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1947년, 남로당, 토벌대, 30,000명 학살, 3·1절 발포사건, 무장봉기, 강경진압작전, 주민희생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고,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이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 총파업이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지만,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을 모두 외지인으로 교체했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 등을 대거 제주로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벌였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서북청년회(이하 ‘서청’)는 테러와 횡포를 일삼아 민심을 자극했고, 구금자에 대한 경찰의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 일선 경찰지서에서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경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의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12개의 경찰지서와 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무장봉기가 발발하자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군대에 진압출동 명령을 내렸다. 당시 국방경비대 제9연대의 김익렬 중령은 경찰·서청과 도민의 갈등으로 발생한 사건에 군이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귀순작전을 추진해 4월 말 무장대측 책임자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대동청년단원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제9연대장은 교체되었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에 파견하여 5·10 선거를 추진했다.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제주도의 세 개 선거구 가운데 두 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됐다. 제주도가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결국 5·10 선거 후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1948년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령은 소개령으로 이어졌고,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됐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중산간 지대는 초토화의 참상을 겪었다. 11월 중순께부터 이듬 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중산간 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4개월 동안 진행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방화되었고, 마을 자체가 없어져버린 이른 바 ‘잃어버린 마을’이 수십 개에 이르게 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용하는 작전이 전개됐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한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고,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19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붙잡혀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결과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 「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4·3평화공원 등이 조성되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2011. 1. 26 현재), 희생자로 1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의의와 평가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제주 4·3 사건
Jeju April 3rd Incident
1947년 3월 1일 삼일절 발포 사건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 반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 해제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무장대원 체포
교전 세력
미군정
→ 대한민국 정부
조선경비대
→ 대한민국 육군
제주경찰감찰청
→ 제주도 경찰국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주요 인물
대통령 이승만
경무부장 조병옥
대한민국 육군 대령 함병선
대한민국 육군 대령 유재흥
남로당 제주도당 총책 김달삼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 이덕구
병력
약 3,000명
남조선로동당원 약 500여 명
제주도민 지원자 약 1,000여 명
피해
확인 사망자 10,715명
추정 사망자 60,000 ~ 80,000명
3,171명 실종
군인 180여 명, 경찰 140여 명 사망
결과
소요 사태 진압
무력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 대거 희생
영향
제주도민의 생활 기반 파괴
전국적으로 제주도 출신에 대한 사상검증·유언비어 발생
제주어 등의 토착 제주도 문화 말살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개정 2022.1.11.>
1.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려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목호의 난과 함께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여순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이런 여러 사건 중에 제주 4·3 사건은 사망자 숫자 자체를 비교하면 제1공화국 시기에 일어난 단일 사건으로는 6.25 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이는 당시 미군정과 그 이후의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이를 상대한 남조선로동당 세력들 모두가 민간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었기 때문이었다.
4·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하였다. 2003년 정부에서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해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165p)'으로 판단하고 있다.
해방 이후 제주도는 일본에서 귀환한 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및 식량 부족, 콜레라의 유행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고, 미곡정책 등에서의 군정의 정책 실패는 군정에 대한 민심을 악화 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집회 당시 경찰의 말에 아이가 치여 항의하러 모인 일반 시민에게 발포한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전개한 총파업을 초래하였다. 미군정은 총파업의 원인을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 및 이를 이용한 남로당의 선동으로 분석하였으나, 사후 대응으로는 후자에 비중을 두어 서북청년회를 파견하여 강경한 검거 작전을 전개했다. 조직이 노출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단독선거 반대'를 슬로건으로 경찰지서와 우익 인사에 대한 습격을 자행하였고, 5·10 선거를 방해하여 무효화 시켰다.
정부는 사태 진압을 위해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 지역 전체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실시하였다. 작전 결과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소각되었고,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동시에 해안 마을에서도 '북촌 사건'과 같은 불법적인 처형이 이루어졌다. 무장대 역시 마을을 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에 대한 살해를 저질렀다. 6.25 전쟁 기간 동안에는 예비 검속을 명목으로 많은 주민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54년 9월 한라산의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이러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다. 2020년 발간된 「제주 4·3 추가진상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12월까지 4·3위원회에 심의·결정된 민간인 희생자는 총 14,442명이었다. 사망자 중 78.7%는 토벌대에 의해, 15.7%는 무장대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희생자 중 20.9%는 여성, 14.5%는 15세 이하 아동과 60대 이상 노인층이었다. 특히 초토화 작전 시기(1948.10.11 ~ 1949.3.1.)에 전체 희생자의 67.2%가 발생하였다(84-89p).
2003년 발간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사태의 책임에 대해 군·경을 비롯하여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을 살해하고 지도부가 북한 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 시키는 계기를 제공한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의 무장대, 4·3 이전부터 도민과 마찰을 일으키고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 사건 등을 자행한 서북청년회, 초토화 작전을 통해 대부분의 희생을 발생 시킨 군 지휘부 및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 진압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 사건 발발과 진압 과정에 관련된 미군정의 책임을 모두 지적하고 있다(536-539p). 결과적으로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각 정치 집단들이 대부분 학살에 가담하거나 방관, 조장하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책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4.3 사건은 폭동적 시위진압을 시작으로 반군 진압을 명분으로 한 학살, 이념과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학살, 특정 지역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 보복성 학살 등등 사실상 지구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학살의 유형이 총집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 4·3 사건 발단
1947년 3.1 발포 사건
미군정 시기인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 행사 직후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치고 조치 없이 달아나자 성난 시민들이 경찰서에 몰려갔고 항의하던 시민을 경찰이 폭도로 오인하여 발포한 사건. 제주 4.3 사건의 발단이 된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다수가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으로 그들에게는 해방조국의 시민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통제와 감시의 대상으로 인식하던 것이 이 사건의 원인이었다.
1947년 3월 1일에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려 25,000~30,000여 명의 주민이 모였는데 이날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 남로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주주의청년동맹, 부녀동맹, 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한 17,000명의 군중과 제주읍, 애월면, 조천면 등에서 모여든 주변 주민들, 학생들 8,000명으로 구성됐다. 경찰은 제주 경찰 330명과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 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주변 경비 활동을 하였다.
시위대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을 지나가고 200명 정도의 군중이 시위행렬을 구경하던 중 사건이 터졌다. 오후 2시 45분경 기마경관 소속의 임영관(任永官) 경위가 시위를 막기 위해 군중들을 헤치다가 제북교에서 관덕정으로 들어서는 길 모퉁이를 돌려고 할 때 고빗길에서 서성대던 어린이가 타던 말의 발굽에 채였는데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을 비난하며 몰려들었고 기마경찰은 황급히 도망쳤다. 군중들은 도망가는 기마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돌팔매질과 더불어 거리가 난장판이 되기 시작하자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은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응원경찰들과 함께 관덕정 주변의 사람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에게 돌을 던진 건 잘못이긴 하지만 이에 대응한 경찰의 발포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 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사망자는 하나도 없었고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으며 "사망자 6명 중 5명이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사망자들이 시위와 관련이 없으며 경찰의 발포가 과잉 대응이었음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경찰은 관덕정 앞에서의 발포가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였으며 3월 1일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했다는 미확인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흘렸다. 3월 1일 저녁부터 제주도에 통행금지령이 선포되었고 다시 수백 명의 응원경찰이 육지로부터 파견됐다. 여기에 3월 1일의 시위와 관련하여 여러 명이 경찰에 끌려가자 제주도의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한편 제주 삼일절 발포 사건로 인해 격앙된 민심은 남조선로동당에게는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 남조선로동당은 제주도 내의 좌익 세력을 이끌면서 친일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대다수의 도민들은 여기에 호응했다. 거기에 3.1 발포 사건의 진상을 아는 우익 세력들도 우려를 나타내며 점차 경찰을 향해 광범위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가 동참하였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회사, 학교 등에서 공무원, 심지어는 미 군정청 통역단까지 파업에 참여하였다. 노동자, 학생들은 일제히 파업했고, 이는 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파업 참여자들은 3.1 발포 사건에 대한 사과와 발포자 및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주장했다. 심지어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도 파업에 참여하여 직장을 이탈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총파업은 이후의 이념적인 무장봉기나 국가 권력 주도의 학살이 연상되기 어려운 민중 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총파업에 참여한 직장과 사람들은 166개 기관, 41,211명이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인 미군정은 철저히 이런 요구 조건을 무시해버렸다. 미군 보고서는 총파업의 원인이 3.1 발포 사건에 대한 분노와 남조선로동당의 선동에 있다고 봤지만,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파 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파분자의 거점이라며 제주도민 모두를 좌파로 몰아갔다. 미군정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저항 세력을 모두 좌파로 매도하고 탄압해 총파업을 와해 시키려고만 했다. 곧 파업에 참여한 66명의 경찰이 해임, 그 자리는 육지에서 온 서북청년회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을 비롯하여 응원경찰들을 제주도로 파견을 보내, 조병옥의 지휘하에 경찰은 파업 본부를 습격하고 파업 참여자들을 잡아가며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탄압 때문에 3월 말부터는 총파업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탄압은 계속되었다.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한동안 이어졌고, 검거된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47년 3.1 발포 사건 이후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2,500여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들을 수용하기에 제주도의 감옥은 너무 좁았고, 때문에 미군 감찰반의 보고에 따르면 약 3평 정도의 방에 35명이 갇혀 있을 지경이었다. 수용자들의 상태가 최악이었던 것처럼, 감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는 제주도민들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유해진 제주도지사의 부임이다. 1947년도에 도지사로 부임한 유해진 지사는 미군정에게도 극우파로 규정된 인물로서, 도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치적 반대파만 탄압하고자 하였다. 유 지사는 "일반 대중을 극좌 단체로부터 분리 시키기 위해 극우 단체의 힘을 빌렸다"고 대놓고 발언하며 탄압 정책에 매진하였는데, 이는 미군정 관계자들조차 불만을 토로할 지경이었다.
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은 "그(유해진)는 자신의 편과 가까운 단체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단체의 회합도 금지했다. 이와 같은 유 지사의 행보는 본인(군정장관)은 물론 도민들을 당혹케 했다. 제주도 우익 테러 행위는 증가했고, 지사는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사가 부임한 이래 공직에서 해임되고 있다"며 제주도에 조성된 탄압적 상황을 꼬집었다. 제주도를 감찰하던 미군정 넬슨 중령은 "유 지사가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 이념을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를 해왔고... 경찰은 수없이 테러 활동을 자행했다"며 유해진 지사가 문제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미군정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는데, 탄압 정책에 동원되어 입도한 서북청년회원들은 극우 테러 활동은 물론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거나,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다. 우려가 있음에도 미군정은 4.3 전까지 제주도지사를 교체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북청년단의 이 같은 폭력 행위는 사상적 요인도 있었지만 경제적 요인과도 결부되었는데, 그들에게는 정규 봉급이 없었기 때문에 자금 모금을 위해 테러에 의존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같은 우익 진영과도 갈등하였는데, 서청 세력은 4.3 사건 진행 과정에서, 5.10 총선거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우익 청년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 약칭 족청) 단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집단으로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족청 단원 집단 사살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빨갱이(좌파)라는 지목은 순전히 탄압 주체의 자의적 독단에 의한 것이었다. 실제로 1948년 1월 CIC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의 지식인층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으며, 좌익 인사들도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고, 좌익 인사로 불리는 이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익을 위시한 이들의 빨갱이 공포 선동이 테러의 1차적 요인이었다. 애초에 제주도 좌익의 전통적인 관심사는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가난의 해결이었다.
이와 같은 극단적 탄압 국면이 심화되면서 점차 제주도민과 경찰 사이의 충돌도 빈번해졌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다. 경찰에 끌려간 20대 젊은이 3명이 잇따라 사망한 것이다. 경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이들은 모두 고문으로 죽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이 때문에 1948년 남한을 방문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회의에서 프랑스 대표가 고문치사 사건을 언급하며 질문했으며, 국제적인 관심이 있던 덕분인지 관련 경찰들은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형벌을 내렸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날을 기점으로 제주도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경찰의 폭력 행위는 3.1절 발포 사건 이후 경찰력이 육지발 응원경찰 위주로 교체되면서 본격화되었는데, 응원경찰의 취조는 매질부터 시작했다는 증언이 속출하는 등 경찰의 강압에 대한 도민 사회의 불만은 고조되어 갔다.
육지에서 온 토벌대는 제주어를 알아듣지 못해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일제는 앞서 1945년 패망했지만 아직 3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표준 일본어는 다들 학교에서 배워놓은 상태였으므로 이런 게 가능했는데, 이들이 당시 일본어로 소통한 것은 제주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이민족이라는 인식을 가진 것이고 이러한 인식이 대량학살의 촉발 원인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4.3 피해자 통계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추정치는 3만 명에서 최대 8만 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일가족 전체가 몰살 당하거나 학살 도중 육지로 도피해 살아남았어도 트라우마로 인해 신고조차 하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현재까지 유해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희생자 수는 아직까지도 늘어나고 있다. 또한 유해 발굴이 되었어도 신고한 사람 대부분이 70~80대를 넘긴 고령이거나 이미 사망한 경우도 허다해서 유해가 발굴되었어도 신원이 파악되지 못해 피해자로 등록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3 사건 희생자라는 뜻인데, 실제로 오늘날도 제주도에 가 보면 촌락별로 제사가 거의 비슷한 날에 치러지는 걸 보면 당시에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학살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수적으로만 따져도 인구가 적은 도서 지역에서 만 단위 이상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제주도에 인구학적인 영향(약 1/8 추산, 학살을 피한 주민의 한반도 본토 및 일본으로 이주 등은 별개)을 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4.3은 4월 3일 전후가 중심이 된 사건이 아니었고 4.3이란 명명에는 이 헬게이트의 원인을 무장대의 봉기에 귀인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으며, 실제 사건의 단초는 위에서도 서술하였듯이 3.1절 발포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3 사건에서 가장 중대하게 다루어져야 할 부분인 민간인 학살은 1948년 11월부터 본격 실시된 초토화 작전 때문이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일부 내용 중 주인공이 어느 하루에 동네 집집마다 다 같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아해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 소설의 소재가 된 북촌리 학살은 1949년 1월에 발생하였다. 즉 토벌대가 전도를 돌아다니며 순차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각 촌락별로 학살이 발생한 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지, 제주도 전체가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다.
브루스 커밍스는 제주 평화포럼에서 1949년 제주도민 사망자가 6만명 발생한 것으로 당시 임관호 제주도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했다는 전문가의 주장을 제기하였다. 또한 커밍스는 그 사망자가 8만 명일 수도 있다고 전문가의 주장을 제기했다. #
이 사건으로 인해 바다를 건너 전남, 부산, 일본으로 피난을 떠난 제주도민들이 상당수 있었다. 부산으로 건너온 피난민들의 대부분은 영도 쪽에 정착해서 살았다. 제주은행 부산지점이 부산의 중심가가 아닌 영도구 남항동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며, 영도에는 여전히 많은 제주 출신 해녀가 활동하고 있다. 덤으로 제주도민회관도 영도구에 있다. 공교롭게도 영도도 부산 안의 섬이다. 일본으로의 피난은 밀항으로 이루어졌는데 일단 자료로 확인된 일본행 밀항자는 281명이다. 자료로 확인된 숫자만 저 정도고, 여러 가지 밀항 루트로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참혹한 살육에는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무거운 책임이 있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봉기 자체가 이전부터 이어진 당국의 탄압 조치로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무리 미국 입장에서 제주도는 냉전 상황에서 군사 요충지 및 임시 거점으로 쓰일, 공산화되면 안 되는 곳으로 보일 수도 있더라도 미군정은 결코 그 요충지와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좋게 대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주민들을 탄압하던 일제에 협력했던 기존 관료들을 그대로 쓰고, 복시환을 비롯한 밀항선을 통해 자원을 자신들의 주머니로 빼돌리는 모리(謀利) 행위를 하였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주민들의 항의에 경찰이 총부리를 겨누어 일부 주민을 진짜로 죽이자,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좌파 탄압이라는 이념하에 폭력의 소용돌이를 더 크게 키웠다. 결정적으로 경비대가 이 폭력의 소용돌이를 수습하려 무장대와 맺은 4.28 협정이 정체불명의 세력의 훼방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군정은 김익렬의 진상 보고를 무시하였다. 실제로 피해자들 가운데 대다수가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의 초토화 작전으로 생긴 것이었다. 또한 제주도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이북 출신 극우 단체 등을 토벌 작전에 끌어들이면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해 당하도록 방관한 것도 결정적으로 비판 받아야 하는 점이다. 게다가 정부는 제주 4.3의 영향으로 발발한 여순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으며,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제주도에서의 학살을 계속해서 진행하였다.
한편 남로당 제주도당은 제주 도민을 선동하여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간 주체이다. 삼일절 발포 사건 이후 경찰의 도민 탄압과 극우 단체들의 폭력 행위를 핑계 삼아 자신들이 권력을 쟁취하고자 선동과 무장봉기를 통해 대안 없이 일을 크게 벌리면서도 이후 상황이 악화되자 '등산(입산)'하면 혁명적, 부등산은 비겁 행위'라며 제주도민들에게 입산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들과 북한이 연결되면서 제주도민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해진 반면, 남로당 지도부 6인(김달삼, 강규찬, 안세훈, 고진희, 문등용, 이정숙)은 도민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구실로 떠나버렸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남로당 무장대 역시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상대로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다. 이러한 남로당의 행위는 내란이 맞으며, 이념적 색채가 옅었던 도민들의 평화적인 권리요구 시위를 '미군정 전복을 꾀한 무장봉기'로 아예 성격을 뒤바꿔 놓으면서 결국 대규모 유혈사태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니 비판 받아 마땅하다.
주요 인물
남로당 제주도당/인민유격대
김달삼
이덕구
김의봉
양병시
안세훈
강규찬
군경토벌대
김상겸: 육군 대령. 러시아 제국군 및 폴란드군 출신으로, 독일 동프로이센에서 농장주로 지내다 1947년 국군에 임관하여 제5보병여단(현 5사단) 초대 여단장으로 부임했다. 제주도 경비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이었다. 부임 8일차에 여수·순천 10.19 사건이 벌어지자 그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고, 그 후임으로 부사령관이었던 송요찬 9연대장이 사령관 직에 대신 임명되었다. 제주도 경비사령관 직책을 수행한 기간이 고작 8일뿐이기에 그가 학살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불명확하다.
송요찬
함병선
유해진 :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제주도지사로 부임해 학살에 깊이 관여했다.
임관호: 유해진의 후임 제주도지사 유해진과 달리 학살에 부정적이었다. 도지사 취임 이후 남로당에 의해 도지사 관저까지 점령 당하는 등 여러 가지 수모를 겪다 결국 해임되었다.
조병옥
탁성록
김종원
김창룡
김익렬: 당시 9연대장. 경찰의 무분별한 진압에 회의를 느껴 김달삼과 직접 담판을 지어 동족상잔 상황을 멈추고 귀순 상황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학살에 적극 가담한 일부 경찰들과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같은 우익 단체들의 귀순 방해 공작(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유재흥: 한라산으로 도주한 제주도민을 '피난민'으로 규정해 이들이 산에서 안전하게 내려와 귀가할 수 있도록 하는 선무공작, 유화책을 펼쳤다. 이 유화책 덕분에 무사히 귀가한 도민의 수는 제주도 전체 인구의 20%(약 20,000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문형순: 당시 성산포경찰서, 모슬포 경찰서장을 역임. 예비 검속으로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총살을 거부하고 모두 석방했다. 이때 일명 '자수 사건'도 벌어졌다. 위에서 설명했듯 군경이 주민들에게 '자수'를 강요해 놓고 정작 자수한 주민들을 '적색분자 혐의가 있다'며 학살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자수를 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다'는 생각에 제대로 자수하거나 군경에게 협조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자 군경에게 협조하도록 주민들을 설득하는 일을 하던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이 문형순에게 '자수하는 주민들은 죄가 없으니 살려달라'고 부탁했고 문형순은 이를 받아들였다. 주민들이 자수하러 경찰서에 오자,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주민들을 처벌할(= 학살할) 준비를 하였으나 문형순은 이들을 내쫓고 이후 주민들의 자술서를 읽고는 '시시하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며 주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노력으로 그가 관할하던 지역은 제주도에서 가장 적은 8명의 사상자만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때 미운 털이 박혔는지 1953년에 경찰에서 퇴직한 뒤 쌀 배급소, 극장 직원 등의 일을 하다가 1966년 병사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독립군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어 생전 1번, 사후 5번의 독립유공 심사를 거쳤으나 모두 반려되었다가 결국엔 6.25 전쟁 참전이력으로 참전유공자로 재심사를 요청한 끝에 2023년 12월, 참전유공자로 인정되었다. 문형순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나온 제주 지역언론 기사. 이를 소재로 한 역사 만화가 존재한다.
김두찬 : 제5대 해병대사령관. 4.3 사건 당시 정보참모 신분(당시 중령)으로 위의 문형순에게 총살 지시 공문을 발송하는 등 당시 자행된 예비검속 학살을 주도한 실질적인 명령자이다.
미군정
존 리드 하지
윌리엄 딘
존 무초
로버트 소이어
브라운
관련자의 이후 동향
4.3과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은 4.19 혁명을 기점으로 많이 축출당하거나 사망했다. 면밀히 들여다보면 좌파 측 사건의 주동자인 김달삼은 협상이 결렬되자 북한으로 도망갔다가 6.25 전쟁 때 무장공비 지휘관으로 강원도 쪽을 헤집다 정선군에서 처형 당해 죽었다. 김달삼이 북한으로 향한 후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과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자리를 넘겨 받은 이덕구는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집중사격을 받고 사살됐다. 유격대가 무너져가고 도민들의 희생이 누적되는 가운데 투쟁을 중단하고 대피 생활을 지시했던 유격대 사령관 송원병, 조직부책 백창원, 군사부책 고승옥은 이에 반발한 대원들 손에 죽었다. 우익 측 인물 중 강경 진압을 지시한 조병옥은 4.19 혁명 전 병으로 사망했고 탁성록은 언제 죽었는지 모르나 학살을 저지른 데다가 마약쟁이라 오래 못 살았을 것이고 김창룡은 이승만 정권 밑에서 충실하게 개 역할을 하다가 1956년에 프래깅 당하고 김종원 역시 4.19 혁명 이후 병으로 사망했다. 미군정 치하에서 제주지사를 역임하며 서북청년단을 제주도 내 공직에 앉혀 불씨를 만든 유해진은 인민군에게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나마 송요찬 정도가 예외적인 경우인데 송요찬은 정군운동으로 강제 예편되기는 했지만 5.16 군사반란 이후 국방장관, 외무장관을 역임하였고 인천제철 사장을 지냈으며, 사망 직전인 1980년에는 국정자문위윈회 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이렇게 4.3 관련자들 대부분은 이승만 정권 중 사망하거나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쫓겨났지만 그 중 아무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은 처벌할 수 없었고 반공에 의해 4.3 사건이 부정되면서 그나마 살아있던 사람마저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끝내 처벌 받은 무장대 측 인물 역시 민간인 학살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이유에서 처벌 받았을 뿐이었다. 한편 학살을 방조 및 묵인과 더불어 강경진압을 직접적으로 지휘한 미군정 역시 사죄나 반성이 없이 본국으로 복귀했다.
피해자들의 후유증
제주 4.3 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를 들어보면, 이념과는 상관 없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
총살은 기본으로,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사람을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했고, 군경은 연좌제를 적용한다며 친인척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들을 공개처형했다.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육지 출신 군경이 직접 죽이지 않고 제주 사람들으로 구성된 민보단을 이용해 사람들을 한라산에 몰아 죽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사냥'하였고 이들이 추위에 못 버텨 하산해 투항하자(일명 '귀순자'들) 격리 수용하다가 한국 전쟁의 발발로 예비검속이라는 이름 하에 이들을 학살하는 일도 있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을 모아두고 돌팔매질을 하게 린치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비학동산이라는 곳에서는 임산부를 나체로 팽나무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들의 잔인함에 대한 증언 중에는 당시 폐허가 된 마을에서는 땅을 조금만 파도 시체가 마치 젓갈(멸치젓. 제주 말로 '멜젯') 담근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는 증언, 정방폭포나 천지연 폭포 등 제주 폭포 상당수는 '민간인'을 과녁으로 쓰는 서청이나 군대의 '사격장'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심지어 일본군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영아 살해'마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수습하고 진압하려 한 14연대는 남로당 성향을 지닌 부대원 일부에 의해 제주도 파견을 거부하고 경찰과 행정 기관들을 상대로 보복성의 성격을 가진 여순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이 모든 학살은 1940년대, 1950년대의 섬에서 벌어졌다. 21세기에는 항해, 비행 기술이 발달해 더 이상 섬도 단절된 기분이 들지 않고 마치 한반도와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만,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배가 몇 척 없을 정도로 제주도는 거의 단절된 섬 수준이었다. 그 시대에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몇 사람만 거치면 4촌 아래 혈족일 수준으로 외부 사람의 유입이 적을 텐데, 그곳에서 연좌제를 적용하여 잔인한 학살을 한 것이다.
4.3 사건 기간 동안 가족과 지인 등 가까운 주변인들도 쉽게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계속 반복되자, 마을에 남아있으면 누구든 빨갱이로 몰려서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과 억울함에 휩싸여서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걸 증명함과 동시에 민간에서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많은 제주도 청소년들이 일찌감치 국군에 자원 입대했는데,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대가 해병대였기 때문에 자연히 해병대로 입대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 제주도 청년들은 한국전쟁 동안 거제도 탈환 작전, 인천 상륙 작전 등에 참여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는 어떻게 보면 한국 현대사의 안타까운 장면이다. 비슷한 예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싸운 것도 "우린 쪽발이가 아니라 너희들과 같은 미국인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미국인들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이유로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코사크와 유대인들이 스탈린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에 입대하여 용맹히 싸웠고, 현대 러시아의 체첸인들도 보스토크 대대 등에 입대하여 싸우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4.3 사건의 후반기 당시 제주 지역 계엄군을 맡고 있던 해병대도 소규모로나마 양민학살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 당시는 일반 주민들이 정보도 얻기 힘들고 워낙 정신 없던 아수라장일 때라서 제주도민을 학살한 게 정확히 어느 부대/조직들인지 일일이 알려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해병대라는 부대에 대해 특별히 반감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전의 토벌대가 이미 죽일 만한 사람들은 다 죽였기 때문에 해병대가 계엄 임무를 맡은 시점에는 이전과 같이 마구잡이로 죽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 후 제주도에서 해병대 입대자가 많았고, 무엇보다 제주도 내 예비군 훈련을 해병대에서 담당해 왔기 때문에 현재도 제주도에서 해병대에 대해 특별한 반감이 있는 건 아니다. 사실 현재의 제주도민들도 구체적으로 어느 부대가 학살을 저질렀는지 잘 알지도 못한다. 경찰이 그랬다는 건 많이들 안다고 해서 오늘날의 경찰을 싫어할 리가 없는 것처럼 해병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해병대도 양민 학살에 참여했다는 것은 해병대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해병대측은 제주도 계엄 임무 수행 시절을 미화해 왔고 2019년에는 예비검속 학살에 책임이 큰 당시 정보참모 김두찬의 이름을 따 김두찬관이라는 건물을 교육훈련단에 개관하여 흑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얐다. 다행히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4.3 사건 후기에 정부는 계엄령을 폐지하고 산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귀순을 권유하였는데, 6.25 전쟁 중 예비 검속으로 이때 귀순한 사람들 다수가 학살 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송악산 기슭의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일어난 학살 등이 있다. 현재 그 희생자들의 무덤이 백조일손지묘란 이름으로 사계리에 조성되어 있다. 게다가 귀순한 사람들 말고도 무고한 사람들 다수가 모함이나 잘못된 정보에 의해 희생되었다. 마을 유지들한테 밉보였던 이들, 아니면 그 사람들의 일가친척 등이 학살 당한 사례가 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 중 가족이 사건에 연루되어 가족에게 전과 기록이 남은 사람은 민주화 이전까지만 해도 연좌제를 적용 받아 공무원, ROTC나 부사관, 교사 등 공직에 진출하거나 사관학교 등 각종 입학 시험과 취직, 승진에 불이익을 받았고, 심지어 해외로 출국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는 본인이 아무리 반공주의자라고 해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올가미였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지대하여, 제주도민의 보통 제주 밖을 일컫는 육지(한반도 측) 사람들에 대한 인식마저 극도로 악화되어 1990년대까지(!) 육지에서 제주로 시집 오거나 장가 온 사람들은 괜히 그런 이미지가 덧씌워져 고생한 일이 많았다. 21세기에도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과 대화하다 그쪽 화제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며 심하면 아예 대화를 끊을 정도이다. 바로 눈 앞에서 가족이 잔인하게 살해 당하는 걸 본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을 무덤덤하게 꺼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제주도에서 이 슬픈 역사 때문에 육지 사람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육지 측에서는 제주도 출신을 공산주의자의 자손 취급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21세기 들어 4.3 사건에 관련한 제주도민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옛 이야기가 된 것처럼 보여졌다. 하지만 태영호 국회의원이 2023년 2월 13일 '4.3 사건 북한 지령설'을 학술적 근거도 없이 꺼내든 것에 이어 정순신 아들 학교폭력 가해 사건에서 가해자인 정순신 아들이 피해 학생의 아버지가 제주도 출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빨갱이'라는 말을 쓴 것이 알려지면서 # 큰 충격을 안겼다. 이에 대해 오영훈 제주특별자치도지사는 대책 마련을 주문하기까지 했다.
문화적, 종교적 영향
4.3 사건은 제주어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사건 당시 제주어를 쓰는 사람들은 피해를 당하지 않게 제주인인 척을 안 하려고 억지로 제주어 사용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겼고, 사건 이후에도 (현재는 사라졌지만) 제주도에서 제주어는 훈육의 대상이었다. 수업 중 제주어를 사용한 교사는 장학관에게 지적을 받았고, 제주어를 사용하는 학생은 수업 중에는 반드시 표준어만 사용하도록 강요 받는 사례도 있었다. 게다가 6.25 전쟁 이후 육지 학생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투리는 촌스럽다'라는 인식까지 퍼져 현재 언어 사용 인구가 약 5,000~10,000명까지 줄어들었으며, 이는 현 제주도 인구의 1/60 수준이다. 그래서 현재 유네스코에 의해 소멸 위기의 언어 가운데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에 등록될 정도로 소멸 위기 상태이다. 다행히 현재 제주어는 보존되고 지켜야 할 소중한 유산이자 언어로 자리 잡았으며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에선 거주민들, 특히 학생들에게 제주어를 배우고 사용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제주어교육 활성화 조례. 일례로 제주의 초등학교들에서는 '제주어 연극 대회'가 열린다. 실제로 제주어 대본을 가지고 연극을 한다.
또한 이 사건으로 제주도에서 기독교 전체에 대한 인기가 떨어졌다. 제주인들은 예전부터 신축민란을 계기로 이미 천주교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었는데, 여기에 더해 4.3 사건의 학살에 주도적으로 참가한 서북청년회는 기독교 우파 성향의 한경직 목사 휘하 영락교회 청년들이 구심점이 되어 조직된 곳이라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단, 4.3 당시에는 개신교나 천주교나 둘 다 교세가 급격히 확장되었다고 한다.
개신교는 5개 교회가 파괴되었다. 4개는 무장대에 의해, 1개는 토벌대에 의한 것이었지만 파괴된 교회는 금새 복구한 후 군경 인원들에 의해 보호를 받았다. 무장대에 의해 순교한 이도종 목사 외에 16명의 교인이 사망했으며 4명은 토벌대에 의해, 12명은 무장대에 의해 희생됐다. 천주교는 신도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4.3을 방관했고, 성당 시설이나 교인들의 피해는 입지 않았다.
불교는 제주도 내의 종교 중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60개 사찰 중 총 56개가 파괴되었다. 여기서 16개는 전소, 1개는 일부 소실, 8개는 의도적으로 파괴되었다. 제주도 내의 사찰 3분의 2에 달하는 규모였으며, 현재까지 많은 사찰들이 복원되지 못한 채 부지들이 귤밭 등 농지로 쓰이고 있다.
21세기에도 제주도 기독교 신자의 비율은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쳐도 불교보다 낮은 형세이다. 제주도가 육지와의 종교 지형이 다르다곤 해도 현재의 구도가 이뤄진 것에는 4.3 사건이 영향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참고로 신축민란은 이미 1세기 이상이 지났으며, 민란 당시 무고한 천주교인들까지 공격을 당했기 때문에 천주교도 일부 피해자의 입장을 겸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1999년에 천주교 제주교구가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죄했다. 반면 4.3 사건은 해방 이후 일어난 사건이고 당사자들이 아직 생존한 경우가 있으며, 신축민란보다 더 길고 크게 일어난 유혈사태임에도 불구하고 학살에 참여한 영락교회는 별다른 사과를 표명하지 않았다. 이미 세상을 뜬 한경직 목사도 "반란군을 토벌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사실만 전해지지 따로 사죄를 표명하지 않아 현재는 사건과 관련이 없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의 진보 교단에서 대신 사과했다.
정치적 영향
4.3 사건은 제주 지역의 정치 성향이 '육지'에 있는 당과 상관 없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자유당과 민주당 모두 우익 정당으로서 4.3 사건에 관여한 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한 학살을 저지른 이승만 정권은 4.19 혁명으로 인해 축출되고, 조병옥이 몸담궜던 민주당이 세운 장면 내각도 5.16 군사정변으로 축출되어 어느 당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게 되었기에 제주도의 선거 양상은 당보다는 지연에 기반한 인물을 중시하고, (일명 제주도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당, '궨당') 제주도 출신 중 중앙 정계에 영향력 있는 인물을 배출하고 싶어하게 되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제주도는 박정희의 득표율이 가장 높았던 지역이었다. 민주당의 후신이었던 민정당 윤보선이 민주공화당 박정희를 상대로 남로당 전력을 들어 매카시즘 공격을 하자 그에 대한 반발로 4.3 사건의 악몽이 남아있는 제주도 사람들이 70%에 가까운 투표를 던져준 것. 그래서 한동안 제주도는 대선과 총선 모두 민주공화당이 승리하였다.
21세기에는 전체적으로는 4.3 사건의 진상규명을 도와준 적이 많은 대통령을 배출한 민주당계 정당의 성적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 계열 성향의 무소속 후보(우근민)가 당선되었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과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모든 선거구를 싹쓸이해갔으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3개 선거구에서 모두 당선되었다. 사실 제주도는 고향을 떠나 육지로 가는 사람들도 있고, 육지에서 이주하면서 4.3 사건과 연관이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애초에 제주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젊은 세대가 많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4.3 사건 추모식에 직접 참석해 진상규명과 사과를 약속하는 등 민주당 정권이 4.3 사건을 챙기는 것이 계속되면서 제주도의 성향도 차츰 민주당계 정당에 기울고 있다. 20대 총선에 이어 2020년 21대 총선, 2024년 22대 총선까지 민주당계 정당이 국회의원을 독차지한 것.
그렇다고 보수정당의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새누리당 후보였던 박근혜와 원희룡이 각각 승리하였다. 새누리당 후보들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4.3 사건, 지연 등이었는데 박 후보는 4.3 해결과 국가추도일 지정을 공약했으며, 원 후보의 경우는 본인이 고향인 제주도에서 먼치킨 급의 좋은 이미지(학력고사 및 사법시험 수석, 보수 정당 내 소장파 등)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주 출신을 중앙 정계에 고위 정치인으로 진출 시키고 싶은 것이 보수정당의 당선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현오봉 전 의원의 경우 공화당의장을 역임했고, 19대 총선 당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도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에서 6선을 거두었으며, 민정당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친박계 측근으로 박근혜 정부 당시 비서실장에 유력시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데, 보수정당이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이라고 추앙하자 제주도의 노년층 표심도 돌아서면서 19대 대선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보수정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세탁하면서 개인기로 제주도지사 재선에 성공한 원희룡을 제외하면 보수정당의 득표율이 대거 폭락하고 민주당에 거의 텃밭 수준의 몰표를 주었다. 이건 사드 배치 논란으로 중국의 보복에 경제적 타격을 입은 것도 있다. 원희룡 이전에 신구범, 김태환도 보수정당 출신 도지사로 선출된 바가 있다. 다만 둘 다 민주당계에 잠시 몸 담은 바가 있지만.
그리고 원희룡도 제주도지사직을 중도 사퇴하고 국힘 대선 경선에 참가하고 윤석열 지원 유세를 돌면서 도정 공백이 생기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20대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에 거의 호남 다음 수준의 몰표를 주었다. 때문에 역대 대선에서 처음으로 대선 후보 적중에 실패했다. 이제 제주도에서 지지를 얻을 만한 보수 인사가 없기 때문에 경합지역이 아니라 민주당 텃밭에 가까워졌다.
제주도민이 많은 타 지역도 상황은 마찬가지라서 부산에서 제주도민이 많은 영도구에서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김철훈이 영도구청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물론 영도구는 다른 원도심 지역처럼 보수 세력이 강하긴 하지만 그렇게 강하지는 않고 민주당계 득표율이 40% 이상 나오는 이유 중 하나를 제주도 출신 사람들의 영향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민주화(6.10 민주 항쟁) 이후에도 계속된 부정
민주화 이후에도 4.3 사건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다. 노태우 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정도가 비교적 약해졌을 뿐이지, 경찰에서는 학살 피해자들의 유족들을 단순한 안부인사나 행정상의 가정 방문 등을 명분으로 주기적으로 감시하고 방문/소환조사를 하였으며,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는 중에도 다른 면에서는 이런 탄압이 존재하였다. 문민정부 시절과 역사바로세우기가 끝난 국민의 정부 시절까지도 주민들은 진상규명과 경찰의 감시/연행/연좌제 중단, 피해보상 등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냈다. 아래 항목인 '문화에서의 4.3 사건'에 적혀 있듯 1990년 KBS1 <역사탐험> 불방사태, 1997년 <레드헌트> 사태처럼 다큐멘터리와 관련자들이 탄압 받은 적이 있으며, 이는 참여정부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참여정부 이후 다시 돌아온 보수정부 시대에는 다시 묻으려고 했다. 이명박 정부 시기, 원세훈 국정원장 시절인 2009년에 어처구니없게도 최고의 대공(對共) 전문가도 탄압 받은 일이 있었다. 윤 모 단장은 2009년 5월 감찰실 직원과 점심을 먹다가 "제주 4.3 진압은 정부 쪽에서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는 말을 했다. 감찰실은 윤 단장의 발언을 '좌파적 발언'이라고 몰았고, 윤 단장은 대기발령 끝에 해임 당했다. 정작 미군 G-2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한 제주도민들 중 80% 이상은 토벌대에게 죽었다. 윤모 단장이 한 말은 좌우파를 떠나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기발령 끝에 해임 처분을 받은 것이다.
2014년에 새로 바뀐 역사 교과서에서는 실리지 않는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사 교과서에 기재되었다. 설명이 줄기는 했는데 이건 과목 전반의 문제라...
마침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인 이영조가 2010년 11월 5일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벌어진 국제학술회의에서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 폭동(communist-led rebellion)'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빚게 되었다. 사실 관계만 논하자면 4.3 사건의 발단부터가 남로당 문제와 거리가 멀고 이를 진압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의 희생을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더욱 논란이 된 것이다.
2014년에 박근혜 정부의 공약에 따라 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공약을 안 본 거 같은) 자칭 우파 단체가 반발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까지 언급했다. # 또한 제주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박원순 서울시장이 만든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좌파 폭도들을 감싸고 이승만 대통령을 학살자로 만드는 등 왜곡되었다며 박원순 시장의 사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예비역 영관장교 연합회'라는 어버이연합과 비슷한 시기에 반짝하고 나타난 극우 단체가 제주 4.3 사건 당시 일어났던 군의 학살을 극구 부정하고, 군이 오히려 정당한 대처를 했다고 주장했다. 2015년 12월에 행정자치부는 보수단체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희생자 재조사를 시도하려 했으나 유관단체들의 반발로 2016년 2월에 보류됐다.
2020년 4월에는 미래한국당의 7번 비례대표 후보 정경희 영산대 교수가 4.3 사건을 두고 좌파의 폭동으로 지칭한 것이 드러나 4.3 사건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이 반발하는 성명을 냈다.
2023년 2월 13일 태영호 국회의원은 4.3 사건이 남로당 지부가 일으킨 단독 행동이 아니라 김일성이 주도하여 발생했다는 북한 지령설을 주장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2023년 2월 24일 정순신 아들 학교폭력 가해 사건의 가해자인 정순신 아들이 피해 학생의 아버지가 제주도 출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피해 학생에게 '빨갱이'라는 말을 쓰면서 괴롭힌 사실이 밝혀졌다.
2023년 3월 21일에는 우리공화당, 자유당, 자유민주당, 자유통일당 등 4개 극우 정당이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다'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제주도 곳곳에 게시하여 논란이 일었다.
부족한 인지도
2017년 이후에도 제주 4.3 사건은 다른 대한민국의 민간인 학살 사건인 보도연맹 학살 사건, 5.18 민주화운동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인지도가 적고 공교육 과정에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교과서만 해도 국사 과목 시절 국정교과서에는 4.3 사건이 날개로 아주 짧게 나온 것으로도 모자라 반공 논리를 내세운 서술이 눈에 띌 정도였다. 그나마 제7차 교육과정 내 한국사 검정교과서에서는 비상교과서 기준으로 서술도 좀 중립적으로 바뀌었고, 탐구 활동으로 관련 자료를 더 추가했다.
<제주4·3 인지도 및 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68.1%는 4.3 사건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다" 고 답하긴 했지만 4.3 사건에 관심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비율은 16.2%에 그친 반면, 관심이 없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비율은 50.2%에 달했다. 이는 99%가 관심을 보인 5.18 민주화운동, 75.7%가 관심을 보인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수치이다.
4.3 사건에 대해 인지도가 낮기 때문인지 각 지역구에서는 4.3 학살을 주도했던 군경 출신 인물들의 기념 사업을 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여전히 제주도 이외의 지역에서 4.3 사건의 인지도가 낮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예시로 제주도로 경찰병력을 증원한 조병옥 당시 경무국장의 흉상 건립 방안이 서울 강북구에서 논의되다가 4.3 단체들의 항의로 취소되었고, 송요찬 당시 제9연대장의 선양사업을 고향인 충남 청양군에서 실시하려다 역시 4.3 관련 단체의 항의로 철회되었다. 심지어 2019년에는 경북 포항 해병대교육훈련단 복합교육센터 명칭을 예비검속 학살 명령권자인 김두찬 당시 중령의 이름을 따 '김두찬관'으로 명명하였다가 4.3단체의 항의 및 국방부의 시정조치로 이름을 충성관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남로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4월 3일 이전에는 제주 4.3 사건이 민중항쟁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걸 선뜻 떠올리는 국민은 연령과 지역을 막론하고 드물다. 4.19 혁명, 부마민주항쟁, 5.18 민주화운동, 6.10 민주 항쟁 등 다른 대한민국의 민중항쟁도 유명세에 비하면 놀랍도록 전문가에 의한 학술적 연구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인데, 4.3에 대해서는 제주 지역 언론, 시민단체, 향토사학자들이 아니고서는 거의 관심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4.3에 대해서 남아 있는 자료의 수는 결코 적지 않지만, 대다수의 논자들이 이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는 것도 문제다. 십수 년 전 제민일보사에서 출간한 '4.3은 말한다' 같은 연구서만 해도 두꺼운 책이 5권이나 됐지만, 세월이 흘러 절판됐고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 원문 보기 형식으로 올라와 있어서 굳이 보려면 시간을 내서 협약 공공/대학도서관의 원문 검색용 컴퓨터로 접속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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