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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62

조선총독부투탄의거, 1921년, 의열단, 김익상

1921년 의열단(義烈團) 단원인 김익상(金益相)이 조선총독부청사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 당시 27세의 김익상은 1921년 9월 중국 북경(北京)에서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조선총독부 폭파와 총독 등 일제 요인 처형을 위하여 폭탄 2개와 권총 2자루를 건네받고 같은 달 11일 서울로 잠입하였다.이튿날인 13일 아침 변장하고 왜성대(倭城臺)에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가 2층 비서과와 회계과에 각각 폭탄 하나씩을 던졌다. 처음에 던진 것은 불발되고, 두 번째 던진 것은 커다란 폭음과 함께 폭발하여 건물의 일부를 파괴하였다. 김익상은 혼란에 빠진 조선총독부를 빠져나와 평양을 거쳐 만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제 식민지지배의 상징인 조선총독부에 대한 폭탄투척은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파문을..

조선물산공진회,1915년,경복궁,박람회,일제강점기박람회,일선동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일제가 일부 건물을 훼손하거나 수축하여 경복궁에서 전국의 물품을 수집·전시한 대대적인 박람회.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 한국인에게 군사력과 경찰력으로 철저한 물리적 통제를 가하였다. 그들은 또 한편으로는 지배의 합법성을 창조하고 유지하기 위해 문화와 역사를 교묘하게 왜곡하거나 조작하면서 한국민의 상대적 열등성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또한 1910년대에 무단통치를 실시하면서 일제는 동시에 동화주의를 표방하였다. 그들은 총독정치가 조선인민의 복리를 증진하는 데 기여한다고 강변하면서 병합으로 한국민은 큰 혜택을 입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일제는 병합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고 이른바 조선의 진보와 발전을 한국민에게 전시하려는 의도에서, 시정(施..

조선어학회사건,1942년,조선어연구회,조선어사전편찬회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 한말에 일어났던 한글운동이 3·1운동 후 다시 일어나면서, 1921년 12월 뒤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된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이로써 민족의 숙원이며, 문화민족의 공탑이요 민족정신의 수호인 사전을 만들기 위한 일이 시작되어, 사전 편찬의 바탕이 되는 「한글맞춤법통일안」·「표준어사정(標準語査定)」·「외래어표기」 등을 제정하는 등 말·글의 연구 및 정리, 보급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중국 침략을 목전에 두고 조선 민족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해갔다.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한 후, 1937년에는..

물산장려운동, 조선물산장려운동,1920-1930년대, 경제자립운동.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한민족이 거족적으로 전개한 경제자립운동. 국권상실 후 일제의 경제침략은 더욱 거세어 일본자본에 의해 우리 민족의 생활권은 잠식되어갔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민족의 자각을 촉구해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근대기업을 일으켜 자주·자립경제를 수립,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경제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경제자립을 위한 민족적 자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직후부터이며, 1920년대 초부터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다. 1920년 봄 평양기독교계의 민족지도자들은 민족기업의 건설과 육성을 촉구하는 조직체 결성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이 해 8월평양야소교서원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발족하였다. 창립총회에는 평양의 유지 70여 명과 교육자·종교인·실업인 및 혁신 청년들이..

조선국한행이정약조,朝鮮國閒行里程約條,1883년,일본인 여행허용지역 확장

1883년(고종 20) 6월 조선 내에서의 일본인 여행허용지역을 확장하기 위하여 조선과 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 조선국 전권외무독판 민영목(閔泳穆)과 일본 전권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郎]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인은 이전보다 두 배나 넓은 지역을 여행할 수 있게 되었는데, 허용된 지역은 다음과 같다. 인천항에서는 동쪽으로 안산·시흥·과천까지, 동북쪽으로 양천·김포까지, 북쪽으로 강화도까지이고, 원산항에서는 서쪽으로 덕원부 마식령까지, 남쪽으로 안변부 고룡지원(古龍池院)까지, 북쪽으로 문천군 업가직(業加直)까지이며, 부산항에서는 동쪽으로 기장까지, 서쪽으로 김해까지, 남쪽으로 명호(鳴湖)까지, 북쪽으로 양산까지이다. 그리고 이 조약은 여행중인 일본인이 범죄행위를 저지른다 하여도 치외법권을 인정하..

조선국권회복단중앙총부사건, 1919년, 조선국권회복단원 체포

1919년 6월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이 대거 체포되었던 사건. 조선국권회복단은 단군(檀君)을 받들고 신명을 바쳐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것과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지도자와 연결,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1915년 1월 15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安逸庵)에서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 등이 시회(詩會)를 연다고 가장하고, 경북지방의 유림들을 포섭, 항일운동결사를 조직하였다. 조직은 통령(統領)에 윤상태, 외교부장에 서상일, 교통부장에 이시영·박영모(朴永模), 기밀부장에 홍주일(洪宙一), 문서부장에 이영국(李永局)·서병룡(徐丙龍), 권유부장에 김규(金圭), 유세부장에 정순영(鄭舜永), 결사부장에 황병기(黃炳基) 등으로 구성되었다. 활동..

조비무고사건, 고려 충선왕, 충선왕의 개혁정치, 계국대장공주, 충선왕 퇴위, 원간섭 강화계기

고려 충선왕 때 왕실에서 일어난 무고(誣告) 사건. 1298년(충선왕 1)에 몽고인 왕비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가 충선왕의 다른 왕비인 조비(趙妃)를 시기해, 조비가 자기를 저주했다고 무고함으로써 발단된 사건이다. 충선왕은 1295년(충렬왕 21)에 조인규(趙仁規)의 딸을 맞이하였다. 다음해에는 원나라에서 성종(成宗)의 질녀인 보탑실련(寶塔實憐)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들이 각각 조비와 계국대장공주이다. 계국대장공주가 충선왕과 조비 사이를 시기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298년에 충선왕이 양위를 받아 즉위한 뒤 수개월 만인 그 해 5월 종신(從臣) 활활불화(闊闊不花)와 활활대(闊闊歹)를 원나라에 보내어 조비가 자기를 저주했음을 무고하였다. 이로써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불화가 원에 알려..

제물포조약,1882년,임오군란,조선,일본,불평등조약

1882년(고종 19) 8월 30일(음력으로 7월 17일) 임오군란으로 빚어진 양국 간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조약. 6개조의 본조약과 2개조의 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으로 되어 있다. 임오군란 이후 청일 양군의 한성진주와 흥선대원군의 청국 납치 문제 등이 민씨정권의 재집권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이후 군란 뒤처리를 위한 조ㆍ청ㆍ일 3국의 절충 협의가 다각도로 벌어지게 되었다. 일본은 군란 때 일본세력의 조선 침투에 민족적 의분을 품고 있던 병사들과 시민들에 의해 공사관이 습격당했고, 별기군(別技軍) 교관 호리모토(堀本禮造)등 수 명이 살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군 3,000명이 한성에 진주하면서 청국의 정치적 영향은 커졌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의..

제네바회담, 1954년, 유엔참전국, 19개국 외상,스위스 제네바,한국의 평화적인 통일방안,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 회담 결렬, 분단

1954년 4월 26일∼6월 15일까지 유엔참전국을 비롯한 19개국 외상들이 스위스 제네바 전 국제연맹회관에서 한국의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개최했던 국제정치회담. 1953년 7월 27일판문점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이는 전쟁을 군사적으로 종결시켰을 뿐,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휴전협정 제4조 60항은 휴전조약이 조인되어 효력을 가진 뒤 3개월 안에 한반도로부터의 외국군 철수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토의할 고위정치회담을 열도록 건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해 8월 28일 유엔총회는 한반도에 있어서 독립된 통일 민주정부를 세우는 것이 유엔의 목표임을 재확인하면서 휴전협정을 승인하고, 특히 휴전협정 때 건의된 고위정치회담의 실..

제너럴셔먼호사건, 1866년, 고종,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평양

1866년(고종 3)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군민(軍民)의 화공(火攻)으로 불타버린 일. 1866년은 조선의 대외교섭사에 있어 중요한 한 해였다. 그해 초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정책(禁壓政策)에 따라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수천 명을 죽이는 이른바 병인사옥(丙寅邪獄)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의 배외 감정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경과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오리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그해 8월 정체 불명의 이양선(異樣船) 1척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왔다. 이것이 바로 제너럴셔먼호였다. 셔먼호는 원래 미국인 프레스턴(Preston,W.B)의 배였다. 그런데 프레스턴이 톈진(天津)에 기항하고 있던 중 그곳에 주재하던 영국 메도즈상사(..

제2차 왕자의 난, 1400년, 정종, 방간의 난, 박포의 난

1400년(정종 2)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일명 방간의 난 또는 박포(朴包)의 난이라고도 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세력구조는 이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아직 사병을 거느린 동모 형제(同母兄弟)들이 여럿 있고, 그들의 세력도 적지 않았다. 이방원으로서도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항상 그들을 견제하였다. 태조의 넷째 아들 이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으나, 인격·공훈(功勳)·위세가 이방원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마침 지중추부사 박포의 밀고가 있었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 태조, 무인정사, 방석의난, 방원의난, 정도전의난

1398년(태조 7)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 일명 방원(芳遠)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定社),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도 한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 간의 싸움인 동시에 정도전 일당과 방원 일당의 권력다툼이기도 하다. 조선 건국 이후 국가의 통치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개국공신들의 지위가 급격히 상승하였다. 1393년(태조 2)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의 설립을 계기로 정도전을 주축으로 추진된 병권집중운동과 중앙집권화정책은 권력구조면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개국공신 중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했지만, 여타의 훈신(勳臣)과 왕실세력 및 무장세력은 정치의 핵심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398년 이후 이른바 진법훈련(陣法訓鍊)이 강화되자 왕자·종친, 기타 훈신 및 ..

정중부의 난,1170년,의종,무신반란,문존무비(文尊武卑),보현원

1170년(의종 24) 정중부 등이 문신귀족정치에 반발해 일으킨 난. 경인년에 일어났으므로 경인(庚寅)의 난이라고도 한다. 정중부 등이 반란을 일으켜 문신귀족정치를 타도하고 무신정권을 수립해 고려사회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역사적 배경 예종 때 여진의 정벌,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 등으로 무신의 지위가 크게 상승하였다. 그러나 문존무비(文尊武卑)의 풍조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은 고사하고라도 군사행동에서 문신이 지휘관이 되고 무신은 아래에서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군인들이 적과 싸워 공을 세워도 불력(佛力)에 의한 것이라 하여 그 공을 부처에 돌리는 수가 많았다. 특히, 난이 일어날 무렵 문..

정주영소떼방북사건,1998년,정주영,판문점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은 사건. 1998년 6월과 10월 2차례에 걸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였다. 1998년 6월 16일 83세의 정주영 회장은 트럭 50대에 500마리의 소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었다. 이날 오전 임진각에서 정주영 회장은 “이번 방문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그 소회를 밝힌바 있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은 향후 10여 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될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는 기념비적 사건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역사적 배경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실향민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이룬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 그는 17세 때 현재 ..

정읍발언, 1946년, 단독정부, 이승만

1946년 정읍에서 단독정부수립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승만의 발언. 반탁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가운데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보도되었다. 좌익 중심의 찬탁운동과 우익 중심의 반탁운동의 대결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1946년 6월 3일,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이승만은 정읍에서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라는 정치적 발언을 했다. 이 발..

정미약조, 1547년, 명종, 일본 국교 허용

1547년(명종 2) 조선이 3년 전의 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이후 중단되었던 일본과의 국교를 다시 허용한 조약. 조선은 삼포왜란 이후 1512년 일본과 임신약조를 체결하고 왜인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일본은 호족들이 할거하는 전국시대의 내란기로 국내가 혼란해지자 왜구들이 다시 일어나 왜인과의 충돌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544년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사량진(경남 통영시 원량면 진동)에 쳐들어와 인마(人馬)를 약탈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왜인 내왕을 금하였다. 일본은 대마도주를 통해 국교 재개를 간절히 요청했으며 조정에서는 통교 문제를 놓고 찬반 양론으로 맞섰다. 문제는 왜인들을 믿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결국 국왕사(國王使)의 통교만을 허용하고 대..

정묘호란,1627년,인조,후금(後金)

1627년(인조 5) 후금(後金)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전쟁. 1월 중순부터 3월 초에 걸쳐 약 2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경향이 고조되었지만,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동아(東亞)의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적 외..

전후복구삼개년계획,북한,1954년,전후복구,중공업우선노선,로력영웅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진행된 북한의 전후 복구 계획. 1953년 8월 5일 발표된 김일성의 전후인민경제복구발전에 관한 방침을 기본으로 시행되었다. 1953년 하반기 6개월의 준비단계를 거친 후, 1954년부터 1956년까지 3년간 진행되었다. 소련과 동구권, 중국 등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 기간 동안 연평균 42%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북한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기반이 되었다. 역사적 배경 1953년 8월 5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모든 것을 전후인민경제복구발전을 위하여’를 발표하고 전후 복구 계획의 기본 방향을 정립하였다. 이 계획의 기본 방향은 중공업우선의 경제건설 노선이었다. 이 보고에서 김일성은 “중공업 기업소들의 확장과 인민생활 안정을 위한..

전황, 錢荒, 荒, 거칠 황, 조선 후기, 동전 유통 부족 현상

조선 후기, 특히 1700년대 초부터 181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일반 유통계에 거의 만성적으로 나타났던 동전 유통량 부족현상. 荒. 거칠 황, 돈이 마르다. 봉건 조선정부는 1600년대에 들어, 그 당시 급진전하는 사회경제 발전에 대응하는 한편, 거의 파탄에 직면한 국가경제를 되살려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이에 국가경제 재건책의 일환으로 미(米)·포(布) 등 물품화폐와 칭량은화(稱量銀貨)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名目貨幣)인 동전을 법화(法貨)로 유통, 보급하기 위해 화폐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화폐정책은 1600년대 전반기에는 사회경제의 미숙성, 화폐 원료의 공급난, 정책 운용의 불합리성 및 호란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시행착오를 되풀이했다. 그러나 국가의 화폐정책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중에도..

전태일분신사건,1970년,평화시장,근로기준법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 항거 자살한 사건. 전태일은 1965년부터 서울 평화시장에서 시다, 재단사 등으로 일하면서, 시다를 비롯한 여공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 침해를 체험하였다. 1969년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지만, 노동자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건축 노동자로 일하다가,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였다. 그와 동료들은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 설문 조사를 하여 정부, 언론 등에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노동조건은 개선되지 않았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

저고여피살사건,1225년, 고종, 몽고 사신 저고여

1225년(고종 12) 고려에 왔던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피살당한 사건. 강동성(江東城)의 전역(戰役)이 끝난 뒤 몽고는 고려에 대해 큰 은혜라도 베푼 듯이 해마다 동진국(東眞國)을 경유해서 사절을 파견하여 과중한 공물을 요구해 왔다. 특히, 저고여는 1221년과 1224년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 파견되어 무례한 행동으로 공물을 요구하였다. 한편, 몽고에 굴복했던 동진의 만노(萬奴)는 이때 서역지방으로 원정을 나선 칭기즈 칸[成吉思汗]의 소식이 막연함을 호기로 삼아 몽고와의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1224년 정월 고려에 사신을 보내와 이 사실을 통고하는 동시에 각기 각장(榷場)주 01)을 설치하여 무역을 하자고 요청해 왔다. 이에 고려는 몽고를 배반한 만노를 가까이할 수도 없..

재일조선인북송사업,1959년,9만 3천,재일동포

1959년 12월부터 1984년까지 9만 3천여 명의 재일동포들이 북한으로 영주 귀국한 사업. 재일조선인북송사업은 1958년 8월, 인도 캘커타에서 가진 북한적십자회와 일본적십자사 간 합의에 의해 1959년 12월 14일부터 1984년까지 9만 3천 339명의 재일동포들이 북한으로 영주귀국한 사업으로, 초기 2년간 61년까지 전체의 80%인 7만 4천 900여 명이 귀국하였다. 1965년 한일수교 이후 한국정부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1968년부터 3년간 중단되었지만, 1971년 재개되었고 이후 15년 간 4천 700여 명이 추가로 귀국하였다. 역사적 배경 북송사업 초기 북한은 전후 복구사업이 종료(1956년)되고, 1950년대 말부터 ‘천리마운동’을 통해 대중동원을 통한 양적 성장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장진호전투,1950년,미 제1해병사단,중공군,철수작전

1950년 11월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과 충돌하여 2주간에 전개한 철수작전. 장진호전투는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규모가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간에 걸쳐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 목적과 병력규모를 11월 초까지도 경시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가 선제공격을 단행하기로 결심함에 따라 동부지역을 담당한 미 제10군단 알몬드(Edward M. Almond)소장은 국경선을 목표로 한 북진을 재..

자유언론실천선언,1974년,자유언론실천대회,동아일보,동아방송,언론자유화,언론노동운동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대회에서 채택한 선언. 언론은 활자나 전파매체를 통해 사실을 전달하고, 여러 계층들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해 여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언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이러한 이유로 자본과 권력은 지배력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언론을 장악하고 정보를 통제해 왔다. 언론 통제에 맞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언론노동운동의 역사는 4월 혁명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 5월 부산지역의 모든 신문사에 노조가 결성되었고, 뒤이어 대구지역의 대구일보, 영남일보, 대구매일신문 등에서 노조가 조직되었다. 서울지역에서는 연합신문, 자유신문, 평화신문, 국도신문 등에서 노조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군부세력에 ..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년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케이초[慶長]의 역(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으로 부른다.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

임오화변(壬午禍變), 1762년, 사도세자, 영빈이씨, 영조, 한중록, 뒤주

1762년(영조 38), 임오년에 발생한 정치적 화변. 임오화변(壬午禍變)은 1762년(영조 38) 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왕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경종대 이후 당쟁은 군주 혹은 예비 군주를 선택하는 상황과 결부되어 한층 파급력도 크고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실시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세자와 갈등을 일으켜 임오화변이 발생하였다. 임오화변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다양한 원인을 배경으로 한다. 임오화변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노·소론 당쟁설과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 갈등설이 대립하는 가운데 뚜렷..

임오군란(壬午軍亂),1882년,고종,대원군 집권

1882년(고종 19) 6월 9일 훈국병(訓局兵)들의 군료분쟁(軍料紛爭)에서 발단해 고종 친정 이후 실각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변(政變). 군란의 배경을 단지 민씨척족정권(閔氏戚族政權)에 대한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守舊派)의 정쟁(政爭)으로만 볼 수는 없다. 고종을 비롯한 민씨척족정권이 개화정책을 추진해 일본과 구미제국과의 교섭통상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개화파 관료가 제도 개혁에 따라 대거 등장하자 수구파의 반발이 격화되었다. 특히, 5영(營)을 폐지한 후 무위(武衛)·장어(壯禦)의 2영을 설치하고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는 등 군제 개혁이 단행되자 구 5영소속 군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881년 전개된 수구파의 위정척사론과 이..

임신약조(壬申約條),1512년,중종,일본 대마도주

1512년(중종 7) 조선과 일본 대마도주(對馬島主) 사이에 맺은 무역에 관한 조약. 1510년 삼포왜란이 있은 뒤 조선은 삼포를 폐쇄해 왜인과의 교통을 끊고 방비를 엄중히 하였다. 그 결과, 물자의 궁핍을 느낀 대마도주는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를 통해 조선에 통교를 간청하게 되었다. 일본은 국왕사(國王使) 호추(弸中)를 2차에 걸쳐 조선에 파견해 강화를 시도하였다. 조선에서는 강화 반대론도 많았지만, 첫째 군사 방위 시설의 증가에 따른 국민의 부담 과중, 둘째 북방의 야인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또 다른 한편에 긴장 요인을 둘 수 없다는 점, 셋째 후추[胡椒]·단목(丹木) 등 약용품의 수입 필요성, 넷째 조선은 지리적으로 사실상 일본과 절교하기 힘들며, 특히 대마도는 생활 필수품인 식량 등이 ..

임술민란(壬戌民亂),1862년,철종,삼남지역,농민전쟁,

1862년(철종 13) 삼남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전쟁. 1862년 농민항쟁은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 70여 개 고을에서 일어났다. 최초로 일어난 곳은 2월 4일 진주 바로 위쪽에 있는 작은 고을인 단성이었다. 단성으로부터 시작된 항쟁은 3월에는 경상도 지역으로, 4월에는 전라도로, 5월에는 충청도로 확산되었다. 정부가 조세문제를 개혁하겠다고 약속하자 항쟁이 수그러졌다가 정부가 개혁을 시행하지 못하자 다시 터져 나왔다. 9월부터 제주지역, 함경도 함흥, 경기도 광주, 경상도 및 몇 고을에서 농민항쟁이 발생하였다. 농민항쟁이 발생한 주요한 원인은 삼정문란(三政紊亂)을 비롯한 봉건정부와 관리의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수탈이었다. 또 항쟁 과정에서 고리대나 고을의 소작료를 통해 지..

임수경 평양축전참가사건,1989년,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임수경,전대협,판문점,문익환

임수경이 1989년 평양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여했다가 판문점으로 귀환하다가 체포된 사건.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반제 자주와 반전 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건 축전이었다. 제13회 축전은 1989년 7월평양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 4학년 학생이던 임수경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 대표로 선발되었다. 형식상 일본 관광으로 출국했지만, 독일을 거쳐 1989년 6월 30일 북한에 입국했다. 축전에 참여하여 북한 인민들로부터 대대적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정의구현사제단의 대표로 파견된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걸어서 귀환했다. 임수경은 입국과 동시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국가안전기획부의 조사를 받았다. 징역 5년, 자격정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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