립을 위해서는 ‘단도, 화약, 육혈포, 폭발탄으로써 죽일 놈 죽이고 불 놓을 데 불 놓아 의기남자(義氣男子)와 열혈청년이 계속 배출하야’ 독립의 정신을 일으키고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태극국기 든 독립대군이 압록 두만을 건너는 날’을 염원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저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종암은 골목을 통해 현장을 빠져나갔지만, 두 사람은 격투 끝에 붙잡히고 말았다. 중국경찰과 영국군인이 그들을 쫓으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이때 두 사람은 그들이 쏜 총알에 부상을 입고 일본영사관으로 넘겨져 악랄한 취조를 받게 되었다. 4월 2일 새벽 2시 오성륜이 파옥을 결행하여 유유히 사라졌다. 이때 같이 파옥한 일본인 죄수 다무라(田村忠一)는 잡혔으나 오성륜은 항주를 거쳐 대륙으로 잠적했다. 이에 놀란 일제는 김익상을 급히 나가사키(長崎)로 이송해 버렸다.

재판 도중에 김익상은 1921년 9월 12일 일본 총독 사이토(齊藤實)를 암살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밝히면서 굳은 의기와 강건한 기개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의 범인을 잡지 못하고 변죽만 울렸던 일제는 또다시 동일인에 의해 저격사건이 벌어진데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이 사건을 급히 마무리짓기 위해 숱한 술수를 부리다, 결국 김익상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그러다 계속되는 저들의 소위 은사로 20년 동안 옥고를 치뤘다.

김익상이 만 21년만에 출옥하여 고향에 돌아오자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기필마의 용맹도 세월 앞에서는 무상한 일이었으며, 더구나 너도나도 일제의 대동아공영을 예찬하는 소리 앞에서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어느 음식점에서 쓸쓸한 심사를 달래고 있는데 용산경찰서의 박형사라는 놈이 술잔을 들면서 깐죽거리는 것이었다.

“당신이 그 유명한 김익상인가? 마누라 도망간 것은 아능가?”

자신 때문에 부인과 동생이 숱한 고초를 당한 것을 생각하기만 해도 분통터지는 일인데, 이제 그 고생하다 뿔뿔이 흩어져 소식조차 알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그런데 강도 일본의 똥구멍이나 핥아대는 놈이 농간을 치는 데 어찌 분개하지 않겠는가!

“네 놈이 뭐간대 감히 수작이냐.”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 놈’을 흠씬 두들겨 패 주었다. 이 놈이 놀라 달아났다가 잠시 후에 용산경찰서의 일본인 경찰들을 불러와 김익상을 끌고 갔다. 그 뒤 그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일설에는 잡혀가는 도중 한강다리에서 투신하여 자결 순국했다는 말도 있다.

한편 운명의 장난으로 비운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 금발의 여인은 영국인 톰슨 부인으로 밝혀졌다. 일설에는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라고도 하지만 일제의 공소장을 따르기로 한다. ‘동방의 파리’ 상하이로 신혼여행을 왔다가 변을 당한 남편 톰슨 씨는 현장에서 아내를 잃은데 분노하여 ‘살인범’을 쫓아가 그들을 ‘체포’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나가사키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본의 대표적 군국주의자를 총살하려 한 조선의 혁명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일본 재판정에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다른 일설에는 톰슨 씨가 직접 김익상과 오성륜을 면회했다고도 한다. 아내를 잃은 슬픔은 그지없었으나 그는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나는 불행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대들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나는 그대들을 존경합니다. 나는 아내의 주검으로 그대들을 영원히 기념하려 합니다. 앞으로 내게 기회가 있고, 또 내 힘이 자란다면, 나는 그대들의 해방운동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1922년 6월 5일자 ꡔ동아일보ꡕ는 김익상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넘어가는 저녁해가 가없는 바다 저편으로 숨고, 3백년 옛 포구에 전등빛만 찬란할 때에 멀리 고국 하늘을 생각하고 젊은 협객의 가슴에도 응당 무량한 감개가 떠돌겠지.”*1)

황포탄 의거 이후 국내외적으로 비난에 시달리던 의열단은 새로운 이념 무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서양 부인의 죽음에 대한 예의를 지킨 열사들을 보더라도 식민지하의 테러는 용인할 만한 점이 인정된다. 그런데도 제국주의자들은 스스로 물질적·정신적 수단을 동원하여 더욱 강력한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정의의 테러에 대해서는 알량한 인권을 내세우면서 저항을 꺾으려는 작태를 벌이고 있다. 이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이에 의열단은 신채호를 통해 “조선혁명선언”을 공표한다. 여기서 ‘칠가살’(七可殺)을 통해 테러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기하고 있다. 신채호가 작성한 의열단 선언서 “조선혁명선언”에 따르면, 다섯 가지 파괴 대상인 ‘오파괴’(五破壞)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왜적의 중요기관이며, 죽여도 좋은 일곱 부류의 암살대상을 정한 ‘칠가살’은 조선총독과 고관, 일본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밀정을 의미하는 적탐(敵探),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이다.

임시정부가 정한 ‘칠가살’은 더욱 포괄적이어서, 일본인, 매국적(賣國賊), 고등경찰 및 형사나 밀고자는 물론이고, 적의 관리된 자, 애국 의연금 횡령 등을 저지른 불량배, 배반자가 포함되어 있다.

황포탄은 망명자와 고독자의 추억만 묻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과 저항을 통한 인간의 내밀한 실존이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냉정한 역사의 숨결이 뿜어지는 곳이다. 오늘도 황포강은 상해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뒷이야기>

1983년 홍콩 TVB 연속극 ꡔ상해탄ꡕ(上海灘)은 거리마저 한적할 정도로 인기있는 드라마였으며, 그 후 계속해서 리메이크되고 있는 작품이다. 역대 홍콩 드라마와 인기배우 순위 2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 여기서 주윤발이 연기한 허문강(許文强) 역이 바로 오성륜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황포탄 저격은 조선뿐만 아니라 당시 중국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만큼 전격적이고 대담한 시도였기 때문에 드라마와 영화에서 종종 소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오성륜(1898-1947)은 만주에서 전광(全光)이라는 이름으로 만주를 누비고 다닌 걸출한 혁명가였지만, 1941년 1월 일제에 체포되어 변절했다 한다. ‘풍류남아’의 기질을 가졌던 그는 이정룡(李正龍), 오름(吳凜) 등의 가명을 사용하면서 ꡔ아리랑ꡕ의 김산과 혁명적 우애를 맺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해방이 되자 자신의 변절 사실을 고백하고 중국 팔로군에서 활동하다 병사했다.

만주벌판을 누비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던 그의 풍찬노숙의 삶, 그런 그가 해방 4년을 남겨놓고 변절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연변 지역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가 변절하지만 않았다면, 고 김일성 주석에 버금가는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로 평가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의 활동이 출중했다. 그의 변절을 변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밀정 출신이 버젓이 독립운동가로 둔갑하는 우리의 현실을 비추어볼 때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종암(1896-1930)은 본명이 이종순(李鍾淳)이라 하나 양건호(梁健浩)라는 가명으로 이름을 떨친 의열단원이었다. 만주와 국내를 오가면서 활동하다 군자금 조달 관계로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다, 1925년 체포되었는데, 경찰서를 비롯한 적의 관공서에 폭탄 투척 등의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려 했던 소위 ‘이종암 사건’으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는 1930년 가출옥 후 병사했다.

당시 이종암은 대구 이기양(李起陽)의 산장에서 체포되었는데, 이기양 또한 피신처를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고 3년간 투옥되었다. 이기양의 손자가 대구 출신의 혁신계 활동가이자 과거 남로당원으로 좌익 활동을 벌였던 이일재(李一宰)다. 역사는 끊임없이 희생과 투쟁을 요구하는가 보다.

황포탄의 현장과 그 이야기가 영화의 소재로 사용되어도 웃고 즐길 수 있는 세상, 식민과 억압이 없는 그런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찌 황포탄에만 국한된 이야기겠는가. 진정 자연지리가 동경과 향수의 장소로만 기억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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