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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63

포츠머스 강화조약, 1905, 러일전쟁, 미국 루스벨트

1905년 9월, 러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간에 체결된 강화조약. 1905년 8월 9일부터 미국 뉴우햄프셔주에 있는 조그마한 군항 도시 포츠머스에서,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종전협상을 거듭하여 1905년 9월 5일 크게 다섯 가지 사항을 합의한 강화회담이다. 사실상 일본의 승리를 확인한 조약이었다. 역사적 배경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일본군이 중국 여순(旅順)의 러시아 해군기지를 기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쟁은 1905년 1월 봉천(奉天)전투와 5월의 동해해전에서 일본군이 러시아군에 승리하면서 일본이 승세를 잡았다. 일본은 유리한 전쟁 상황을 활용하여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러시와의 강화를 알선해 주도록 ..

포츠담선언, 1945년, 연합국 정상회담, 대일(對日) 공동선언

1945년 7월 26일,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 중 발표한 연합국의 대일(對日) 공동선언. 연합국 정상들은 이 선언에서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고, 또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대일처리방침을 밝혔다. 역사적 배경 포츠담 회담(Potsdam Conference)은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한 뒤, 일본의 항복 문제와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의 세 번째 전시회담이다. 회담은 1945년 7월 17일에 시작하여, 8월 2일 종결되었다. 회담의 주요 의제는 패전국 독일의 통치방침, 해방국 폴란드의 서부 국경 결정, 패전국 오스트리아의 점령방침, 동유럽에서 러시아의 역할, 패전국의 배상금문제, 대일(對日..

포상팔국의난, 남해안, 8개 소국, 가야

남해안 일대에 있었던 8개의 소국이 가야를 침략하여 일어났던 사건. 포상팔국은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의 내해니사금 14년조와 같은 책 권48의 물계자전, 『삼국유사』 권5 물계자조에 등장한다. 8국이라 하였으니 모두 여덟 나라이겠지만 사료 상 보이는 나라는 골포국(骨浦國), 칠포국(柒浦國), 보라국(保羅國), 고자국(古自國), 사물국(史勿國) 등 다섯 나라이다. 이들이 힘을 합하여 가라(加羅) 또는 아라(阿羅)를 침범하니 신라가 도와 팔국의 병사들을 물리친다는 것이 내용의 대략이다. ‘포상팔국의 난(亂)’이란 명칭은 신라사 중심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라 하여, 최근에는 ‘포상팔국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점들이 논란이 되고 있다. 첫째는 포상팔국 전쟁이 일어난 시기와 성..

폐비윤씨사사사건, 성종, 폐비윤씨, 정의왕후, 소혜왕후, 연산군

조선 성종의 계비 윤씨가 부덕한 소치로 폐비가 되고 그 뒤 사약을 받아 죽은 사건. 윤씨의 아버지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무(起畝)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이후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1476년 왕비로 책봉되고 이 해 세자 융(0xF92C : 뒤의 연산군)을 낳았다. 왕비가 된 뒤 투기가 매우 심해 국모로서 부덕한 일을 자주 일으켰다. 1477년에 비상(砒霜)을 숨겨 왕과 왕 주위의 후궁을 독살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아 빈(嬪)으로 강등되려는 수모를 겪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일로 왕과 모후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격분을 유발해 이 해 여러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비..

폐가입진, 廢假立眞, 가왕(假王)을 몰아내고 진왕(眞王)을 세운다, 고려 말, 이성계, 창왕, 공양왕, 역성혁명

가왕(假王)을 몰아내고 진왕(眞王)을 세운다는 말로,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 등이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사건. 창왕과 그 아버지 우왕(禑王)이 왕족이 아니라는 의심은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恭愍王)이 최만생(崔萬生)·홍륜(洪倫) 등에 의해 시해된 뒤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되었다. 이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辛旽)과 그의 비첩(婢妾) 반야(般若)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역사적 배경 당시 태후와 시중 경복흥(慶復興) 등은 종친으로써 왕위를 잇게 할 것을 주장했으나, 이인임(李仁任) 등이 이미 대군에 봉해져 있던 우왕의 옹립을 고집해 결국 우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직후에 이성계측의 윤소종(尹..

평양 천도, 고구려, 장수왕, 427년, 국내성, 평양성,

고구려가 도읍을 압록강변의 국내성(國內城)에서 대동강변의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긴 사건. 4세기대 국력이 비약적으로 신장된 고구려는 대폭 늘어난 인구와 영토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였다. 국내성에서 대대로 뿌리를 내린 귀족들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고 왕실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왕도(王都)의 건설이 요청되었다. 이와 같은 필요성은 광개토왕 이후 점차 대두되었다. 한편 장수왕의 재위 기간(412∼491) 동안 국제정세는 복잡하였다. 북연(北燕)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쪽으로부터의 압박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서쪽에서 새로 일어난 북위(北魏)는 고구려에게 위협적인 강적이었다. 한편「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 의하면, 왜가..

평양성 전투, 1592년, 임진왜란, 이여송, 고니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조선과 일본의 군대와 벌인 네 차례의 전투. 제1차 전투는 1592년(선조 25) 5월에 있었다. 즉,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5월 2일 서울에 진입, 새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고니시에게 평안도를 침입하게 하였다. 임진강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침을 계속하던 고니시의 군대는 6월 1일 개성을 출발, 평양으로 향하였다. 이에 선조는 11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하고 평양성을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등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성중에는 군민(軍民)을 포함 3,000∼4,000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나누어 성을 지키게 했으나, 항오(行伍)가 분명하지 못하고 치밀한 작전 계획도 없었다. 다만, ..

팔칠년체제, 1987년 기점, 6월 항쟁, 6·29선언, 민주화, 대통령직선제

1987년을 기점으로 한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정치변동과 특질을 통칭하는 개념이자 담론. 1987년은 6월 민주항쟁과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노동진영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힘이 성장하면서 표면적으로는 급속도로 민주화가 이루어져 정치·경제·사회적 변화와 변형을 겪게 된 기점이었다. ‘87년 체제’는 한국사회의 현재 모습을 형성하는데 87년의 민주화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인식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87년 체제는 1987년을 기점으로 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이행과 민주개혁의 시기를 거쳐 형성된 체제로서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출현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체제의 복합적 특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87년 체제’라는 용어가 쓰이는 일차적인 이유는 현재 우리의 직접적 뿌리가 87년에..

8·15선언, 1970년, 박정희, 닉슨독트린, 체제경쟁

1970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 제25주년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대북선언. ‘닉슨 독트린’ 선언 이후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변화하자 1970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 제25주년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전기를 새로이 마련하고자 대북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 전복을 기도해온 종전의 태도를 포기한다고 대외에 공표하고, 이를 행동으로 실증해야만 한다. 이러한 요구를 북한이 수락·실천한다면 인도적 견지와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는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갈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 둘째, 북한이 한국의 민주·통일·독립..

판문점도끼만행사건, 1976년, 공동경비구역,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유엔사 경비병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방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사 경비병들을 북한군 수십 명이 도끼 및 흉기로 구타, 살해한 사건. 북한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일으킨 핵심적인 대외적 동기는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한은 남북 간의 긴장상태를 ‘북침 위협’으로 역선전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는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미국과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키는 법적 효력을 지닌 대미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유엔군사령부의 존재 명분을 제거하여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를 실현하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북한의 대내적 동기는 긴장상..

통일축전, 2000년, 6·15 남북공동 선언문, 남북 공동행사

2000년 '6·15 남북공동 선언문' 발표 이후 개최되었던 남·북한 공동행사. 2000년 6월 남북한 정상회담 이후 축적된 남북한 교류와 협력의 분위기는 민간 차원의 다양한 교류와 협력의 실천을 통해서 공고해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남북한 간의 공동행사를 통해 통일문화를 창출하는 ‘통일축전’이다. 2001년에 민족통일대축전(평양)이 처음으로 개최된 이래 2002년 8·15민족통일대회(서울), 2003년 8·15민족대회(평양), 2004년 우리민족대회(인천) 등의 행사가 민간주도로 이루어지다, 2005년 민족통일대축전(평양)부터는 남북한 정부당국자들의 참석이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인해 2008년 이후부터 남북 공동행사 차원에서는 개최되지 않고 있다. 역사적 배경 2000년 6월 13일..

탄금대전투, 임진왜란, 신립, 김여물, 충주, 조령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을 주장으로 한 조선군과 왜군이 충주에서 벌인 전투. 1592년 4월부산에 상륙한 왜군 대병력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북방 방비에서 용맹을 떨친 신립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임명, 이를 막게 하였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뒤 4월 24일 부장 몇 사람과 조령(鳥嶺)으로 달려가 형세를 살필 때, 먼저 경상도로 남하했던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해 돌아왔다. 이 때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岉) 등이 “적은 군대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마땅히 지형이 험한 조령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이곳에서는 기병(騎兵)을 쓸 수 없으니 마땅히 평원에서 일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6일 그는 드디어 충주의 서북..

칼기폭파사건, 대한항공(KAL) 858기, 1987년, 김현희

대한항공(KAL) 858기가 1987년 11월 29일 북한공작원 김현희 등에 의해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파된 사건. 북한은 1987년 11월을 전후하여 대한민국 내부가 개헌 문제, 대통령 선거 등 극도로 복잡해진 정치일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한국 국내정국을 더욱 혼란시키고 사회 불안을 더욱 가증시켜 민주발전을 저해시킨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었다. 대한항공 폭파사건은 국제적으로 고립된 북한이 서울올림픽의 안전문제를 세계 여론화하여 참가 예상국을 위축시키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서울올림픽 자체를 개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 한 반인륜적인 사건이었다. 경과 북한은 사건 발생 오래전부터 미리 공작원을 선발하여 용의주도하게 준비시켰다. 1984년 7월 마침내 북한의 김현희, 김승일 등 부녀..

통일혁명당간첩사건, 1968년, 김종태, 신영복

1968년 발표된 대남(對南) 대규모 간첩단사건으로 1971년 재건이 기도되었던 사건. 김종태(金鍾泰)를 정점으로 한 이른바 통일혁명당(統一革命黨, 약칭 통혁당)은 북한노동당의 실질적인 재남지하당(在南地下黨) 조직으로서 전 남로당원·혁신적 지식인·학생·청년 등을 대량 포섭하였다. 김종태는 북한노동당의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許鳳學)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미화 7만 달러와 한화 2,250만 원)을 받고 남파된 거물간첩이었다. 통일혁명당은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정부전복을 기도하려다가 일망타진되었다. 이 사건에 관련되어 158명이 검거되었으며, 그 중에는 문화인·종교인·학생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중 73명이 송치(23명은 불구속)되었는데, 김종태는 1969..

칠천량 해전, 정유재란, 칠천도, 원균, 유일 패배 해전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원균(元均)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했다.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몄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해 섬멸하려고 일본의 이중첩자인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유혹했다. 이에 도원수 권율(權慄)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상의해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원균은 ..

청산리 대첩, 1920년, 김좌진, 나중소, 이범석, 북로군정서군, 홍범도, 대한독립군

1920년 10월 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 국권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기지를 설치해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1919년 8월에 서일(徐一)·김좌진·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奎植)·최해(崔海)·정훈(鄭勳)·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북로..

철의 삼각지대 전투,  6·25전쟁, 철원·김화·평강

6·25전쟁중 철의 삼각지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투. 철의 삼각지대란 철원·김화를 저변으로, 평강을 정점으로 한 삼각지대의 군사적인 호칭이며, 신고산∼평강으로 이어진 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는 경원선과 5번국도가 이 지대에서 철원-연천-의정부-서울, 김화-포천-의정부-서울과 그 밖의 여러 곳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나진·성진·원산항에 양륙된 군수물자와 각지에서 동원한 병력을 이 지대에 집결시킨 뒤 전선에 투입한 공산군 최대의 중간 책원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철의 삼각(Iron Triangle)’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작전이 이 지대 일대에서 펼쳐졌다. 그 중에서도 쌍방의 전체적인 작전과 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중..

천리마운동, 1958년, 노력 경쟁(勞力競爭), 노동강화운동

노력 경쟁(勞力競爭)을 통하여 생산 증대를 꾀하려는 북한의 노동강화운동. 사회주의 경쟁운동의 하나로서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실시배경은 당시 ‘3개년계획(1954∼1956)’의 수행으로 전후 복구 건설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으므로, 이 바탕 위에서 새로운 ‘인민경제5개년계획(1957∼1961)’을 실시하려고 1956년 김일성(金日成)이 소련과 동유럽을 순방하면서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함에 따라, 부득이 자체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 있다. 5개년계획을 자체적으로 추진하자면 내부적인 예비자원이 동원되어야 하고, 또한 절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56년 12월에 열린 당전원회의에서는 ‘최대한의 증산과 절약’을 내세워 종래의 노력경쟁운동을 한층 강화하기로 방침을 세웠..

처인성 전투, 고려, 몽골 제2차 침입(1232), 승장(僧將) 김윤후, 사르타이 사살

고려시대 몽골의 제2차 침입(1232) 때 처인성(處仁城)에서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가 적장 사르타이[撒禮塔]를 사살한 전투. 1232년(고종 19) 6월 고려는 몽골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그 해 몽골의 장수 사르타이가 고려의 북계(北界)에 침입하여 서경의 반적(叛賊) 홍복원(洪福源)과 합세하여 고려를 위협하였다. 사르타이는 고려가 해도(海島)인 강화로 도읍을 옮긴 것을 꾸짖고, 국왕이 육지로 나올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사르타이는 북계에서 남쪽으로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을 함락하고, 수주(水州)에 예속되었던 처인부곡(處仁部曲)의 소성(小城), 즉 처인성에 도달하였다.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난을 피하여 처인성에 와 있던 백현원(白峴院..

진주전투, 임진왜란, 1592년, 1593년, 김시민

임진왜란 때인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 김시민(金時敏)·김명원(金命元) 등이 진주에서 왜군과 싸운 두 차례의 큰 전투. 1592년(선조 25)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 간 계속되었다. 왜군은 진주가 전라도로 가는 경상우도의 대읍이며, 경상우도의 주력군이 진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주성 공격계획을 세웠다.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나가오카(長岡忠興) 등은 9월 24일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집결지 김해를 떠나 노현(露峴)·창원·함안을 거쳐 마현(馬峴)과 불천(佛遷)으로 나누어 쳐들어왔다. 이러한 적군의 동태를 접한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진주에는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이끄는 군사 3,700여 명과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100여 명..

진주민란(晉州民亂), 1862년, 철종, 반관숙정운동(反官肅正運動)

1862년(철종 13) 2월 18일에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반관숙정운동(反官肅正運動). 철종 때의 임술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직접 동기는 경상도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불법 탐학에 있었다. 그는 부임한 이래 갖은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한 금액이 줄잡아 4만∼5만 냥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진주목의 역대 불법 수탈곡인 도결(都結) 8만4000여 냥을 일시에 호별로 배당해 수납하려 하였다. 우병영(右兵營)에서도 이 기회를 이용해 신구범포곡(新舊犯逋穀)인 환포(還逋) 7만2000여 냥을 농가에 분담, 강제로 징수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처사는 그렇지 않아도 파탄 지경에 다다랐던 농민들을 극도로 분격시켰다. 진주에서 서남쪽으로 30리쯤 떨어진 유곡동(杻谷洞)에 사는 유계춘(柳繼春)은 김수만(金守滿)·이귀..

진보당사건, 1958년, 이승만 정권, 진보당 조봉암

1958년 7월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 당수 조봉암 등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사형시킨 정치탄압 사건. 1959년 7월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 간첩죄 혐의로 체포하여 조봉암을 사형 집행하였으나 2011년 1월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사건. 1952년 8월 5일의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79만 7504표를, 1956년 5월 15일의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무려 216만 3808표를 얻은 조봉암이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을 결성하고 지방에서 지역당 조직을 확대해 가자 이승만 정권은 정치적 위협을 느꼈다. 서울시 경찰국은 1958년 1월 9일 “김달호, 박기출, 조규희, 이동화 등이 사회주의제도로 개혁하고 정부를 변란 할 목적 하에 진보당을 창당 조직하고, 북한 괴뢰집단과의 협상으로 무력재..

직선제개헌, 1985년, 삼민헌법쟁취투쟁론, 6·29선언, 6월항쟁

1985년 2·12총선거 직후부터 벌어진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1985년 2·12총선거를 통해 제도권 정당의 지형도가 새롭게 재편되고 야당과 재야운동단체들의 연합으로 반정부 세력의 규모와 내실이 강화되는데 있어 중요한 핵심 의제로 작동했다.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법적으로 보장가능하게 했던 제5공화국 헌법 개정의 문제는 2·12총선거 직후부터 야당과 민주화운동 내부에서 꾸준히 제기되었다. 2·12총선거를 통해 창당한지 채 1개월도 안 되는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급부상했고, 지도부는 1985년 8월 전당대회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식당론으로 확정하였으며 이를 12대 국회의 일차적 의제로 설정했다. 1985년 9월 신민당은 정기국회에서 ‘개헌을 위한 특별위원회(개헌특위)’..

중종반정(中宗反正),1506년, 연산군, 진성대군 이역

조선 제10대왕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 이역(晉城大君 李懌)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 등 이른바 훈구세력이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 등의 궁금세력(宮禁勢力)과 결탁해 학정을 거듭하던 연산군을 폐위시킨 사건이다. 연산군은 당시 특권 관료층인 훈구세력과 성종 때부터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신진 사림세력이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왕위에 올랐다. 그는 1498년 훈구세력과 결탁해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사림파를 무오사화로 한 차례 거세하였다. 이로써 정치적 우세를 더욱 확고히 한 훈구세력은 그 횡포가 더욱 심해지고 권귀화(權貴化)의 경향을 현저하게 보였다. 이러한 가운데 연산군은 궁금 계열 중심의 측근 세력을 새로이 등장시켜 ..

종로경찰서투탄의거, 1923년, 의열단, 김상옥

1923년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사건.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경 폭탄이 경찰서 서쪽 경무계 사무실에서 폭발하여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하였다. 투탄에 성공한 김상옥은 그날 밤으로 삼파동(三坡洞)주 01)에 있는 매부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일본경찰에 포위되었다. 이 곳에서 총격전을 전개하여 형사부장 마에무라(前村)를 비롯하여 우메다(梅田)경부 등을 저격한 뒤 왕십리를 거쳐 효제동으로 도주, 은신하였다. 그러나 22일 다시 은신처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치열한 총격전을 3시간 동안 전개하다가 마지막 남은 총탄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이 사건으로 많은 동지들이 붙잡혀 투옥되었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

종계변무, 宗系辨誣, 명나라, 이성계, 대명회전, 윤이, 이초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세계(世系)를 시정해 달라고 주청했던 사건. '종계'란 종가의 혈통, '변무'란 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힌다 고려 말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타도하려는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 왕실의 후손이 아니고 이성계의 인척이라 한 적이 있다. 이 때 윤이 등은 이들이 공모해 명나라를 치려고 한다면서, 이성계의 가계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뒤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그대로 기록하였다. 조선에서 이러한 종계(宗系)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일평양선언, 2002년, 평양, 고이즈미, 김정일

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일본 총리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조인한 선언문. 1999년 8월 10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발표한 성명 ‘조일관계의 현 사태와 관련한 3가지 원칙적 입장천명’에는 북한이 대일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목적이 밝혀져 있다. 그 목적은 첫째, 일본이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고 새로운 정책전환으로 나오게 하고, 둘째, 일본이 조선인민에게 저지른 과거의 모든 죄행에 대하여 사죄하고 보상하게 한다는 두 가지이다. 경과 북한과 일본의 두 수뇌들은 조일사이의 불미스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현안사항을 해결하며 결실 있는 정치, 경제, 문화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쌍방의 기본이익에 부합되며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큰 기여로 된다는 공통된 인식을 확인하였다...

조일수호조규속약,1882년, 간행이정 50리,2년 후 100리

1882년(고종 19) 7월 17일(양력 8월 30일) 조선 전권대신 이유원(李裕元)과 일본 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 사이에 체결된 전 2조로 된 조약. 같은 해 6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나 청일 양국의 군대가 서울에 진주하자, 일본은 개항 이후 미해결로 남아 있던 문제를 결말짓기 위해 하나부사를 파견, 강력한 외교공세를 펴왔다. 먼저, 임오군란으로 입은 일본측 손해배상과 공사관 수비병 주류문제를 타결하는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같은 날 수호조규속약을 조인하였다. 수호조규속약은 조일수호조규부록을 협상할 때 우리측의 강력한 반대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던 간행이정(間行里程)을 확대하는 것과, 일본인 외교관과 그 수행원 및 가족의 조선 내지여행권의 확보에 대한 것이었다. 더한층 친호를 두텁게 하고 무역의 편의를..

조위총의 난,1174년,명종,서경민 반란,무신정권,서북민,민란

1174년(명종 4)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발해 일으킨 난. 1174년(명종 4)에서 1176년(명종 6)까지 약 3년 동안에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대항해서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서경유수(西京留守)였던 조위총은 국왕을 폐립하고 문신을 학살해 전횡을 일삼던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을 타도하고, 자신과 서경(西京)주 01)인의 세력을 펴기 위해 난을 일으켰으나, 윤임첨과 두경승 등이 이끄는 관군의 활약으로 끝내 실패하고 만다. 경과 서경유수 조위총은 1174년에 정중부 등의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 동계(東界)주 02)와 북계(北界)주 03)에 “개경의 중방(重房)에서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고 군사를 발했으니 각각 병마(兵馬)를 규합해 서경으로 모여라.”고 격문을 돌..

조소우호협력및상호원조조약, 1961년, 북한, 소련, 군사동맹조약

1961년 7월 6일 북한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양국 간의 군사동맹조약.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특징은 유사시 군사적 자동개입을 규정한 양자동맹조약이라는 것이다. 김일성의 소련 방문 중 체결된 이 조약은 6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핵심 내용은 ‘체약 일방이 어떠한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지체 없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소련 양국 간의 경제·문화·기술의 원조·제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당시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등 다자간 안보조약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는 양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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