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기 6두품 동향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서학(西學)하여 얻은 바가 많아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고 하였으나 (왕조의) 말기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고, 대산군 태수(大山郡太守)로 나갔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2년(진성여왕 7, 893)에 납정절사(納旌節使) 병부시랑(兵部侍郎)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서 익사하자, 곧 추성군(橻城郡) 태수 김준(金峻)을 고주사(告奏使)로 삼았다. 이때 최치원은 부성군(富城郡) 태수로 있었는데, 마침 불러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그러나 해마다 흉년이 들어 기근에 시달렸고, 그로 말미암아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그 후에 최치원이 또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으나 언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중략)…… 최치원이 서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