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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의 원시 사회, 켈트 사회, 팍스 로마나 [영국 역사]

Jobs9 2020. 9. 2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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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의 원시 사회와 켈트 사회


 도버 해협의 폭은 30km를 조금 넘는 거리여서 날씨가 좋은 날에는 대륙에서 도버 해협이 보일 정도이다. 빙하시대에는 얼음으로 덮여 대륙과 연결되어 있던 브리튼은 대략 BC 8,000년 경 빙하가 물러나면서 대륙과 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이전 수십만 년 동안 온 나라가 얼음으로 덮여있어 몹시 추웠던 이 섬에서 사람이 살았던 최초의 흔적은 대략 25만 년 전의 것으로, 빙하가 물러나 브리튼이 대륙과 분리되기 훨씬 이전에 사람들이 이 섬에 들어와 있었다는것을 보여주고 있다. 


 브리튼의 신석기 시대는 BC 4,000년 경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의 대륙의 서부 또는 서북부 해안 지방에서 브리튼 서남단의 콘월 지방으로 건너온 최초의 브리튼 주민들, 이 '선주민' 은 그동안 이베리아인으로 불려왔으나, 실제로 그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건너온 이들인지는 분명치 않다. 작달만한 키에 검은 머리털, 갸름한 머리를 가진 지중해 인종인 이들 가운데 일부는 웨일즈나 스코틀랜드로 건너갔으며,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데번(Devon)과 도시트 다운즈를 거쳐 솔즈베리 평원에 이르렀다. 이들은 뿔이 큰 소와 돼지, 또는 염소와 양을 기른 유목민이었다.


 목축에 부수된 일로 시작된 소규모의 곡물 경작은 가볍고 배수가 잘되는 백악질의 이 평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구릉지를 따라 퍼져나갔다. 옷은 대개 가죽으로 지어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경의 발전과 더불어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조직도 발전해 나갔는데, 초기 문명 단계의 브리튼에서 경제, 종교, 정치의 중심지가 된 것은 솔즈베리 평원 일대였다. 브리튼 최초의 거석 문명이 발달하고, 스톤헨지(stonehenge)와 같은 원형의 거석기념물이 세워진 곳 또한 바로 이 지역이었다. 


 신석기시대인들의 뒤를 이어 이른바 비커 포크(Beaker folk)로 불리우는 이들이 브리튼에 들어온 것은 대략 BC 2,500년 전후의 일이다. 이들의 이름은 그들의 무덤에서 화약 실험용 비커처럼 생긴 원뿔 모양의 물그릇이 발굴된 데서 연유한다. 그들은 구리를 제련하고 이어 청동기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동안은 이러한 비커 포크들이 브리튼에 야금술을 최초로 들여온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에 의해 이 무렵 아일랜드 지방에서 이미 이러한 기술은 발달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활과 단검으로 무장한 비커 포크는 토착 주민들을 지배하고, 또 그들과 뒤섞였다. 천막이나 나뭇가지로 지붕을 덮은 그들의 움막집은 차라리 원주(原住) 신석시시대인들의 집만도 못했으나, 그들이 만든 토기는 선주민들의 그것보다 훨씬 정교했고 또한 아마(亞麻)와 양모로 옷감을 짜 입었다. BC 2,000년 무렵부터 BC 1,00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웨식스 문화라고 불린 청동기 문화가 대륙에서 잉글랜드의 서남부 지방을 통해 브리튼으로 들어왔고, 이 문화는 곧 브리튼 섬 전역에 퍼져나갔다.


 청동기 시대의 중엽인 BC 1,400년 경에 농경과 야금술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구릉 지대 토양의 지력이 쇠퇴하자, 사람들은 좀 더 오랫동안 경작할 수 있는 기름진 저지대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초기의 목축 대신 농경과 목축을 아우른 혼합농업이 선호되었으며, 겨울에 밀과 보리를 심는 방법을 알아냄으로써 더욱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 가능해졌다. 칼과 도끼, 창날 등의 무기뿐만 아니라 낫, 물통, 솥 등 농사 용구와 그 밖의 일용 도구들이 더욱 대량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브리튼은 청동기 시대 말엽에 거의 100만에 가까운 인구를 지탱 할 수 있었다. 


 BC 8세기에서 BC 7세기 무렵, 그 유명한 켈트족(Celts)이 브리튼 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이주민들은 브리튼의 생활 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았는데, 그들은 철기를 가져오고, 화폐를 도입하고, 왕국들을 세우고, 사제(司祭) 제도를 처음 시작하고, 새로운 기예(art)를 개발했다. 그들의 등장과 함께 시대적 구분은 철기 시대에 접어들었고, 단검과 장검을 지닌 이들은 성채를 기반으로 하여 소수의 동족 주민들에 대한 과두 지배를 확립하는 한편, 원주민들을 종속민의 지위로 떨어뜨렸다. 로마 시인 아비에누스(Avienus)는 자신의 시 <오라 마리타마에>(Ora Maritima)에서 이런 묘사를 하였다.


 "……고대 사람들이 세이크리드 아일(아일랜드)이라고 부르는 섬까지 가기 위해서는 배로 이틀이 걸린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이 섬은 매우 크다. 그리고 섬의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면 가까운 곳에 알보이네스 섬(브리튼)이 있다. 이곳 사람들은 건장하고 자존심이 강하며 활발하고 부지런하다. 그들은 어떤 물건이든 거래한다. 그들의 배는 거칠고 광할한 바다와 괴물들로 가득 찬 대양을 자유롭게 항해한다. 그들은 소나무로 만든 선체 대신 자신들이 고안한 가죽 배를 타고 넒은 바다를 건넜다."


 BC 2세기 말, 벨가이(Belgae)족이라는 새로운 켈트족 침입자들이 남동부 잉글랜드 지방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원주 켈트족의 저항을 물리치고 팽창한 이들은 템즈 강 하구와 그 주변 일대에 군사적 귀족정을 바탕으로 한 왕국들을 세워나갔고, 그에 따라 BC 1세기 동안에 잉글랜드 남동부 지방에서 뚜렷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존 켈트족의 언덕 성채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평야 지대에 좀 더 넒고 밀집한 거주지인 '도시' 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이런 도시들은 종래의 부족사회보다 넒은 지역을 통괄하는 강력한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런 도시는 대개 상인 귀족들이 권력을 쥐고 통치했던 것으로 보여지며, 언덕 요새와 도시들 사이로 나 있는 도로와 강을 통해 수송과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졌다. 즉 이런 교통로를 통해 각 지역에서 대량 생산된 수제품과 지중해 지역에서 생산된 올리브유, 포도주 등의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발전된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로부터도 점점 더 많은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가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은 단연 BC 25년 쿠노벨리우스(Cunobelinus)에 의해 세워진 왕국으로, 이 왕국은 하트퍼드셔(Hertfordshire)와 에식스 지방을 중심으로 그 세력이 옥스퍼드셔, 펜 지대, 켄트에까지 미쳤다.


 켈트 사회는 전사귀족층과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또한 제 3의 중요한 집단이었던 드루이드(Druid)들은 사제로서 초자연적이며 마술적인 힘에 대한 제사를 관장했다.  이들은 전쟁터에 나간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는데, 드루이드들은 사제일 뿐만 아니라 의사이자 교사이며, 예언자이자 재판관이기도 했다. *2) 


 한편 남동부 저지대의 강력한 왕국들과는 달리 브리튼 북서부 고지대의 정치조직은 지방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언덕 성채는 남동부보다 수도 훨씬 적고 규모도 아주 작아 울타리로 둘러막은 한 가족의 집터 정도에 불과해다. 이는 주민들이 작은 규모의 정치조직 아래서 실질적인 독립을 누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주화도 없었고, 도시로 집중되는 현상도 없었다. 이는 부족적, 농촌적, 계서제(階序制)적, 가족적인 사회로서 도시와 왕국을 세운 저지대 브리튼 사회와는 대조적이었다. 


 BC 55년 로마인들이 브리튼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 섬은 미개하고 무지한 사람들의 거주지가 아니었다. 정착 농업, 철제 무기와 도구, 화폐, 훌륭한 도기등을 가진 그들의 문명은 물론 로마 문명의 광휘에는 훨씬 뒤떨어진 수준이었지만 4,000~5,000여년 전의 브리튼 선주민들이 누렸던 생활보다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이었다. 그들의 종교적 신앙은 시내와 우물, 잘린 머리에 대한 숭배와 같은 공통적인 양식을 띠고 있었으며 주민들은 공통의 켈트어에 속하는 어느 한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이상은 군사적 귀족정을 지향하고 있었다. 즉 카이사르의 도래 이전에 브리튼은 어떤 특정 지점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정치적 ─ 사회적 통일체를 이루지는 못했다. *3) 



로마 지배하의 브리튼


지중해 세계의 패권국인 로마가 브리튼 섬의 켈트족과 접촉한것은 그 유명한 율리우스의 카이사르(CAIVS IVLIVS CAESAR)가 특유의 기민함을 바탕으로 갈리아 땅에서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있던 시대였다. BC 55년 8월 26일의 오후 3시 경, 브리튼 남부의 이스트 켄트 해안 *4) 에 로마군이 발을 디딘 그 시점에 대해,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대영 제국 역사의 시발점이다." *5) 라고 발언했다. 


이 유명한 인물이 멀고 낯선 브리튼을 정복하기 위해 나선 동기는 여러가지로 추측이 가능하다. 바꿔 말하면, '정확한 이유' 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며, 사실 그가 과연 정복을 의도하고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갈리아에서 도망친 켈트(벨가이) 반군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브리튼인들을 처벌하고자 하는 의도를 생각해 볼수 있고, 금 · 은 · 납 · 주석 · 곡물 등 브리튼의 여러 산물을 얻고자 하는 목적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혹은 대양 너머 신비에 쌓인 땅을 차지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려는 개인적인 야심이 작용 했을 수도 있다.


 사람에 대한 평판 ─ 즉 그의 동료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점이 매우 중시된 것은 고전세계의 한 가지 특징이었고 로마에서는 귀족 개개인이, 공적인 경력을 쌓고 최고의 관직을 쟁취함으로써 자기 조상을 본받아야 한다는 가문으로서의 책임과 개인적 야망이라는 두 가지 압력을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명성은 주로 법과 군대라는 두 분야에서의 성공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군사적으로 용맹을 날린 사람은 한층 더 큰 위세를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병사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방안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카이사르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저 바다 건너 황금과 진주가 무궁무진하게 있는 브리튼이 있다." *6) 고 외쳤다. 그러나 그에게는 미지의 땅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는 갈리아 상인들을 불러 모았지만 브리튼은 얼마나 큰지, 어떤 부족이 살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전쟁하는지,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등등 어떤 의문점에 대해서도 시원한 해답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카이사르는 자신의 부장 중 한 명을 브리튼에 잠입시켰고, 닷새가 지난 후 돌아온 부장에게 상륙 지점에 대한 보고를 들은 본격적으로 브리튼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7군단과 10군단이라는 2개 군단의 수송에 필요한 화물선 80여 척을 모으고 각 배에 재무관, 부장, 원군대장을 중심으로 한 보병을 나누어 태웠다, 그리고 18척의 상선에는 기병을 태웠다.



 그러나 원정은 신통한 효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이 천재 지휘관의 첫번째 원정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는데, 이는 브리튼인들이 상륙을 방해하기 위해 기병과 전차를 앞세워 공격한 탓이다. 지중해 최강의 로마군은 쉽지 않은 전투 끝에 해안으로 올라서는데 성공했지만 기병대를 태운 선단이 폭풍으로 인해 다른 지역으로 떠내려간 탓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는 선박을 이용해 기병대를 데려오고자 했지만, 폭풍으로 인해 이는 실패로 끝났다.


 로마군은 겨울이 오기 전에 브리튼을 정복하고 갈리아에서 겨울을 보낼 계획이었으므로 이제와 월동 준비를 취하긴 어려웠다. 브리튼인들이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지에서 식량을 확보하는 일 역시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패배하여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데 있어 최고의 병종은 단연 기병이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군단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도 기병 전력의 부재로 줄행랑을 놓는 적을 추격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브리튼인들이 강화를 요청해 왔을때, 카이사르로서는 이를 거절할 어떠한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오래 머물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로마인들이었으며, 군대를 뒤로 물릴 명분을 얻은 카이사르는 대륙에서 강화 절차를 밞기로 하고 배를 수리하여 갈리아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BC 54년, 카이사르는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원로원 출석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던 그는, 로마에서 돌아온 후 600척의 수송선과 20여척의 함선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이 병력을 현재의 블로뉴-포크스톤에 집결시켰다. 5개 군단과 2,000여 기병을 태운 800척의 대선단은 1차 원정의 상륙지점보다 약간 북쪽에 위치한 딜 캐슬 부근에 도착했다. 


 브리튼은 로마군의 침략을 받자 연합군을 형성하고 카트벨라우니족(Catuvellauni)의 지배자 카시벨라우누스(Cassivelaunus)에게 총지휘권을 맡겼다. 카시벨라우누스는 바다에서 약 80마일 떨어져 있는 타메시스 강(현재의 템스강)을 끼고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으며, 브리튼 내에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카시벨라우누스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전쟁의 승리를 결정적을 것이라 판단했고, 군대를 타메시스 강변으로 이동시켜 전투를 치루었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브리튼의 군사들은 뿔뿔히 흩어졌으며 카시벨라우누스는 용기를 잃어 자신을 중심으로 뭉친 브리튼인들을 대부분 해산시켰다. 이후 그는 약 4,000여대의 전차만 이끌고 로마군의 진격로에 매복하였다가 기습하는 전술로 항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카시벨라우누스의 패배는 브리튼 전역으로 퍼져 나가 많은 사람들의 전의를 꺾어 놓았기에, 트리노반테스족(Trinovantes)을 비롯한 여러 부족을 보내 잇달아 카이사르에게 항복을 했다.


 부족들의 항복을 맥없이 지켜봐야 했던 카시벨라우누스는 남아 있는 유일한 동맹 부족 칸티움에 사자를 보내 해안에 있는 로마군 진지를 기습하게 했으나, 오히려 칸티움이 패배를 당하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또다시 결정적인 마무리를 지을 수 없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고, 보급물자의 부족도 걱정되었다. 그는 브리튼인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로마에 조세를 바치게 하고 성공적으로 귀환했다. 이 원정이 끝난 후 브리튼은 한동안 착실하게 조세를 바쳤으나, 로마의 내분 조짐이 있던 52년부터는 조세 납부도 흐지부지해졌다. 


로마의 브리튼 정복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라도 하듯 전 지중해를 들썩이게 하던 카이사르의 사망 이후, 새롭게 대두한 '존엄자'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자신의 경쟁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를 패배시키기 이전에 이미 브리튼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두 번 이상이나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도 하였다. 이 모든 일은 더욱 긴급을 요하는 일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7) BC 26년 이후에는 이 존엄자도 브리튼을 당장 정복하기 보단 이를 미래의 과업으로 남겨 두는 편이 현재로선 수지가 맞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이는 기원후 9년 로마군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그 유명한 패배를 당한 이후 제국 밖의 지역에 대해 한동안 불간섭 정책을 원칙으로 심게 되어 더욱 공고해졌다.


 틀림없이 이는 당시 브리튼에서 가장 유력한 군주, 카투벨라우니족의 쿠노벨리우스에게는 만족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자신의 왕국의 힘과 영향력을 계속해서 키워 나갔는데, 이러한 판도는 칼리쿨라(Caligula)가 황제에 즉위한 후 흔들리기 시작했다. 칼리쿨라는 브리튼의 복종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브리튼 침입명령을 여러 차례 내리기도 했다. *8) 이는 미수로 끝났지만, 야심만만한 로마인들은 새삼스레 그 미완의 과업에 대한 기억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변덕스러운 황제가 살해당하고 새로 즉위하게 된 클라우디우스는 상식, 유별난 독창성, 역사에 대한 전문지식, 그리고 로마 전통에 대한 깊은 존경심 등을 함께 간직한 사나이였다. 제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군대에서 명성을 얻고 로마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브리튼이 마련해 준 군사적 영광의 기회에 주목하였다. 아우구스투스와 칼리쿨라가 포기했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저도 완수하지 못한 과업이라고 한다면, 개인적으로나 가문적으로나 명성을 얻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기회도 없었다.


 대외적 여건과 침공의 구실 또한 준비된 듯 기다리고 있었다. 브리튼 최강의 쿠노벨리우스는 마침 세상을 떠났고 그의 왕국은 용감하지만 무능한 카라타쿠스(Caratacus)와 토고두눔스(Togodumnus) 형제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부족 간의 유대는 깨지고 내전이 벌어졌으며, 이 여파는 갈리아 동북부 벨기에 해안까지 확대되었다. 로마는 자신들의 패권을 수호하는 대의명분을 이유로 드디어 미루고 있었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나서게 되었다.


 황제의 야심을 채워줄 칼은 도나우 강 방위선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Aulus Plautius)로 결정되었다. 그를 정복군 총사령관으로 하는 4개 군단 2만 4,000여명은 게르마니아와 스페인 출신 지원병을 츠기러 합하여 4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정예군을 구성, 첨공을 개시했다. 


 이 강력한 대적이 침략할 당시, 내적으로 사분오열된 브리튼은 하나로 뭉쳐 싸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브리튼인들로서는 생존을 위해서 단합하는 길밖에 도리는 없었다. 설득과 협상이 벌어진 끝에 겨우 몇몇 부족들이 부분적으로 연합을 하게 되었지만, 한계는 분명해 보였다. 


 지중해를 제패한 로마군에 맞서는 브리튼 군대의 대부분은 농장에서 소집된 징모병이었다. 로마의 무장병과는 달리 브리튼 병사들은 갑옷을 입는 일이 드물거나 전혀 없었다. 그들은 기민성과 돌진력, 그리고 내려치는 긴 칼에 의존했으며 전열을 갖춘 로마군에 근접하기도 전에 구름떼 같은 로마인들의 창끝에서 많은 병사들을 잃기가 일쑤였다. 정면대결은 전혀 승산이 없었으며,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숲이나 늪과 같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게릴라 전 뿐이었다. 이런 전투 상황에 대해 카시우스 디오(Cocceianus Dio Cassius)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로마 원정군 사령관인 플라우티우스는……숨어 있다가 기습을 하는 식으로 저항하는 브리튼인들을 다루는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특히 가장 강력히 저항하는 쿠노벨리우스의 두 아들이 그의 전진을 묶어 놓았다. 그러나 (브리튼인들은) 플라우티우스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패배하였고 플라우티우스는 내륙으로 더 전진하였다. 그때 템스 강을 사이에 두고 또 다른 브리튼 저항군들이 나타났다. 강 건너편에 대치하고 있던 그들은 로마군이 다리가 없는 강을 건널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플라우티우스의 전진은 또 한번의 난관에 부딫혔다. 그러나 플라우티우스는 무장한 상태로도 강을 건널 수 있는 게르만 용병들을 앞세워 공격하였다. 결과는 승리였다." *9)


 로마군의 지휘관들은 브리튼인들을 넒은 곳으로 끌어내거나 성채 안으로 몰아넣어 압도적인 포위공격과 포격으로 그들을 분쇄, 혹은 배고파 나오게 하려고 애썻다. 이러한 로마인들과 대적하는 데 가장 불리한 점은 브리튼인들이 농민병으로서 일 년 중 짦은 기간 동안밖에는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가는 모두가 굶어죽을 판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로마군의 보급체제는 로마군으로 하여금 기후가 허용하는 동안 계속 전투를 치르게 하였으며, 매해 겨울을 날 수 있는 충분한 보급품들을 채워놓은 방비된 병영을 세울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적대자를 맞서 브리튼인들이 보여준 저항은 차라리 경탄할만한 것이었다.



 44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친히 현장으로 행차하여 템스 강변에 집결 해 있는 로마 군단과 합류했다. 그는 내륙 깊숙이 공략해 들어가도록 군단에 명령을 내렸고, 콜체스터(Colchester)는 황제가 브리튼에 도착한 지 6일도 되지 않아 함락되었다. 황제는 11명의 브리튼 왕들을 굴복시키고 코끼리까지 동원하여 위풍당당하게 콜체스터에 입성, 자신의 영광을 만끽했다. 황제는 그 승전보를 충분히 누린 후 로마로 돌아갔다. 클라우디우스의 의도대로 원로원은 승전보와 '제국의 확대' 에 환호했다. 물론 플라우티우스는 계속해서 남은 정복을 담당했다.


 대적에 맞서 항전하는 쿠노벨리우스의 두 아들은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토고두눔스는 템스 강변에서 전사하였고, 카라타쿠스는 본국마저 유린당하자 웨일즈 국경으로 달아나 다른 부족들과 연합한 뒤 약 6년 동안 기약없는 저항을 계속했다. 그는 거의 희망이 없을때조차도 영웅적으로 끝까지 로마에 맞섰지만, 브리튼인들은 로마군 도래 이전 그가 보여준 무능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카라타쿠스의 영웅적인 행동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저항조차 50년, 플라우티우스의 뒤를 이은 새로운 사령관 오스토리우스로 인해 종말을 맞이했다. 


 로마는 콜체스터를 중심으로 하여 브리튼을 통치했고, 대신 브리튼인들의 저항이 강력했던 영국의 중 · 북부 지역은 아직 로마의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의 해결은 후임 황제인 네로의 몫이 되었다. 54년, 로마는 브리튼에 있던 4개 군단의 2만여 병력을 재정비하고 브리튼 서쪽의 정벌을 꾀하고 있었다. 2개 군단은 웨일스 서쪽의 글로스터를 거쳐 링컨 지역 120마일 부근까지 진출했다. 로마군이 지나는 곳에서는 브리튼인들에 대한 대량 학살과 초토화된 마을만 남았다. 로마군이 보여준 이런 거침없는 살상과 파괴는 브리튼인들의 저항 의지를 사전에 꺾어버리기 위한 것이었다.


 기원 후 60년에 이르면 속주는 대체적으로 착실한 진보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북웨일즈는 총독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에게 거의 굴복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실정(失政)과 겹치며 빛이 바랬다. 문제가 된 것은 세금으로, 브리튼인들에게 부과된 10%의 속주세율은 그리 높다고 할 순 없었지만 세금을 내기 위해 빚을 졌을 때의 금리는 지나치게 높았다. 즉 문제는 로마에서 건너온 고리대금업자들이었다. 원래 로마에서는 12% 이상의 금리를 받을 수 없도록 제재를 취했지만, 속주에서는 그런 제한이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마음껏 폭리를 취하였다. 타키투스(Tacitus)는 이러한 평을 남겼다. "브리튼인들은 징병, 공납, 그리고 제국에 대한 그 밖의 의무들을 그것들이 부정한 것이 아닌 한 별다른 불평 없이 감내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부정을 극단적으로 싫어했다. 그들은 남의 지배를 감내할 수는 있었지만 남의 노예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의 문제에 대해 항의했던 부다카(Boadicea)는 오히려 개처럼 매질을 당했고 그녀의 딸들은 겁탈당하는 능욕을 맛보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로마의 평화' 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브리튼인들이 들고 일어서지 않는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녀 자신의 부족과 트리노반테스족에 속하는 이웃 부족들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남부 브리튼을 석권하였다. 부다카는 이렇게 소리쳤던 것이다. "나는 나의 잃어버린 자유를 위해, 나의 상한 몸과 폭행당한 내 딸을 위해……그러니 여러분은 나를 주목하라. 여인의 손에 의해 저 로마 제국이 어떻게 유린되는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자들을 모두 여인의 노예로 만들어 로마에게 치욕을 안겨주자." *10) 그리하여 콜체스터, 런던, 베룰라미움을 불태웠고 붙잡은 모든 로마인과 로마인 동조자들은 고문을 당했다. 총독은 속주의 상실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을 뿐이다. *11)



 전쟁 초기의 양상에서 로마군은 브리튼인들의 게릴라식 전술에 고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브리튼인들은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전쟁터의 후방에 가족을 이끌고 다닌다는 점이었다. 로마 총독인 수에토니우스는 브리튼인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넒은 평원에서 회전을 치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실 회전에서 로마군을 격파할 수 있는 세력은 당대 지구상에 그리 많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에토니우스는 적의 약점을 이용했다.


 브리튼인들과의 전투가 시작되자 로마군은 경사진 곳에 진지를 만든 뒤에 적을 깊숙이 유인하여 창을 던졌고, 보병과 기병을 동시에 내보내 역공하였다. 갑작스런 역공에 도주하는 브리튼인들은 뒤를 따르던 가족들 때문에 퇴로가 막히고 말았고, 처참하게 살육되었다. 부다카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팍스 로마나


 저항이 모두 분쇄되어 더 이상 대들 기력도 사라지고 말자, 로마의 보복은 잔혹하고 강력하게 이루어졌다. 수만명의 브리튼인들은 목이 달아난 귀신이 되었고 브리튼 속주의 파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마치 로마인들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제는 더 겸양을 부릴 필요도 없이 분명한 군사적 통치를 이루고 있던 로마는 단 6만명의 관리와 군인들로 약 400만의 브리튼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 지배 영역은 점점 더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고 있었다.


 78년, 브리튼 총독이 된 율리우스 아그리콜라(Julius Agricola)는 웨일즈를 완전히 정복한 뒤 눈을 돌려 스코틀랜드의 로울렌즈를 공략하고 포즈 만에서 클라이드 만에 이르는 선을 따라 방어 요새들을 구축했다. 그는 하일랜즈까지 쳐들어가 야만족을 쳐부쉈으나 호전적인 전사들의 공격을 받아 로마의 방어선은 타인 강과 솔웨이만 사이의 선으로 후퇴되었다. 11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던 브리간데스족의 반란으로 브리튼에 주둔하던 제9군단이 궤멸당하자, 122년 하드리아누스 황제(Publius Aelius Hadrianus)는 브리튼을 방문해 기존의 방어선을 따라 돌로 된 더욱 견고한 성벽을 구축하기 시작하여 128년 이를 완성하였다.




 하드리아누스의 성벽(Hadrian’s Wall)으로 알려진 이 건축물은 로마인들이 이제까지 구축한 가장 거대한 축조물로, 120km 가까운 길 사이사이에 수많은 요새와 망루들이 있어 병사들이 주둔하였다. 스코틀랜드 중부의 비옥한 땅을 탐낸 로마인들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Antoninus Pius) 시대에 하드리아누스 성벽보다 북쪽으로 120킬로미터 떨어진 포즈 만과 클라이드 만에 잇는 60킬로미터의 '안토니누스의 성벽' 이 축조되었다. 그러나 안토니누스 성벽은 하드리아누스 성벽처럼 치밀한 구성으로 방비된 것은 아니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브리튼 방문은 그 이름을 딴 성벽의 건축 외에도 여타 영향력을 끼쳤다. 그 시점에서부터 브리튼의 도시들은 좀 더 확실한 기반 아래서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70년 ~ 120년 무렵 동안 브리튼은 정말로 로마화하여 로마제국의 일부로서 영속적인 특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브리튼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로마의 평화를 누렸으며, 로마인들은 켈트족의 우두머리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하면서도 그들에게 로마 문명의 우월성을 과시하여 로마의 지배에 순응하도록 했다. 


 로마적 도시와 건축문들은 인상적이었으며 안토니누스 시대 초기에 도시와 시골의 발전은 절정에 달하였다. 문화면에서는 로마풍이 지배적이었으며 고전적 미술장식들이 널리 이용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병사들과 관리들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지배 계층이었고, 로마인들의 힘이 약화된 징조가 포착된다면 언제라도 반항과 봉기가 일어날 위험성은 남아 있었다. 197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황제가 되기 위해 브리튼 주둔군을 잉글랜드에서 철수시켰을 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으며, 하드리아누스의 성벽은 픽트족에 의해서 무너지기도 했다. 성벽은 곧 재건되고 로마의 지배는 재확립되었지만, 약 한 세기 뒤인 296년 로마 장군 카라우시우스(Carausius)는 브리튼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이에 대한 로마의 분노를 뿌리쳐 한동안 브리튼의 통치자로 인정 받았다. 그는 휘하 장교 알렉투스에게 살해되었다. 알렉투스는 카라우시우스에 이어 자신을 브리튼의 황제로 자칭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에게 진압되었다.


또다시 한 세기가 지난 383년, 스페인의 천민 출신인 막시무스(Magnus Clemens Maximus)는 브리튼의 주둔군을 발판으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하고, 콘스탄티노플 서부에서 경쟁자 노릇을 하던 그라티아누스 황제를 제거하였다. 당시 여러 명의 황제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고 있던 로마였기에 가능한 상황이었다. 또다른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막시무스를 황제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막시무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도 협상을 맺어 평화조약을 이루었지만, 388년 테오도시우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몰락하고 말았다.


 운명을 담보로 도박을 벌이는 승부사들의 무대가 되어버린 듯한 로마 치하 브리튼의 위태위태한 나날은 398년 종결의 시간에 가까워졌다. 위대한 군사 지휘관인 플라비우스 스틸리코(Flavius Stilicho)는 비시고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브리튼에서 군사를 철수시켰는데, 이후 409년 호노리우스 황제는 드디어 전면적인 철수 명령 ─ 어감을 바꾸자면 브리튼의 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때었다. 황제는 한때 자신의 신민들이었던 섬 주민들에게 선포하였다. "로마는 이제 그대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그대들 스스로 방법을 찾아 주길 바란다."


 300년에 걸친 로마의 지배는 브리튼에 로마의 문화를 유입시켰고, 로마의 압도적인 문명은 도시민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브리튼인들은 시골 마을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여전히 켈트의 신들을 숭배했다. 그들에게 로마인의 지배는 곡물 징발과 과세를 의미할 뿐이었다. 그들은 외견상 로마인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여전히 켈트적이었으며, 그래서 로마의 지배가 물러나자 그들 고유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도시는 영구적이지 못했다. 로마인들이 떠나가자 도시는 곧 쇠퇴하기 시작했다. 


 실상 앵글로 색슨(Anglo-Saxon) 침입자들이 목격한 것은 로마화한 브리튼이 아니라 켈트적인 브리튼이었다. 그리고 이 침략자들은 남아있던 로마적인 것들을 거의 모두 쓸어버렸다. 영구적인 유산으로 남은것이 없지는 않았는데, 이는 로마의 길, 도시의 터전, 그리고 브리튼의 그리스도교였다. 로마가 물러난 이후 450년 경에서 600년까지의 약 150년은 브리튼의 역사상 가장 희미하고 확실치 않은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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