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52

정중부의 난,1170년,의종,무신반란,문존무비(文尊武卑),보현원

1170년(의종 24) 정중부 등이 문신귀족정치에 반발해 일으킨 난. 경인년에 일어났으므로 경인(庚寅)의 난이라고도 한다. 정중부 등이 반란을 일으켜 문신귀족정치를 타도하고 무신정권을 수립해 고려사회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역사적 배경 예종 때 여진의 정벌,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 등으로 무신의 지위가 크게 상승하였다. 그러나 문존무비(文尊武卑)의 풍조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은 고사하고라도 군사행동에서 문신이 지휘관이 되고 무신은 아래에서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군인들이 적과 싸워 공을 세워도 불력(佛力)에 의한 것이라 하여 그 공을 부처에 돌리는 수가 많았다. 특히, 난이 일어날 무렵 문..

정주영소떼방북사건,1998년,정주영,판문점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은 사건. 1998년 6월과 10월 2차례에 걸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였다. 1998년 6월 16일 83세의 정주영 회장은 트럭 50대에 500마리의 소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었다. 이날 오전 임진각에서 정주영 회장은 “이번 방문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그 소회를 밝힌바 있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은 향후 10여 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 사건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역사적 배경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실향민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이룬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그는 17세 때 현재 ..

정읍발언, 1946년, 단독정부, 이승만

1946년 정읍에서 단독정부수립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승만의 발언.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가운데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보도되었다. 좌익 중심의 찬탁운동과 우익 중심의 반탁운동의 대결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1946년 6월 3일,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이승만은 정읍에서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라는 정치적 발언을 했다. 이 발..

정미약조, 1547년, 명종, 일본 국교 허용

1547년(명종 2) 조선이 3년 전의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이후 중단되었던 일본과의 국교를 다시 허용한 조약. 조선은 삼포왜란 이후 1512년 일본과 임신약조를 체결하고 왜인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일본은 호족들이 할거하는 전국시대의 내란기로 국내가 혼란해지자 왜구들이 다시 일어나 왜인과의 충돌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544년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사량진(경남 통영시 원량면 진동)에 쳐들어와 인마(人馬)를 약탈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왜인 내왕을 금하였다. 일본은 대마도주를 통해 국교 재개를 간절히 요청했으며 조정에서는 통교 문제를 놓고 찬반 양론으로 맞섰다. 문제는 왜인들을 믿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결국 국왕사(國王使)의 통교만을 허용하고 대..

정묘호란,1627년,인조,후금(後金)

1627년(인조 5) 후금(後金)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전쟁. 1월 중순부터 3월 초에 걸쳐 약 2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경향이 고조되었지만,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동아(東亞)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적 외..

전후복구삼개년계획,북한,1954년,전후복구,중공업우선노선,로력영웅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진행된 북한의 전후 복구 계획. 1953년 8월 5일 발표된 김일성의 전후인민경제복구발전에 관한 방침을 기본으로 시행되었다. 1953년 하반기 6개월의 준비단계를 거친 후, 1954년부터 1956년까지 3년간 진행되었다. 소련과 동구권, 중국 등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 기간 동안 연평균 42%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북한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기반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 1953년 8월 5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모든 것을 전후인민경제복구발전을 위하여’를 발표하고 전후 복구 계획의 기본 방향을 정립하였다. 이 계획의 기본 방향은 중공업우선의 경제건설 노선이었다. 이 보고에서 김일성은 “중공업 기업소들의 확장과 인민생활 안정을 위한..

전황, 錢荒, 荒거칠 황, 조선 후기, 동전유통부족현상

조선 후기, 특히 1700년대 초부터 181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일반 유통계에 거의 만성적으로 나타났던 동전 유통량 부족현상. 荒. 거칠 황, 돈이 마르다. 봉건 조선정부는 1600년대에 들어, 그 당시 급진전하는 사회경제 발전에 대응하는 한편, 거의 파탄에 직면한 국가경제를 되살려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국가경제 재건책의 일환으로 미(米)·포(布) 등 물품화폐와 칭량은화(稱量銀貨)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名目貨幣)인 동전을 법화(法貨)로 유통, 보급하기 위해 화폐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화폐정책은 1600년대 전반기에는 사회경제의 미숙성, 화폐 원료의 공급난, 정책 운용의 불합리성 및 호란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시행착오를 되풀이했다. 그러나 국가의 화폐정책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중에..

전태일분신사건,1970년,평화시장,근로기준법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 항거 자살한 사건. 전태일은 1965년부터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 재단사 등으로 일하면서, 시다를 비롯한 여공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 침해를 체험하였다. 1969년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지만, 노동자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건축 노동자로 일하다가,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였다. 그와 동료들은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 설문 조사를 하여 정부, 언론 등에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노동조건은 개선되지 않았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

저고여피살사건,1225년, 고종, 몽고 사신 저고여

1225년(고종 12) 고려에 왔던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피살당한 사건. 강동성(江東城)의 전역(戰役)이 끝난 뒤 몽고는 고려에 대해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해마다 동진국(東眞國)을 경유해서 사절을 파견하여 과중한 공물을 요구해 왔다. 특히, 저고여는 1221년과 1224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파견되어 무례한 행동으로 공물을 요구하였다. 한편, 몽고에 굴복했던 동진의 만노(萬奴)는 이때 서역지방으로 원정을 나선 칭기즈 칸[成吉思汗]의 소식이 막연함을 호기로 삼아 몽고와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1224년 정월 고려에 사신을 보내와 이 사실을 통고하는 동시에 각기 각장(榷場)주 01)을 설치하여 무역을 하자고 요청해 왔다. 이에 고려는 몽고를 배반한 만노를 가까이할 수도 없..

재일조선인북송사업,1959년,9만 3천,재일동포

1959년 12월부터 1984년까지 9만 3천여 명의 재일동포들이 북한으로 영주 귀국한 사업. 재일조선인북송사업은 1958년 8월, 인도 캘커타에서 가진 북한적십자회와 일본적십자사 간 합의에 의해 1959년 12월 14일부터 1984년까지 9만 3천 339명의 재일동포들이 북한으로 영주귀국한 사업으로, 초기 2년간 61년까지 전체의 80%인 7만 4천 900여 명이 귀국하였다. 1965년 한일수교 이후 한국정부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1968년부터 3년간 중단되었지만, 1971년 재개되었고 이후 15년 간 4천 700여 명이 추가로 귀국하였다. 역사적 배경 북송사업 초기 북한은 전후 복구사업이 종료(1956년)되고, 1950년대 말부터 ‘천리마운동’을 통해 대중동원을 통한 양적 성장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장진호전투,1950년,미 제1해병사단,중공군,철수작전

1950년 11월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과 충돌하여 2주간에 전개한 철수작전. 장진호전투는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규모가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간에 걸쳐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 목적과 병력규모를 11월 초까지도 경시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가 선제공격을 단행하기로 결심함에 따라 동부지역을 담당한 미 제10군단 알몬드(Edward M. Almond)소장은 국경선을 목표로 한 북진을 재..

자유언론실천선언,1974년,자유언론실천대회,동아일보,동아방송,언론자유화,언론노동운동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대회에서 채택한 선언. 언론은 활자나 전파매체를 통해 사실을 전달하고, 여러 계층들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해 여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언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이러한 이유로 자본과 권력은 지배력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언론을 장악하고 정보를 통제해 왔다. 언론 통제에 맞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언론노동운동의 역사는 4월 혁명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 5월 부산지역의 모든 신문사에 노조가 결성되었고, 뒤이어 대구지역의 대구일보, 영남일보, 대구매일신문 등에서 노조가 조직되었다. 서울지역에서는 연합신문, 자유신문, 평화신문, 국도신문 등에서 노조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군부세력에 ..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년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케이초[慶長]의 역(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

임오화변(壬午禍變), 1762년, 사도세자, 영빈이씨, 영조, 한중록, 뒤주

1762년(영조 38), 임오년에 발생한 정치적 화변. 임오화변(壬午禍變)은 1762년(영조 38) 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왕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경종대 이후 당쟁은 군주 혹은 예비 군주를 선택하는 상황과 결부되어 한층 파급력도 크고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실시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세자와 갈등을 일으켜 임오화변이 발생하였다. 임오화변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다양한 원인을 배경으로 한다. 임오화변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노·소론 당쟁설과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 갈등설이 대립하는 가운데 뚜렷..

임오군란(壬午軍亂),1882년,고종,대원군 집권

1882년(고종 19) 6월 9일 훈국병(訓局兵)들의 군료분쟁(軍料紛爭)에서 발단해 고종 친정 이후 실각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변(政變). 군란의 배경을 단지 민씨척족정권(閔氏戚族政權)에 대한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守舊派)의 정쟁(政爭)으로만 볼 수는 없다. 고종을 비롯한 민씨척족정권이 개화정책을 추진해 일본과 구미제국과의 교섭통상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개화파 관료가 제도 개혁에 따라 대거 등장하자 수구파의 반발이 격화되었다. 특히, 5영(營)을 폐지한 후 무위(武衛)·장어(壯禦)의 2영을 설치하고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는 등 군제 개혁이 단행되자 구 5영소속 군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881년 전개된 수구파의 위정척사론과 이..

임신약조(壬申約條),1512년,중종,일본 대마도주

1512년(중종 7) 조선과 일본 대마도주(對馬島主) 사이에 맺은 무역에 관한 조약. 1510년 삼포왜란이 있은 뒤 조선은 삼포를 폐쇄해 왜인과의 교통을 끊고 방비를 엄중히 하였다. 그 결과, 물자의 궁핍을 느낀 대마도주는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를 통해 조선에 통교를 간청하게 되었다. 일본은 국왕사(國王使) 호추(弸中)를 2차에 걸쳐 조선에 파견해 강화를 시도하였다. 조선에서는 강화 반대론도 많았지만, 첫째 군사 방위 시설의 증가에 따른 국민의 부담 과중, 둘째 북방의 야인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또 다른 한편에 긴장 요인을 둘 수 없다는 점, 셋째 후추[胡椒]·단목(丹木) 등 약용품의 수입 필요성, 넷째 조선은 지리적으로 사실상 일본과 절교하기 힘들며, 특히 대마도는 생활 필수품인 식량 등이 ..

임술민란(壬戌民亂),1862년,철종,삼남지역,농민전쟁,

1862년(철종 13) 삼남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전쟁. 1862년 농민항쟁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70여 개 고을에서 일어났다. 최초로 일어난 곳은 2월 4일 진주 바로 위쪽에 있는 작은 고을인 단성이었다. 단성으로부터 시작된 항쟁은 3월에는 경상도 지역으로, 4월에는 전라도로, 5월에는 충청도로 확산되었다. 정부가 조세문제를 개혁하겠다고 약속하자 항쟁이 수그러졌다가 정부가 개혁을 시행하지 못하자 다시 터져 나왔다. 9월부터 제주지역, 함경도 함흥, 경기도 광주, 경상도 및 몇 고을에서 농민항쟁이 발생하였다. 농민항쟁이 발생한 주요한 원인은 삼정문란(三政紊亂)을 비롯한 봉건정부와 관리의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수탈이었다. 또 항쟁 과정에서 고리대나 고을의 소작료를 통해 지..

임수경 평양축전참가사건,1989년,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임수경,전대협,판문점,문익환

임수경이 1989년 평양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여했다가 판문점으로 귀환하다가 체포된 사건.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반제 자주와 반전 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건 축전이었다. 제13회 축전은 1989년 7월평양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 4학년 학생이던 임수경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 대표로 선발되었다. 형식상 일본 관광으로 출국했지만, 독일을 거쳐 1989년 6월 30일 북한에 입국했다. 축전에 참여하여 북한 인민들로부터 대대적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정의구현사제단의 대표로 파견된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걸어서 귀환했다. 임수경은 입국과 동시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국가안전기획부의 조사를 받았다. 징역 5년, 자격정지 ..

일장기말소사건,1936년,조선중앙일보,동아일보,베를린올림픽,손기정,남승룡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4면과 『동아일보』지방판 조간 2면 및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베를린올림픽대회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禎)선수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 1936년 8월 독일 베를린에서 거행된 올림픽대회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소수의 우리 선수가 몇 개 종목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마라톤부문에서 손기정·남승룡(南昇龍) 두 선수가 우승후보로 지목되었다. 1935년 3월에 있었던 올림픽파견 마라톤예선대회에서 손기정은 2시간 26분 14초라는, 당시 세계기록 2시간 31분 37초보다 5분이나 앞서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 경기가 시작된 8월 9일 밤 11시(한국시간)에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일본인납북사건,북일정상회담,일본인납치,김정일, 고이즈미, 김현희, 이은혜,메구미

북한이 남파간첩의 일본어 교육 및 신분 도용을 위하여 일본인을 납치한 사건. 일본인 납북사건은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범 김현희(金賢姬)가 일본어 여교사인 ‘이은혜’(일본명 田口八重子)에게서 일본어를 배웠다고 폭로하면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은혜 사건’ 및 ‘일본인 납치의혹’에 대해 ‘남한의 조작극’, 또는 일본 당국이 과거청산을 피하기 위해 조작해 낸 ‘정치적 모략극’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열린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이즈미 일본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를 시인하고 공식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함으로써 명백한 사실로 확인되었다. 역사적 배경 북한당국은 냉전 시기에 북한이 남파 간첩들에게 일본인의 신분으로 위장시키고 일본어 교..

일본원정,1274년,1281년,충렬왕,여몽연합군,동로군,정동행성,태풍

1274년(원종 15, 충렬왕 즉위)과 1281년(충렬왕 7)의 2차에 걸쳐 원(元)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려 했던 사건. 고려와의 전쟁이 끝나고 강화가 성립됨에 따라 원은 일본지배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원(元)세조(世祖)는 일본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기 위해 모두 6차에 걸쳐 고려와 원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했다. 당시 원이 일본초유의 의도에 대해서 남송(南宋) 정벌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원은 남송의 양양성(襄陽城) 공격(1268∼1273)을 전후하여 일본초유를 시도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해상으로 연결된 남송과 일본의 통교관계를 끊어 남송을 고립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원의 요구에 불응하자 원은 무력을 동원해 일본을 굴복시키기로 하고 대규모의 원정군을 파견했다. 1..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북한의 남침 이후 인천지역에 대한 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과 배후를 공격하여 전쟁을 반전시킨 상륙작전. 1950년 6월 29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는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할 경우 장차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복귀한 직후인 1950년 7월 첫주에 그의 참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에게 하달한 지시와 더불어 조기에 계획이 진척되었다. 이 계획은 작전참모부장 라이트(Edwin K. Wright) 준장이 이끄는 합동전략기획단(JSPOG: Joint Strategic Planning and Operations G..

인조반정,1623년,광해군,이귀,서인,이이첨,대북파,능양군 종(綾陽君倧)

1623년(광해군 15) 이귀(李貴)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倧)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임해군이 불궤(不軌)주 02)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 그 뒤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감 이직(李稷)에게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칠서지옥(七庶之獄)주 03)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

인민혁명당사건,1964년,1974년,1차 인혁당사건,2차 인혁당사건,사법살인

1964년 8월과 1974년 4월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민혁명당이 한국의 국가변란을 기도하였다고 발표된 사건. 1964년 8월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한 것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된 ‘인민혁명당사건’(1차 인혁당사건)과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발표된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2차 인혁당사건)을 말한다. 1. 1차 인혁당사건 1960년 4·19 이후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운동 단체인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등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쿠데타세력은 4·19 시기 조직..

안중근, 이토히로부미,이토포살의거,1909년 안중근,하얼빈

1909년 안중근(安重根)이 만주의 하얼빈(哈爾賓)에서 이토(伊藤博文)를 포살한 의거. 이토는 1905년 11월 특파대사로 서울에 와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다음 해 3월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친일내각을 조직하여, 정치·외교뿐만 아니라 재정·금융·화폐·체신·교통 등 제분야를 장악하여 조선의 식민지화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개된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항쟁 등 반일민족운동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장악한 뒤 군대까지 해산시켜 버렸다. 이와 같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병탄작업은 이토에 의해 완결되었 형식적 절차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래서 주권회복을 원하는 한국인들은 통감..

이탕개의 난,1583년,선조,회령,여진족

1583년(선조 16) 이탕개를 중심으로 회령 지방의 여진족(女眞族)이 일으킨 반란. 세종대의 육진 개척으로 동북 지방의 여진족에 대한 경략은 대체로 큰 문제가 없이 유지되어왔다. 그러나 중종 이후 내정이 문란해짐에 따라 북방에 대한 통제력도 차츰 기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틈을 타 여진족이 준동하기 시작해, 자주 국경을 침범하며 약탈행위를 자행해 변장(邊將)을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그들을 토벌하기 위한 출병론(出兵論)이 대두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반대론자에 의해 실행되지 못하고 계속 소극적인 회유책으로 일관해 오던 중 1583년 마침내 ‘이탕개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이탕개는 선조 초 우리 나라에 귀화한 여진인으로, 육진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관록과 여러 가지 후대를 받아온 자였다. 158..

이치전투,임진왜란,금산,이치,황진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 8일 황진(黃進), 권율(權慄) 등이 금산(錦山) 서평의 이치(梨峙)에서 일본군과 싸운 전투. 당시에 아군은 전라도도절제사 권율(權慄)과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거느린 관군 1,500명이었고, 일본군은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거느린 6번대소속의 별군이었다. 이 전투는 일본군의 전주 침입을 막기 위한 웅치전투(熊峙戰鬪) 및 금산전투와 거의 동시에 벌어졌는데, 웅치와 금산전투에서 아군이 비록 패하였지만, 이 전투에서는 끝내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온 종일의 전투 중에 황진이 총을 맞고 쓰러지자 한때 사기가 떨어졌으나 권율이 장병을 독전하여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전라도가 보존되어 후방병참기지로서의 역..

이철희장영자사건,1982년,전두환 인척,장영자,어음사기사건

1982년 당시 대통령 전두환의 인척이었던 장영자와 그의 남편 이철희가 일으킨 거액의 어음사기사건. 1982년 5월 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외국환관리법 위반혐의로 이철희·장영자 부부를 구속했다. 검찰은 이들이 명동 암달러시장과 캘리포니아에서 80만 달러를 모았다고 발표했다. 검찰 조사가 이루어질수록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사기행각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 규모임이 드러났다. 전두환의 처삼촌 이규광의 처제였던 장영자는,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남편 이철희와 함께 권력을 배경으로 주로 자금압박에 시달리는 건설업체들에 접근하였다. 부부는 이들 업체에게 조건이 좋은 자금조달을 제시하였고, 그 담보로 대여액의 2∼9배에 달하는 약속어음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약속어음을 할인해 또 다른 회사에 빌려주거나..

이자겸의 난,1126년,인종,이자겸,척준경,최사전,인주이씨

1126년(인종 4) 왕실의 외척이었던 이자겸(李資謙)이 왕위를 찬탈하려고 일으킨 반란. 이자겸의 난은 척준경(拓俊京)과 그의 군사적 배경이 연계되었기 때문에 이·척(李拓)의 난이라고도 한다. 예종과 인종에게 자신의 딸을 왕후로 들이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이자겸을 인종이 자신의 측근세력을 종용하여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이 척준경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켰다. 그는 왕궁을 침범하여 국왕파 신료들을 제거한 다음 왕을 유폐시키며 정치를 독단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척준경을 이자겸과 갈라서게 해야 된다는 최사전의 계략을 수용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얼마 안 있어 이자겸은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포박되어 유배되었으며 인주이씨의 발호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왕권을 견제하면서 그들의..

이인좌의 난,1728년,영조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경종이 세자 때부터 질환이 심했으므로, 숙종은 세자의 왕위계승을 우려해 이이명(李頤命)에게 연잉군(延礽君)주 01)을 은밀히 부탁하는 정유독대(丁酉獨對 ; 1717년 숙종과 이이명 두 사람만의 만남)를 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세자청정을 할 때도 정사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재위 중에도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노론측은 경종의 무자다병(無子多病)을 이유로 연잉군의 세제책봉(世弟冊封)과 세제대리청정을 서둘렀다. 그러자 소론측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