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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62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조직된 재러 한인 독립운동 단체. 개설 1917년 8월 러시아 혁명이 계기가 되어, 러시아에 입적한 한인의 대단결을 위해 전로한족회가 조직되었고, 회장에 김야코프가 취임하였다. 1917년 12월에 전로한족회 중앙총회가 우수리스크[소왕령]에 만들어졌고 회장으로 문창범이 취임했다. 연추, 추풍, 수청, 하바롭스크, 하마탕 등 각처에 전로한족회를 설치하였다.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는 7명의 의원을 두었다. 의원들은 회장과 부회장을 선거하는 권한이 있었고 회장과 부회장은 집행 위원이 되어 모든 사무를 처리하였다. 전로한족회 중앙총회에서는 각 지방의 인구릍 계산하여 지방 대표를 뽑았고 그 외에 또 각 단체의 대표를 참여하게 하였다. 설립 목적 전로한족회 중앙총회는 러시아..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 안재홍

안재홍이 -우리나라 고대사와 관련된 여러 논문들을 모아 수록한 역사서 안재홍은 민족주의 사학자 중 드물게 고등교육[일본의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을 받았다. 동제사(同濟社), 3·1운동, 신간회(新幹會), 조선어학회 등과 관련을 맺으며 독립운동에 나섰고 여러 번 투옥되었다. 또한, 조선일보 사장 재직시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와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를 지면에 연재하도록 하였다. 어릴 때부터 술사가(述史家)를 희망했으나, 일제의 강점으로 말미암아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30년대 전시체제의 강화로 거듭 투옥되는 상황에서 ‘정치로써 투쟁함은 한동안 거의 절망의 일이오 국사(國史)를 연찬(硏纘)하야 써 민족정기를 불후(不朽)에 남겨둠이 지고한 사명임을 자임(自任)’하고 10여 ..

낭가사상(郎家思想), 풍류[風流], 신채호

신채호가 1920년대에 한국고대사연구를 통해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전통적인 민족사상. 당시 민족사학자들은 일제식민정책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던 일본 관학자들의 식민사관에 정면으로 맞서, 왜곡되고 날조된 한국사를 재정립하여 국가와 민족의 자강과 독립을 위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이들 역사인식의 일반적인 특징인 정신사관은 신채호의 낭가사상을 비롯하여 박은식(朴殷植)의 ‘혼’, 문일평(文一平)의 ‘조선심(朝鮮心)’, 정인보(鄭寅普)의 ‘얼’,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정신’ 등으로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낭가사상은 여타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정신사관에 비해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 서술되고 있어 단연 이채롭다. 낭가사상은 민족적이고 근대지향적인 실학사상과 당시 서구의 주된 사상 조류인 민족주의를 수용..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신채호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 신채호가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서술하고 있다.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었고, 이후 1948년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원래 이 책은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일부분이었으나, 그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로 불려지게 되었다. 전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 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시대(列國爭雄時代) 대(對) 한족 격전시대, 5편 (1) 고구려 전성시대, (2)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 고구려 공수동맹, 8편 3국 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전역..

백남운(白南雲)-「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

일제강점기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 등을 저술한 학자. 경제학자, 정치인.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38년에는 이순탁(李順鐸)·노동규(盧東奎) 등 동료 교수 그리고 학생 10명과 함께 ‘조선사정연구회사건’으로 일제에 피검되어 옥고를 치렀다. 8·15광복 직후인 1945년 9월에는 조선학술원을 설립, 원장에 취임하고 민족문화연구소도 설립하였다. 같은해 12월에는 경성대학 법문학부 재정학 교수로 미군정의 임명사령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인 1946년 2월에는 김두봉(金枓奉)·한빈(韓斌) 등이 북한에서 결성한 조선신민당의 경성특별위원회(후에 남조선신민당으로 발족)의 위원장을 맡는 한편, 좌익세력의 집결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의장 및 상임위원·경제대책위원 등으로 정치활동을 하..

정약용(丁若鏞)-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조선후기 『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 실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

삼균주의(三均主義), 조소앙, 임시정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소앙이 독립운동의 기본방략 및 미래 조국건설의 지침으로 삼기 위하여 체계화한 민족주의적 정치사상. 내용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균등생활을 실시하려는 주의’이다. 완전균등을 대전제로 하면서 이의 실현을 위해 정치적·경제적·교육적 균등을 주장하고 있다. 1920년대 말 기본적 구상이 정립되고, 한국독립당의 정강에 채택되었으며, 1941년 11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국의 기본이념으로 공포하였다.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 이후 가혹한 정치적 유린과 토지수탈 등 경제적 파탄 및 심한 교육차별대우를 받았던 한민족은 민족적 자각을 통해 정치적 독립과 자유를 지향하고, 경제적인 자립을 추구하며, 무차별 평등교육의 실현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독립운동 진..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임오군란, 수호조규속약

1882년(고종 19) 8월 30일(음력으로 7월 17일) 임오군란으로 빚어진 양국 간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약. 6개조의 본조약과 2개조의 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으로 되어 있다. 역사적 배경 임오군란 이후 청일 양군의 한성진주와 흥선대원군의 청국 납치 문제 등이 민씨정권의 재집권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이후 군란 뒤처리를 위한 조ㆍ청ㆍ일 3국의 절충 협의가 다각도로 벌어지게 되었다. 일본은 군란 때 일본세력의 조선 침투에 민족적 의분을 품고 있던 병사들과 시민들에 의해 공사관이 습격당했고, 별기군(別技軍) 교관 호리모토(堀本禮造)등 수 명이 살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군 3,000명이 한성에 진주하면서 청국의 정치적 영향은 커졌다. 이로 인..

수신사(修信使) 1876

조선 말기에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 이전까지는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하는 사신을 통신사(通信使)라 불렀으나,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수신사로 바뀌었다. 이는 양국이 근대적 입장에서 사신을 교환한다는 뜻이다. 내용 1. 제1차 수신사(1876) 임진왜란 이후 조선수신사일기은 일본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간청으로 국교를 재개하고 고종 초년까지의 260여 년 동안 10여 차례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냈다. 일본의 사절 역시 여러 번 조선에 와서 양국 사이에는 평화적 외교가 진행되었고, 동시에 부산에서는 왜관무역(倭館貿易)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자 쇄국주의자였던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이 은퇴하고..

조선책략(朝鮮策略)-황준헌 역사서, 김홍집

청나라 황준헌이 개항기 한국이 당면한 국제적 지위를 논하고 그 대외책을 시사한 역사서. 1880년(고종 17)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 초명은 宏集)에 의해서 당시 청국 주일공사관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을 기증받아 귀국해 고종(高宗)에게 복명과 동시에 바쳤다. 내용 이 책략의 내용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러시아에 대한 방아책(防俄策)의 방법으로서 친중국(親中國)과 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함으로써 자강책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의 남침을 방어하기 위해서 연미국수교론(聯美國修交論)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미국은 강대(强大)·공명(公明)·정의(正義)의 나라로 조선에 대해서 이를 얻을 욕심은 없고, 오히려 조선을 이롭게 할 것이라 하여 미국과 수호..

최익현의 5불가소(왜양일체론)

최익현의 5불가소(왜양일체론)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조일 수호 조규(朝日修好條規)」 체결 직전인 1876년(고종 13년) 1월 23일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 엎드려 조약 체결을 반대하며 올린 글이다. 조약을 체결하려면 도끼로 자신의 목부터 자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명한 것이다. 이 상소에서 그는 일본과 수호 조약을 체결하면 안 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조목조목 열거하였다. 특히 일본이 과거의 일본이 아니라 서양의 앞잡이이므로 서양이 곧 일본이요, 일본이 곧 서양이라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함으로써, 정부 내에 일본과 서양을 분리하여 조약 체결은 과거 일본과의 외교를 회복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대한 강한 반대를 표시하였다. 아울러 서양의 2차 공산품에 맞서 조선이..

육영공원(育英公院)1886-헐버트, 최초 관립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 1886년(고종 23)에 설립되었던 관립학교. 우리 나라 최초의 관립 근대학교로서 1894년에 폐교될 때까지 양반고관 자제들을 수용해 근대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키웠다. 1883년 미국에서 돌아온 보빙사(報聘使) 민영익(閔泳翊) 일행은 근대화를 위한 몇 가지 건의를 하였다. 이 때 근대문명 보급을 위한 근대학교 설립을 제기하였다. 또한 보빙사 수행원으로 해외근대문명을 견문할 수 있었던 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변수(邊燧) 등 개화정객들의 노력이 있어 마침내 육영 공원설치의 윤허가 내려졌다. 그러나 이 해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육영공원의 개교는 지연되었다. 그러다가 미국측에 요구한 3명의 교수요원이 도착한 1886년 9월 23일에야 개교하였다. 육영공원의 학칙인 내부의 계사(啓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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