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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張保皐)

Jobs9 2021. 12. 21.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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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해상 활동

장보고(張保皐)【「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궁복(弓福)으로 되어 있다】와 정년(鄭年)【연(年)은 연(連)으로도 되어 있다.】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 그들의 고향과 아버지⋅할아버지는 알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싸움을 잘하였는데, 정년은 특히 바닷속에서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조금 뒤졌으나 정년이 장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장보고는 연령으로, 정년은 기예(技藝)로 항상 서로 맞서 서로 아래에 들지 않으려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당나라에 가서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타고 창을 쓰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이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을 뵙고 아뢰기를,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청해(淸海)에 진영(鎭營)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사람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청해는 신라 해로(海路)의 요충지로서 지금의 완도(莞島)라 부르는 곳이다. 

대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었다. 그 후 해상에서 우리나라 사람[鄕人]을 파는 자가 없었다. ……(중략)……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되어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의 자리가 비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장보고가 군사 5000명을 정년에게 주며, 정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환난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정년이 왕경에 들어가 반역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다. 왕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대신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이것은 신라의 전기(傳記)와는 자못 다르나, 두목(杜牧)이 전(傳)을 지었으므로 둘 다 남겨 둔다】.  

『삼국사기』권44, 「열전」4 장보고⋅정년

문성왕(文聖王) 8년(846) 봄에 청해진(淸海鎭)의 궁복(弓福)이, 왕이 자기의 딸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장차 그를 토벌하자니 뜻하지 않을 우환이 있을까 두렵고, 그냥 방치해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었으므로 근심하고 염려하여 어떻게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그때) 무주(武州) 사람 염장(閻長)은 용감하고 굳세기로 동시에 소문이 나 있었는데, (그가) 와서 아뢰기를 “조정에서 다행히 저의 말을 들어준다면 저는 한 명의 병졸도 수고롭게 하지 않고 맨주먹을 가지고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의 말을 따랐다. 

염장은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것처럼 꾸며 청해진에 투항했는데, 궁복은 장사(壯士)를 아꼈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불러들여 귀한 손님으로 삼고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매우 즐거워하였다. (궁복이) 술에 취하자 (염장이)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 그 무리를 불러 달래니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문성왕 8년 춘


張保臯【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郷邑父祖. 皆善闘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噎. 角其勇壯, 保臯差不及也, 年以兄呼保臯. 保臯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保臯還國, 謁大王曰,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鎮清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清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臯萬人, 此後海上無鬻郷人者. ……(中略)……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臯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誅叛者立王, 王召保臯爲相, 以年代守清海【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立傳, 故兩存之.】

『三國史記』卷44, 「列傳」4 張保皐⋅鄭年

[文聖王] 八年春, 清海弓福怨王不納女, 㩀鎮叛. 朝廷將討之則恐有不測之患, 將置之則罪不可赦, 憂慮不知所圖. 武州人閻長者, 以勇壯聞於時, 來告曰, 朝廷幸聽臣, 臣不煩一卒, 持空拳以斬弓福以獻. 王從之. 

閻長佯叛國投清海, 弓福愛壯士, 無所猜疑, 引爲上客, 與之飮極歡. 及其醉, 奪弓福劒斬訖, 召其衆說之, 伏不敢動.

『三國史記』卷11, 「新羅本紀」11 文聖王 8年 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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