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첩, 空名帖
조선시대 수취자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고 관직을 제수하거나, 면역 · 면천 등을 허가한 문서.
관직 · 관작의 임명장인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 양역(良役)의 면제를 인정하는 공명면역첩(空名免役帖), 천인에게 천역을 면제하고 양인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공명면천첩(空名免賤帖), 향리에게 향리의 역을 면제해주는 공명면향첩(空名免鄕帖) 등이 있다.
이 제도는 임진왜란 중에 나타난 것으로, 군공을 세운 사람 또는 납속(納粟)을 한 사람들에게 그 대가로서 주어졌다.
그러나 그 뒤 국가의 재정이나 군량이 부족할 때, 또는 진휼(賑恤)을 위해, 심지어는 사찰을 중수하는 비용을 얻기 위해 남발하였다. 그 폐단은 처음 발급될 때부터 나타났다.
예컨대, 모속관(募粟官)들이 공명고신을 사사로이 주고받기도 하였다. 또, 이조와 병조에서는 공명첩을 발급만 했을 뿐, 누가 어떤 공으로 받은 것인지 기록해놓지도 않았고, 그 뒤의 관리도 소홀히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방관과 하리들의 작폐가 심했고, 위조 · 남수(濫授) 등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났다. 그러한 문제는 그 뒤 더욱 심해져, 조선 후기에 신분 제도를 문란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면역 · 면천 · 면향을 위한 공명첩은 신분의 상승 효과를 가져왔으나, 관직과 산계(散階)를 주는 고신공명첩(告身空名帖)은 실제의 관직이 아니라 허직(虛職)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관직은 자손에게 미치지 못하고 가문의 지위를 높이는 데도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납속해 공명첩 얻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자 지방관은 모속의 공을 올리기 위해 강제로 팔아넘기는 일도 있어, 원하지 않아도 공명첩을 사들이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명첩을 사들이고도 자기의 이름을 써넣지 않아, 지금 전해지는 고문서에는 이름이 없는 공명첩을 볼 수 있다. 또한, 교지 중에 이름의 필체와 그 문서의 필체가 다른 경우 공명첩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진휼을 위한 공명첩 발매의 예는 1677년(숙종 3) 기근을 당해 진휼청에서 매매한 공명첩이 있다. 또한, 사찰의 중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1793년(정조 17) 유점사(楡岾寺)에 100장, 1851년(철종 2) 법주사에 400장, 1879년(고종 16) 귀주사(歸州寺)에 500장의 공명첩을 발급한 일이 있다. 이 문서는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