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한국사 사료

후백제 견훤(甄萱)

Jobs 9 2021. 12. 19. 14:57
반응형

후백제 견훤(甄萱)

견훤(甄萱)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이씨(李氏)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후에 가문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견훤이 태어나 어린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일하면 어머니가 식사를 날라다 주었는데, 아이를 나무 수풀 밑에 놓아 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시골에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장성하자 체격과 용모가 우뚝 뛰어났으며, 뜻과 기개가 커서 보통이 아니었다. 군대를 따라 서울에 들어왔다가 서남 해안을 지키러 갔을 때에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기다렸고, 그의 용기는 항상 병졸보다 앞섰으므로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 즉 신라 진성왕(眞聖王) 재위 6년(892)에 왕의 총애를 받던 아이들이 (왕의) 옆에 있으면서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고, 그 위에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이 떠돌아다니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은근히 왕위를 엿보는 마음을 가져 무리를 불러 모아 왕경(王京)의 서남쪽 주(州)와 현(縣)을 치자 이르는 곳마다 메아리처럼 호응하였다. 한 달 사이에 무리가 5000명에 이르자 드디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아직 감히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 못하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持節)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어사중승(兼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良吉)이 가장 강성하여 궁예가 스스로 투항하여 그 부하가 되었는데,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巡幸)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이르니 그 백성이 환영하고 위로하였다.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좌우에게 말하였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살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발흥하였으므로 진한과 변한이 따라서 일어났다. 이에 백제가 금마산(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00여 년이 되어 총장(摠章) 연간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신라의 요청을 들어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 명을 싣고 바다를 건너왔고, 신라의 김유신이 잃은 영토를 다시 찾기 위해 황산(黃山)을 지나 사비(泗沘)에 이르러 당나라군과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내 이제 감히 완산(完山)에 도읍하여 의자왕(義慈王)의 묵은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 드디어 후백제 왕을 자칭하고 관직을 마련하니, 이때는 당나라 광화(光化) 3년이고, 신라 효공왕(孝恭王) 4년(900)이었다. 

『삼국사기』권50, 「열전10」 견훤

甄萱, 尚州加恩縣人也. 夲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郷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竒,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秊, 是新羅真聖王在位六秊,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羣盜蜂起. 於是萱竊有覦心, 嘯聚徒侣, 行撃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䓁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 食邑二千戸. 是時北原賊梁吉雄強,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梁吉職爲裨將.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百濟開國金馬山六白餘秊, 揔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舩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圡, 歷黄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㓕之. 今予敢不立都扵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秊, 新羅孝恭王四秊也.

『三國史記』卷50, 「列傳」10 甄萱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