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 - 야요이 시대
3. 야요이 문화
1) 한반도에서 전래된 문화
야요이 문화는 BC 3세기에서 AD 3세기에 걸쳐 존속한 문화로 야요이라는 명칭은 1884년 도쿄 분쿄구 야요이에서 발견된 토기를 그 지명을 따 야요이 토기라 칭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야요이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농경이 시작되고 청동기나 철기 등의 금속기를 사용하게 된 것인데,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이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고고학적 증거들 때문이다.
첫째, 일본 열도에서 최초로 토지를 갈고 물을 대서 쌀을 재배하는 수전도작(水田稻作)이 시작된 곳은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북부 규슈였다.
둘째, 농경과 관련되어 만들어진 도구들, 예를 들면 목제 농구를 만들기 위한 돌 도끼나 벼 이삭을 따기 위한 돌칼은 한반도 남부의 청동기 시대 전기의 것과 거의 유사하다.
셋째, 이 시기가 되면 나가사키현이나 사가현 등 북부 규슈 지역에 청동기 시대 한반도의 대표적인 매장 풍습인 지석묘(고인돌)가 만들어지고 그 부장품인 마제 석촉이나 마제 석검은 모두 한반도 계통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넷째, 이들 지석묘에서 발견되는 인골의 평균 신장이 조몬 시대 일본인보다 5㎝ 정도 크고, 얼굴 형태도 한반도에 거주하던 이들과 유사하다.
일본의 규슈 지역에서 발굴된 지석묘(고인돌)와 마제석검으로 사진으로 알 수 있듯이 한반도의 것과 거의 유사하다.
문제는 그렇다면 이 시기 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많은 이들이 이주했는가인데, 현재로서는 전해지는 자료가 없어 단정지을 수 없다. 다만 이 시기 중국 대륙이 전국 시대가 끝나고 진나라에 의해 통일이 되었다가 다시 한나라가 건국되는 격변기여서 그 전란의 여파를 피해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한반도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 여파로 한반도에 거주하던 이들 중 일부가 일본 열도로 이주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축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의 다른 지역이 아닌 북부 규슈 지역으로 이주한 것일까? 이는 당시의 초보적인 항해술로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손쉽게 갈 수 있는 지역이 북 규슈 지역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그림에서 보듯이 한반도 남부에서 쓰시마 섬을 거쳐 규슈로 가는 이 길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 중국 사서에서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 길은 야요이 시대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일본이 한반도에서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된다.
야요이인이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온 도래인이었다면 원주민인 조몬인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몬 시대의 유적은 동 일본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조몬 시대 일본인들은 주로 동 일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목기, 석기를 도구로 하여 수렵, 어로, 채집 등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반면 야요이 문화를 가져 온 이들은 주로 서 일본 지역에 정착하여 양자간의 충돌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야요이 문화가 차츰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서로 다른 문화권의 충돌이 있었겠지만 보다 선진적인 문화인 야요이 문화에 의해 압도되었을 것이고 그 양상 역시 큰 갈등이나 대립은 없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2) 야요이 토기
1884년 도쿄 야요이쵸(町)의 무코가오카 패총에서 한 개의 호형(壺形) 토기가 발견되었다. 얇고 견고하며 밝은 색으로 구워진 문양이 거의 없는 이 토기는 이 때까지 발견된 조몬 토기와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어 야요이식 토기로 불렸고 이 야요이 토기가 사용된 시대라는 의미로 야요이 시대라 칭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몬 토기와 야요이 토기가 제조 기법 등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토기를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타당한지는 일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다. 따라서 조몬 시대와 야요이 시대는 채집 경제인가 농경 경제인가 하는 경제 기반의 차이가 본질적인 차이이며 다만 그 시대의 명칭을 그 시대에 사용된 토기의 이름을 따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반면 야요이 토기가 조몬 토기와 다른 점은 토기의 종류가 많아졌다는 점 외에도 높이가 30cm가 넘는 호(壺)형 토기가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점으로, 이는 본격적인 농경문화가 시작되면서 쌀 등을 저장하는데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일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야요이 토기가 한반도 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앞선 시기의 조몬 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가 논란이다. 이는 야요이 문화가 순전히 한반도에서 전래된 문화인지 아니면 한반도에서 전래된 문화와 토착의 조몬 문화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문화인지의 문제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즉, 야요이 토기에 한반도의 무문토기의 영향도 보이지만 야요이 토기는 기본적으로 앞선 시기의 조몬 토기를 변형시켜 만든 것이라고 본다. 이들은 그 증거로 야요이 토기가 등장한 시점에 조몬 토기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는 토기들이 많이 만들어졌다는 점을 든다.
야요이 토기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이런 인식은 야요이 문화의 성격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본의 역사책들을 보면 우리가 과거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물을 전수 받았지만 우리 실정에 맞게 변형시켜 받아들였다고 가르치듯이 일본 역시 과거 한반도로부터 많은 문물을 전해 받았지만 일본의 실정에 맞게 변형해서 수용했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대표적인 예가 동탁(銅鐸)이다. 일본의 역사책들은 동탁은 한반도에서 전해진 청동제의 작은 종으로 야요이 시대의 일본인들이 이를 모방하여 독자적인 형태의 종으로 만들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동택을 예로 들면서 야요이 문화에는 앞선 조몬 시대부터 이어 온 일본의 고유의 도구나 기술도 많으며 이런 점에서 야요이 문화는 농경사회를 형성한 한반도 남부에서 쌀이나 금속기를 갖고서 일본 열도로 건너 온 도래인의 문화가 토착의 조몬 문화와 결합하여 만들어진 문화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동탁과 그 표면에 새겨진 문양
3) 환호 집락
야요이인은 앞선 조몬인과 마찬가지로 수혈주거에 거주하였다. 이 수혈주거는 조몬 시대의 수혈주거와 큰 차이가 없어 조몬 시대와 마찬가지로 4~5명 정도의 한 가족 구성원이 거주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조몬 시대와 다른 점은 집락의 규모가 증가하였다는 점이다. 20~30 개 이상의 수혈주거와 창고로 사용되었다고 여겨지는 다수의 고상 건물로 구성된 집락이 각지에서 발견되었다. 또 이 집락 주변에 호(濠)를 두른 경우가 많은데 이를 환호 집락이라고 한다.
이 환호 집락은 야요이 시기에 등장하는 특징적인 현상인데, 집락 주변에 호를 두른 이유에 대해서는 방어를 위함이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자면 아이치현 아사히 유적은 야요이 시대 중기의 환호 집락인데, 여기서는 환호가 주거를 여러 겹 둘러싸고 있고, 호 안에는 나무 가지를 날카롭게 자른 나무 기둥을 배치시켰고, 호와 호의 사이에 끝을 뾰족하게 한 말뚝을 비스듬하게 박아 엄중한 바리케이트를 구축하였다.
그렇다면 왜 야요이인들은 집락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을 만들었을까? 이는 주변 세력과의 분쟁 때문이다. 인류 역사의 보편적인 현상 중 하나가 농경사회로 전환되면서 이웃 집단과의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생산력의 증가는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지만 이는 동시에 증가된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생산력의 증가를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증가한 인구를 지탱하기 위해 농지 및 농사에 필수 불가결한 관개용수를 확보해야 하는데 이는 주변 세력과의 충돌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주변 세력들이 비축해 놓은 잉여 생산물을 약탈하는 보다 손쉬운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이 일본에서는 야요이 시대에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이런 환호 집락 역시 한반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울산의 검단리 유적, 부여 송국리 유적, 창원 남산 유적 등에서 다수의 환호 집락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4) 소국의 등장
농업의 발달은 잉여 생산물을 가져오고 이 잉여 생산물을 바탕으로 재산이 형성되어 보다 많이 가진 자와 그러지 못한 자 사이의 구분, 즉 계급이 형성되고 마침내는 이를 바탕으로 하는 정치 질서, 즉 국가가 등장하게 되는데, 야요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각 지역에 구니(國)라고 하는 소국(小國) 내지는 지역 공동체가 성립하였다.
소국의 분립 상황은 한서 지리지나 후한서 동이전 등 중국의 역사서에서 살펴볼 수 있다. 1세기 후한의 반고가 지은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해중(樂浪海中)에 왜인이 있어 나뉘어져 100여 국이 되며 세시(歲時)에 와 헌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술이다. 또, 5세기 경에 지어진 후한서 동이전에는 건원중원 2년(AD 57년)에 왜의 노국(奴國)의 왕의 사자가 후한의 수도 낙양에 와 광무제로부터 인수를 받았다는 것, 또 영초 원년(AD 107년)에도 또 다른 왜왕이 노예 160여명을 후한의 황제인 안제에게 헌상하였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중국 사서에 의하면 1세기경 일본에는 100여 개국이 있었으며 서기 57년에는 왜의 노국왕이 후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 황제에게서 인수와 문물을 하사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00여 개국, 및 왕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국가라고 하는 정치 공동체와 그 지배자가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헌에는 왕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실상은 촌락 공동체의 장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는 위 기록에 나오는 각 국의 범위가 오늘날의 군 정도의 규모였기 때문이다. 이런 소국의 왕들은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또 그 정치적 후원을 얻음으로써 일본 내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고자 조공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일본이 독자적으로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이는 당시 낙랑 등 한군현과 교류하고 있던 가야를 통해서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일본과 가야 사이에는 일찍부터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일본 - 가야 - 한군현 - 중국 본토로 이어지는 네트워크가 이미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여하튼 위 기록들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인 유물들이 실재 북부 규슈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노국(奴國)은 후쿠오카 평야에 있던 소국으로 보여지고 있는데, 그 영역이었던 시가노시마에서 후한의 광무제가 노국의 왕에게 수여했다고 보여지는 금인(金印)이 에도 시대에 발견되었다. 또 후쿠오카현 가스가시(市)에 있는 스구오카모토 유적에서 1899년에 옹관묘가 발견되었는데, 이 관 안에는 30개 이상의 전한(前漢) 시대의 거울, 동검, 동모, 벽(璧) 등이 들어 있었다. 스구오카모토 유적 부근은 청동기의 주형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경제적으로도 지역의 중심 역할을 하여 이 옹관묘는 노국의 왕의 묘라고 추정되고 있다. 또 1822년에 발견된 후쿠오카현 이토시마시 미쿠모미나미쇼지 유적의 옹관에서는 전한 시대의 거울 35개, 동검, 동모, 동과, 벽(璧), 금동제 사엽좌금구(四葉座金具) 등이 출토되었다. 이 곳은 3세기에 쓰여진 삼국지 위지 동인전 왜인전에 기록된 이도국(伊都國)의 왕의 묘라고 추정되고 있다.
<참고 -금인(金印)> 기록에 의하면 에도 시대인 1784년 하카타만(灣)에 있는 시가노시마의 가나노사키에 사는 진베에(甚兵衛)라는 백성이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수로를 정리하던 발견하였다고 한다. 금인에는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의 5자가 새겨져 있어 발견 당시부터 후한서에 기록된 광무제가 건원중원 2년(기원 57년)에 왜의 노국의 사신에게 수여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이 금인이 과연 한무제에게서 받은 진품이 맞는 것인지는 발견 당시부터 논란이었다. 금인의 손잡이가 뱀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런 형태의 금인은 한나라 때에는 없었다는 점 그리고 새겨진 다섯 글자가 한나라 때 만들어진 여타의 도장에 새겨진 글자들과는 그 형식이 다르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 그러나 1956년 중국 운남성에서 BC 109년에 한 무제가 하사한 도장이 발견됐는데, 새겨진 글자들이 한나라 때 만들어진 여타의 도장들에 새겨진 글자들과 그 형식이 달랐고 또 손잡이도 뱀 모양이었다. 또, 1981년에 중국 강소성에서 발견된 광릉 왕새는 AD 58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하사한 도장인데 시가노시마의 금인과 크기와 무게, 문자 조각법 등이 거의 동일하다. 그래서 지금은 시가노시마에서 발견된 금인은 진품인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의 다섯 글자가 새겨진 금인 |
5) 매장 풍습
조몬인이 주거의 옆에 묘지를 만든 것과는 대조적으로 야요이인은 집락 부근의 공동 묘지에 시신을 매장하였다. 또 앞서 조몬 시대의 굴장과는 달리 시신을 편 상태로 매장하는 신전장(伸展葬)이 일반화되었다. 매장 풍습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데 옹관이라는 대형의 매장 전용의 토기에 시신을 넣어 장례 지내는 옹관묘, 판석을 사각으로 짜맞춘 상자식 석관묘, 목관을 묻은 주변에 사각으로 도랑을 파고 파낸 흙으로 무덤을 덮는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 일단 시신을 묻고 썩어 뼈만 남으면 이를 취하여 항아리에 넣어 다시 장례 치르는 재장 등 야요이 시대의 장례 풍습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갖는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