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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귀족 복식 문화, 법흥왕

Jobs 9 2021. 12. 23.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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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귀족 복식 문화

신라 초의 의복 제도는 색상에 대해 살펴볼 수 없다. 제23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대에 이르러 비로소 6부(六部) 사람이 입는 복색의 높고 낮음을 제도로 정하였지만, 여전히 오랑캐의 풍속과 같았다. 진덕왕(眞德王) 재위 2년(648)에 이르러 김춘추(金春秋, 604~661)가 당(唐)나라에 들어가 당나라의 의례에 따를 것을 청하니,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이 조서로써 이를 허락하고 아울러 옷과 허리띠를 주었다. 드디어 [김춘추가] 돌아와서 시행하여 오랑캐의 [복색을] 중화(中華)의 것으로 바꾸었다. 문무왕(文武王) 4년(664)에 또한 부인의 의복을 고치니, 이 이후로는 의관이 중국과 같게 되었다. ……(중략)…… 

법흥왕 대의 제도에서 태대각간(太大角干)부터 대아찬(大阿湌)까지는 자주색 옷을 입고 아찬(阿湌)부터 급찬(級湌)까지는 다홍색 옷을 입는데, 모두 아홀(牙笏)을 쥐었다. 대나마(大奈麻)⋅나마(奈麻)는 푸른색 옷을 입고 대사(大舍)부터 선저지(先沮知)까지는 누런색 옷을 입었다. 이찬(伊湌)⋅잡찬(迊湌)은 비단관을 쓰고 파진찬(波珍湌)⋅대아찬⋅금하(衿荷)는 붉은 관을 썼다. 상당(上堂) 대나마(大奈麻)와 적위(赤位) 대사(大舍)는 갓끈을 매었다.  

흥덕왕(興德王) 즉위 9년, 태화(太和) 8년(834)에 하교(下敎)하기를, “사람은 상하가 있고 지위는 높고 낮음이 있어서 [그에 따라] 호칭이 같지 않고 의복 또한 다른 것이다. 그런데 풍속이 점차 경박해지고 백성들이 호사스러움을 다투게 되어, 단지 외래 문물의 진기함을 숭상하고 도리어 토산품의 촌스러움을 혐오하니, 예절이 자기 분수를 넘는 폐단에 자주 빠지고 풍속은 점차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감히 옛 제도에 따라 밝은 명령을 펴니, 만약 [이를] 고의로 범한다면 진실로 형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33, 「잡지」2 색복

新羅之初, 衣服之制, 不可考色. 至第二十三葉法興王, 始定六部人服色尊卑之制, 猶是夷俗. 至眞德在位二年, 金春秋入唐, 請襲唐儀, 太宗皇帝詔可之, 兼賜衣帶. 遂還來施行, 以夷易華. 文武王在位四年, 又革婦人之服, 自此已後, 衣冠同於中國. ……(中略)……

法興王制, 自太大角干至大阿湌紫衣, 阿湌至級湌緋衣, 並牙笏. 大奈麻⋅奈麻靑衣, 大舍至先沮知黃衣. 伊湌⋅迊湌錦冠, 波珍湌⋅大阿湌⋅衿荷緋冠, 上堂大奈麻⋅赤位大舍組纓.

興德王卽位九年, 太和八年, 下敎曰, “人有上下, 位有尊卑, 名例不同, 衣服亦異. 俗漸澆薄, 民競奢華, 只尙異物之珍寄, 却嫌土産之鄙野, 禮數失於逼僭, 風俗至於陵夷. 敢率舊章, 以申明命, 苟或故犯, 固有常刑”

『三國史記』卷33, 「雜志」2 色服


해설 : 색복조에 따르면 신라는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대에 이르러 비로소 복색의 높고 낮음을 제도로 정하였다고 한다. 제1 관등인 태대각간(太大角干)에서 제5 관등인 대아찬(大阿湌), 그리고 제6 관등인 아찬(阿湌)에서 제9 관등인 급찬(級湌), 제10⋅11 관등인 대나마(大奈麻)와 나마(奈麻), 제12 관등인 대사(大舍)에서 제17 관등인 선저지(先沮知) 등 크게 4개 등급으로 나누어 각각 자주색-다홍색-푸른색-누런색 순으로 옷의 색깔을 달리하였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관등의 서열에 따라 머리에 쓰는 관(冠)에도 차이가 있고 아홀(牙笏)의 유무도 결정되었다. 법흥왕 대에 제정된 이와 같은 복식 제도를 색복조에서 “오랑캐의 풍속과 같았다.”고 한 것은 12세기 전반에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이들이 갖고 있던 인식이 이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랑캐의 풍속’은 바꾸어 말하면 신라 고유의 습속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법흥왕 대에 처음으로 제정된 의복 제도는 648년(진덕왕 2)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김춘추(金春秋, 604~661)가 당나라의 의복 제도를 도입하면서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삼국사기』 색복조에서 “문무왕(文武王) 4년(664)에 또한 부인의 의복을 고쳤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덕왕(眞德王, 재위 647~654) 대에는 관료의 의복이나 남성의 의복에만 한정하여 당나라의 양식으로 바꾸었고, 664년 여성의 의복까지 당나라의 양식으로 바꾼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이후로는 의관이 중국과 같게 되었다.”라고 한 것은 『삼국사기』를 편찬한 이들이 판단하기에 오랑캐의 풍속과 다를 바 없었던 신라의 의복이 664년을 전후해 완전하게 당나라의 의복 제도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실제 1986년에 발굴된 경주 용강동 고분(사적 제328호)에서는 당나라의 의복과 유사한 복식을 한 토우가 출토된 바 있는데, 함께 수습된 토기 등으로 보아 이 고분은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통일 이후 신라의 왕릉급 고분에 있는 석인상(石人像)의 복식에서도 당나라 복식의 요소가 확인된다. 이는 7세기 중반을 전후해 양식이 바뀐 신라 의복 제도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해 신라의 의복 제도를 바꾸면서 신라 사회에는 외래 문화를 동경하는 풍조가 생겨났던 것으로 보인다.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이 757년 무렵 중앙의 관부와 관직의 명칭, 나아가 지명 등을 중국식으로 개명한 것도 크게 보면 외래 문화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외래 문화를 숭상하는 대신 신라 고유의 문화를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는데, 834년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이 내린 교지[下敎]에서 “풍속이 점차 경박해지고 백성들이 호사스러움을 다투게 되어, 단지 외래 문물의 진기함을 숭상하고 도리어 토산품의 촌스러움을 혐오하니, 예절이 자기 분수를 넘는 폐단에 자주 빠졌다”고 한 구절에는 외래 문화를 동경하고 호화스러움을 지향하였던 당대의 상황이 그대로 담겨 있다. 

더욱이 경제적 부를 축적한 진골 귀족은 더욱 호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진골 귀족이 아니더라도 경제력을 가진 이들은 외래 문물로 자신들을 치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흥덕왕의 하교에서 “예절이 자기 분수를 넘는 폐단에 자주 빠졌다”고 한 것은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원래는 신분이나 지위 고하에 따라 복식에 차이가 있었는데, 무분별한 외래 문물의 수입 등으로 인해 적어도 흥덕왕 대인 9세기 전반에 와서는 이러한 전통이 붕괴되었던 것이다. 이에 흥덕왕은 “감히 옛 제도에 따라 밝은 명령을 펴겠다”고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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