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張保皐)⋅정년(停年)전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이라는 자는 자기 나라에서 서주(徐州)로 와서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장보고의 나이는 서른 살이고 정년의 나이는 열 살이 젊어, 장보고를 형이라고 불렀다. 모두 싸움을 잘하였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나라와 서주에서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정년은 또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걸어가면서 물을 내뿜지 아니하였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技藝)로서 항상 맞서 서로 지지 않았다.
후에 장보고는 신라에 귀국하여 그 왕(흥덕왕)을 뵙고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신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청해(淸海), 신라 해로(海路)의 요지(要地)에 진영(鎭營)을 설치해, 해적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약탈하여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왕이 (장보고에게) 1만 명을 주어 요청을 들어주었다. 태화(太和) 연간 이후로 해상에서 신라인을 파는 자가 없었다. 장보고는 이미 그 나라에서 귀한 사람이 되었는데, 정년은 당나라에서 관직을 잃고 굶주림과 추위를 무릅쓰며 사수(泗水) 연수현(漣水縣)에 있었다.
하루는 연수수장(漣水戍將) 풍원규(馮元規)에게 말하기를, “나는 동쪽으로 돌아가서 장보고에게 걸식(乞食)하려 한다.”라고 하였다. 풍원규가 말하기를, “그대와 장보고와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가서 그 손에 죽으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정년이 말하기를, “굶주림과 추위에 죽는 것이 싸워서 쾌하게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물며 고향에서 죽는 것이랴.” 하고 그곳을 떠나 장보고를 만났다. 장보고는 함께 술을 마시며, 마음껏 즐겼다.
술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서울에서 사자(使者)가 이르렀는데, 대신(大臣)이 그 왕을 시해(弑害)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며 왕이 없다 하였다. 장보고는 드디어 군사 5000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며, 정년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환란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정년은 국도(國都)에 들어가 반란자를 베고, 왕을 세우고 보답하였다. 왕은 드디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장보고를 대신케 하였다.
천보(天宝) 연간 안록산(安綠山)의 난에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 안사순(安史順)이 안녹산의 종제(從弟)인 까닭으로 사사(賜死)되고, 조서(詔書)를 내려 곽분양(郭汾陽)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열흘 후에는 다시 이임회(李臨淮)에게 조서를 내려 절(節)을 가지고 삭방의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동(東)으로 조(趙)⋅위(魏) 지방에 나가게 하였다. 안사순 때에는 곽분양과 이임회가 모두 아문도장(牙門都將)으로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여 비록 같은 그릇으로 음식을 먹더라도 서로 흘겨보며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곽분양이 안사순을 대신하게 되자 이임회는 도망을 하려다가 결심을 하지 못하였다. 이임회에게 조서를 내려 곽분양의 절반 병력을 나누어 동쪽으로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이임회가 들어가 청하여 말하기를, “내 한 사람의 죽음을 달게 받겠으니 처자나 살려 주시오.”라고 하였다. 곽분양이 내려가 그의 손을 이끌어 당상(堂上)으로 올라 마주 앉아 말하기를, “지금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이 파천(播遷)하였는데 공이 아니면 동쪽을 정벌할 수 없소. 어찌 사사로운 분한(憤恨)을 품을 때이겠소.”라고 하고는, 군리(軍吏)를 모두 불러 모으고 조서(詔書)를 내어 읽은 후 조서와 같이 약속하였다. 작별하게 되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충의(忠義)로 권면(勸勉)하였으니 큰 도둑[안록산]을 평정한 것은 실로 두 공(公)의 힘이었다.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을 알고 그 재능이 일을 맡길 만한 것을 안 후에야 마음을 의심치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평생 동안 분한을 쌓으면 그 마음 알기가 어렵고, 분한하면 반드시 단점을 보이는 것이니 그 재능을 알기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점은 장보고와 곽분양의 어짊이 같은 것이다.
『번천문집』권6, 장보고⋅정년전
張保臯⋅鄭年傳
新羅人張保臯⋅鄭年者, 自其國來徐州, 爲軍中小將. 保臯年三十, 鄭年少十歲, 兄呼保臯. 俱善鬪戰騎而揮槍, 其本國與徐州, 無有能敵者. 年復能沒海, 履其地五十里不噎角. 其勇健, 保臯差不及年, 保臯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後保臯歸新羅, 謁其王曰, 遍中國以新羅人爲奴婢. 願得鎭淸海(新羅海路之要), 使賊不得掠人西去. 其王與萬人, 如其請. 自大和後, 海上無鬻新羅人者. 保臯旣貴於其國, 年錯寞去職飢寒, 在泗之漣水縣.
一日言於漣水戌將馮元規曰, 年欲東歸乞食於張保臯. 元規曰, 爾與保臯所挾何如.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飢寒死不如兵死快. 况死故鄕耶. 年遂去至謁保臯. 保臯飮之極歡.
飮未卒, 其國使至, 大臣殺其王, 國亂無主. 保臯遂分兵五千人與年, 持年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至其國, 誅反者立王, 以報. 王遂徵保臯爲相, 以年代保臯.
天寶末安祿山亂, 朔方節度使安思順, 以祿山從弟賜死, 詔郭汾陽代之. 後旬日復詔李臨淮, 持節分朔方半兵, 東出趙⋅魏. 當思順時, 汾陽⋅臨淮俱爲牙門都將, 將萬人不相能, 雖同盤飮食, 常睇相視不交一言. 及汾陽代思順, 臨淮欲亡去計未決. 詔至分汾陽兵東討. 臨淮入請曰, 一死固甘, 乞免妻子. 汾陽趨下持手上堂偶坐曰, 今國亂主遷, 非公不能東伐. 豈懷私忿時耶. 悉召軍吏, 出詔書讀之, 如詔約束. 及別執手泣涕, 相勉以忠義, 訖平劇盜, 實二公之力. 知其心不叛, 知其材可任, 然後心不疑兵可分. 平生積忿, 知其心難也, 忿必見短, 知其材益難也. 此保臯與汾陽之賢等耳.
『樊川文集』卷6, 張保皐⋅鄭年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