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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 당 유학

Jobs9 2021. 12. 23.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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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 당 유학

[원성왕(元聖王) 5년(789)] 9월에 자옥(子玉)을 양근현(陽根縣)의 소수(小守)로 삼으니, 집사사(執事史) 모초(毛肖)가 논박하여 말하기를, “자옥은 문적(文籍)으로 등용되지 않았으니 지방 관직을 맡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시중(侍中)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비록 문적으로 등용되지는 않았지만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학생(學生)이 되었으니 역시 써도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이에 따랐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5년 9월

 

九月, 以子玉爲楊根縣小守. 執事史毛肖駮言, 子玉不以文籍出身, 不可委分憂之職. 侍中議云, 雖不以文籍出身, 曾入大唐爲學生, 不亦可用耶. 王從之.

『三國史記』卷10, 「新羅本紀」10 元聖王 5年 9月

 

해설 : 신라가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낸 것은 640년(선덕왕 9년)으로, 왕실 자제들을 당나라 국자감(國子監)에 보내 수학하게 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이른바 ‘숙위학생(宿衛學生)’의 명분으로 많은 학생이 당나라로 건너가 수학하였다. 그리하여 첫 유학생을 보낸 시점으로부터 약 200년이 지난 837년(희강왕 2년)에는 유학생 수가 216명에 이르게 되었다. 게다가 821년(헌덕왕 13년) 이래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빈공과(賓貢科)라는 과거시험을 실시하면서 신라인의 유학열은 더욱 고조되었고, 빈공과에 급제하는 유학생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신라가 당나라로 유학생을 처음 파견한 이래 멸망할 때까지 근 300년간 당나라에서 유학한 신라인의 수는 2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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