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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Humanities/동양사 Asian History 106

세키가하라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리, 이시다 미쓰나리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 3대 전투의 하나로, 일본이 중세에서 근대로 도약하는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 역사가 시바 료타로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규모나 영향력이 워털루 전쟁 못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전쟁의 승패가 일본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봉건제가 엄격하게 정착됨으로써 일본사의 특수성이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 세키가하라 전투는 단노우라壇浦 전투, 도바鳥羽·후시미伏見의 전투와 함께 일본 3대 전투로 불리는 대전투이다. 서기 1600년 일본 중부의 세키가하라 벌판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최대 실력자로 떠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옹립한 이시다 미쓰나리가 각각 동군 8만, 서군 10만을 이끌고 격돌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일본의 중세와 근세를..

삼국지 인물, 관계

촉나라 인물 1. 유비 현덕(劉備 玄德 161~223) ●출신지 : 탁군 탁현 ●직위 : 안희현위 - 좌장군 - 한중왕 - 황제 ●영웅성 : ★★★★★ 촉한의 초대 황제. 자는 현덕(玄德). 전한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의 후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신발과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이었으나, 15세 때 노식에게 사사하여 동문 공손찬과 교의를 맺고 호혐들과 교유하는 한편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도당을 모아 그 토벌에 참가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그 후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와의 대전에서 공을 세웠다. 196년, 원술로부터의 공격을 물리치고 진동장군 의성정후에 임명되어 조조에게 의탁하고 있었으나, 조조 살해 계획에 참가했다가 이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자 하비로 탈주..

임팔 전투, 제2차 세계대전, 버마 인도 국경, 무타구치 렌야

임팔 전투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3월 15일 부터 7월 1일까지 버마와 인도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전투. 명칭은 국경선 인도 측의 도시 임팔에서 유래했다. 보통 일본군의 작전 명칭 작명은 대부분 카타카나 글자만 하나 붙여서 ○호 작전이라고 한다. 따라서 일본군에서 붙인 작전명은 '우호 작전(ウ号作戦)'이고 Battle of Imphal의 번역상 '임팔 전투'로 기재하는 게 정상이지만 한국에서는 이 둘을 섞어 '임팔 작전'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본 작전의 주목표는 임팔이었고, 코히마는 임팔 점령을 지원하기 위한 조공에 가까워서 임팔 전투라 부른 경우가 많지만, 코히마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에 주목해 '임팔-코히마 전투'라고 부르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작전자체는 오랫동안..

버마 로드(Burma Road), 중일전쟁, 장제스, 루즈벨트

2차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중국 윈난성 쿤밍에 이르는 기나긴 수송로였던 버마로드는 그 길이가 장장 717 마일(11.54km)에 이르는 험난하고 위험한 길이었다. 중국 본토를 침공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장제스의 중국 국민군을 위하여 미국 루우즈벨트 대통령은 인도양을 통하여 버마로 하역된 미국의 군수물자를 지원하게 된다. 1937년과 1938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일본군은 영국령 버마를 침공하기 위하여 중국인 인부 20만명을 동원하여 이길을 닦았다. 일본군은 전쟁물자를 실어나를 랭구운(지금의 양곤)과 리사오를 잇는 철로가 버마에서 인도를 향한 전략적 분깃점으로 보았던 것이었다. 이후 일본은 1942년 버마를 침공한다. 연합군은 처음에는 일본군에 맞써 싸우는 중국 장제스 국..

일본, 네덜란드, 포르투갈, 데지마(出島, でじま、Dejima), 선교, 전도(傳道)

데지마(일본어: 出島, でじま、Dejima)란 1636년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 일환으로 나가사키에 건설한 인공섬이다. 부채꼴 모양 섬으로, 전체 넓이는 약 1.3ha정도다. 1641년에서 1859년 사이 대 네덜란드 무역은 오직 이곳에서만 독점적으로 허용되었으며, 쇄국일본 시기 서양과 교류라는 숨통을 터놓았던 상징적인 장소다. 당시 일본은 1년에 한 번 쇼군에게 국제 흐름을 설명한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서양을 이해했다.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만 교류를 허락한 이유는 네덜란드 상인들 관심사는 일본과 무역으로 이익을 남기는 것이지, 전도(傳道)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조총을 전해 준 포르투갈은 막부 정권의 골치 거리였다. 기독교 금지령을 수차례 발동했음에도 선교에 나서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나..

조선과 일본의 근대화 차이, 메이지 유신, 지리적 여건

메이지 유신/조선과 일본의 차이점 일본은 분명한 명분, 방향성(화혼양재, 급진 개혁), 추진력을 지니고 개혁을 시도한 반면, 조선은 꽉 막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뒤늦게 크게 당하고서야 불리한 조건으로 개항을 시도한 것이 두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고 보는 인식이 적지 않다. 물론,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단순히 개방 시기의 차이만으로 분석하려는 것은 무리이고, 다수의 요인들이 수백 년간 누적된 결과의 영향도 컸다. 조선보다 남서방향으로 돌출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서구 세력과의 접촉이 조선보다 훨씬 빨랐으며, 따라서 서구 문물에 대한 이해도도 당대의 조선과 비교하면 월등하게 높은 상태였다. 당시 막부의 사실상 수도였던 에도는 막부의 정책으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인구가 100만에 육박하는 당시 세계에서 ..

사카모토 료마, 막부 타도, 메이지 유신

사카모토 료마 도사번 고시(鄕士) 계급 출신으로, 일본의 무사(武士) 겸 사업가이다. 료마는 탈번하여 지사(志士)로서 활동하면서 무역회사와 정치조직을 겸한 가메야마 조합을 세웠고, 이 회사는 훗날 개칭해 가이엔타이가 되었다. 그리고 삿초 동맹의 알선, 대정봉환의 성립 등을 위해 노력하여 에도 막부 타도 및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주었다. 대정봉환 1개월 후, 교토의 여관 오미야에서 료마는 암살당했다. 이러한 업적을 남긴 료마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이후, 지명도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에도 막부 말기의 풍운아로서 일본 국민의 인기를 얻었다. 쇄국과 개화의 갈림길에서 과감한 결단으로 역사를 개척한 료마의 드라마틱한 모습은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사카모토 료..

중국 근현대사(中國近現代史)

중국 근현대사(中國近現代史) ◐ 가.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성립 중국은 청·일 전쟁과 의화단 운동으로 열강에게 굴욕을 당한데다 변법 자강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청조 타도와 민주공화정을 실현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혁명운동은 처음에는 통일성이 없었으나, 손문이 홍중회 등 여러 혁명 단체를 규합하여 중국혁명 동맹회(1905)를 결성하였다. 중국 혁명 동맹회는 ① 오랑캐를 구축하여 중화를 회복한다(민족주의), ② 민국을 창립한다(민권주의), ③ 토지 소유권을 균등히 한다(민생주의)라는 이른바 삼민주의를 강령으로 하면서 혁명운동을 조직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그러자 청조는 입헌정치의 실시를 선언하였고(1906)입헌파의 국회개설 제원운동에 책임내각을 조직하여 대응했다.(1911년) 그러나 이 책임내각은 황족 내..

왕의 여인들과 간통 했던 궁정 내시

왕의 여인들과 간통 했던 궁정 내시 조선 왕조에서 내관들의 섹스 스캔들은 임금의 골치를 아프게 한 사건들 중 하나였다. 어떤 내시는 왕의 여자와, 어떤 내시는 기생들과, 어떤 내시는 왕의 첩실과 사랑에 빠져 도덕국가였던 조선의 건국 명분에 생채기를 냈던 것이다. 재밌는 것은 조선 왕조 실록에 이러한 내관들의 섹스 스캔들이 가감없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왜 내관들은 왕의 여자들을 탐냈던 것일까. 어쩌면 모든 욕정을 억압 받아야 했던 내관들의 잘못된 욕망이 스캔들로까지 번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여기, 왕의 여자와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눈 내시들도 있다. 왕의 여자를 탐낸 내시와 왕의 남자를 사랑한 여자들. 그들의 숨겨진 비사 속으로 들어가보자. ◐ 1. 태조 2년 6월 14일, 태조가 청천벽력 같은..

일본사 - 야요이 시대

일본사 - 야요이 시대 3. 야요이 문화 1) 한반도에서 전래된 문화 야요이 문화는 BC 3세기에서 AD 3세기에 걸쳐 존속한 문화로 야요이라는 명칭은 1884년 도쿄 분쿄구 야요이에서 발견된 토기를 그 지명을 따 야요이 토기라 칭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야요이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농경이 시작되고 청동기나 철기 등의 금속기를 사용하게 된 것인데,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고고학적 증거들 때문이다. 첫째, 일본 열도에서 최초로 토지를 갈고 물을 대서 쌀을 재배하는 수전도작(水田稻作)이 시작된 곳은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북부 규슈였다. 둘째, 농경과 관련되어 만들어진 도구들, 예를 들면 목제 농구를 만들기 위한 돌 도끼나 벼 이삭을 따기 위한 돌칼은 ..

신토, 神道, 신도, 일본 종교, 카미(神)

신토는 고대 일본에서 기원하는 종교이다. 일본어에서 종교명은 대체로 ~~교 형태이지만 신도는 신교라 하지 않고 신도라 부른다. 전통적 민속신앙, 자연신앙, 조상신앙등에 기반해 호족층 뿐 아니라 중앙 지방 상하고하를 막론하고 서서히 성립되어왔다. 또 일본의 국가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신도에는 교조, 창시자가 없다, 기독교의 성경, 이슬람교의 꾸란에 해당하는 공식적인 경전도 없다. 고사기, 일본서기, 고어습유(古語拾遺), 선대구사본기, 선명(宣命)등의 신성한 책[神典]으로 불리는 고전들이 신도의 경전으로 간주된다. 삼라만상에 가미가 머문다 생각하며 조상을 신격화하고 천진신과 국진신 등을 기리는 마쓰리나 제사(祭祀)를 중시한다. 정명정직(浄明正直, 밝게 깨끗하게 바르게 곧게)을 덕목으로 한다. 다른 종교에 비..

근대 일본 난학, 해체신서, 에도시대 난학(蘭學), 네덜란드, Holland, 오란다[和蘭]

에도시대의 난학 1543년에 표류한 포르투갈 선박이 일본의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도착했고, 이를 계기로 히라도에서 일본과의 통상이 시작되었다. 이때 일본에 전해진 서양식 총포(조총 )기술은 전국 시대의 일본을 통일시켰고,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의 배경이 되었다. 1549년에 스페인의 예수회 선교사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方濟各)가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하여 크리스트교 포교를 시작했는데, 이때 일본인들은 크리스트교를 ‘남만교(南蠻敎)’라 불렀다. 활발한 포교 활동은 전개하여 크리스트교의 교세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서일본 제국의 다이묘[大名]들이 크리스트교를 묵인했고, 오랜 전란을 겪었던 백성들이 크리스트교의 박애정신과 평등사상에서 위로를 받고 구원의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

십이지, 십간, 육십갑자

간지(干支) = 지간(支干) 간지(干支)는 천간(天干)과 지지(地支).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 또는 간(干)과 지(支)를 조합한 것이다. 천간(天干) = 십간(十干) = 십천간 = 십신장(十神將)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 육십갑자의 위 단위를 이루는 요소이다. ​ 지지(地支) = 십이지(十二支) = 십이지지 = 십이지신(十二地神)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 육십갑자(六十甲子)= 육십간지 = 육갑 천간의 10가지와 지지의 12가지를 순차로 배합하여 예순 가지로 늘어놓은 것. 갑자(甲子)년 → 을축(乙丑)년… → 갑술(..

와카슈도, 중도, 若衆道, 일본 남색, 코쇼(小姓), 미동

와카슈도, 若衆道 약칭은 衆道로 슈도(しゅうどう)라고 읽는다. 일본에서 남성 동성애의 한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헤이안 시대에 공가나 스님의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 점차 시대가 지나면서 전국 시대 무렵에는 무가에서도 당연시되었고, 이 즈음해서 높으신 분의 취미에서 일반인들도 즐길 정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남색 풍습은 에도 시대에도 성행하며 당대의 일본 문학작품에서도 남색을 다룬 소설이나 그림들이 적지 않게 나오며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에도 중도를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여럿 존재하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성관념이 서구화되고 남색 풍습이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사라졌다. 다만 현대에도 그 영향이 아주 없는것은 아니라서 보이즈 러브나 오토코노코 등으로 간접적으로 슈도의 향기를 느낄 수는 있다. 전국시대에는..

아랍, 수니파, 이란, 시아파, 아수니 이시아

이슬람교를 따르는 무슬림은 크게 두개의 종파, 수니파(Sunni)와 시아파(Shia)로 나뉜다. 오늘날 전 세계 약 18 억 무슬림 중 약 85%가 수니파고 15%는 시아파다. 시아파는 이란, 이라크, 바레인, 아제르바이잔 등의 이슬람 국가에서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수니파는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40 개 이상의 국가에서 대다수를 차지한다. 종파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수니파와 시아파는 1400년에 이르는 오랜 역사 동안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함께 살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는 중동 여러 국가와 종교 세력들이 종교적,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며 수니파와 시아파 간 분열이 심화되었고, 서구(미국)의 개입에 지역의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며 이 분열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걸쳐..

인도 불교 쇠퇴, 이슬람의 침략

이슬람 세력의 성장과 인도 침입 이슬람의 발생과 성장 이슬람의 교주 모하메드(Mohammed, 570∼632)는 AD. 570년 메카(Mecca)에서 쓰러져 가는 명문가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메카는 아라비아의 가장 중요한 도시였으나 사막 지방의 미신과 우상 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모하메드라는 이름은 ‘높이 존경받다’라는 뜻으로 남자의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여졌던 이름이었다. 그의 생의 비극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 압둘라(Abdullah)는 그의 탄생 며칠 전에 죽었다. 그가 여섯 살 때 어머니 아미나(Amina)도 잃었다. 그리하여 그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나 아홉 살 때 그 할아버지마저 죽자 삼촌 아부 탈립(Abu Talib) 밑에서 자라며 그가 속한 코레이쉬(Koreish) 부족들과..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 751년, 이슬람, 당, 고선지, 실크로드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는 751년 7월 ~ 8월 사이에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 장군이 지휘하는 당나라군과 동맹군 카를루크가 압바스 왕조, 티베트 연합군을 상대로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영토인 탈라스 강 유역에서 압바스 왕조의 동쪽 진출을 막으려 하였다. 배경 아바스 왕조는 세력이 강해지고 710년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 진출하였다.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위구르 샤틀리에, 카를룩 등의 유목민은 당나라 영토를 계속하여 진출 정복하였고 당나라는 신강지역에의 안서도호부에서 방어하려고 하였다. 750년,압바스 왕조의 군대는 계속 동진하고 있었고 고선지(高仙芝)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소그디아나를 압박한다. 소그디아나 왕은 당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압바스 왕조에 도움을 요청했고 747년 우마이야 ..

차가타이 한국, 티무르 제국

차가타이 한국의 성립과 분열 차카타이 한국의 성립 몽골제국의 칭기즈칸은 AD 13세기 초에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샤왕조를 무너뜨리고 이곳을 차남인 차가타이의 영지로 부여하였다. 차가타이의 이름을 따서 차가타이 한국으로 불리게 되는 이 영지는 일리강에서 시르다리아강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며 차가타이 자신은 일리 계곡의 알말리크의 막사에서 기거하면서 도시생활을 멀리하고 유목민의 풍습을 지켰다. AD 1242년 차가타이는 임종이 다가오자 이미 호라즘 샤왕조와의 전투 중에 전사했던 아들 모에투겐을 대신하여 모에투겐의 4남이었던 카라 훌레구를 차기 칸으로 지명하였다. 하지만 차가타이 한국은 독립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몽골제국 대칸에 의해 칸의 지위가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카라 훌레구는 몽골제국의 제3대 대칸 구유크에..

훌레구의 이슬람 정벌, 일한국의 건국과 몽골제국의 분열

이슬람 세계 정벌 훌레구의 이슬람 정벌군 출정 AD 1251년 차가타이 가문과 우구데이 가문을 누르고 대칸의 지위에 오른 몽케 칸은 이후 몽골제국을 다시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대상은 정벌이 진행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의 서아시아 지역이었다. 이슬람 지역에 대해서는 이미 AD 1243년 장군 바이주에 의해 룸 술탄국을 무너뜨리고 아나톨리아 반도를 점령한 바 있었다. 몽케 칸의 명령에 의해 몽골전체에서 싸울 수 있는 남자 중 10분의 1을 모집하여 총 13만명이라는 몽골제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정벌군이 조직되었고, 지휘관으로는 바이주로부터 군대를 인계받아 투르키스탄 지방을 공략하고 있었던 훌라구가 임명되었다. 훌라구는 칭기즈칸의 4남인 톨루이의 아들로 몽케 칸과는 형제지간이었다. 다른 형제로는 몽케 칸 사후에 ..

우구데이 칸, 킵차크한국 바투 칸의 유럽원정

제2대 우구데이 칸의 즉위 칭기즈칸 사후 몽골제국의 제2대 대칸의 자리는 칭기즈칸의 3남인 우구데이(혹은 오고타이)의 차지가 되었다. 본래 칭기즈칸의 장자는 주치였으나 어머니 보르테가 메르키트 부족에게 납치당했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임신했기 때문에 주치는 태어날 때부터 혈통을 의심받았다. 비록 칭기즈칸이 자신의 아들로 선언하였으나 칭기즈칸이 직접 지어준 주치란 이름의 뜻은 '손님'이었다고 한다. 칭기즈칸이 대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후 제국을 여러 아들과 친족들에게 분배하고 후계자를 정했는데, 이때 칭기즈칸이 주치를 장자로서 우대하여 먼저 발언할 기회를 주었으나 차남인 차가타이가 주치의 의심스런 혈통을 거론하면서 주먹다짐까지 벌인 일이 있었다. 자신의 사후 아들끼리 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칭기즈칸은..

몽골제국, 칭기즈칸 정복전쟁

몽골족과 초원 통일 AD 12세기경 중국의 북쪽에 위치한 초원 지대에 살던 몽골족은 서쪽의 나이만 부족, 북쪽의 메르키트 부족, 남쪽의 탕구트족(서하), 동쪽의 타타르족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이들은 서로 침략과 약탈, 이에 대한 복수를 거듭하고 있었고 중국왕조의 계략에 따라 동맹과 분쟁을 반복하였다. 몽골족 부족 중 하나였던 보르지긴 씨족의 족장 예수게이가 메르키트 부족의 후엘룬을 납치하여 후처로 삼았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테무진이었다. 테무진은 9살 때 예수게이가 불화관계에 있던 타타르족에게 독살당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부족민들에게 버림받아 극심한 가난을 경험해야 했다. 테무진은 15살이 되어 아버지 예수게이 살아생전에 정혼을 맺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메르키트 부족이 보르테를..

테베의 패권, 레욱트라 전투, 스파르타 붕괴, 에파미논다스

테베의 패권 테베는 그리스 중부의 보이오티아 평원의 남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미케네 문명 시절부터 존재한 유서깊은 곳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페니키아의 왕인 아게노르의 딸 에우로페가 황소로 변한 제우스의 등을 타고 로도스 섬으로 끌려가자 그 오빠인 카드모스가 동생을 찾아 헤메게 되었다. 카드모스는 도중에 아폴론을 만나 동생 찾는 일을 중단하고 도중에 만난 암소를 뒤쫓아 가서 암소가 눕는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라는 말을 들었고 진짜로 암소를 만나자 아폴론의 말 대로 암소가 눕는 곳에 건설한 도시가 바로 테베이다. 또한 테베는 오이디푸스의 전설로도 유명하다. 이렇듯이 테베는 유서깊은 도시로서 BC 6세기경 그리스 중부의 폴리스 간의 동맹인 보이오티아 동맹의 맹주로서 군림하게 되지만 크세르크세스 1세가 ..

이란, 페르시아

이란은 고대국가 시기부터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를 연결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어 많은 침략을 받아왔고, 그 과정에서 침략국가의 민족들과 섞여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이란의 민족구성을 보면 페르시아 족(51%), 아제르바이잔 족(24%), 길락-마잔다란 족(8%), 쿠르드 족(7%), 아랍 족(3%), 루르 족(2%), 발루치 족(2%), 투르크 족(2%), 기타(1%)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란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페르시아 족(Persian)은 이란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지만 주로 내륙지역인 테헤란, 이스파한, 야즈드, 파르스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이들 지역은 유럽의 아리안 족(Arian)이 기원전 10세기 경 동일 민족으로 분류되는 메디아인과 함께 이란 고원에 이주해 ..

중국 민족, 56개 민족, 한족, 좡족, 후이족, 몽골족, 다우르족, 에벤크인, 허저족, 만주족, 시버족, 조선족, 먀오족, 위구르족, 티베트인

중국은 한족이 대다수인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이다. 인구를 92%(정확히는 91.6%)를 차지하는 한족을 비롯해 현 중앙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55개의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은 1949년 수립 이래로 한족과 소수 민족을 따로 구분하여 인구 조사를 한다. 소수 민족들은 한족 주거 지역의 변방에 흩어져 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소수 민족들이 다른 나라에 병합되거나 독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수천 년 전부터 국경 지역, 특히 소수 민족들이 거주하는 변방에 한족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러나 한족 이주 정책은 해당 지역 소수 민족과의 끊임없는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족 외에도 좡족, 후이족, 몽골족, 다우르족, 에벤크인, 허저족, 만주족, 시버족, 조선족,..

페르시아 제국-아시리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박트리아와 파르티아, 사산 왕조 페르시아

아시리아 ▶ 우수한 철제 무기와 기병 보유, 기원전 7세기경 서아시아를 최초로 통일 이민족에 대한 강압적 통치로 1세기만에 멸망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1. 성립 ▶ 이란 고원에서 성장, 키루스 2세 때 서아시아 통일의 토대를 닦음 2. 전성기 ▶ 다리우스 1세(이집트와 마케도니아, 인도 서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 지배) 중앙 집권 정책 전국을 20개의 속주로 나누어 총독 파견 '왕의 눈', '왕의 귀'라고 불리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총독 감시 교통 제도 '왕의 길(사르데스 ~ 수사)'과 역참제 정비 → 상업과 교류 활발 사회 언어·도량형·화폐 통일 → 지역 간 교류 활발 3. 이민족에 대한 관용(포용) 정책 ▶ 세금과 병역 의무를 이행하면 그들의 종교와 풍습, 언어 존중 → 페르시아가 약 200년간 ..

대장정, 대서천, 마오쩌둥, 상강전투, 쭌이회의, 루띵교, 대설산, 태자당

개요 중국 장시성에 주둔해 있던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군의 토벌을 피해 1만 킬로미터를 이동한 대행군. 서쪽으로 천도한다는 의미에서 ‘대서천(大西遷)’이라고도 불린다. 출발 당시 8만 6천여 명에 달하던 홍군 병사들이 대장정을 마칠 즈음에는 6천여 명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대장정의 과정 중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다. 하지만 장정이 있었기에 공산당은 중국의 많은 지역에 홍군과 공산당의 이름을 알릴 수가 있었고, 마오쩌둥은 공산당에 대한 지휘권을 확립할 수가 있었다. 군사학적으로만 본다면 많은 병사들이 처참히 죽어간 실패한 후퇴 작전이지만, 대장정은 혁명을 위한 공산당 병사들의 의지와 열정, 인간승리의 극치를 보여준 대서사시이자, 중국이 혁명을 성공할 수 있게 한 발판이었다. 대장정 배경 대장정 이전의 상황 ..

하나의 중국, 一個中國, One-China policy, 양안문제(兩岸問題), 중국, 대만, 홍콩, 마카오

하나의 중국(一個中國, One-China policy) 원칙은 중국 대륙과 홍콩, 마카오, 타이완은 나뉠 수 없는 하나이고 따라서 합법적인 중국의 정부는 오직 하나라는 원칙 또는 이데올로기이다. 이 원칙은 중국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타이완의 중화민국 간의 정통성 문제를 포괄하는 양안문제(兩岸問題)에서 주로 거론되는 개념이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은 두 개의 중국이다. 양안(兩岸)이란 자연적인 군사분계선의 역할을 하게 된 타이완 해협을 두고 서안(대륙)과 동안(타이완)으로 마주보는 관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두 국가가 된 양자의 관계는 '두 국가의 외교'가 아닌 '특수한 상태의 관계'이므로, 남북 관계와 유사한 개념으로 양안 관계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 중국 대륙이 지지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국=중..

토요토미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사카 성, 대망, 토요토미 히데요시 아들

히데요시는 53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늦둥이 아들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3살 때 병으로 요절하자 크게 상심했고, 다시는 자식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피를 이은 후계자를 거의 포기하던 차였다. 57세라는 더 늦은 나이에 정말 간신히 얻은 히데요리는 얼마나 귀한 아들이었고 오래 살기를 바랐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히데요시가 죽은 후 후계자가 되었지만,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자 21살의 젊은 나이로 어머니 요도도노와 함께 자결했다. 대하소설 '대망' 히데요시가 죽고 그 아들 히데요리가 권력을 이어받아 가문과 오사카성을 지휘하고 있을 당시의 이야기다.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3년 축성을 시작하였고 히데요시 정권의 본성으로 일본 권력의 중심에 있다가 도쿠가와막부로부터 멸..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 무진전쟁(戊辰戰爭)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년 왕정복고 선포와 무진전쟁(戊辰戰爭) 발발 대정봉환(大政奉還)은 경응(慶應) 3년 10월 14일(1867년 11월 9일) 에도 막부(江戶幕府) 마지막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명치천황(明治天皇)에게 통치권 반납을 선언한 사건으로, 이는 260여 년간 이어져온 에도 막부의 종언을 의미하기도 한다. 제 2차 조슈 정벌 이후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이미 일본을 통치할 권세를 잃었으며, 이로 인해 유신파(維新派) 대부분의 인사는 일본의 정치구조를 기초부터 다시 건설하지 않을 시 일개 분열된 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전망하였다. 도사 번(土佐藩)의 유신인사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는 적극적으로 대정봉환론을 제창하였는데 그 내용은 막부가 정권을 조정에..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두견새(時鳥)

일본 전국시대 통일 세 명의 무장 (새가) 울지 않으면(鳴かぬなら) 오다 노부나가 - 죽여버려라(殺してしまえ) 도요토미 히데요시 - 울게 만들어 보이겠다(鳴かしてみしょう) 도쿠가와 이에야스 - 울 때까지 기다리자(鳴くまで待とう) 두견새(時鳥)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 織田 信長는 센고쿠 시대를 평정한 인물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연 다이묘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더불어 중세 일본 삼영걸로 불린다. 오와리국의 센고쿠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의 장남으로, 아버지 대부터의 숙적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격파하고 정이대장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해 교토를 수중에 넣고, 그마저 추방해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면서 중부 일본 일대를 기반으로 중세 일본 봉건제의 정점에 섰다. 일본 각지역의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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