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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여인들과 간통 했던 궁정 내시

Jobs9 2022. 1. 23.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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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여인들과 간통 했던 궁정 내시

 

 

 
조선 왕조에서 내관들의 섹스 스캔들은 임금의 골치를 아프게 한 사건들 중 하나였다.
어떤 내시는 왕의 여자와, 어떤 내시는 기생들과, 어떤 내시는 왕의 첩실과 사랑에 빠져 도덕국가였던 조선의 건국 명분에 생채기를 냈던 것이다.

재밌는 것은 조선 왕조 실록에 이러한 내관들의 섹스 스캔들이 가감없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왜 내관들은 왕의 여자들을 탐냈던 것일까. 어쩌면 모든 욕정을 억압 받아야 했던 내관들의 잘못된 욕망이 스캔들로까지 번진 것은 아닐까. 

그리고 여기, 왕의 여자와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눈 내시들도 있다. 왕의 여자를 탐낸 내시와 왕의 남자를 사랑한 여자들. 그들의 숨겨진 비사 속으로 들어가보자.

 


◐ 1.  

 

태조 2년 6월 14일, 태조가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내린다. 의안대군 방석의 부인인 세자빈 현빈 유씨를 폐하고 궐 밖으로 내쫓는다는 이야기가 들려 온 것이다. 여기에 덧 붙여 내시 이만을 사형에 처한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려왔다.
 
때 아닌 세자빈 폐출 소식에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임금이 며느리를 폐출 한다는 것은 후계 구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조정 대신들은 태조에게 세자빈의 폐출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캐물었으나 태조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오히려 세자빈 폐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대간들을 모두 옥에 가두었다가 벼슬을 뺏고 귀양을 보내는 알 수 없는 일까지 벌어질 뿐 이었다.
 
태조의 굳게 다문 입 때문에 세자빈 유씨가 왜 폐출되었는지, 내시 이만이 왜 죽임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세자빈 유씨와 내시 이만이 동시에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것으로 볼 때, 세자빈과 내시 사이의 간통 사건이 개입된 것이 유력해 보인다.
 
당시 내관들 중에는 제대로 거세가 되지 않아 시간이 흘러 남성성이 회복되는 사람도 있었는데 11살 어린 남편만을 바라보던 세자빈 유씨가 남성성이 회복 된 이만과 정을 통했다는 것이다.
 
조숙했던 세자빈으로서는 제대로 된 성생활이 불가능한 어린 지아비가 원망스러웠을테고 자연히 무르익은 내관에게 손을 뻗을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체통이고 뭐고 남녀간의 정보다 중한 것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 된 세자빈과 내관의 간통 관계는 눈이 많은 궁궐에서 용납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이 사실을 안 태조는 격분했고 그 자리에서 이만의 목을 베고 세자빈을 사가에 내치는 대처분을 내리게 된 것이다.

다만 당시 조선은 세워진지 채 3년도 되지 않은 신생국가였다. 태조는 세자빈의 섹스스캔들 때문에 나라의 명분과 근간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았고 세자빈 폐출에 대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해 뒷조사 하려는 대간들을 모두 탄핵함으로써 이를 철저히 봉인했던 것이다.
 
이로써 세자빈 폐출 사건은 태조와 왕실 일가의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만이 제대로 된 진상을 아는 '미해결 사건' 으로 역사의 이면에 남게 된다.

 

세자빈 유씨의 섹스 스캔들이 역사의 이면에 묻힌 뒤 조선은 역사의 격랑에 휩싸이며 대변혁의 기회를 맞았다.

 
 
 
◐ 2.
 
태조가 물러나고 정종이 즉위하고, 다시 승계의 방식으로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이방원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이방원의 시대, 태종의 시대가 전개된 것이다.
 
강력한 절대 군주였던 이방원은 피의 숙청을 시작하며 왕권을 급속도로 안정시켰다. 피와 살육은 태종 특유의 정치 형태였고 공포 정치라고 할만큼 냉엄하고 엄숙한 측면이 있었다.
 
태종만큼 조선 왕조에서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며 군사, 사회, 정치 등 조선 왕조 전 분야에 걸친 사회 시스템을 좌지우지한 임금도 드물다.
 
그런데 이토록 엄격한 시대였던 태종 17년 8월 8일, 천인공노 할 일이 벌어진다. 바로 내관 정사징의 간통사건이었다.

정사징은 고려 시대부터 내관으로 일해 왔던 사람인데 정사징을 둘러싸고 들려오는 소문은 대단히 요상한 것이었다. 내관은 내관인데 수염이 자라는데다가 남성성을 전혀 잃지 않은 듯 하다는 소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소문은 제대로 맞아 떨어졌다. 실제로 정사징은 기녀 기매와 성관계를 가지며 간통을 했는데 문제는 정사징이 간통했던 기녀 기매가 태종의 형인 정종의 첩이라는 사실이었다.
 
기매는 정종이 왕 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와 오랜 시간 정을 나눈 사이였는데 어쩌다보니 정종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어 불노라는 아이까지 낳은 몸이었다.
 
정종의 아들을 낳은 기매는 후궁이 될 꿈에 부풀어 있었으나 심각하게 돌아가는 정치적 풍랑 속에서 정종은 기매에게 이별을 통보했을 뿐 아니라 불노 역시 제 자식이 아니라며 부정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정종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기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고 복수심에 탄 기매는 내관 정사징과의 간통사건을 통해 조선왕조의 도덕성에 일대 타격을 주기에 이른 것이다.

남성성이 거세 되지 않은 내관이 버젓이 활동했다는 것도 격분할 노릇이건만, 정을 통한 여자가 형의 첩이라는 사실에 자지러진 태종은 정사징 사건을 일대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시켜 정사징을 엄벌에 처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이 과정에서 정사징이 태조의 네 번째 아들인 방간의 첩과도 간통을 한 것이 밝혀지면서 정사징과 관련 된 왕실 사람들이 모두 망신을 당했고 태종은 이 섹스 스캔들을 일대 사건으로 간주하여 관련자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왕권 강화의 구실을 삼기에 이른다.
 
섹스 스캔들을 쉬쉬했던 아버지 태조나 아들 세종에 비해 태조의 대처법은 상당히 저돌적이고 적극적인 측면이 있었다.
 
어찌되었건 이 사건을 통해 정사징은 대처분을 받게 되고, 한 때 기매와 사랑을 나눴던 정종은 큰 구설에 오르게 되었으니 태종으로선 타격 받은 정권의 도덕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극복한 셈이다.


 
◐ 3.

왕의 여자는 아니지만 이런 류의 내시들의 섹스 스캔들은 비일비재했다. 세종 1년 9월에는 내관 임승부가 임금과 대신들이 연회를 펼치는 자리에서 술김에 평소 정을 통하고 있던 기생 봉소련과 성관계를 갖는 파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세종 뿐 아니라 대신들이 모두 뒤집어 질 사건이었다. 내관이 남성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도 놀랍지만 임금과 대신 들 앞에서 노골적인 성관계를 가진 일도 전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신들은 당연히 내관 임승부의 처형을 주청했지만 평소 섹스 스캔들에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세종은 참형을 감해 임승부를 관청 노비로 보내고, 기생 봉소련은 공주 관청으로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졌다.

 

 
 
◐ 4.

연산군 시절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내관 김세필이라는 자는 제대로 음신이 거세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관 생활을 지속해 연산군의 진노를 샀다.
 
그러나 김세필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김세필 사건이 벌어 진 이틀 뒤에 내관 스캔들이 또 다시 대대적으로 터졌기 때문이다.
 
내관 서득관이라는 자가 궁궐에서 양잠을 하는 여인과 관계를 가진 것이 들통 나 잠모의 남편이 서득관을 사헌부에 고발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김세필에 이어 서득관까지 연이어 내관 스캔들이 터지면서 연산군은 "남자도 아닌 것들이 감히 남자 행세를 하는가!" 라는 한마디와 함께 서득관을 대처분했다.
 
자신에게는 한 없이 너그러웠지만 다른 이들에겐 엄격했던 연산군의 행정 처분이 서득관에게도 그대로 적용된 셈이다.

내시란 사람이 아니라 임금의 오른팔로만 여겨졌던 내관들의 모습이 새삼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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