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이 스스로 항상 깨어 있는 마음을 지니도록 경계하기 위해 옷깃에 달고 다녔다는 방울인 성성자(惺惺子)를 『남명집(南冥集)』 등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조식은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에서 일생을 은거한 학자로, 그의 학문은 의리를 숭상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데 특징이 있다.
남명 조식(曺植)
조선전기 『신명사도』, 『파한잡기』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南冥). 생원 조안습(曺安習)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승문원판교 조언형(曺彦亨)이며, 어머니는 인주(仁州)이씨로 삼가현 지역의 유력한 사족이던 충순위 이국(李菊)의 딸이다.
1501년 경상도 삼가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의 토골(兎洞)에서 태어나 4∼7세 사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으며, 이후 아버지의 벼슬살이를 좇아서 의흥(義興)·단천(端川)에 가기도 했으나 20대 중반까지 주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서울의 처음 거주지는 연화방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이웃에 살던 이윤경(李潤慶)·이준경(李浚慶) 형제와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로 미루어 황효헌(黃孝獻)·이연경(李延慶)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18세 때 북악산 밑의 장의동으로 이사하여 성운(成運)과 평생을 같이하는 교우관계를 맺었고, 부근의 청풍계(淸風溪)에 숨어살던 성수침(成守琛) 형제에 종유하였으며,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죽임을 당한 일과 숙부 조언경(曺彦卿)이 귀양가는 현실을 크게 탄식하였다.
이후 7∼8년 간 서울 근교의 백운대나 탕춘대의 무계동(武溪洞)에 있는 절을 찾아 독서에 몰두하면서 때로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는데, 22세 때 생원·진사시의 초시와 문과의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 실패했으며, 26세 때 부친상을 당해 고향 삼가로 돌아가 3년 상을 마친 뒤, 한때 의령의 도굴산(闍堀山)에서 독서하다가 30세 되던 해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 탄동(炭洞)에 있는 처가로 거처를 옮겼다.
장인인 충순위 조수(曺琇)가 김해 일대에서 부자로 소문났던 만큼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되어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독서에 힘쓰며 특히 31세 때 서울 친구이던 이준경과 송인수(宋麟壽)로부터 선물받은 『심경(心經)』과 『대학(大學)』을 읽고 성리학에 침잠하면서 성운·이원(李源)·신계성(申季誠)·이희안(李希顔) 등과 더불어 의리의 구명과 실천에 힘써 그 학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덕성함양에 전념하였다.
학자로서의 명망이 높아지자 1538년(중종 33) 경상도관찰사 이언적(李彦迪)과 대사간 이림(李霖)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또 한번 만나기를 원하는 이언적의 요구도 후일을 기약하며 거절하였다.
45세가 되던 1545년(명종 1) 을사사화로 이림·송인수·성우(成遇)·곽순(郭珣) 등 가까운 지인들이 화를 입게 되자 세상을 탄식하고 더욱 숨을 뜻을 굳혔으며, 마침 모친상을 당함에 삼가로 돌아가 시묘(侍墓)하였고, 상복을 벗은 후에는 김해 생활을 청산, 고향인 토골에 계복당(鷄伏堂)·뇌룡사(雷龍舍)를 짓고 문인들과 함께 도학을 강론하였다.
이 시기 노진(盧禛)·강익(姜翼)·김희삼(金希參) 등이 종유하였으며, 오건(吳健)·문익성(文益成)·이광우(李光友)가 처음으로 문하에 출입하였다.
1553년 조정에서 내린 사도시주부의 관직을 사양했을 때 이황이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와 벼슬에 나가기를 권유하면서 “천리신교(千里神交)”를 맺기를 원하였고, 이후 서너 차례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듬해인 55세 때 단성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하나 궁중의 한 과부요, 전하는 어린 나이로 선왕의 한 아들일 뿐이니, 천백 가지의 재앙을 어찌 다 감당하며 억만갈래 민심을 어찌하여 수습하렵니까?”하는 유명한 단성현감 사직소를 올려 척신정치의 폐단과 비리를 통절히 비판하면서 임금이 크게 분발하여 명신(明新)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였다.
임금으로 하여금 국가 위기의 심각성을 깨우치도록 심금을 울리기 위해 격한 표현을 썼지만 임금의 어머니인 문정대비(文定大妃)를 과부라 한 것 때문에 죄를 입을 뻔했으나 대신과 언관의 구원으로 무사했으며, 당대 사림의 훈척공격에 모범을 보인 것이라 하여 조야에 명성을 크게 드러내게 되고 후세까지 길이 칭송되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정인홍(鄭仁弘)·하응도(河應圖)·하항(河沆)·박제현(朴齊賢) 등 후일 그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수업받기 시작하였다.
61세 때인 1561년 삼가의 토골에서 진주 덕산(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의 사륜동(絲綸洞)으로 거처를 다시 옮기고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강학하자, 진주·산청·함양·거창 등의 인근지역은 물론 서울의 선비들까지 조식을 좇아 몰려들었는데, 바로 그들이 정탁(鄭琢)·김효원(金孝元)·최영경(崔永慶)·김우옹(金宇顒)·이정(李楨)·김면(金沔)·조원(趙瑗) 등이었고, 정구(鄭逑)·최황(崔滉)·곽재우(郭再祐)·성여신(成汝信) 등은 이들보다 조금 늦게 문하로 들어왔다.
문정대비가 죽고 윤원형이 실각하여 척신정치가 막을 내리던 1566년(명종 21), 정치쇄신과 민심수습의 일환으로 성운·이항(李恒)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징소되어 상서원판관의 벼슬을 받자, 66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사은숙배 후 임금을 면대하고 물음에 응했는데 명종의 성의와 대신의 경륜이 부족함을 알고 곧 사직, 하향하였다.
이듬해 선조가 즉위한 이후 새로운 정치를 보필할 어진 인물을 구한다는 차원에서 여러 차례 징소되고, 1569년(선조 2)에는 정4품인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의 벼슬까지 내려졌으나 조정이 헛된 자리로만 대우함을 알고 늙고 병들었음을 구실로 끝내 응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때로는 당시의 폐단 열 가지를 논하는 소를 올리되 민생구제가 급선무인데도 조정의 논의에 성리설만 무성할 뿐 실혜(實惠)가 없음을 경계하였다.
특히 68세 때인 1568년에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에서는 유명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펴 서리의 작폐를 근절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등 나라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선조 초에 일어난 진주 지역의 음부옥(淫婦獄)에 관련되어 이정과 절교하고 뒤이어 그 문인들이 주동하였던 음부집안의 훼가출향(毁家黜鄕)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기대승(奇大升) 등 일부 관료로부터 비방을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했는데 조정에 나와 있던 그 문인 오건·정탁 등의 변호로 무사할 수 있었으며, 오히려 흉년이라 하여 임금이 음식물을 내려주고 72세로 별세하기 직전 의원을 보내오는 우대를 받았지만, 이정의 편에 서서 음부옥에 관한 조식의 처신을 비난했던 이황의 편지가 후일 알려지면서 그 문인들 사이의 갈등을 깊게 하고, 끝내 정인홍(鄭仁弘)에 의한 이언적·이황 배척을 불러오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조식의 학문은 처음 과거공부에 주력하며 좌류문(左柳文)주 01)을 주로 익혔으나 25세 되던 해에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원나라 유학자인 허형(許衡)의 글에서 “이윤(伊尹)의 뜻과 안연(顔淵)의 학문을 체득하여 벼슬에 나가면 큰 일을 하고 재야에서는 지조를 지킨다.”는 글귀에 접하여 크게 깨우쳐 이제까지 속된 학문에 빠졌던 것을 후회하고 비로소 성리학으로 나아가 6경 4서와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글을 탐독하게 되었으며, 특히 『심경(心經)』을 중시하여 마음을 잃지 않게 하는 약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역시 다른 성리학자와 마찬가지로 경의(敬義)를 배움의 바탕이라 하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경(敬)’이라 하고 밖으로 과단성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하였다(평소 차고 다니는 칼에 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새겨 넣었음).
이러한 조식의 주장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여 수양하는 기본으로 삼고 ‘의’로써 외부생활 즉, 하학(下學)·인사(人事)를 처리하여 나간다는 의리철학 또는 생활철학을 표방한 것이었다.
북송대 성리학자들에 의해 수양론의 이념으로 정립된 ‘경’(보통 居敬·主敬으로 표현됨)을 받아들이면서도, ‘경’을 직접 드러내며 실천하는 ‘의’를 함께 중시하는 데서 퇴계 이황과 차이를 보인다.
퇴계가 ‘경’의 본원을 찾고자 궁리(窮理)주 02)에 치중하여 사단칠정이기심성설(四端七情利己心性說)의 상학(上學)을 즐겨 논하고 문인들과도 논변을 벌이며 이에 관한 문자를 적지 않게 남겼다면, 조식은 정주(程朱)에 의해 상학은 이미 소상하게 밝혀진 만큼 다시 이를 가지고 중언부언할 이유가 없고 오직 이를 지키면서 하학 즉, 일상생활을 통해 의리로서 실천하여 드러내게 하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독서할 때마다 선유(先儒)의 글 중에 몸에 긴요한 내용이 있으면 이를 채록하여 편찬한 『학기유편(學記類編)』이나 존양(存養)·성찰(省察)·극치(克治)의 과정을 통해 생사를 걸고 수양에 몰두하는 내용을 적은 『신명사도(神明舍圖)』 이외에는 상학에 관한 별다른 글을 남기지 않았으며, 나아가 기대승과 이기심성설 논쟁을 벌인 퇴계에게 편지하여, 손으로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천리를 논하여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하는 행위를 그만두게 하라고 한 데서 보듯이 심성논변 자체를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것이라 하여 비판하고 경계하였다.
퇴계가 시사(時事)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언급하는 경우에도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처럼 군덕의 성취에 필요한 도덕적 내용으로 시종하였던 데 비해, 단성현감 사직소에서 보듯 조식이 훈척정치를 정면으로 비판 공격한 것은 현실과 실천을 강조하는 그 학문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조식에 의하면 학문이란 모름지기 반궁실천(反躬實踐)하고 지경실행(持敬實行)하는 것이어야 하며 현실에서는 일반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고 삶을 영위하는데 실제적인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학문의 두 번째 특징이라고 할 성리학을 중시하면서도 천문·지리·의학·복서(卜筮)·병학(兵學) 등의 이른 바 잡학(雜學)에 관심을 갖고 여기에 능통하였던 점도 이런 학문들이 인사, 즉 현실생활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식의 학문적 특징은 사람을 가르치는 데서도 일관되었다. 일상생활과 관련된 ‘하학’적인 측면에 치중하였으며 강학(講學)을 하기보다는 방법을 제시해주고 학습자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심득(心得)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심신수련의 수단으로 노장(老莊)적 방법을 담고 있는 참동계(參同契)를 즐겨 읽고 조용히 앉아 깊이 사색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퇴계에 의해 이미 지적되었듯이 도교나 선학(禪學), 양명학적 특징을 다분히 나타내는 요소였다.
조식의 인물에 대해서는 젊은 시절에는 다소 고답적이며 세상사람에 대해 오만하였다고 말해지기도 하지만 “중년 이후 몸을 깨끗이 가지고 결의를 지키며 예법으로 몸을 단속해서 행실이 뛰어났다.”고 한 실록의 기사나 “사람됨이 우뚝 솟아 속세를 벗어났고 희고 맑은 성품이 세상 밖에 있을 정도로 높고 멀다.(亭亭物表 皎皎霞外)”라고 한 퇴계의 평가, 그리고 그 문인인 정구가 “선생은 천지의 순수한 덕과 하악(河嶽)의 맑은 정기를 타고났고, 재주는 일세에 높고 기개는 천고를 덮으며, 지혜는 족히 천하의 변화를 통하고 용맹은 능히 삼군의 우두머리를 앗을 수 있으며, 태산벽립(泰山壁立)의 기상과 봉황이 높이 나는 이상을 갖고 있다.”고 한 말로 보건대 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처사로 살아가면서도 단순히 학문에만 침잠하여 절의를 지키는 일절지사(一節之士)에 그치지 않고 천길 낭떠러지에 홀로 우뚝 솟은 늠름한 기상을 지니고서 세상을 근심하고 민생을 구하기 위하여 현실에 직접 뛰어들어 불의에 과감히 맞서는 재야의 비판자였다고 하겠다.
정인홍·최영경·정구로 대표되는 조식의 문인들은 선조·광해군 때까지만 하여도 퇴계 문인들과 대등할 정도의 학파를 이루어 영남우도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중앙정계에서도 집권세력인 북인(北人)의 주축을 이루었는데, 대개 이들 남명학파는 다음과 같은 특색을 갖는다.
첫째 이들은 대부분 기절을 숭상하며 처사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었다. 조식이 벼슬에 나오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행적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이어진 것이다.
둘째 영남좌도의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영남우도의 학풍을 대표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문풍을 일으킨 지역문화의 기수들이었다.
셋째 국가의 위기 앞에 대부분이 몸소 앞장 서 싸움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 활동하는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던 그들은, 국가의 위란 앞에 수수방관하지 않고 학자의 신분으로 직접 몸을 던진 참여정신이 철저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정인홍의 회·퇴배척(晦退排斥)과 독주로 인해 남명학파의 한 축이던 정구가 떨어져 나가고 정온(鄭蘊) 등이 분립하는 내부의 분열을 겪은 데다, 인조반정 후 정인홍이 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함으로써 남명학파는 그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 겨우 진주 일대에 잔존하는 데 그쳤다.
1. 참선비의 길을 안내한 교육자
400 여년전 조선사회를 개혁 하고자 했던 처사. 남명 조식(1501 ~ 1572)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그리워지고 날이 갈수록 절실한 까닭이 무엇일까. 남명이 이룩한 많은 업적이 당대는 물론 지금에도 여전히 변함없이 추앙받고 있기에 지금도 우리는 지적인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선비의 모습으로 남고 싶어한다. 한 시대를 살았던 지성인의 ‘삶’은 ‘앎’을 통하여 영원히 계승되고, 교육을 통하여 그와 같은 ‘됨’을 지향하게 되어 있으므로 잠시 동안의 고난과 모순된 삶속에서도 잊혀 지지 않고 살아나는 것이다. 오늘 여기 모이신 많은 유림의 지도자들은 바로 이러한 삶에 동참하면서 나의 모습을 선현과 같이 그리워하고 되고파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내재하고 있다고 본다. 남명이 살다간 400여년 전 사림의 정신이 국가의 원기가 되어 우리의 정신을 지탱하고있다.
『남명집』편년 67세 조에 당시 선비의 성격과 관련하여 언급하였으니, 일반적으로 사림은 ①성리학자나 사장학자의 구분없이 사류로 보는 경우 ② 성리학자와 사장학자를 통칭하는 경우 ③ 사림파라 하여 선비들의 집단개념으로 보았다. 이렇게 볼때 선비의 인생로는 반드시 정해진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과거를 거쳐 벼슬길을 나선 선비가 퇴관낙향하여 교학의 장을 열어 후학을 가르치고 지방문풍을 교화하는 지도자가 될 때 사림파라 부를 수 있다.
조선중기 김종직의 문도가 일시 중앙정제에 진출하기 이전까지는 출사한 성리학자 정도전, 권근 등을 훈구파라 하여 앞서 말한 선비에 속하지만 순수한 사림파와는 구별된다.
한번 출사한 선비도 그들의 재지적 기반이 향리이기 때문에 향촌의 교화에 힘썼다. 즉, 이들은 향촌에서 글을 가르치고 예법을 일으키는 예교주의자다. 이같은 현상은 유교문화의 공통성으로 본다. 당시의 향촌교화는 경전을 기초로한 제분야의 지식을 가르치는 역할이 공자의 교학이나 정주자의 교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선비 역할은 정치함의 명분을 정명으로 내세워 각자의 역할기대에 충실하는 경우도 있다. 남명은 언로를 통하여 군왕지학을 헌책하였는데 이것은 선비의 「정명론」이며 향촌의 교화와 민풍의 순화로 사림파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남명에게서 이러한 기절을 엿볼 수 있다.
유자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부나 권력, 실리와 같은 욕망에 무관심하거나, 무력한 사람이 아닌, 현실에 바탕을 두면서 이상적 사회를 꿈꾸는 지성인이다. 그러므로 유가에서 이해하는 유학은 현실참여를 전제하고서 자신의 학을 체득하였다. 여기서 사림의 현실 참여의식은 수기의 측면에서 「학」이 되고 치인의 입장에서 「교」를 성취하려 한다. 이로써 사림파의 역할은 충족된다. 조선중기 이후에 거듭되는 사화를 계기로 남명같은 사림의 선비가 주목을 받으면서 숭앙받는 인물이 되므로 자연히 교학에만 전념하는 선비의 기절을 순유로 보게 되었다. 남명은 스스로 성찰하기를,
「내 일찍이 재와 덕이 없으니 어찌 일마다 할 수 있겠는가마는 만일 옛날의 덕을 높이고, 후학을 권장하여 얼마간의 현재를 설발하여 각기 그 재능을 높이고 앉아서 성공함을 보는 일이 좋다.」
고 하였으니 이는 그가 꿈꾸는 조선사회의 중심이 선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사림파의 선비는 관직보다는 향리와 산림에 은거함으로써 출사의 선비보다는 높은 기절로 숭앙받고 있었다. 동시에 교학과 국정에 대한 헌책으로 순수한 선비의 기절을 보지할 수 있었다. 남명의 이와 같은 사림정신은 출처대절에서 나타난다.
조선시대 유학의 흥기와 교학의 요람은 사회발전의 기본 바탕이라고 보고 나아가 유학은 학문적 성장과정서 교학의 역할이 지대하여 전통논리를 흡수하는 가운데 민본정치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유학이 정교이념과는 별도로 인간본연의 본성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훈구학자와는 대조되는 사림학파에 의하여 새로운 사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사림의 공적은 백성을 순화하고 군왕을 교화하면서 인재양성에 뜻을 두면서 차츰 특정의 학자를 중심으로 문도를 이루어 학통을 형성하게 이르렀다. 이러한 학통은 주로 영남지역의 선비들에 의해서 「조선의 추로지향」 이라는 유학의 고장이 형성되었다. 그 학파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까지 이어져서 남인의 영수 허목은 남명의 사상을 계승한 정구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남명이 성장한 다음 1519년 기묘사화는 도학정치의 맥을 끊어 놓았으나 학문과 사색의 도장은 날로 흥기 하였다. 이로써 영남사림의 학풍은 조선 초 관학에 대칭되는 사학의 태동으로 한국유학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즉 길재이후 형성된 학통은 이황· 조식대에 와서 사림의 선비정신은 교학활동을 함으로써 두 학파의 사상은 더욱 생명력을 얻게된다.
영남우도의 조식은 김굉필, 정여창의 학풍을 계승하여 남명학파를 형성하여 퇴계학파와 더불어 양 학파는 공자 이래 중국의 원시유학과 주자의 성리학을 받아 들여서 각기 다른 학문사상과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유하연구의 대가 박종홍은『한국사상사논고』에서 유학이 한반도 문화형성에 정신적 일익을 담당함과 동시에 중앙집권적 체제형성에 있어서 지도이념의 구실을 하였다고 하였다.
중앙집권체제형성에서 지도이면의 역할은 정신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으나 후일 파당으로 사사를 앞세우는 일면도 있었기에 학파의 순수성이 훼상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학파의 형성에 긍정적인 요인이 된 배경은 성종대부터 신진사류를 우대하여 지방 문풍 진흥에 이바지를 하였다. 대개 학통의 연원은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는 경우와, 과거장에서 선거취재한 지공리를 사부로 존경하고 그 사상과 학문을 따르고 숭모하는 데서 비롯된다.
학통의 연원은 사숙한 문인의 계통과 어느 한 인물에 의해서 나타났다기 보다는 당시의 정치문화속이 잉태한 사림의 정신이 강직한 선행성과 각고의 탐구심이 강직한 파지력으로 나타나서 타 학파의 추수를 불허하였다. 이러한 풍토가 조선중기의 교학을 난숙하게 하였다. 또한 교학이념의 다단한 방법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로 인하여 학교의 제도와 학규가 속출하였고, 사학기관이 발달하여 신진사류가 다수 배출되었다. 일단 배출된 신진사류는 향리에 생활근거를 두면서 농촌의 애환을 직접 체험하였으나 때로는 상경종사하는데 의미를 두었다. 그러나 남명의 문도는 대개 시종하였을 뿐 관직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하여 교학과 행신에 유념하였다. 이들이 주로 교학하는 장소는 서원을 중심으로 「존양성찰」과 「수신치기」를 종지로 삼았다. 이들은 일신의 안녕을 안목에 두지 않고 오직 「존천리갈인욕」하려는 삶의 태도가 있었으므로 당시 서원을 중심으로 한 교학활동은 인륜을 목표로하고 있었다. 남명학파도 퇴계학파와 같이 정치적인 패퇴를 그들의 명분론으로 보상받고자 정교이념과 맞설 수 있는 사상으로 윤리적 예교주의를 정도로 받아 들였다. 그런 까닭으로 절의만이 이러한 사상을 보존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교학규범으로 「의」를 내세웠던 남명은 의리를 내면적 근거와 우주적 근원에서 해명하려는 철학적 삶을 성리학의 과제로 전면에 내세운 것이 예학의 실천적 행도다. 그 행도가 불취와 순자연의 도가적 삶의 자세와 가깝다고 보게된다.
그러나 성리학적 원리에만 구속받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으므로 퇴계학파로부터 배척을 받은 적도 있다. 퇴계학파에서는 “육구연과 왕수인의 학문은 중국에서 성하지 않고 간혹 숭상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고 말하였다.
이황의 문도인 류성룡이 이같은 견해를 표명한 바 있는데 「명의 왕안석이 양명을 종사하는 것은 패도하는 유자」라고 하여 다소 선적인 태도를 비난하였다. 이황은 양명은 학술이 매우 어긋나고 그 마음은 굳세고 사납다고 하면서 왕양의 모든 변설은 장황하며 인의를 해치고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다면서 배척하였다. 남명의 학문경향은 퇴계학파와는 달리 양명학을 부정한 적이 없고 오히려 폭넓게 이해하였기 때문에 문도들의 학문성향도 성리학에만 얽매이지 않았다.
2. 제자교육에 성공하여 후일 남명학파를 형성하다.
남명에게서 배운 수많은 문인들은 대개가 경상우도에 밀집해 있다. 남명의 사우, 문인, 사숙인에 관한 기록은 「덕천원생록」7권, 「산해사우연원록」, 「덕천사우연원록」등이 있다. 이중 「산해연원록」에는 문인과 종유인의 구분없이 111명이고, 「덕천산우연원록」에는 135명 종유인이 52명 사숙인이 162명으로 등재되어 있다. 남명이 30세부터 과업을 포기하고 독서와 교학에만 전념하던 산해정(김해)시절에 정복현, 이제신, 권문임, 노흠, 권문현 등이 와서 배웠고, 48세부터 60세까지 약 12년간은 합천 「뇌룡정」(삼가)에서는 정인홍, 이광우, 이광곤, 문익성, 오건, 강익, 전치원, 하응도, 박제현, 진극원, 박제인, 하항, 하각, 박찬, 오운, 이정, 조종도, 이천경 등이 보인다. 남명 61세부터 별세할 때까지 산천재(산청원리)에는 이조, 이창, 정탁, 조원, 김우옹, 이대기, 이노, 유종지, 최영중, 김효원, 정구, 최항, 유대수, 곽재우 등이 있으며 강학장소가 밝혀지지 않는 문인으로 배신, 하청주, 이요, 이유인, 오간, 김면, 도희령, 박제현, 이욱, 박순, 최원, 박인량, 하혼, 강숙, 최녁, 송당수, 노순, 이현우, 정인기 등이 있다. 이처럼 영남 우도에서 최대의 문도를 이루어 이후 남명학파 혹은 남명별파(안정복의 말)를 형성한 것은 한국유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남명의 교육적 역량이 지대함을 말해 준만큼 문인들의 처신과 행적도 조선조 선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기에 남명의 교육적 업적은 퇴계를 압두하고도 남음이 있다.(이만규, 조선교육사 1950)는 후세의 평가가 나온것은 영남우도의 학이 남명의 출현에 이르러 일고봉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남명의 폭넓은 인간성과 고절한 지조는 남방의 대종산 같아서 지리산하의 기상을 그대로 표출 했다.
이는 영남좌도의 소맥산하의 이황의 문도와 뜻을 같이 하면서도 학문의 차서와 방법을 달리하여 남명학파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조식의 사상은 도학자적 삶의 자세를 중시하였다. 그는 노자의 우주본체에 따르는 이법을 당연시 하였으므로 어떻게 하면 실천할 수 있을는지 그 방도를 강구하는 힘썼다. 더욱이 홀로 우뚝 선 기절은 우도인의 풍토와 관련하여 숭문호무하며 역농호학하는 생활자세가 어우러져서 남명학은 성립되었다. 남명학이 특별히 유학에서의 학통은 그들의 학문적 성격과 동양의 시대정신과 관련되어 있다.
이들이 한결같이 궤를 같이하는 학문의 공통연원은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도통의 시발은 복희에서 요· 순· 우· 탕· 주· 문· 무왕의 중국사상에 일정한 맥을 이루었다. 이는 다시 춘추시대의 공· 맹시대에 중절되다시피 하였으나 송대에 주렴계, 장재, 정호, 정이, 주희에 와서 도학의 전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여기서 주희의 도학은 조선시대 사상을 지배해왔다. 남명학파는 성리학을 학문사상의 토대로 삼으면서 제병학과 노장학의 정신을 어느 정도 수용하였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남명학파는 대개 세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① 학문에 힘쓰면서 출사한 문도로서 나중에 사림으로 돌아와 교학으로 생을 마친 오건, 정구, 김우옹, 김효원 등이 있다. ② 남명과 같이 처음부터 은일지사로 지낸 문도로서 취영경 , 이재신, 하항 등이 있다. ③ 후일 잠시 출사한 적은 있으나 임진의 병으로 활동한 문도로서 곽재우, 조조도, 오운등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여기서 대부분의 문도는 남명의 정신을 이어 받아 은일지사로 교학에 종사하였는데 기묘사화(1519)를 계기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자연히 유자들은 산림으로 돌아가거나 아예 출사를 단념하였다.
이 당시 유자들의 일반적인 성향은 ① 순수한 산림파로서 성운, 서경덕, 조식, 하항, 이제신 등의 도학자와 ② 출처의 절충파로서 이황, 김인후, 기대승, 이이 등의 경세학자 ③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심의경, 류성룡, 이산해, 정여립, 김효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분류는 처세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며 학문관고도 관련되어 하나의 도학연원을 따르게 되었다. 도통의 연원을 분류한 안정복은 이황을 이언정의 영향에서 보았는데 남명은 남명별파로 규정하여 학문과 정신세계의 독자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안정복 정구의 문하에서 장현광, 허목이 배출되었으며 허목은 이익, 안정복으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실질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사학계에서 알려진 실학의 태두 이익은 남명학파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남명학파의 적전인 정구는 남명의 장자격인 오건의 제자이기도 하다. 남명에 의하면 퇴계문하에서는 류성룡, 김성일이 가장 이름나 있으며 오건은 양문에 출입하여 행동이 가장 높다고 하였다. 정구와 김우옹은 이황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남명의 고제로 정구와 김우옹을 들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남명학파는 같은 지역적 연고로 인해서 이황의 학통과도 관계되면서 「남명학파」라는 독특한 유학정신과 학문에서 오는 도통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학문세계는 중국고대의 유학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정신세계, 특히 선비정신은 남명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실제로 그러한 모습이 은일지사의 교학자로서 임란 초에 남명학파의 창의 및 의병활동은 경상좌도 내지 타도의 의병봉기에 촉매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도망한 군민을 집결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남명학파는 그들의 의병 활동을 통하여 국난극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구체적이 전과는 (1) 전국에서 가장 먼저 창의함으로써 다른 지방의 창의를 촉발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2) 남해상에서 아군의 제해권 장악을 위한 배후기지를 제공해 주었으며, (3) 낙동강 방어선과 진주성을 잘 지킴으로써 왜적의 호남 진입을 차단하는 동시에 군량을 비롯한 군수· 민수물자의 공급을 원활히 할 수 있었고, (4) 초기 관· 의병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상호협조체제를 유지하는 데에서 전수 양면에 다대한 성과를 거둔 동시에 다른 지방에도 시범이 될 수 있었다.(남명학연구2집 이수건, 1992 : 22)
3. 출처가 분명한 선비를 기대하다.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길은 쉽지 않은 것으로 자의로 할 수도 없고 타의로 원치않는 처지로 몰리기 쉬우므로 그 실천에 있어서 매우 어렵다. 『소학』에서도 진퇴의 절도를 언급하여 40세에 관직에 나아가서 사물에 대응하여 계책을 내여, 임금과 도에 맞으면 복종하고 옳지 않으면 관직에서 떠난다고 하였고, 70세가 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난다고 하였다.(입교)
또한 고대 아테네의 플라톤(platon B.C 427~347)도 교육의 단계서 35세부터 50세까지 군사 및 정치 실무에 참가하고 50세까지 배워야만 국가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철인정치)를 들고 있다.(한상규,「교육사상사」형설출판, 2009) 오늘날 우리의 지도자들은 어떤 형태로 나아가는가.
학연과 지연 등 인맥의 친소와 개인의 충성도에 따른 인사는 없는지 인사의 기준이 의에 두고 있는지 이에 두고 있는지를 남명의 출처 정신에서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조선시대처럼 출사를 가장 큰 명예로 생각하는 풍토에서 선비 실천해야 한다. 조선시대처럼 출사를 가장 큰 명예로 생각하는 풍토에서 선비의 몸가짐은 한시대의 정신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선비는 학과 사가 정기에 나타나야 한다고 볼 때 선비의 삶이 학문과 사환의 길에서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일반적으로 관직에 임할 때 「묘당유」로 부른다. 그러나 남명은 사환의 길을 단념하고 사림의 선비로 자족하였다. 성운은 일찍이 남명의 출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남명은 그 거함에 노자, 장자의 생활관과 같았고 평생을 도를 추구하였기에 1572년(72세)에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처사로 칭함이 옳다고 하였다. 또한 명종대의 여론에 의하면 「조광조이후조정에서는 새로 인재가 필요할 때마다 남명과 성수침을 가까이 하여 성학성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하여 그들의 청절과 학문을 높이 숭앙하였다. 이처럼 남명은 당대 모든 선비의 사표가 되었으며 사림의 종사로 존대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남명은 학유들에게 도학의 입지를 일으키게 하였고, 시정의 절실한 인물로 조정에서도 그의 정론을 따르는 여론이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선생은 평생 세상의 도에 뜻을 두었고 백성의 고통에 늘 근심하였으며 국위에 대하여 탄식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고 정구는 제문에서 밝혔다. 또한 허목도 「남명선생신도비문」에서 「선생은 구차스럽게 따르지도 않았고 가만있지도 않아서 출처의 대절이 분명하였다.」이율곡도 『석당일기』에 「유일을 천거하여 기용하는 일은 있으나 허문으로 실제 성이 없다고 지적하고 조모 같은 분이 사로를 포기하고 사직서를 올려서 시정의 폐단을 말하였다」고 하였다. 이처럼 남명은 산림에 있으면서 시정의 참여를 포기한 적이 없다. 그의 정신세계는 야은 『길재선생전』을 쓴 적이 있었으므로 처사로서의 생활에 크게 자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정은 사림의 인재를 전혀 무시하지 않았으므로 명종이 「사정전」에서 남명을 만남으로써 사림의 실세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럴수록 남명은 정치현장의 유인을 물리치면서 언론으로 정치참여를 하여 사림파 선비에게 「상소」의 신뢰성을 갖게 하였다. 『학기』에 구산 양씨의 출처관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한 남명은 이렇게 말했다.
「도를 행하기 위한 벼슬과 록을 받기 위한 벼슬은 같지 않다. 상이보는 집이 가난하였으므로 소명에 응하여 벼슬에 나아가서 신종이 우대한바 있다. 때에 두어가지 정무를 맡아 일하면서 등문고 양원등의 낮은 직책에 만족했다. 그는 록만으로도 집안을 넉넉히 할 수 있었지만 모두 받고 사양하지를 않았다. 그 후 정숙이란 자가 백의로 발탁되어 권청하는 직책을 받았다. 이때 조정의 다른 직책도 겸임하게 했으나 사양하였다. 대개 전일에 벼슬하지 않던 것도 도를 위함이므로 오늘의 벼슬은 그 관직만으로도 행도에 족하므로 받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을 구차하게 받는 록이 된다. 그런데 후세에는 도학이 밝지 않아서 군자가 사양하고 받음이, 취함과 사함의 곡절을 능히 아는 사람이 드물다. 까닭에 상공의 사양함을 사람들이 옳지 않다.」
고 했다. 이 말은 취사와 불취의 행도는 관직정도나 녹봉에 의해서 행신할 수 없다는 취지를 말해 준 것이다. 군자도 이러한 견지에서 「벼슬을 하는 것과 그만두는 것 또한 벼슬을 오랫동안 하는 것과 잠시 하는 것 등의 모두가 적당한데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진· 퇴에 분명한 도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정신을 수용하여 남명은 출사를 반드시 옳지 않다고 한 적은 없다. 그리하여 제자들 중에는 관직에 진출한 자도 많다. 그때 마다 관직에 나간 제자에게 목민관의 자질을 훈도한 바 있다. 그 중에서 1551년 문인 김희삼이 경상좌도의 경차관으로 여러 고을을 순회할 때 남명은 그에게 목민의 바른 길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수제자 오건이 조정에서 학록으로 재직할 때 의로써 행신하도록 훈도한 바 있다. 그런 후 1565년 4월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드디어 삭탈 관직되자 정국은 다소 평온하게 이르자, 수차의 제수에도 불취하다가 드디어 소명에 응하여 사정전에 나아갔을 때 제자 박인은 남명에 대하여 출처대절을 대개 짐작하였다고 한 바 있다. 김우옹에게는,
「장부의 거동에 무게가 있어서 큰 산줄기를 깍은 만길 절벽 같아야 한다. 때가 되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여 사업을 이루어야 한다. 천조의 쇠뇌는 한번 쏘아 만겹의 굳은 성을 능히 부스는데 쓰며 생쥐를 잡는데 쓰지 않는다.」
하여 「대학」과 「성리대전」으로 학문적 입지를 강화하여 선현의 올바른 식견을 받아들이도록 충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행도, 위학,행의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의 시문중에서 출처대절의 정신이 강하게 표출된 시<제덕산계정주>에서 선비의 높은 기절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면,
천석드리 종을 보라 /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울리지 않아 / 만고의 천왕봉은/ 하늘이 울려도 오히려 울리지 않는구나(청간천석종 비대구무성 쟁사두류산 천명유불명)
지리중턱 아래 전야에 은일하며 교학과 사색의 장을 열어 자족하는 선비에게는 자연과 같은 청고한 모습 외의 다른 모습은 전혀 없는 듯이 보였다. 자신을 천석종에 비유하면서 사림의 명분을 지켰기에 스스로 호를 「남명」이라고 칭하면서 지우 성수침과 같은 산림생활을 기쁘게 생각한 바 있다. 다음의 시가에서 그의 이러한 도가풍의 정신세계를 엿 볼 수 있다.
「두류산 양단수를 내 듯고 이제 보니, 도화뜬 말근 물에 산영조차 잠기어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매오, 나는 옌가 하노라」
성동주에게 준 시에서도 앞서 기술한 싯구처럼 자연적인 삶의 모습이 엿보였고, 김탁이에서 준 시에서도 관직을 사양하고 녹문하에 들어가 버린 한양 방씨의 고사를 인용하였는가 하면 〈속욕〉에서 진세의 혼탁한 시류를 씻어버리겠다는 의지로 탁한 무리와는 멀리하겠다는 선비의 정신을 보였다.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도 남명의 이러한 정신세계가 선비들이 선망하는 기준이 되고있다.
4. 서민이 잘 사는 사회를 꿈꾸다.
백성들의 민생을 위한 정치, 경제 개혁을 표방하여 국이들의 마음을 읽고 아픈 상처를 치유하면서 빈자와 병자등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을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 남명이다. 산골에서 쟁기질하며 보리밥에 된장 나물국으로 생계를 유지한 남명은 누구보다도 민초들의 고통을 잘 알고있었다. 한민족은 고조선 시대부터 법보다는 도덕성과 개인의 덕성을 존중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단군만 해도 홍익인간의 사상속에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을 우주의 작은 실체로 겸손한 존재로 여겨왔다. 즉 백성의 뜻을 하늘에 전달하는 외경이 천심을 불렀고 하늘은 인간의 마음을 헤아려 복을 내리는 인심과 연결하였다. 세종은 오랜 가뭄에 토방에서 거친 멍석자리로 거처하고 소찬을 하여 농민과 함께 고통을 극복하였다고 한다. 남명은 국정과 위민에 대한 현실을 두고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포의의 신분으로 간절한 소망을 상소장과 시· 부의 문장을 통해서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여기서 그는 시국에 대한 애국충정의 정신은 사림의 선비로서 느끼는 현실감각과 이상론에 대한 욕구성향이 벽을 마주보는 듯이 날카롭고 엄숙하다. 백성을 위한 민정은 군왕의 성덕을 요구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을 보는 사림정치문화는 개혁의지가 포함된 경세치용적 입장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적 차원의 단계는 아니였으나, 주자학적 사회질서내에서 정치문화가 성숙된 조선중기에 남명과 같은 개혁론은 확실히 진보적이다. 이같은 사고는 주자의 이가 자연과 사회를 일관하는 영원한 절대적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에 근거한 것으로, 현실적 사회질서는 절대적 진리가 불변의 자연질서로서 불변한다는 성향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 질서의 인식은 개별 사물의 「이」에서 시작하여 일원적 이의 인식에 도달할 때 개인의 주관적 인식은 객관화하여 동일한 인식이 되며 그것은 때로는 개별사물을 제약한다. 즉 치국 평천하의 원리는 보편적 도덕률의 실현이 통치자 군왕에 의해서만 가능 해 질 수 밖에 없는 절대적 통치논리를 뒷받침해준다. 남명은 1555년(명종10)단성현감을 제수받고는 그 직을 사면하는 「사단성현감소」를 군왕에게 올렸다. 소장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있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면서 호사생활에 만족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둘째, 지금 이 나라는 근본이 서지 않았고 인심도 이미 조정과 멀어지고 있으므로 앞날을 예측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더욱이 이런 시국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내외 관료들의 부패가 극도로 문란한데도 대책을 세우지 못함을 안타깝게 호소하였다.
셋째, 변방의 방비는 소홀하고 조정은 재물로 인사를 처리하여 자격있는 장수는 없으며 성내는 군졸도 없는 형편이다. 이런 때 왜군이 변방을 혼란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무능함을 지적하였다.
넷째, 국사는 구구한 정법에 있지 않고 국왕의 올바른 마음에 있음을 명심해야 하며 이를 위한 방도로 군왕은 학문을 좋아하고 백가지 덕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요지다.
「사단성현감소」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위민사상은 군왕을 교화하려는 의도와 인을 위하는 애국충정의 깊은 정신적 고뇌가 있었다. 비록 직설적인 표현으로 군왕의 실정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언론의 정도는 용기있는 선비만이 지닐 수 있는 정신으로 그렇게 해서라도 살기좋은 조선사회를 바라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5. 남명을 평가한 사관의 기록
남명은 선민의식을 소유한 선비가 아닌 모든 사람과 함께 삶을 걱정하고 가난하게 살았던 처사였다. 이러한 그의 정신세계를 사관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 조식은 방정하고 염결한 사람으로 형제와 같이 살면서 자가의 재물을 자축하지 않았으며 학문에만 뜻을 두고 과거는 일삼지 않았다.(명종실록 권13, 7년 3월 9일, 7년 7월 11일 조)
· 조식은 사도사 주부로 삼았다. 조식은 사람됨이 맑고 절개가 굳어 예법으로 몸을 단속하고 영욕· 이달로써 마음은 움직이지 않으며 조행이 뛰어나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명종실록권 14, 8년 윤 3월 18일조)
· 조식은 천성이 감개하고 정직하고 세상따라 부앙하려 하지 않았고, 몸을 깨끗하게 가져 속된 사람과 말을 할 때는 더럽힐까 두려워 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듯이 있었으며 국가에서 누차 초빙하였으나 응하지 아니하였다.(명종실록 권12, 8년 5월 6일조)
· 단성현감 사직 상소문을 올려 문제시 될 때 성균유생 5백명의 상소문속에 조식은 강직하고도 절실한 의론으로 정녕 나라를 걱정한 성심에서 나온 것이며 시폐에 강복하지 않고 언로가 막히어 사림의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명종실록 권19, 10년 12월 13일조)
· 누차에 걸쳐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는데 대하여 심의겸은 차에서 조식같은 이는 유일의 선비로서 조수의 은혜를 입고도 소명에 달려와 봉직은 않고 있지만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말이 일찍이 위에 전달되었습니다.(명종실록 권33, 21년 7월 19일조)
· 명종이 서늘한 때를 기다려 남명을 역마를 태워 보낼 것을 경상감사에게 지시하였다.(명종실록 권 33, 21년 7월 19일조)
· 명종과 사정권에 나아가 만난 남명은 가언과 선정의 치도를 논하였다.(명종실록 권 33, 21년 10월 7일조) 이때 남명은 마지 못해 올라와서 사대한 뒤에 즉시 호연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입대했을 때에 식의 말은 대단히 예리했다고 사신은 기록하였다.(명종실록 권33, 21년 10월 21일조)
·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강가에는 선비들이 남명의 고명을 흠모하여 전송하는 사람이 많았다.(명종실록 권331 21년 10월 21일조)
이상에서 살펴본 남명이 꿈꾸는 조선사회는 이 땅에 선비문화를 만들어낸 사림의 표상으로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도를 실천하여 경상우도의 선비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남명의 삶의 세계는 그의 삶의 단계에서 ‘학이불염 회인불권’한 가운데 군자의 길을 개척하였다.
제자 송암 이노는 용사일기(임진 11월 17일)에 「우리들이 평소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읽고 논했는가. 신하는 충에 죽고, 자식은 효에 죽는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평소에(우리가) 배우고 논한 것이 바로 이에 있도다.」고 하였다. 남명의 선비정신은 이처럼 의의 실천력이 후세에 까지 영향을 주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 북이 져서 의병장 양은이 대동중 퇴폐(광해군)
- 북인 정권장악, 광해군
- 조식. 서경덕 학풍 계승
- 의리절의숭상정인홍등다수의병장배출
- 양전사업
- 은광개발
- 대동법
- 중립외교(강홍립의 후금투항)
- 회퇴변척
- 폐모살제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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