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베의 패권
테베는 그리스 중부의 보이오티아 평원의 남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미케네 문명 시절부터 존재한 유서깊은 곳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페니키아의 왕인 아게노르의 딸 에우로페가 황소로 변한 제우스의 등을 타고 로도스 섬으로 끌려가자 그 오빠인 카드모스가 동생을 찾아 헤메게 되었다. 카드모스는 도중에 아폴론을 만나 동생 찾는 일을 중단하고 도중에 만난 암소를 뒤쫓아 가서 암소가 눕는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라는 말을 들었고 진짜로 암소를 만나자 아폴론의 말 대로 암소가 눕는 곳에 건설한 도시가 바로 테베이다. 또한 테베는 오이디푸스의 전설로도 유명하다.
이렇듯이 테베는 유서깊은 도시로서 BC 6세기경 그리스 중부의 폴리스 간의 동맹인 보이오티아 동맹의 맹주로서 군림하게 되지만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 본토를 침공한 페르시아 전쟁 당시에는 페르시아 편에 서기도 하였다. 이후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의 힘을 이용하여 패권을 찾이한 시기에 보이오티아 평원을 두고 아테네와 대립하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는 스파르타를 도와 아테네의 패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전횡이 심해지자 페르시아의 자금을 지원받아 코린토스 전쟁을 일으켰고 아테네, 아르고스 등과 연합하여 스파르타를 괴롭혔으나 안탈키다스 화약 때문에 전쟁을 끝내야 했다. 더욱이 안탈키다스 화약을 통해서 페르시아로부터 그리스 폴리스의 대표로 인정받은 스파르타는 이를 빌미로 테베에게 보이오티아 동맹을 해체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절하자 아게실라오스 2세가 테베를 공격하여 BC 387년 보이오티아 동맹을 해체시킨 후 BC 382년에는 테베의 수도인 카드메아를 점령해 버렸다. 이렇게 하여 테베에 친스파르타 정권이 들어섰고 스파르타군의 일부도 주둔하게 되었지만 이미 스파르타의 군사력은 예전같지 않았기 때문에 스파르타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BC 379년 반스파르타 쿠데타가 일어나 친스파르타 정권을 물리치고 스파르타군을 축출한 후 보이오티아 동맹을 재건하였다. 스파르타가 이에 대한 응징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BC 379년과 BC 378년의 2번이나 테베를 공격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렇게 스파르타의 패권이 흔들리자 BC 378년에 아테네도 키오스, 비잔티온, 로도스, 무틸레네 등과 함께 스파르타의 압제에서 그리스 폴리스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제2차 아테네 해상동맹을 결성하였다. 스파르타가 이를 응징하고자 하였으나 낙소스 해전에서 패전하면서 아테네에게 제해권을 되돌려주고 말았다. 더욱이 BC 375년에 스파르타군이 테기라 전투에서 테베군에게 대패하였는데 이는 육지의 정규전에서 스파르타군이 겪은 첫 패배였다.
BC 374년이 되면 테베의 보이오티아 평원에 대한 지배력이 명실상부하게 되었고 아테네 역시 에게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되찾았다. 더구나 이번에는 페르시아가 이집트 반란에 시달리고 있어 아테네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린토스 전쟁과 달리 페르시아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는 여전히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여 테베에게 지속적으로 보이오티아 동맹 해체하고 자신과 평화조약을 체결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테베는 보이오티아 동맹의 대표로서만 평화조약에 서명할 수 있다는 입장을 굳히지 않으면서 결국 BC 371년 양측의 운명을 뒤바꾸게 되는 레욱트라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레욱트라 전투의 승리
스파르타의 아기드 가문 출신 왕인 클레옴브로투스가 이끄는 스파르타군이 테베 공격에 나섰다. 스파르타군은 테베로 향하는 일반적인 협곡을 통하지 않고 언덕을 지나 크레우시스 요새를 점령한 후 레욱트라로 향했다. 이에 테베에서는 보이오티아 동맹군을 서둘러 소집하고 스파르타군을 상대하도록 하면서 BC 371년 7월 6일 보이오티아 평원의 레욱트라에서 양군이 대치하게 되었다. 보이오티아 동맹군은 원칙적으로는 각 동맹 폴리스에서 선발된 '보이오타르크(Boeotarch)'라고 불리는 4명의 사령관이 동등하게 지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동맹군의 중심인 테베의 에파미논다스가 사실상 총사령관이 되었다. 레욱트라 전투에서 싸우게 된 클레옴브로투스의 스파르타군은 기병 1천명과 중장보병 1만명에 달하는데 반해서 에파미논다스의 보이오티아 동맹군은 기병이 1천5백명으로 약간 우세하였으나 주력인 중장보병은 테베가 자랑하는 신성부대 300명을 포함하더라도 6천명에 불과하였다. 참고로 테베의 신성부대는 300명 전원이 동성애자로 구성된 테베의 최정예 부대였다.
이때 에파미논다스는 전통적인 방진이 아닌 사선진이라는 획기적인 전술을 들고 나왔다. 고대 그리스 전장에서의 전투는 중장보병이 12열의 방진을 균일하게 이룬 채 오른손엔 창을 들고 왼손엔 방패를 들고 싸웠기 때문에 서로 상대의 우측을 노리면서 빙글빙글 도는 모양새가 일반적이었다. 고대의 대규모 전투를 회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전체적인 모양은 12열의 균일한 사각형 형태에서 아군의 우익에 최정예를 배치했고 페르시아 전쟁에서는 스파르타군이 그 강력함을 인정받아 그리스 동맹군의 최우익에 위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파미논다스는 기존 방식으로는 스파르타군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종래의 상식을 깨고 아군의 좌익을 50열로 두텁게 쌓는 대신에 우익을 의도적으로 약화시켰다. 그리고 엷어진 우익은 종래보다 뒤로 물러선 형태를 취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선모양이 되었다. 또한 기병 역시 기존에는 정찰과 상대에 대한 견제정도로만 사용하였던 통례를 깨고 적극적으로 백병전을 벌여 적진형을 돌파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예파미논다스의 전술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우선 전초전에서 테베의 기병에게 패배한 스파르타의 기병이 아군 보병 쪽으로 후퇴하면서 진형을 흩뜨러트렸고 이어진 테베 기병의 돌파로 혼란은 더 커졌다. 군기가 엄정하였던 스파르타군의 진형은 혼란을 수습하고자 노력하였지만 뒤이어 닥친 테베군의 50열이나 되는 두터운 좌익의 공격으로 12열에 불과한 스파트타군의 우익은 삽시간에 격파당하고 말았다. 스타르타군의 좌익은 아군의 우익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정면에 위치한 테베군의 우익에게 측후방을 노출시킬 것을 우려하여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스파르타의 우익이 무너지자 좌익도 협공을 당하였고 그리스 최강이라는 스파르타 중장보병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결국 스파르타군은 클레옴브로투스를 비롯한 병사 1천명을 상실한 채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거듭된 펠로폰네소스 반도 원정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을 꺾은 에파미논다스는 BC 370년말 이번에도 종래의 상식을 깨고 군사활동을 벌이지 않는 겨울철에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침공하였다. 그동안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지만 단 한번도 육로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공격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그러나 에파미논다스는 스파르타의 국경인 에브로타스 강까지 진격하였으나 이제 유일하게 남은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 2세가 테베군과의 대규모 전투를 피하면서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이에 에파미논다스는 스파르타를 흔들기 위해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들어선 에파미논다스는 300년 가까이 스파르타의 국유노예인 헬로트가 된 메세니아인의 반란을 지원하여 그들의 옛 나라인 메세니아를 부활시켰고 또한 아르카디아인을 설득하여 스파르타와의 동맹을 파기하도록 하였다.
이후 에파미논다스는 테베로 돌아온 후 스파르타에 대한 직접적인 전과가 부족하다는 정적들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지만 곧 무혐의로 판명받고 다음해에도 보이오티아 동맹군의 사령관(보이오타르크) 4명 중 한 명으로 재선임되었다. 그리고 스파르타와 맞서고 있던 아르고스, 엘리스, 아르카디아의 요청에 따라 BC 369년 겨울에 2번째 펠로폰네소스 반도 원정을 단행하였다. 스파르타가 자신의 동맹인 코린토스, 메가라, 펠레네은 물론 아테네의 지원까지 받아 코린토스 지협 방어에 나섰지만 돌파당하고 말았다. 이후 에파미논다스는 다시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된 폴리스의 탈퇴를 종용하였고 시키온과 펠레네가 테베의 동맹이 되었지만 트리지나와 에피다우로스는 테베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와의 동맹을 유지하였다. 더욱이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마저 스파르타를 지원하기 위한 군대를 보내왔기 때문에 에파미논다스는 다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에파미논다스가 이번에도 스파르타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되돌아오자 그의 정적들이 두번째 탄핵을 시도하였고 이번에는 성공을 거두어 에파미논다스는 사령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BC 367년 테살리아의 참주인 알렉산드로스에게 테베의 외교관인 펠로피다스와 이스메니아스가 억류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테베군이 이를 구출하기 위해 출병하였고 펠로피다스가 에파미논다스의 친구였기 때문에 에파미논다스는 병사 신분으로 부대에 합류했다. 에파미논다스가 지휘하지 않는 테베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테살리아와의 전투에서 패배할 위기에 내몰리자 전투 도중에 에파미논다스가 지휘권을 인수하면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덕분에 에파미논다스는 다시 보이오티아 동맹군 사령관에 임명될 수 있었다.
BC 366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대한 3번째 원정을 시도하였다. 여전히 에파미논다스는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무너뜨리기 위해 스파르타의 동맹 폴리스를 테베의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스파르타가 동맹 폴리스에 세운 과도정부를 그대로 인정하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민주정의 테베 정부와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또한 이제는 스파르타를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아테네를 상대하기 위해 보이오티아 함대를 이끌고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으로 향하여 이 지역 폴리스들이 아테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조장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BC 364년에 테살리아와 싸우던 펠로피다스가 전사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에파미논다스는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절친이자 정치적으로는 가장 강력한 조력자를 잃고 말았다.
최후의 원정과 에파미논다스의 죽음
BC 362년 테베의 지원을 받던 아르카디아와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던 만티네이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아르카디아의 요청에 따라 에파미논다스가 보이아티아 동맹군을 이끌고 가면서 4번째 펠로폰네소스 반도 원정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스파르타군은 에파미논다스와의 정면 대결을 피해왔지만 이번만은 아게실라오스 2세가 스파르타군을 이끌고 나오면서 만티네이아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보이오티아군은 테베군을 중심으로 에우보이아, 로크리스, 시키온, 메세니아, 테살리아 등의 동맹군으로 구성되어 기병 3천명과 중장보병 3만명에 달했다. 이에 맞선 스파르타군은 아테네와 엘리스, 만티네이아의 지원을 받아 기병 2천명과 중장보병 2만명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BC 362년 7월 4일 만티네이아 전투가 시작되자 보이오티아 동맹군의 우익에 배치된 테살리아 기병이 아테네 기병을 몰아내었지만 후위에 있던 엘리스 기병이 전투에 가세하면서 역습을 받아 테살리아 기병이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좌익에서는 테살리아 기병이 만티네이아 기병을 성공적으로 압박하였다. 중앙에서는 중장보병끼리 전투가 벌어졌고 보이오티아 동맹군은 레욱트라 전투에서 사용한 사선대형을 일부 변형한 진형을 편성한 채 에파미논다스가 선두에 서서 격전을 벌였다. 전체 전황은 보이오티아 동맹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지만 에파미논다스를 발견한 스파르타군은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공격을 집중하여 에파미논다스를 쓰러뜨리게 된다.
이렇게 만테네이아 전투에서 보이오티아 동맹군이 승리를 거뒀지만 에파미논다스가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사망하면서 더 이상 공세를 펼치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레욱트라 전투 이후 10년간이나 그리스 최강으로 군림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명장인 에파미논다스가 사라졌다. 테베의 패권은 전적으로 에파미논다스의 개인적인 능력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에파미논다스의 죽음은 곧 테베 패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에파미논다스가 선보인 사선대형은 더이상 테베군에 계승되지 못하고 에파미논다스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오히려 북방의 마케도니아에서 에파미논다스의 사선대형을 계승하여 더욱 개량하면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게 된다.
흔들리는 제2차 아테네 해상동맹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전을 딛고 BC 378년 제2차 아테네 해상동맹을 체결하면서 부흥에 성공하였다. 해산되었던 함대를 재건하여 100척 정도를 확보하였고 델로스 동맹(제1차 아테네 해상동맹) 당시 아테네가 동맹 폴리스 위에 군림하였던 폐해를 반성하는 의미로 동맹 폴리스들의 자치를 보장하며 공납금을 부과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였다. 또한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아테네인이 동맹 폴리스 내의 토지를 소유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테네의 태도가 델로스 동맹 당시에서 크게 바뀐 것이 없음이 들어났다. 제2차 아테네 해상동맹의 결성목적이 스파르타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음에도 스파르타가 레욱트라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에도 해산되지 않았고 군역대납금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공납금도 징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아테네의 전횡에 반발하여 BC 357년 로도스와 코스, 키오스, 비잔티온이 동맹 이탈을 선언하였고 아테네가 무력으로 저지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하면서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였다. 아테네는 카브리아스와 카레스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키오스를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아테네의 힘이 예전만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키오스에게 패배하고 카브리아스는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카레스는 헬레스폰투스 해협으로 함대를 물렸고 카레스를 돕기 위해 아테네는 티모테우스, 이피크라테스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티모테우스, 이피크라테스와 카레스 사이에 의견충돌이 발생하였고 티모테우스와 이피크라테스가 폭풍을 이유로 진격을 거절하였고 카레스는 함대의 3분의 1만 이끈 채 키오스 공격을 강행하였다. 결국 엠바타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였고 카레스는 패전의 책임이 자신을 돕지 않은 티모테우스와 이피크라테스에게 있다며 탄핵하였다. 재판을 통해 티모테우스는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피크라테스는 무죄로 판결받았다.
이렇게 동맹시의 이탈을 제압하지 못하면서 아테네는 자금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제 단독 지휘관이 된 카레스는 아테네 함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 내에서 일어난 페르시아 태수(사트라프)들의 반란에 개입하여 프리지아 태수인 아트라바주스의 용병으로 참여하였다. 이에 대해 아테네는 처음에 승인하였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로부터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가 동맹이탈 폴리스를 지원하는 것을 우려하여 카레스에게 물러나도록 하였고 이후로는 더이상 군사행동도 벌이지 못하면서 동맹 폴리스들의 제2차 아테네 해상동맹의 이탈을 막아내지 못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