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팔 전투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4년 3월 15일 부터 7월 1일까지 버마와 인도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전투.
명칭은 국경선 인도 측의 도시 임팔에서 유래했다. 보통 일본군의 작전 명칭 작명은 대부분 카타카나 글자만 하나 붙여서 ○호 작전이라고 한다. 따라서 일본군에서 붙인 작전명은 '우호 작전(ウ号作戦)'이고 Battle of Imphal의 번역상 '임팔 전투'로 기재하는 게 정상이지만 한국에서는 이 둘을 섞어 '임팔 작전'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다. 본 작전의 주목표는 임팔이었고, 코히마는 임팔 점령을 지원하기 위한 조공에 가까워서 임팔 전투라 부른 경우가 많지만, 코히마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에 주목해 '임팔-코히마 전투'라고 부르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작전자체는 오랫동안 준비했고, 또한 영국군의 움직임, 공격시기 등등을 정확히 포착하여 허를 찌르겠다는 기동전이라는 전술 관점에서 보면 나름 괜찮은 작전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전략적 관점, 전장까지 도달하기까지의 전력유지, 보급문제, 포위 이후의 적의 반격에 대한 대비, 작전실패시 철수 등등에서 헛점 투성이인 도박에 가까운 반쪽짜리 작전이었다. 일본군은 앞선 전투에서의 승승장구로 인해 영국군을 얕잡아 보았고, 공격하면 즉시 적의 거점을 빼앗을 수 있다고 오판한 것이 근본적인 패전의 원인이였다. 또한, '보급을 적에게서 탈취한 것으로만 충당하려고 하면 망한다.'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흔히 무타구치 렌야의 의거만행으로 유명하지만, 이런 정신 나간 작전이 승인된 것은 자기 파벌과 자신의 안위만 생각한 일본 육군 수뇌부의 책임, 정권유지를 노린 군부 정치인들의 실책이 크다. 정상적인 군대면 이런 작전을 제시해봤자 바로 반박당하기 마련이고, 일본군 안에서도 반대하는 소리가 높았다. 자기편 들어주기 급급한 자들의 목소리가 더 높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전쟁은 보급과 같은 전략단계를 도외시하고 단기결전으로 전세를 뒤집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그러한 방침은 무모한 도박이 될 수 밖에 없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례로 남았다.
무모한 임팔작전 덕분에 연합군의 버마 벵갈지역 작전은 예상된 기간보다 6개월 이상 일찍 끝났다.
반면 일본군 15군 예하 사단들은 전사자 3만 2천 명, 병사 및 아사자 2만 명 이상을 내 사실상 60%에 가까운 사상자를 내 전멸을 넘어 궤멸됐다. 보통 사상자 20~30%면 전멸로 간주하는 게 일반적이므로 이 전쟁의 참상은 안 봐도 비디오다. 한편 연합군의 피해는 사상자 1만 7500명이었다. 1만 2603명이라는 말도 있는데, 어느 쪽이든 일본군에 비해서는 매우 적다. 그리고 이중에서 진짜로 전사한 사람들은 훨씬 적고 대부분은 질병으로 사망했다.
임팔 작전이 실패하자 그 전까진 호각지세였던 일본군의 버마-벵갈 전선은 붕괴했고, 1945년 3월에는 아웅 산 장군이 이끄는 버마국방군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당시 버마를 맡았던 스틸웰 장군도 무타구치만큼은 아니지만 전투 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일관하며 일본군을 얕잡아보고 무리한 공세를 추진하다가 1941년에 버마를 날려버리고 걸어서 버마 국경을 넘어 달아나는 추태를 보인 무능한 인간이었다. 스틸웰은 이 치욕을 씻겠다고 중국군 예비대 수십만을 멋대로 차출해와서 이를 갈고 있었다. 그리고 그놈의 오만한 근성 어디 버리질 못하고 버마의 일본군이 얼마 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며 멋대로 공격했는데 실제로 버마의 일본군은 스틸웰 주장의 3~5배에 달했다. 하지만 때를 맞춰 무타구치가 자폭해준 덕분에 그는 역사에서 까일 거리를 겨우 하나 줄였다.
작전 책임자인 무타구치는 15군 총철수 이전에 퇴각로 '시찰'을 명목으로 먼저 도망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겨우 예비역에 편입되는 경미한 징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장으로 좌천되는 선에서 끝났다. 그의 상관들 또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별다른 징계를 받지 않았다.
반면 사토 중장은 군법재판을 앞두고 있었는데, 정작 사토 중장은 오히려 재판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재판장에서 무타구치와 그 일당의 추태를 낱낱이 까발릴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재판장은 사토 중장에게 정신병 판결을 내렸고, '정신적으로 하자가 있는 자에게는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예편시켜 버렸다. 이 와중에 병을 얻어 후송된 야마우치 마사후미 15사단장은 임종하기 전 이렇게 말했다.
공격할 탄환도 없고 지금은 호우와 진흙 속에서 병과 기아에 전투력을 상실했다. 제1선부대가 처한 이런 현실은 군과 무타구치의 무능 탓이다.
종합하자면 임팔 작전이 참패로 끝나 버마-뱅갈전선의 일본 육군 전반을 상실했음에도 실질적으로 지도층은 개선의지를 느끼지 못했다.이는 제15군, 버마방면군 등 상부조직과 군 장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결과적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임팔 작전의 실패 책임과 소재를 육군 상부가 스스로 감추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결과 이 이후 일본 육군은 위신은 보전하는 대신 필리핀 탈환전부터 오키나와 전투에 이르기 까지 식민지에 배치된 일본 육군 전체가 산산조각 나면서 괴멸당하고 만다.
무타구치 렌야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적의 보급품을 빼앗아서 아군에 유리하게 활용하는 것은 정석 중 정석이긴 한데, 3개 사단에 이르는 정규군이라면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타짜라도 자기 판돈 정도는 준비하여 그걸 기본으로 작전을 짜는 법이다. 게다가 이렇게 조달할 수 있는 품목은 현대전에서는 어디까지나 식량까지고, 자군의 무기에 맞는 탄약은 조달할 수 없는데 일본군의 무기체계는 일본군 내에서조차 호환성이 극악이었다. 더구나 식량도 약탈에만 의존하면 항상 필요한 양 이상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식량이 부족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적군이 "식량하고 탄약 가져가십쇼" 하며 순순히 넘겨줄 만큼 호구냐? 그것도 당연히 아니다. 난전 중이라면 모르지만 후방에 있는 보급 지역에는 이미 질 듯하다 싶으면 후퇴하면서 챙기거나 챙기지 못한 보급품들은 적들이 못 쓰게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청야전술에 패배하게 된 군대들조차도 이런 멍청한 발상으로 출발하진 않았다. 그리고 군사물자에는 식량과 탄약, 무기뿐만 아니라 세신도구나 의류, 자질구레한 각종 생활용품들도 포함된다. 그런 것들밖에 노획하지 못한다, 면도칼과 철모로 싸우고 군화와 비누를 씹어먹으며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정상적인 작전은 절대 불가능하다. 또한 기적이 벌어져서 작전에 필요한 물자를 모조리 얻는다고 해도 대규모 공격군에게 보급하려면 실셈하고, 정비하고, 운반하고, 배급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러는 동안 적은 더욱 철저한 방어계획을 수립할 것이 당연지사고 심하면 아예 역습에 나설 수도 있다.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저 '식량'으로 쓰겠다는 코끼리와 소, 말은 대개 점령지에서 조달했는데, 먹이도 제대로 안 주고 부려 먹은 데다가 원래 종자들이 장거리 이동을 잘 안 하는 종들이라 먹은 소보다 지쳐서 객사한 소가 더 많았다고 한다. 원래 가축을 식량으로 이용하는 신속한 기동전은 평지에서 가능한 전술로, 정글과 고산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다구치의 징기스칸 전법은 이론만 그럴 듯한 전형적인 탁상공론으로 국경을 지나자 가축들은 친드윈 강을 건너다가 익사하고, 아라칸 산맥을 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포격에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 심지어 사료 문제가 거론될 때 '이것(가축)들은 초식동물이니 길가의 풀을 먹여 사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기도 했으니 뭐...
군부대의 보급과 같은 대규모 수송에 동물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길가의 풀'은 조속히 고갈되는 데다 독초 등을 뜯어먹고 쓰러질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마초 역시 보급해야 한다는 점은 이미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군이 경험한 사실이다.
삼국지나 갈리아 원정기 등에도 마초 보급을 따로 준비하는 대목이 나온다. 소나 말, 양등이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는 초식동물이긴 하지만. 단순히 방목해서는 영양효율이 영 좋지 않다. 순수하게 풀만 뜯어먹고 배를 채우게 하려면 거의 하루 종일 풀밭에 풀어놓고 풀을 뜯게 해야 하므로 필요한 목초지의 넓이도 상상 이상으로 넓다. 실제 역사에서 목동들이 아침이면 소때나 말떼, 양떼를 몰고 풀밭에 나가서 풀을 뜯게 하다가 해질녘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게 괜히 심심해서 시간 죽이려고 하는 짓이 아니었다. 가축을 대량으로 키우는 유목민들이 허구한 날 좋은 목초지를 빼앗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움 역시 식곤증 때문이 아니었다.
하물며 무거운 짐까지 싣고 장거리를 이동하는 중노동을 시킨다면 평소 가만히 풀이나 뜯고 다닐 때보다 훨씬 잘 먹여야 하는데, 길가의 풀로 수송용 가축을 먹이겠다는 것은 수송은 포기하고 한 자리에 머무르며 풀을 뜯게 하다가 풀이 고갈되면 목적지 대신 목초지를 향해 이동하겠다는 뜻밖에 안 된다. 길가에 목초가 그렇게 충분할 리도 없지만, 충분하다고 가정하더라도 먹이는 시간이 너무 길어 수송은 못한다는 것. 괜히 우리 조상들이 소에게 귀한 곡식까지 넣은 여물(소죽)을 쑤어 먹인 것이 아니다. 풀보다 훨씬 영양효율이 높은 곡식을, 소화흡수율이 높아지도록 익혀서 먹여야 일을 시킬 수 있기에 그렇게 귀찮은 짓을 한 것.
부피가 크고 무거운 마초를 따로 준비할 경우 그 마초를 실을 소와 말을 더 동원해야 하고 당연히 보급 관리에 애로사항이 더욱 꽃핀다. 당연히 마초를 수송하는 소와 말을 먹일 마초를 준비하면 실을 것이 더 늘어나니 소와 말을 추가해야 하고, 다시 추가한 소와 말을 위한 마초를 준비하면 실을 마초가 늘어났으니 다시 소와 말을 추가하고... 이렇게 계산을 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소와 말을 추가하지 않아도 되긴 하는데, 결과적으로 준비해야 할 소와 말과 마초가 생각했던 것보다 3~4배 정도 불어난다.
다 자란 소 한마리에게 필요한 하루 건초의 양은 약 10 kg이다. 임팔 작전을 위해 동원된 말과 노새가 1만 2천 마리, 소가 3만 마리이니, 하루에 건초를 약 420톤 준비해야 한다. (임팔작전의 주요기간인 1944년 3월 초부터 5월 초까지) 60일간 작전을 위해서는 건초를 무려 2만 5천 톤, 중간에 잡아먹을 걸 감안해도 대충 1만 5천 톤 건초를 수송해야 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건초(수분 함유량 12% 이하)를 일상생활할 때 이야기로 탄약 운송 같은 중노동을 했다면 당연히 훨씬 많이 먹어야 한다. 추가로 건초는 중량문제 말고도 부피가 엄청나기 때문에 실제 수송은 더 힘들다. 그러니 트럭으로 보급을 하기 힘들어, 소를 통해 수송한다는 전제부터 넌센스다. 거기에 정글이라 기껏 준비한 건초가 축축해져서 상하기도 쉽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전술의 ㅈ자도 모르는 사람이나 할 법한 무식한 소리. 일반 병사도 아니고, 명색이 작전을 지휘하는 장군급 인사라는 인간이 저런 소리나 하고 앉아있었다. 현대전에서 항공기의 중요성을 망각했다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정작 영국 공군은 포위된 자국 육군 진지에 계속 항공 보급으로 각종 물자를 쏟아부었다.
당시 굶주린 일본 육군들까지 그 항공물자가 자기 쪽으로 떨어지기만을 고대했고 운 좋게 손에 넣으면 처칠 급여라고 불렀을 정도이다. 게다가 당장 이 작전의 원인이 된 영국군 게릴라들도 당연히 공수된 부대다. 그리고 항공지원이 없는 보병은 적의 제공권 하에서는 보통 큰 피해를 입고 위축되어 작전을 하는데 그 상황이 실제 일어났다. 반면 연합군이나 독일군의 경우는 항공지원이 잘 결합되어 큰 전과를 올린 경우가 많아 심하게 대조된다. 차라리 위에 언급된 가축 수송 보급에 대해 '정글에서 소나 말을 어디에다가 쓰냐?'라고 바꿔 얘기했으면 이 정도로 조롱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란 게 있는 사람이라면, 척박한 환경의 정글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가축 수송 보급로다, 연료가 적어서 자주 비행 못 한다 하더라도 항공기로 보급하는 게 쓸데없는 노동력 낭비도 줄이고 좋다는 걸 알 수 있고, 분명히 이 점을 지적하거나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이 점이 개선되는 일은 임팔 작전이 헛짓으로 끝나는 그 순간까지 없었다. 이 작전을 구상, 실행한 윗선들이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생각 없는 작자들인지 알 수 있는 부분.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격언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뭐라고? 그딴 걱정은 하지 마. 적을 만나면 총구를 하늘에 대고 3발만 쏘아 보라고. 그러면 자동으로 항복하게 되어 있어.
15군 사령부 작전회의에서 '보급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지하게 염려하는 의견을 제시한 15군 보급참모 우스이에게 농담이랍시고 한 소리다. 무타구치가 적인 영국군을 얼마나 터무니없이 얕보고 방심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의 모든 명언들을 버로우시킨 희대의 명언이 있었으니, 일선 부대에서 보급품이 모자란다고 하소연하자...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일본인은 주로 채식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떨어지면 초근목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또는 '일본군은 원래 초식동물인 고로 주위를 둘러보면 풀이 이토록 많으니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그 말이 그 말이다. 당시의 참전했던 군인들 중 한 명은 풀을 가리키면서 "식량이 사방에 널려있는데 뭐가 걱정이냐. 풀을 뜯어먹으면서 전진하면 된다" 라고 말했다는 증언도 남겼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식량이 떨어지자 주변의 식물을 아무거나 집어먹다가 전멸한 사례는 흔하다. 게다가 정글은 사람들의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녹색 사막이라고 부를 정도로 생산력과 인구 부양 능력이 극도로 떨어지는 지역인데, 사람이 먹을 만하거나 많이 나는 식물은 적지만 독성을 가진 식물은 많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모르는 사실은 현재 인류가 식용하는 동식물들의 야생종은 사람이 도저히 섭취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아시아 인류의 주식인 쌀만 해도 처음부터 흰 쌀이 자라서 섭취한 게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의도적으로 품종을 개량했거나, 우연히 발생한 식용에 유리한 변종을 보존 및 개선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인류의 손을 타지 않은 야생 그대로의 동식물은 함부로 섭취해서는 안 된다. 즉 채식 위주라고 해도 결국은 인류의 손을 탄 식물성 식품을 기반으로 한 채식 그것도 토끼풀이나 잔디 같은 말 그대로 풀이 아닌 탄수화물 비율이 높은 곡식 위주이므로, 들판에서 자란 야생식물까지 먹을 수는 없다.
게다가 식물에는 흔히 독이 있다. 식물은 벌레나 초식동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독을 진화시켰는데 바로 알칼리계 독들이다. 현미에도 약한 독성성분이 들어있다. 단지 식용식물의 독은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거나 오히려 이득이 되는 경우라 문제가 안 될 뿐. 특히 종족의 유지를 위해 씨와 씨를 보호하는 기관에 독을 포함하는 경우도 많다. 즉 풀이라고 아무 거나 뜯어 먹으면 죽거나 탈난다. 대표적 예가 버섯인데, 독버섯일수록 '날 좀 먹어줘요' 식으로 크고 예쁘게 자라지만 이에 혹해서 먹는 순간 큰일 또는 사망이다.
식물에서 눈을 돌려 벌레나 작은 동물을 사냥한다고 쳐도 그걸로 1만 병력 이상의 식량이 될 리가 있겠는가? 저런 것만 먹으면 몸이 버틸 수 없다. 그 베어 그릴스도 구조받을 때까지 살아남는 시간을 연장하려고 벌레를 먹는다. 제대로 된 한끼 식사로도 벌레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얘기이다.
그나마 민간인이라면 몰라도 이들은 군인이었다. 군인들은 전투상황 내지 전투 준비에 필요한 훈련 등의 이유로 어마어마한 열량을 소모하기 때문에 요구되는 섭취 열량도 그에 상응하는 고열량을 섭취해야 한다. 실제로 병영 식단은 1일 약 3000 kcal를 조금 넘는 기준으로 짜인다. 전투식량들을 보면 알겠지만 평시에 먹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잉열량을 자랑하는데, 실전상황에서는 그걸 퍼먹고도 열량이 부족해진다.
이렇게 급양이 군대의 기본 중의 기본인데, 이 분은 보급이라고는 하나도 모르고, 거기에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는데 군인들이 잘 버티고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괜히 나폴레옹이 "군대는 배가 불러야 움직인다" 고 말한 게 아니다. 더구나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는 정글에서는 전투력 유지와 생존을 위해 잘 먹고 체력을 보존하는 게 더더욱 중요한데 풀만 뜯어 먹으라는 것은 이미 그 시점에서 전투력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본인도 솔선수범해서 그렇게 생활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올시다... 추가로 약탈 보급을 할거라며 예로 들었던 칭기즈 칸도 식량은 보르츠 등의 전통 보존식으로 철저히 준비해놨을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임팔 작전은 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서 인도의 북부인 아삼을 기습해 직접 압박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작전 입안과 강행 자체가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다고 주위에서 증언했다. 게다가 무타구치가 제시한 작전 기한은 불과 15일밖에 안된다. 물론 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서 인도의 북부인 아삼까지 15일만에 갈 수 있을 리 없지만, 보병 개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식량이 15일치이기 때문에 작전 기한을 15일로 잡은 것. 이렇듯 보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작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