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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52

통일혁명당간첩사건, 1968년, 김종태, 신영복

1968년 발표된 대남(對南) 대규모 간첩단사건으로 1971년 재건이 기도되었던 사건. 김종태(金鍾泰)를 정점으로 한 이른바 통일혁명당(統一革命黨, 약칭 통혁당)은 북한노동당의 실질적인 재남지하당(在南地下黨) 조직으로서 전 남로당원·혁신적 지식인·학생·청년 등을 대량 포섭하였다. 김종태는 북한노동당의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許鳳學)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미화 7만 달러와 한화 2,250만 원)을 받고 남파된 거물간첩이었다. 통일혁명당은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정부전복을 기도하려다가 일망타진되었다. 이 사건에 관련되어 158명이 검거되었으며, 그 중에는 문화인·종교인·학생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73명이 송치(23명은 불구속)되었는데, 김종태는 1969..

칠천량 해전, 정유재란, 칠천도, 원균, 유일 패배 해전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원균(元均)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했다.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몄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해 섬멸하려고 일본의 이중첩자인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유혹했다. 이에 도원수 권율(權慄)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상의해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원균은 ..

청산리 대첩, 1920년,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 북로군정서군, 홍범도, 대한독립군

1920년 10월 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 국권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기지를 설치해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1919년 8월에 서일(徐一)·김좌진·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奎植)·최해(崔海)·정훈(鄭勳)·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북로..

철의 삼각지대 전투,  6·25전쟁, 철원·김화·평강

6·25전쟁중 철의 삼각지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투. 철의 삼각지대란 철원·김화를 저변으로, 평강을 정점으로 한 삼각지대의 군사적인 호칭이며, 신고산∼평강으로 이어진 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는 경원선과 5번국도가 이 지대에서 철원-연천-의정부-서울, 김화-포천-의정부-서울과 그 밖의 여러 곳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나진·성진·원산항에 양륙된 군수물자와 각지에서 동원한 병력을 이 지대에 집결시킨 뒤 전선에 투입한 공산군 최대의 중간 책원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철의 삼각(Iron Triangle)’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작전이 이 지대 일대에서 펼쳐졌다. 그 중에서도 쌍방의 전체적인 작전과 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중..

천리마운동, 1958년, 노력 경쟁(勞力競爭), 노동강화운동

노력 경쟁(勞力競爭)을 통하여 생산 증대를 꾀하려는 북한의 노동강화운동. 사회주의 경쟁운동의 하나로서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실시배경은 당시 ‘3개년계획(1954∼1956)’의 수행으로 전후 복구 건설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으므로, 이 바탕 위에서 새로운 ‘인민경제5개년계획(1957∼1961)’을 실시하려고 1956년 김일성(金日成)이 소련과 동유럽을 순방하면서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함에 따라, 부득이 자체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 있다. 5개년계획을 자체적으로 추진하자면 내부적인 예비자원이 동원되어야 하고, 또한 절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56년 12월에 열린 당전원회의에서는 ‘최대한의 증산과 절약’을 내세워 종래의 노력경쟁운동을 한층 강화하기로 방침을 세웠..

처인성 전투, 고려, 몽골 제2차 침입(1232), 승장(僧將) 김윤후, 사르타이 사살

고려시대 몽골의 제2차 침입(1232) 때 처인성(處仁城)에서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가 적장 사르타이[撒禮塔]를 사살한 전투. 1232년(고종 19) 6월 고려는 몽골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그 해 몽골의 장수 사르타이가 고려의 북계(北界)에 침입하여 서경의 반적(叛賊) 홍복원(洪福源)과 합세하여 고려를 위협하였다. 사르타이는 고려가 해도(海島)인 강화로 도읍을 옮긴 것을 꾸짖고, 국왕이 육지로 나올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사르타이는 북계에서 남쪽으로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을 함락하고, 수주(水州)에 예속되었던 처인부곡(處仁部曲)의 소성(小城), 즉 처인성에 도달하였다.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난을 피하여 처인성에 와 있던 백현원(白峴院..

진주전투, 임진왜란, 1592년, 1593년, 김시민

임진왜란 때인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 김시민(金時敏)·김명원(金命元) 등이 진주에서 왜군과 싸운 두 차례의 큰 전투. 1592년(선조 25)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 간 계속되었다. 왜군은 진주가 전라도로 가는 경상우도의 대읍이며, 경상우도의 주력군이 진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주성 공격계획을 세웠다.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나가오카(長岡忠興) 등은 9월 24일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집결지 김해를 떠나 노현(露峴)·창원·함안을 거쳐 마현(馬峴)과 불천(佛遷)으로 나누어 쳐들어왔다. 이러한 적군의 동태를 접한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진주에는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이끄는 군사 3,700여 명과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100여 명..

진주민란(晉州民亂), 1862년, 철종, 반관숙정운동(反官肅正運動)

1862년(철종 13) 2월 18일에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반관숙정운동(反官肅正運動). 철종 때의 임술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직접 동기는 경상도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불법 탐학에 있었다. 그는 부임한 이래 갖은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한 금액이 줄잡아 4만∼5만 냥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진주목의 역대 불법 수탈곡인 도결(都結) 8만4000여 냥을 일시에 호별로 배당해 수납하려 하였다. 우병영(右兵營)에서도 이 기회를 이용해 신구범포곡(新舊犯逋穀)인 환포(還逋) 7만2000여 냥을 농가에 분담, 강제로 징수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처사는 그렇지 않아도 파탄 지경에 다다랐던 농민들을 극도로 분격시켰다. 진주에서 서남쪽으로 30리쯤 떨어진 유곡동(杻谷洞)에 사는 유계춘(柳繼春)은 김수만(金守滿)·이귀..

진보당사건, 1958년, 이승만 정권, 진보당 조봉암

1958년 7월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 당수 조봉암 등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사형시킨 정치탄압 사건. 1959년 7월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 간첩죄 혐의로 체포하여 조봉암을 사형 집행하였으나 2011년 1월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사건. 1952년 8월 5일의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79만 7504표를, 1956년 5월 15일의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무려 216만 3808표를 얻은 조봉암이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을 결성하고 지방에서 지역당 조직을 확대해 가자 이승만 정권은 정치적 위협을 느꼈다. 서울시 경찰국은 1958년 1월 9일 “김달호, 박기출, 조규희, 이동화 등이 사회주의제도로 개혁하고 정부를 변란 할 목적 하에 진보당을 창당 조직하고, 북한 괴뢰집단과의 협상으로 무력재..

직선제개헌, 1985년, 삼민헌법쟁취투쟁론, 6·29선언, 6월항쟁

1985년 2·12총선거 직후부터 벌어진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1985년 2·12총선거를 통해 제도권 정당의 지형도가 새롭게 재편되고 야당과 재야운동단체들의 연합으로 반정부 세력의 규모와 내실이 강화되는데 있어 중요한 핵심 의제로 작동했다.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법적으로 보장가능하게 했던 제5공화국 헌법 개정의 문제는 2·12총선거 직후부터 야당과 민주화운동 내부에서 꾸준히 제기되었다. 2·12총선거를 통해 창당한지 채 1개월도 안 되는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급부상했고, 지도부는 1985년 8월 전당대회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식당론으로 확정하였으며 이를 12대 국회의 일차적 의제로 설정했다. 1985년 9월 신민당은 정기국회에서 ‘개헌을 위한 특별위원회(개헌특위)’..

중종반정(中宗反正),1506년, 연산군, 진성대군 이역

조선 제10대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 이역(晉城大君 李懌)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 이른바 훈구세력이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 등의 궁금세력(宮禁勢力)과 결탁해 학정을 거듭하던 연산군을 폐위시킨 사건이다. 연산군은 당시 특권 관료층인 훈구세력과 성종 때부터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 사림세력이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왕위에 올랐다. 그는 1498년 훈구세력과 결탁해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사림파를 무오사화로 한 차례 거세하였다. 이로써 정치적 우세를 더욱 확고히 한 훈구세력은 그 횡포가 더욱 심해지고 권귀화(權貴化)의 경향을 현저하게 보였다. 이러한 가운데 연산군은 궁금 계열 중심의 측근 세력을 새로이 등장시켜 ..

종로경찰서투탄의거, 1923년, 의열단, 김상옥

1923년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건.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경 폭탄이 경찰서 서쪽 경무계 사무실에서 폭발하여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하였다. 투탄에 성공한 김상옥은 그날 밤으로 삼파동(三坡洞)주 01)에 있는 매부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일본경찰에 포위되었다. 이 곳에서 총격전을 전개하여 형사부장 마에무라(前村)를 비롯하여 우메다(梅田)경부 등을 저격한 뒤 왕십리를 거쳐 효제동으로 도주, 은신하였다. 그러나 22일 다시 은신처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치열한 총격전을 3시간 동안 전개하다가 마지막 남은 총탄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동지들이 붙잡혀 투옥되었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

종계변무, 宗系辨誣, 명나라, 이성계, 대명회전, 윤이, 이초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했던 사건. '종계'란 종가의 혈통, '변무'란 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힌다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라 한 적이 있다. 이 때 윤이 등은 이들이 공모해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면서, 이성계의 가계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종계(宗系)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일평양선언, 2002년, 평양, 고이즈미, 김정일

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일본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인한 선언문. 1999년 8월 10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발표한 성명 ‘조일관계의 현 사태와 관련한 3가지 원칙적 입장천명’에는 북한이 대일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목적이 밝혀져 있다. 그 목적은 첫째, 일본이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새로운 정책전환으로 나오게 하고, 둘째, 일본이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과거의 모든 죄행에 대하여 사죄하고 보상하게 한다는 두 가지이다. 경과 북한과 일본의 두 수뇌들은 조일사이의 불미스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현안사항을 해결하며 결실 있는 정치, 경제, 문화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쌍방의 기본이익에 부합되며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큰 기여로 된다는 공통된 인식을 확인하였다...

조일수호조규속약,1882년, 간행이정 50리,2년 후 100리

1882년(고종 19) 7월 17일(양력 8월 30일) 조선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과 일본 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 사이에 체결된 전 2조로 된 조약. 같은 해 6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나 청일 양국의 군대가 서울에 진주하자, 일본은 개항 이후 미해결로 남아 있던 문제를 결말짓기 위해 하나부사를 파견, 강력한 외교공세를 펴왔다. 먼저, 임오군란으로 입은 일본측 손해배상과 공사관 수비병 주류문제를 타결하는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같은 날 수호조규속약을 조인하였다. 수호조규속약은 조일수호조규부록을 협상할 때 우리측의 강력한 반대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던 간행이정(間行里程)을 확대하는 것과, 일본인 외교관과 그 수행원 및 가족의 조선 내지여행권의 확보에 대한 것이었다. 더한층 친호를 두텁게 하고 무역의 편의를..

조위총의 난,1174년,명종,서경민 반란,무신정권,서북민,민란

1174년(명종 4)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발해 일으킨 난. 1174년(명종 4)에서 1176년(명종 6)까지 약 3년 동안에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대항해서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서경유수(西京留守)였던 조위총은 국왕을 폐립하고 문신을 학살해 전횡을 일삼던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을 타도하고, 자신과 서경(西京)주 01)인의 세력을 펴기 위해 난을 일으켰으나, 윤임첨과 두경승 등이 이끄는 관군의 활약으로 끝내 실패하고 만다. 경과 서경유수 조위총은 1174년에 정중부 등의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 동계(東界)주 02)와 북계(北界)주 03)에 “개경의 중방(重房)에서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고 군사를 발했으니 각각 병마(兵馬)를 규합해 서경으로 모여라.”고 격문을 돌..

조소우호협력및상호원조조약, 1961년, 북한, 소련, 군사동맹조약

1961년 7월 6일 북한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양국 간의 군사동맹조약.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특징은 유사시 군사적 자동개입을 규정한 양자동맹조약이라는 것이다. 김일성의 소련 방문 중 체결된 이 조약은 6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핵심 내용은 ‘체약 일방이 어떠한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지체 없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소련 양국 간의 경제·문화·기술의 원조·제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당시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등 다자간 안보조약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는 양자조..

조-소 양국 간의 경제적 및 군사적 협조에 관한 협정, 1949년, 김일성, 스탈린, 모스크바

1949년 3월 김일성과 스탈린의 모스크바 협상에서 체결된 경제문화협정. 개설 건국 직후 북한 정부대표단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 소련 정부대표단과 회담을 갖고 경제문화교류 협정을 비롯한 기타 부속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주목할 사항 중의 하나는 북소 지도자 사이에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 문제가 논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1949년 3월의 김일성과 스탈린의 협상은 경제적 문화적 교류와 군사적 협력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 요구한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원조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4천만 달러 상당의 차관이었다. 이 차관은 경제적이며, 동시에 군사적 성격의 차관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요구한 지원 요청에 대부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고, 소련은 북한의 후견국..

조선총독부투탄의거, 1921년, 의열단, 김익상

1921년 의열단(義烈團) 단원인 김익상(金益相)이 조선총독부청사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 당시 27세의 김익상은 1921년 9월 중국 북경(北京)에서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조선총독부 폭파와 총독 등 일제 요인 처형을 위하여 폭탄 2개와 권총 2자루를 건네받고 같은 달 11일 서울로 잠입하였다. 이튿날인 13일 아침 변장하고 왜성대(倭城臺)에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가 2층 비서과와 회계과에 각각 폭탄 하나씩을 던졌다. 처음에 던진 것은 불발되고, 두 번째 던진 것은 커다란 폭음과 함께 폭발하여 건물의 일부를 파괴하였다. 김익상은 혼란에 빠진 조선총독부를 빠져나와 평양을 거쳐 만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제 식민지지배의 상징인 조선총독부에 대한 폭탄투척은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파문..

조선물산공진회,1915년,경복궁,박람회,일제강점기박람회,일선동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일제가 일부 건물을 훼손하거나 수축하여 경복궁에서 전국의 물품을 수집·전시한 대대적인 박람회.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 한국인에게 군사력과 경찰력으로 철저한 물리적 통제를 가하였다. 그들은 또 한편으로는 지배의 합법성을 창조하고 유지하기 위해 문화와 역사를 교묘하게 왜곡하거나 조작하면서 한국민의 상대적 열등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또한 1910년대에 무단통치를 실시하면서 일제는 동시에 동화주의를 표방하였다. 그들은 총독정치가 조선인민의 복리를 증진하는 데 기여한다고 강변하면서 병합으로 한국민은 큰 혜택을 입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일제는 병합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고 이른바 조선의 진보와 발전을 한국민에게 전시하려는 의도에서, 시정(施..

조선어학회사건,1942년,조선어연구회,조선어사전편찬회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 한말에 일어났던 한글운동이 3·1운동 후 다시 일어나면서, 1921년 12월 뒤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된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이로써 민족의 숙원이며, 문화민족의 공탑이요 민족정신의 수호인 사전을 만들기 위한 일이 시작되어, 사전 편찬의 바탕이 되는 「한글맞춤법통일안」·「표준어사정(標準語査定)」·「외래어표기」 등을 제정하는 등 말·글의 연구 및 정리, 보급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중국 침략을 목전에 두고 조선 민족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해갔다.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한 후, 1937년에는..

물산장려운동, 조선물산장려운동,1920-1930년대, 경제자립운동.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한민족이 거족적으로 전개한 경제자립운동. 국권상실 후 일제의 경제침략은 더욱 거세어 일본자본에 의해 우리 민족의 생활권은 잠식되어갔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민족의 자각을 촉구해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근대기업을 일으켜 자주·자립경제를 수립,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경제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경제자립을 위한 민족적 자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직후부터이며, 1920년대 초부터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다. 1920년 봄 평양기독교계의 민족지도자들은 민족기업의 건설과 육성을 촉구하는 조직체 결성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이 해 8월평양야소교서원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발족하였다. 창립총회에는 평양의 유지 70여 명과 교육자·종교인·실업인 및 혁신 청년들이..

조선국한행이정약조,朝鮮國閒行里程約條,1883년,일본인 여행허용지역 확장

1883년(고종 20) 6월 조선 내에서의 일본인 여행허용지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조선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 조선국 전권외무독판 민영목(閔泳穆)과 일본 전권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郎]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인은 이전보다 두 배나 넓은 지역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는데, 허용된 지역은 다음과 같다. 인천항에서는 동쪽으로 안산·시흥·과천까지, 동북쪽으로 양천·김포까지, 북쪽으로 강화도까지이고, 원산항에서는 서쪽으로 덕원부 마식령까지, 남쪽으로 안변부 고룡지원(古龍池院)까지, 북쪽으로 문천군 업가직(業加直)까지이며, 부산항에서는 동쪽으로 기장까지, 서쪽으로 김해까지, 남쪽으로 명호(鳴湖)까지, 북쪽으로 양산까지이다. 그리고 이 조약은 여행중인 일본인이 범죄행위를 저지른다 하여도 치외법권을 인정하..

조선국권회복단중앙총부사건, 1919년, 조선국권회복단원 체포

1919년 6월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이 대거 체포되었던 사건. 조선국권회복단은 단군(檀君)을 받들고 신명을 바쳐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과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지도자와 연결,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15년 1월 15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安逸庵)에서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 등이 시회(詩會)를 연다고 가장하고, 경북지방의 유림들을 포섭, 항일운동결사를 조직하였다. 조직은 통령(統領)에 윤상태, 외교부장에 서상일, 교통부장에 이시영·박영모(朴永模), 기밀부장에 홍주일(洪宙一), 문서부장에 이영국(李永局)·서병룡(徐丙龍), 권유부장에 김규(金圭), 유세부장에 정순영(鄭舜永), 결사부장에 황병기(黃炳基) 등으로 구성되었다. 활동..

조비무고사건, 고려 충선왕, 충선왕의 개혁정치, 계국대장공주, 충선왕 퇴위, 원간섭 강화계기

고려 충선왕 때 왕실에서 일어난 무고(誣告) 사건. 1298년(충선왕 1)에 몽고인 왕비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가 충선왕의 다른 왕비인 조비(趙妃)를 시기해, 조비가 자기를 저주했다고 무고함으로써 발단된 사건이다. 충선왕은 1295년(충렬왕 21)에 조인규(趙仁規)의 딸을 맞이하였다. 다음해에는 원나라에서 성종(成宗)의 질녀인 보탑실련(寶塔實憐)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들이 각각 조비와 계국대장공주이다. 계국대장공주가 충선왕과 조비 사이를 시기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298년에 충선왕이 양위를 받아 즉위한 뒤 수개월 만인 그 해 5월 종신(從臣) 활활불화(闊闊不花)와 활활대(闊闊歹)를 원나라에 보내어 조비가 자기를 저주했음을 무고하였다. 이로써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불화가 원에 알려..

제물포조약,1882년,임오군란,조선,일본,불평등조약

1882년(고종 19) 8월 30일(음력으로 7월 17일) 임오군란으로 빚어진 양국 간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약. 6개조의 본조약과 2개조의 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으로 되어 있다. 임오군란 이후 청일 양군의 한성진주와 흥선대원군의 청국 납치 문제 등이 민씨정권의 재집권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이후 군란 뒤처리를 위한 조ㆍ청ㆍ일 3국의 절충 협의가 다각도로 벌어지게 되었다. 일본은 군란 때 일본세력의 조선 침투에 민족적 의분을 품고 있던 병사들과 시민들에 의해 공사관이 습격당했고, 별기군(別技軍) 교관 호리모토(堀本禮造)등 수 명이 살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군 3,000명이 한성에 진주하면서 청국의 정치적 영향은 커졌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의..

제네바회담, 1954년, 유엔참전국, 19개국 외상,스위스 제네바,한국의 평화적인 통일방안,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 회담 결렬, 분단

1954년 4월 26일∼6월 15일까지 유엔참전국을 비롯한 19개국 외상들이 스위스 제네바 전 국제연맹회관에서 한국의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개최했던 국제정치회담. 1953년 7월 27일판문점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이는 전쟁을 군사적으로 종결시켰을 뿐,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휴전협정 제4조 60항은 휴전조약이 조인되어 효력을 가진 뒤 3개월 안에 한반도로부터의 외국군 철수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토의할 고위정치회담을 열도록 건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해 8월 28일 유엔총회는 한반도에 있어서 독립된 통일 민주정부를 세우는 것이 유엔의 목표임을 재확인하면서 휴전협정을 승인하고, 특히 휴전협정 때 건의된 고위정치회담의 실..

제너럴셔먼호사건, 1866년, 고종,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평양

1866년(고종 3)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군민(軍民)의 화공(火攻)으로 불타버린 일. 1866년은 조선의 대외교섭사에 있어 중요한 한 해였다. 그해 초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정책(禁壓政策)에 따라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수천 명을 죽이는 이른바 병인사옥(丙寅邪獄)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 배외 감정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경과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그해 8월 정체 불명의 이양선(異樣船) 1척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 이것이 바로 제너럴셔먼호였다. 셔먼호는 원래 미국인 프레스턴(Preston,W.B)의 배였다. 그런데 프레스턴이 톈진(天津)에 기항하고 있던 중 그곳에 주재하던 영국 메도즈상사(..

제2차 왕자의 난, 1400년, 정종, 방간의 난, 박포의 난

1400년(정종 2)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일명 방간의 난 또는 박포(朴包)의 난이라고도 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세력구조는 이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아직 사병을 거느린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이 여럿 있고, 그들의 세력도 적지 않았다. 이방원으로서도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항상 그들을 견제하였다.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으나, 인격·공훈(功勳)·위세가 이방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마침 지중추부사 박포의 밀고가 있었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 태조, 무인정사, 방석의난, 방원의난, 정도전의난

1398년(태조 7)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일명 방원(芳遠)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定社),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도 한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 간의 싸움인 동시에 정도전 일당과 방원 일당의 권력다툼이기도 하다. 조선 건국 이후 국가의 통치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개국공신들의 지위가 급격히 상승하였다. 1393년(태조 2)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설립을 계기로 정도전을 주축으로 추진된 병권집중운동과 중앙집권화정책은 권력구조면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개국공신 중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했지만, 여타의 훈신(勳臣)과 왕실세력 및 무장세력은 정치의 핵심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398년 이후 이른바 진법훈련(陣法訓鍊)이 강화되자 왕자·종친, 기타 훈신 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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