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일본부설, 任那日本府説, みまなにほんふせつ, 임나(가야) 일본부 존재설
임나=가라국(금관가야)
일본 서기 일본서기의 문제가 되는 기록들에 대해서는, 비록 이 책에서 과장이 되긴 했지만 '일본부' 기록의 원형이 된 어떤 왜인 위주의 기관이 6세기 전반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데는 현대 한일 학계에서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 기관의 성격은 '통치기구'가 아니라 ‘백제-가야의 여러 나라-신라-왜국’이란 고대의 국제 다자구도에서 일종의 교섭 용도, 그것도 왜왕과 왜국 정부의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
일본의 고훈 시대에서 아스카 시대에 해당하는 서기 4세기-6세기 중엽 사이에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 일본부(日本府)라는 통치기구를 세웠으며 이 지역을 속국, 제후국(번국) 또는 식민지로 삼아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남조선경영론(南朝鮮經營論),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기 삼한정벌 이래로 일본학계에서 주장하는 임나의 일부인 임나4현 즉, 하다리, 상다리, 사타, 모루를 6세기 초반까지 소유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다가 512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임나국의 임나4현을 요구 했고 왜왕은 흔쾌히 받아들인다. 이듬해 513년에는 대가야가 백제의 기문과 대사라는 땅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데 대가야에게 빼앗기자, 왜왕에게 사신을 보내 되돌려 달라고 부탁하고, 왜왕이 재차 조칙을 내려 대가야의 기문(己汶)과 대사(滯沙)를 백제에게 할양하게 했다. 임나일본부설은 단지 그들이 한반도 남부 일대를 통치했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한반도 남부에 존재하던 백제, 신라마저도 마치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고 마음껏 전횡을 부렸던 것처럼 서술하는데, 이에 대한 일례로 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을 무례하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 책망하자, 백제인들이 스스로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이 즉위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일본서기 397년 응신 8년조의 기사에는 근초고왕 시절 백제가 정복한 침미다례 및 현남, 지침, 곡나, 동한의 땅을 아신왕이 무례하다는 이유로 빼앗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에 아신왕은 당황하여 태자 직지(후의 전지왕)를 파견하여 선왕의 우호를 잇게 하였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 다만 東韓은 아신왕이 죽고 왜국에 체류하던 전지왕을 백제로 송환하여 즉위하는 과정에서 왜국이 백제에게 빼앗은 땅의 일부인 동한을 다시 백제에게 주었다고 나온다. 또 458년에는 지진원(池津媛)이라는 백제 여인이 왜왕의 신하와 정을 통하였다가 발각되어 화형에 쳐해지고, 이에 놀란 개로왕은 동생인 부여곤지을 보내어 친선을 도모했다. 즉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중반에 걸쳐 고구려의 남하와 맞물려 왜국 자신들이 백제와 신라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인 점을 부각시켜 서술하고 있다.
특기할 점은, 근초고왕 치세기와 맞물려 시작된 이주갑인상의 연도 조작은, 백제가 일본서기에서 장수왕에 의해 정벌해 사라졌다라고 전하는 5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라진다. 직후에 등장하는 기사는 개로왕이 장수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가 멸망 했다고 이른다. 그 소식을 들은 왜왕은 문주왕에게 고마나리(웅진)을 주어 백제를 재건하게 한다. 그러다가 일본서기에 이르면 백제가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수복한 것은 6세기 중반으로 주장하는데 백제 성왕이 가야계 왜인들의 안라왜신관을 내쫒고 551년에는 성왕이 직접 가야군을 이끌고 신라와 연합해 한성을 수복하고 남평양 일대의 6군을 점령한 기록이 존재한다.
이주갑인상에 대해 특기할만한 점도 일본 국내의 사정을 다룬 기사에서는 이주갑인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한반도 관련 기사, 특히 백제에 관련한 기사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5세기 중반 백제가 고구려에게 멸망하고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가 이때 멸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이주갑인상은 사라진다. 이를 두고 김현구는 백제가 망해서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8대 성씨중 한개인 목씨가 이룩한 일들을 소급적용 해서 자신들이 통치 했던 것처럼 윤색 했다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것이, 일본서기에서 가야를 정벌한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백제에서 전횡을 일삼자 왜왕이 소환 (일본서기 414년, 광개토왕이 막 승하 했을 시기이다.)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미 大倭의 목만치라고 기록하며, 마치 왜국의 신하 인것처럼 소급해서 전하고 있다. 백제에서 건너간 이들 세력들에 의해 마치 왜국이 백제의 상전인 것처럼 기록 해놓고, 백제의 역사와 비교하고 나니, 자신들이 우위인것처럼 기록 했지만 정작 당대 백제의 기록에 비해 초라함과 한미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 이전 기록을 윤색해서 120년을 끌어 올린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다. 당대에 문자가 없어서 문헌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일본으로써는 120년을 끌어올렸으니 당연히 그 120년의 공백에 백제삼서를 인용하며 끼워 넣을수 밖에 없었다.
백제가 가야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가야 연맹국들에게 리더쉽을 회복 한것은 사비회의 이후 부터이다. 이 후엔 백제 성왕이 백제/가야 연합군과 신라군을 이끌고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서 다시 빼앗아 온다. 그래서 6세기 중엽에 일본의 가야 패권은 소멸 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 일본이 가야에 대한 패권을 완전히 잃은 것은 562년에 벌어진 신라와 백제 왜 연합군 사이에 가야를 두고 씨운 전쟁이다. 이때부터 가야는 근초고왕 이래로 200여년 간의 백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신라에게 완전히 복속된다.
일본서기에서 말하는 임나의 정의는 일관되게 가야의 통칭 즉, 전라남도 일대와 경상남도 일대 (김해 + 부산) 처럼 묘사되지만,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는 임나와 가야를 합쳐서 부르고 있는 용례가 있으며, 임나가야는 부산 김해 일대의 가야 연합체의 일부로 불리고 있어서 서로 충돌하는 경향이 있다.
간혹 국내 사서에서 임나라고 단독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일관되게 금관가야를 지칭한다. 후술할 내용이지만 임나와 가야를 같이 병기하며 별개의 나라로 취급하는 용례는 송나라에서 왜왕에게 하사한 육국제군사의 직위 밖에 없다. 임나 혹은 가야를 따로 언급하며 혼용하는 경우나 임나와 가야를 같이 병기하고 같은 국가 취급하며, 부산, 김해 일대의 금관가야를 칭하는 용례는 있어도... 가라에 대한 명칭에 대해도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일본어로 가라는 한국의 韓을 뜻한다. 일본어에서 한국의 韓은 가야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또 임나가야에서 임나의 접미어의 가야는 고대 韓語로 나라라고 해석된다. 즉 임나가야는 임나국 (예를 들어 한+국 = 한국, 미+국 = 미국)의 개념이고 가야는 일본어로는 韓이라는 뜻이고 고대 한국어로는 나라라는 뜻이다 .
선술한 바와 같이 일본서기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다 수용한다면 경상남도 전역에 걸친 가야 10개국의 강역은 물론이요 전라남도 일대 전역과 전라북도 일대와 충남 일대 충북 일대를 걸친 백제 강역의 대부분과 중복되는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사진의 B에 해당하는 강역이다. 즉, 일본이 말하는 임나는 가야 연맹체 10국과 선술된 임나4현과, 이밖에 일본서기에서 '임나'라고 불리는 국가들의 통합된 강역이다.
이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술에 대한 일본어 위키백과의 설명은 이렇다.
三書の中で最も記録性に富むのは『百済本記』で、それに基づいた『継体紀』、『欽明紀』の記述には、「日本の天皇が朝鮮半島に広大な領土を有っていた」としなければ意味不通になる文章が非常に多く、また、任那日本府に関する記述(「百済本記に云はく、安羅を以て父とし、日本府を以て本とす」)もその中に表れている。
삼서 중에서 가장 기록성이 풍부한 것은 『백제본기』로서 이를 토대로 한 『계체기』와 『흠명기』의 기술에는 「일본 천황이 한반도에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었다」고 하지 않으면 의미불통이 되는 문장이 매우 많았으며, 또한 임나일본부에 관한 기술(『백제본기』에는 임나가 안라를 부(父)로, 일본부를 본(本)으로 여긴다고 한다.」)도 그 속에 나타나 있다.
天皇が百済王に「賜」わったという地は、忠清道の洪城、維鳩、公州付近から全羅道の栄山江、蟾津江流域にまで及んでいる。これは、滅亡時の百済王が独立して、かつ正当に統治していた国家の領土とほぼ一致する。しかし、7、8世紀の交の在日百済王族、貴族はそれを天皇から委任された統治と表現せざるを得ない臣下の立場にあった。このような観念を実体化して、「高麗、百済、新羅、任那」は「海表の蕃屏として」「元より賜はれる封の限」をもつ「官家を置ける国」だった(『継体紀』)などというのは信頼し難い
천황이 백제왕에게 하사했다는 땅은 충청도의 홍성,維鳩,공주 부근에서 전라도 영산강, 섬진강 유역까지 이르렀다. 이는 백제가 멸망했을때 까지 백제왕이 독립적으로 통치하던 국토와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7-8세기에 백제 멸망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귀족들은 천황으로부터 위임받아 통치했다고 표현할수 밖에 없는 신하의 입장이었다. 이러한 관념을 실체화하여,'고려, 백제, 신라, 임나'는 '海表'의 번병 '원래 내려진 봉한'을 가진 '관가를 둘 수 있는 나라'였다(『계체기』)는 것은 신뢰하기 어렵다.
《일본서기》에서는 임나를 가라국(금관가야)을 포함해서 10국이 있다고 쓰여 있다. 가라, 안라, 사이기, 다라, 졸마, 고차, 자타, 산반하, 걸손, 임례 10개국과 임나4현이 일본에서 말하는 자신들이 통치했다던 강역이다. 이 10개국 중 예를 들어 합천 다라리에 다라국의 고수준 제철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다라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일본서기는 비록 해외 기록이지만 한국 측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삼국시대로부터 수백년 뒤 고려시대에 편찬된 것과 달리 좀 더 앞선 8세기에 편찬된 기록이므로,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가 사실이라고는 볼 수 없어도 부분적으로는 국내 기록보다 정확한 부분이 일부 있다고 확인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한반도와 관련된 기사는 모두 일본이 상전인 것처럼 조금씩 바꿔 써 놓은 게 《일본서기》의 특징이고, 이런 일본서기의 과장된 내용을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고 다른 사료를 여기에 짜맞춘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설이다.
일제시대 이래로 한일 역사학계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고, 현대 사학, 고고학이 발달하며 이를 부정하는 근거가 모인 끝에 '일본부의 존재' 가설은 2010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통해 폐기되었으나, 마치 한반도 남부 지역을 군사적으로 지배한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일본 내 역사 교과서에 아직까지도 인용되고 있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로 인하여 다시 고개를 슬금슬금 들고 있는 상황. 제1차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좌담회 부분에서 비판 받았던 내용인데, 일본측에서도 상기된 내용들이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라는걸 인식하고 있긴 하지만 개괄적으로는 사실을 바탕으로 쓴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측 김태식 교수와 김현구 교수등은 일본에서 사료비판 없이 일본서기에 기록 되어있는 내용등을 마구 적으며, 옛 사람들이 쓴 기사니깐 기사 그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라는 식의 방관하며 부연설명을 하지 않고 원문만 번역하여 개설서에 수록하며 일반인으로 하여금 현혹 하게 만드는 무책임한 서술 방법을 지적했다.
물론 학계에서 헛소리 취급 받는 것은 그림의 A, B, C와 같은 막나가는 주장 쪽이고, 그와는 별개로 일부 지역이 일본계 군사세력에게 공격받은 사례는 실제 있었던 일의 예시로 들 수 있다.
일본서기의 문제가 되는 기록들에 대해서는, 비록 이 책에서 과장이 되긴 했지만 '일본부' 기록의 원형이 된 어떤 왜인 위주의 기관이 6세기 전반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데는 현대 한일 학계에서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 기관의 성격은 '통치기구'가 아니라 ‘백제-가야의 여러 나라-신라-왜국’이란 고대의 국제 다자구도에서 일종의 교섭 용도, 그것도 왜왕과 왜국 정부의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것으로 등장한다.
A
진구 황후가 백제를 속국으로 두고 신라를 정벌했다는 주장(삼한정벌).
《일본서기》 내 신화적 변작으로, 정사로 인정되지 않음.
B
일본계 세력이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
일본어 위키백과 및 일본 내 일부 교과서에서 채용.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으로 간주, 시정을 촉구하고 있음.
C
옛 침미다례 및 가야 안라국(아라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부 또는 일본계 세력이 존재했다는 주장. 일본 내 일부 교과서에서 채용.
일본의 역사왜곡으로 간주되고 있음.
D
임나일본부는 실존하지 않으며,
안라국 등이 일본과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였다는 주장.
E
임나일본부는 실존하지 않으며,
한반도 남부 일대에서 일본계 또는 왜구의 제한적 활동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
F
임나일본부는 한반도 내에 존재하지 않으며, 대마도의 세력을 지칭했을 것이라는 주장.
G
임나일본부는 실존하지 않으며,
《일본서기》, 《고사기》 기록은 당시의 외교나 전쟁 등을 후세에 과장・변작한 결과라는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