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Humanities/동양사 Asian History

임나일본부설, 가야

Jobs9 2022. 9. 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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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설과 가야
가야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주장(남조선경영론)의 핵심이 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광복 이전에는 임나일본부의 입증을 위해서만 연구되었고 광복 이후 1980년대까지는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는 안습의 시기를 거쳐왔다. 그 과정에서 학계를 지배했던 것은 초기의 김해의 금관국 중심의 연맹체가 금관국 멸망 이후 후기의 대가야 중심으로 이동하였다는 학설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자신감을 다소 회복한 학계에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 결과, 이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발굴 결과가 보고되고 있다. 

현재로서는 굵직굵직한 발굴 몇 개가 마감될 때마다 학설이 생겼다가 뒤집어지는 양상이 있다. 대표적으로 대성동 13호 고분에서 일본 지배자들의 무덤에서만 발굴되는 일본계 유물인 파형동기[205]가 발굴된 일이다. 심지어는 일본의 파형동기들보다도 더 크다.# 그래서인지 2011년 현재까지 고대 일본과 가야의 관계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일고 있다. 때문에 아래 각 지역에 대한 소개에도 이전의 학설과 현재 학설이 뒤엉겨 있다. 어느쪽이 옳다고 확실하게 단언하기 곤란한 관계로 약간의 추가는 하지만 삭제는 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최근에는 금관국이 고구려의 침략으로 5세기 초에 멸망했다는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되는 유물까지 나왔다. 금관국 유적인데, 5세기 후반부의 것이라고 한다. 

다만 어느 쪽이든 일본의 왜국이 임나일본부설의 주장따나 가야를 직접 지배했을 가능성은 낮다. 일반적으로는 백제가 가야를 오랫동안 자신들의 세력권에 넣었고, 같은 백제 세력권이었던 왜가 그 기록을 차용해서 관계를 뒤집어 《일본서기》를 꾸몄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일본서기》에는 4세기 근초고왕의 시기에 백제의 장군으로 가야를 정벌한 목라근자라는 장군이 나온다. 이 때 가야가 백제의 세력권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목라근자 기록에서 보이는 남가라는 금관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변진 지역에서 독보적인 국가였던 금관국이 가라라는 이름을 대가야에 넘겨주고 남가라로 통칭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후대의 관념이 부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노중국은 이에 대해서 백제를 중심으로 가까운 고령을 가라로, 먼 김해를 남가라로 생각하는 관점이 반영되었다고 설명하지만, 후대의 관점이 반영되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206]. 

왜국이 이것을 자신들의 기록으로 편입하여 진구황후의 기록으로 바꿨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진구황후는 3세기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어 시기가 차이나는 것은 고질적인 이주갑인상 문제다. 보통 가야(및 백제-신라 등지)에서 건너가서 일본에 자리잡은 한반도 출신 이주민들이랑 가야인들의 제휴,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 및 일본의 가야 외교부 내지는 가야랑 일본이 문화-군사력을 서로 주고받은 전형적인 기브 앤 테이크 관계로 여겨지고 있다. 아주 잘해봐야 일본의 군사적, 외교적 영향력이 가야 지방에 일시적, 부분적으로 끼쳤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서기》에서 보여지는 성왕의 가야에 대한 재건 의지를 보면 6세기경 가야는 친백제계 지역이었고, 고구려에게 박살난 가야를 수습하여 신라에 연합하여 대항하려던 정황이 엿보인다. 그러나 결국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는 가야에 대한 주도권을 잃고, 신라가 가야를 흡수하게 된다. 

다만 왜국이 가야와 친밀했던 점은 사실로 보인다. 고고학적으로 봐도 가야에서 건너간 유물이 많이 나오며, 인적 교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부라는 정체불명의 기관은 같은 세력권이었던 가야와 왜국이 서로 혹은 백제랑 연락하기 위한 외교창구 정도에 그쳤으리라 추정한다. 《일본서기》는 긴메이 덴노기에서 성왕과 왜국의 관계를 거꾸로 기술하여 일본의 종주권을 강조했다는 의심을 많이 받는다. 당시 정황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왜가 가야를 지배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임나 이름 자체는 가야의 별칭으로 쓰여졌으나 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때문에 임나의 역사적 용어가 급속히 부정적인 의미로 전락했다. 

 

반도 일본어설과의 관계
임나일본부설에서 연상될 법한, 혹은 임나일본부설이 연상될 법한 다른 학설로 반도 일본어설이 있다. 이는 러시아계 미국인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이 본격적으로 제시해 한국어와 일본어의 연구와 관련해 큰 주목을 끈 학설로, 언어학적 지식과 역사적 지식이 얕은 사람들은 임나일본부설과 연관지어 곧잘 잘못 이해하기 쉽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보빈의 반도 일본어설에 따르면 한반도 중남부에는(지역 오지를 포함해 늦게 잡으면 기원후 5~6세기 무렵까지, 대체로는 그보다 이른 시기까지) 일본어족의 고대 언어를 쓰던 부족들이 살았는데, 이 학설에서 비정하는 반도 일본어의 대략적인 범위가 공교롭게도 가야의 영역은 물론이고 백제와 신라의 영역과도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즉, 언어적으로만 따지면 일본계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이 지냈다는 것이다. 

이는 얼핏 보기에 임나일본부설과 엮기에 충분해서 한국인들에게는 불쾌감을[207], 일본인들에게는 사람에 따라 불쾌감[208]이나 솔깃한 소식으로 다가올 수 있는데[209], 정작 제대로 보빈의 논지를 살펴보면 임나일본부설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대표적으로 참조할 만한 논문으로는 '고구려에서 탐라까지(2013)'(번역), '고구려어와 백제어: 다른 언어였는가, 고대 한국어의 방언이었는가?(2005)(번역)', '이주민인가, 지배자인가?(2012)(번역) 등이 있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보빈의 반도 일본어설 및 그에 바탕을 둔 학설 및 주장들은 모두 임나일본부설에서 주장하는 바와는 그 성격이 다르며,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앞서 예로 든 논문 중 2005년의 것에서는 '섬', '구지', '무레' 등의 옛 한반도 삼국의 어휘들 상당수가 서부 고대 일본어로 차용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2013년의 논문에서는 그간 주장해 온 반도 일본어설을 전체적으로 종합한다는 느낌으로 고대 한국어족 사용자들이 한반도 중남부의 일본어족 사용자들을 일본 열도로 밀어내거나 한국어족으로 동화시켰다는 골자를 분명히 했다. 2012년의 논문에서는 아예 한국인들이 봐도 급진적으로 보일 법한 주장으로 일본 황실이었던 오진 덴노와 그 어머니로 기록된 진구 황후마저 고대 한국어를 쓰던 한국계 일본인이었다고 주장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두 인물은 삼한정벌 등과 관련해 일본 우파들에 의해 허구한 날 임나일본부를 비롯해 일본의 한반도 남부 정복 및 지배·경영설의 핵심 인물로 거론된다는 것이다. 반도 일본어설은 보빈의 방대하고도 실증적인 연구 방법으로 인해 그 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어와 일본어의 계통적 관계에 큰 진전을 준 학설로, 정치적 입맛에 따라 쥐락펴락되는 여타 한일 양국의 분쟁 사안에 대한 주장과는 궤를 달리한다. 보빈의 주장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일본에서 한반도로 영향을 미쳤다기보다는 그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영향을 미친 게 합당한 흐름이며, 이는 고대 일본이 어떤 형태로든 고대 한반도의 영향을 '받는' 쪽에 있었다는 기존 사학계의 이해와도 궤를 같이한다.

이쯤에서 '임나일본부'가 정확히 무엇인지 다시 보자. 임나일본부란 '야마토 정권'에서 한반도 남부의 특정 지역에 설치한 '통치 기구'를 가리킨다. 즉, 이는 일본 열도의 고대 일본 정부에서 직접 한반도 남부에 설치한 일종의 지방 정권 내지는 식민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도 일본어설에서는 이 같은 흐름을 전혀 읽을 수 없고, 오히려 한국계 통치자가 일본 황실까지 장악했을 가능성마저 열어 두었다.[210] 한반도 남부에 반도 일본어 화자, 즉 일본어족 집단이 살았던 시기는 지방 구석구석까지 포함해서 늦게 잡아 봐야 6세기 언저리까지이고, 대부분은 그보다 몇백 년 앞서서 거의 삼한시대 및 초기 삼국시대 중으로 일본 열도로 이주하거나 부여계 한국어족 집단에 동화되어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한국인'이 되었다. 반도 일본어 집단이 한반도 남부에서 활발히 생활하던 시기는 원삼국시대 이전으로,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이 시기에는 '일본인'이라는 개념마저 소급 적용하기 힘들다. 

결론적으로 임나일본부설과 반도 일본어설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얼핏 연관되어 보일 수는 있으나 실제로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고대 한일 양국 언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삼국시대에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던 쪽은 한국계였음을 역으로 뒷받침하는, 일본 우익 측 주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증거만을 내놓는다. 

양직공도의 '혹속한 혹속왜(或屬韓或屬倭)' 역시 '한때는 한(韓)에 속했으며, 한때는 왜(倭)에 속했다'라기보다는 '어떤 이는 한(韓)인이며, 어떤 이는 왜(倭)인이다'로 보는 게 더 적절할 수 있다. '혹자(或者)' 등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혹(或)'에는 '어떤'이라는 부정칭의 의미도 있는데, 반도 일본어설과 연계하면 여기서 말하는 '왜인인 어떤 이들'은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 남부에 잔류하던 일부 토착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나 저러나 위에서 제시된 수많은 반론들과 더불어 반도 일본어설 역시 임나일본부설은 설 자리가 더 이상 없음을 더욱 공고히 한다. 

 

종합
종합하자면 대부분의 기록들은 왜의 과장과 허세에서 비롯되었으며, 통치기관으로서의 임나일본부는 없었다는 것이 결론이다. 이 결론에 대해 한국 사학계뿐만 아니라 일본 사학계에서도 점차적으로 인정해나가다가, 2010년 한일역사공동위원회에서 임나일본부설을 근거 없음으로 결론 내렸으며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공동 합의를 맺음에 따라 임나일본부설은 일단 양국 사학계에서 배제된 상황이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학계에서일 뿐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한 적은 없으며, 여전히 상당수 일본 교과서와 외국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나오는 상황이기에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논쟁이 언제 최종적으로 종결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게다가 일본은 교과서와 학계가 따로 논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일본의 주류 정치세력이 교체되기 전까지는 이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현재진행형 수정설

 

제1차 (2005), 2차 (2010) 한일역사공동연구 보고서의 고대사 부분(제1분과)의 내용과 토론부문 발췌[편집]
설명에 앞서 보고서는 한일 양국의 각자 개개인의 논문을 투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양측이 상호의 의견에 동의 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서로 자신의 주장을 논문으로 투고했기 때문에 상대측의 의견에 동의 하는지, 동의 할지 않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양측이 서로 각기 다른 쟁점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동감을 이루었는지 알고 싶다면, 보고서의 맨 마지막 부분인 좌담회 토론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토론 부분에서는 매우 직설적인 질문과 답변이 오갔기 때문에 한일 양측에서 생각하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제2기 한일 역소 공동연구회의 좌담회 토론을 주도한 사람은 한국측의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이고 일본측에서 주도적으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방어한 사람은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 큐슈대 교수이다.

김태식 교수가
1) 신공황후 49년(369년), 목라근자와 사사노궤[211] 등을 주축으로 하는 백제의 가야 정벌은 신공황후와 왜국이 주도적으로 했다고 볼 수 없다라고 발언하며, 전형적인 의미의 임나일본부설은 붕괴 되었다고 발언.
2)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왜군은 백제와 왜 양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파견된 용병이며, 가야-왜 연합군 중 복식이나 행색이 이질적인 왜군을 크게 과장했다.
3) 후기 가야의 주도 세력인 고령가야는 6세기에 고대국가의 틀을 잡았기 때문에, 일본학계에서 가야를 약소국 취급하는 인식에 대해 수정을 요구.

이에 대해 하마다 고사쿠 교수는, 신공황후 49년 가야 정벌의 기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이 맞다고 수긍했다.[212] 이에 대해 일본측에서는 왜국이 주도적으로 정벌을 했다고 믿을 순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근초고왕의 가야 평정전에 왜군이 참여 내지는 관여 했을거고 이걸 후대에 자신들이 유리한 기사로 바꾸어 기록 했다고 추정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왜구 세력이 상당히 과장 되었다는게 통념이긴 하지만, 5만의 군사를 동원한 광개토대왕이 한반도 남부에서 왜군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점을 주목했다. 그리고 가야가 저평가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야가 왜국의 문화 형성에 매우 큰 역할을 한 것은 맞다라고 대답했다.

김태식 교수는 사비회의에서 성왕이 근초고왕 시절, 백제와 가야는 형제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발언에 주목하며, 근초고왕 치세기 시절 김해의 금관가야와 교류를 하며, 금관가야의 중개를 통하여 백제와 왜가 통교를 맺었다고 발언했다.[213] 덧붙여 백제가 칠지도를 보낸 이유를 가야를 평정 할때 왜군이 원조를 보낸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한 하마다 고사쿠의 발언을 두고 가야7국 평정에 대해 상당히 사실성이 높다고 평가하는것 같은데 사실이냐고 몰아 붙였다. 이에 하마다 고사쿠는 이에 대해 오해라고 해명했다. 덧붙이자면 김태식 교수는 각자 개인이 투고한 논문에서 칠지도를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청동거울과 동시대의 유물이라고 발언하며, 6세기경의 물건이라고 추정하였다.

또한 김태식 교수는 투고한 논문에서 관산성 전투에서 파견한 왜군의 병력 규모에 주목하면 1000명 [214]수준의 상대적으로 소규모 부대가 한반도에서 이산적으로 활동 했을거라고 봤고, 또 그들의 병기나 무기 수준을 언급하며 주력부대는 아니었을거라고 단언 했다. 또 고고학과 수반된 가야-왜국 간의 관계 연구가 임나일본부설의 실체에 접근하는데 절실하다고 말했다.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는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가야와 백제 왜군의 무기 수준이나 착용 갑옷 수준에 대해 심도있게 서술했다
백제나 가야에 비하여 일본 열도에서는 4세기대에 소급할 수 있는 금촉제마구가 한점도 출토되지 않았으며, 5세기가 되어서야 가야로부터 개별적으로 수용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일본 고분시대의 마구에 대한 연구로서 小野山節는 일찍이 편년 작업을 하여, "오로지 수입품에 의존한 시기"를 설정하고 발걸이 형태의 차이를 가지고 제1기를 구식과 신식으로 나누어 보았다.이에 대하여 中村潤子는 5세기 전반의 제1차 도입기 (구식)에 전해진 한반도 낙동강 하류욕 마구는 결국 일본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끝났으며 5세기 후반의 2차 도입기 (신식)에 검릉형 또는 편원검미형 말띠드리개와 f자형 재갈멈추개로 표상되는 川脥 玉田 계통의 마구가 들어와 그것이 비로소 일본에서 계승 발전되었다고 하였다. 즉 일본에 4세기대의 기마문화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 또한 왜는 4세기대에 단검,단도, 두께가 얇은 양날창과 쇠화살촉 등의 무기를 주로 사용하고 5세기에 와서야 공격구(攻擊具)의 주류로서 장검을 채택할 정도였다. 두께가 얇은 양날창과 쇠화살촉은 어느정도의 갑옷과 방패만 있으면 치명상을 입힐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러므로 왜의 무장은 일부 射兵이 부가되어 있으나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短兵器가 주력이고, 실전적인 무기로서보다는 과시적인 威信財로서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인다.

그의 견해는 왜국의 부대는 단언코 주력부대가 아니고 소규모 부대로 가야 군대에 편입되어 용병으로 참가 했으나, 복색이 백제 신라 가야와 이질적인 왜군의 부대를 고구려가 크게 과장 하였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김태식 교수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써져있는 병신년(396년)의 기사를 두고, 왜가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면, 396년 병신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할 명분이 없다며, 기존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해석론에 의문을 제시하는 내용을 논문에 투고 하였다 [215][216]

제 1차 1분과 고대사
하마다 고사쿠 4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1k.pdf
김태식 4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2k.pdf
이시히 마사토시 5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3k.pdf
노중국 5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4k.pdf
사토 마코토 6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5k.pdf
김현구 6세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6k.pdf
제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좌담회 토론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7k.pdf
제 2차 1분과 고대사 논문 + 좌담회 토론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
7.2. 일본 학계[편집]
예전처럼 한반도 남부에 대한 식민지 경영과 같은 주장은 현재는 일본학계 주류에서도 거의 사라졌다. 대신 일본서기에 기록된 '왜곡된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좀 더 현실적으로 해석해서 기내(畿內)의 야마토 조정과는 무관한 큐슈의 지방 호족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로부터, 대마도 설치설, 일본의 '출장소' 또는 '출장기관'과 같은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등을 계속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의 신빙성이 의심받자 이제는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활발한 교류를 들어, 가야지역에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고, 이러한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가야의 왜(倭)'설[217]이나 왜의 식민지 지배기관이 아니라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로 이해하는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 등 다양한 견해가 나왔다. 이런 견해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임나일본부의 영역과 성립시기는 작아지고, 군사적 침략의 가능성은 옅어진다.[218] 2017년 6월 경 심용환 역사작가가 국내와 일본학계의 동향을 설명하며 학설 중 하나로 외교사절설을 언급하며 인터뷰한 적이 있다.

일부에서는 백제의 치적을 일본이 가져다 썼다는 말도 있다. 정확하게는 원래는 백제가 주도한 것인데 나중에 기록을 정리하면서 왜왕이 명령해서 왜가 주도한 것처럼 주어를 바꿨다는 설로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천관우가 제기한 주장이다.
7.3. 한국 학계[편집]
《일본서기》는 과장이 많지만 백제, 가야에 대해 한국 기록에 없거나 자세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정보가 많아 백제사, 가야사 전공 학자들에게 연구가 많이 되고 있는데, 일본서기에 기록된 '통치기구 임나일본부' 그 자체는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대신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왜'가 실제로는 백제라는 견해와 앞서 말한 한반도 내 일본 군사 세력의 잔영이라는 백제군사령부설이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는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사령부와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임나(任那)와 안라국(安羅)에 파견된 왜의 사신인 기비노오미와 가와치노아타이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아무튼 기존의 일본 사학계가 주장하던 식민지설은 점차적으로 폐기되는 추세이다.

일본인들이 지진, 태풍, 화산 폭발 등의 재앙을 피해 떼를 지어 한반도로 도망쳐온 것이 임나일본부의 실체라는 설도 있으나, 민간인이 아니라 통치 기관이 자연 재해 때문에 머나먼 타지인 한반도로 이주했다는 말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냥 '이런 설도 있다'는 차원에서만 보는 것이 맞을 듯. 다만 이 설을 차용한다면 6세기 초반에 갑자기 임나일본부의 기록이 사라진것도 '한반도에 피난온 일본인들이 재해가 끝난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식으로 설명이 가능하긴 하다.

일본서기의 서기 534~540년 시기에 안라국에 어떤 하나의 기관을 설치하고 왜인을 파견하는 부분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 기관의 이름을 임나일본부 또는 안라일본부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위 서술처럼 임나일본부 식민지경영설로 악용되었기도 했고 일본부라는 용어 자체도 당대에 사용되지 않은 등 문제가 있어 현대의 한국 학자들은 이 기관의 이름을 임의로 '안라왜신관'이라고 부르고 있다. 안라국에 설치된 왜인들로 이뤄진 기관이란 의미다. 게다가 《일본서기》 기록상 이 안라왜신관에 최초로 파견된 인지미(印支彌)라는 왜인을 파견한 것이 백제 성왕이었던 것으로 묘사되는데, 안라왜신관이라는 기관은 왜국이 아니라 백제에서 설치했다고 보는 게 한국 학계의 의견이다. 그리고 정작 《일본서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안라왜신관의 왜인들은 왜국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지 않고 때로는 왜왕의 의도와 반대되는 짓을 해서 왜왕이 당황하는 상황까지 나오는 등 왜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기관이란 모습이 자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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