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찬 선비(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과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들
임진왜란 경상도 3대 의병장 - 의령의 의병장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 합천의 의병장 내암 정인홍 장군, 고령의 의병장 송암 김면 장군
창녕 조씨 남명 조식(南明 曺植, 1501~1572, 연산군 7년~선조 5년) 선생은 조선 중기 대학자다.
조선 성리학 영남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 선생의 이름 앞에는 칼 찬 선비, 대쪽 같은 선비, 실천 지식인, 조선의 참 선비 등 숱한 수식어가 붙는다.
당시 조선 성리학에서 남명 조식 선생은 경상우도의 영수였으며, 퇴계 이황은 경상좌도의 영수로 두 사람은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3대 의병장인 홍의장군 곽재우,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과 이노, 전치원, 하락, 조종도, 박성무, 이대기 등을 비롯하여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50여 명이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남명 조식 선생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남명 조식 선생은 1540년(중종 35)에 회재 이언적 선생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됐으나 거절하였고, 남명 조식과 함께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이 명종에게 천거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552년(명종 7), 1553년(명종 8)에 전생서 주부, 사도시 주부, 예빈시 주부를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1555년(명종 10)에 단성현감으로 제수되자 목숨을 내놓고 단성현감을 그만둔다는 사직상소를 올린다.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에서 왕(명종)의 실정과 부도덕한 문정왕후의 권력 전횡을 무섭게 비판했다.
1568년(선조 1) 새로운 정치를 해보려던 선조는 남명 조식을 불렀으나 끝내 벼슬을 사양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 여파로 남명학파가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남명 조식 선생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년 전인 1572년(선조 5)에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곽재우, 정인호, 김면 등 조식 선생의 남명학파 제자들은 앞다투어 임진왜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50여 명이 넘는 제자들이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은 남명 조식 선생의 학문이 단순히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니고 학문을 통해 자신을 수양하고, 현실에 적용한 실천적인 대학자였기 때문이다.
남명 조식 선생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과 지리, 산술 등을 비롯하여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병법도 가르쳤다. 당시 성리학이 이론적 학문에 치중했지만, 남명 조식 선생은 실천적인 면에 주력함으로써 임진왜란에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남명학파 50여 명의 제자가 의병장으로 나서 왜군을 물리쳤다.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 곽재우, 정인홍, 김면 의병장 등 수십 명이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선봉에 서서 맹활약하였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한 약포 정탁도 남명 조식이 있는 곳에 부임하자 스승의 예를 올리고 공부를 배웠다.
곽재우의 재주 눈여겨보고 외손녀 사위 삼아
남명은 서거하기 전 전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정인홍·김면 등 남명의 제자들은 영남의 3대 의병장으로 불릴 만큼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이 세 분 외에도 남명의 제자로 의병장이 된 사람이 오십 명에 이른다.
남명 문하생들의 의병활동은 관군의 패주와 조정의 몽진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반격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싸울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했으며, 호남 곡창 지대의 보존이 전쟁의 승패를 가를 것으로 인식했다. 경상우도 의병들의 분전은 결국 호남의 곡창을 지킨 밑거름이 됐다.
흔히 의병은 의기로만 싸워 헛된 희생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남명 문하생들이 이끄는 의병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이것은 의병장들이 문사(文士)이면서 무예와 병법을 배웠기 때문이니 남명이 실천한 문무병중(文武竝重) 교육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로써 남명의 문하생들은 선조-광해-인조 시대 초반까지 학계-정계-의병 등으로 폭넓게 활약했으니 한 처사의 교육 역량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다. 내친김에 남명의 외손녀와 결혼한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선생에 대해 잠시 알아보고 지나간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 출신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을 지낸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이고, 수(守)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과 진주 강씨의 셋째 아들로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출신 곽경(郭鏡·1117~1179)으로 송나라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 때 귀화했다. 곽재우는 일찍이 영남의 유학자인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했는데 후에 조식의 외손녀 사위가 됐다. 함께 동문수학한 김우옹 역시 스승 조식의 외손녀 사위가 돼 동서간이 됐다.
그 뒤 상경하여 과거시험에 응시, 낙방했지만 그의 재주를 눈여겨보던 남명은 자신의 문도들과 외조카 이준민(李俊民)이 한성부에 다녀오면 반드시 그의 소식을 묻곤 했다. 일설에 따르면 곽재우가 연달아 과거시험에 실패하자 남명은 차라리 병법을 익히라고 권했다고 한다.
곽재우는 1585년 과거에서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그의 글을 읽은 선조가 기분 나빠해 합격이 취소되고 만다. 그 뒤 정계에 진출할 뜻을 포기하고 40세가 넘도록 학문 연구와 농사를 지으며 고향에서 은거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패하고 임금이 의주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곽재우는 같은 해 음력 4월 22일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붉은 옷으로 철릭을 해 입고 이불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적은 깃발을 만들었다.
그는 2000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 활동으로 의령·창녕(昌寧) 등지의 산악에서 신출귀몰 왜군을 물리치고 왜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했으며 왜의 보급선을 기습하기도 했다.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곽재우의 전투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정암진(鼎岩津·솥바위 나루) 전투다. 곽재우는 언덕에 병사들을 매복시킨 뒤 날랜 병사 몇 명을 선발, 남강을 건너는 왜군을 늪지대로 유인해 화살 공격으로 전멸시켰다. 왜군도 정암진 일대가 늪지이기 때문에 부대의 통행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군은 통과할 수 있는 지점 근처에 나무로 표시를 해놓았는데 이를 지켜보던 곽재우가 밤에 표지목을 늪지로 옮겨 꽂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른 왜군 2만명은 다음날 잘못 표시된 표지목을 따라가다 늪지로 들어섰고 마침내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에게 전멸당하고 말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