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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52

형평운동(衡平運動), 1923년, 백정(白丁), 신분 해방 운동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 운동. 형평운동은 백정의 계급적인 해방투쟁과 민족적인 해방투쟁의 두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백정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인 지배 관계를 유지시키려는 정책을 펴,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이력서 등에 반드시 신분을 명기하도록 했다. 때문에 당시 백정은 자신의 신분을 호적상 도한(屠漢)으로 기재하든지 붉은 점[赤點]으로 표시했으며,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또한 그대로 존속되었다. 당시 백정의 수효는 형평사 통계에 의하면 40여 만명이었고,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3만 3712명이었다. 이들은 일부가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본업이라 할 ..

헤이그특사, 1907년, 고종, 네덜란드, 만국평화회의, 을사조약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도발 이후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구미 열강이 일제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도록 조처한 뒤, 1905년 11월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해 ‘보호국’으로 삼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이 조약을 인준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내보냈다. 미국의 헐버트(Hulbert, H. B.) 박사에게 전보를 보내 그 곳에서 조약 반대운동을 벌이게 한 것도 이 즈음의 일이었으나, 별다..

행주대첩, 임진왜란, 1593년, 권율

임진왜란 때인 1593년 2월에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권율은 왜란 초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1592년(선조 25) 7월 배티〔梨峙〕싸움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관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한 뒤,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의 원군과 호응해 서울을 되찾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군대를 서울 근교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에게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도록 하였다. 조경은 양천(陽川)에서 한강을 건너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어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권율은 서울 주변인 안현(鞍峴)에 진을 치려고 했으나 막하 장수들..

해주옥사(海州獄事), 1616년, 광해군, 이이첨, 대북, 소북

1616년(광해군 8) 집권 세력의 압력으로 인해 빚어진 역모 혐의자 처리 사건. 이 사건은 전 해에 일어난 ‘신경희(辛景禧)의 옥사(獄事)’로 소북 세력으로부터 적지 않은 공세를 겪은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 세력이 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소북 세력을 누르려는 목적에서 조작한 것이라고 한다. 대북 세력과 소북 세력의 대립을 통해 대북이 정권을 독점해가던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빚어졌으며, 그 뒤 서인 세력이 집권한 뒤 사건의 전말이 재해석됨으로써 오늘날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대략 다음과 같이 사건이 전개되었다. 당시 대북 세력은 반대 세력에 속한 황신(黃愼)·남이공(南以恭)이 황해도로 귀양간 때에 “구월산에 큰 도적이 숨어 있다.”는 말을 퍼뜨리고, 해주민으로 행실이..

한칠레자유무역협정, 2004년, 최초 자유무역협정(FTA)

2004년 4월 1일칠레와 체결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무역협정(FTA). 한국과 칠레 간 자유무역협정을 통하여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수출 확대 및 안정적인 원자재의 확보에 그 목적이 있다. 역사적 배경 한·칠레 FTA는 5년이라는 긴 준비 과정을 거쳐 발효됐다. 1998년 11월에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한국과 칠레가 FTA 추진에 합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협상이 시작되어 2002년 10월제네바에서 열린 제16차 협상에서 타결되고, 2003년 2월에 정식 서명하였다. 2004년 2월에 한국 국회에서 비준동의가 통과됨으로써 2004년 4월 1일부터 한국·칠레 FTA가 발효되었다. 주요사업 한·칠레 FTA 협정문은 전문 및 21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상품 교역, 투자 및 서비스, 경쟁정책,..

한중어업협정(韓中漁業協定), 2000년, UN해양법협약, 어업분쟁

2000년 8월 3일 한국과 중국이 서해상에서 양국 사이의 어업분쟁을 조정하고자 체결한 협정. 한중 양국이 각각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선포한 이후 양국 간 수역 거리가 400해리 이내이기 때문에 해양경계획정은 장기적 사안이 되었다. 이에 서해 수역 획정과 어업협력을 위하여 1993년 12월부터 19차례의 회의를 진행하였다. 한중어업협정은 2000년 8월 3일 정식 서명이 이루어졌고, 국회 비준을 거쳐 2001년 6월 30일 공식 발효되었다. 역사적 배경 1994년 11월 ‘바다헌장’이라고 불리우는 유엔해양법 협약이 발효됨에 따라 각국은 200해리(360km)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포하였고, 우리나라는 1996년에, 중국은 1998년에 각각 배타적 경제수역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한·중 양국 간..

한중수교(韓中修交), 1992년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에서 남북한 관계 개선과 사회주의권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바 있으며, 한중수교는 그 연장선에서 평가할 수 있다. 한중수교의 국제적 배경은 1989년 12월 미소 몰타정상회의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했고, 1989년 5월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으로 중소관계가 정상화되었으며, 1990년 9월 한소수교가 수립된 것 등이 한중수교의 디딤돌이 되었다. 중국인민공화국의 건설과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양국간의 교류를 새롭게 개시하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한중수교 과정을 보면, 1991년 한국과 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영사 기능을 일부 ..

한일협정반대운동,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전개된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한 야당, 지식인, 학생,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 한일협정반대운동은 1964년 3·24시위에서 6·3시위까지 이르는 한일회담반대운동과 1965년 8·27시위까지의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4년 박정희 정부는 ‘3월 타결, 5월 조인’으로 조기타결 방침을 굳게 세웠다. 경과 이에 3월 9일 야당과 재야세력들은 ‘대일저자세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회담반대 강연회를 개최했다. 한편 대학가에서는 3월 24일서울대·고려대·연세대·대광고 등에서 한일회담 즉각 중지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고, 이후 전국으로 ..

한일의정서, 1904년, 조일공수동맹

1904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교환된 의정서. 러·일 간의 전운이 급박함을 알게 된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 양국간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러·일 양국은 이 해 2월 6일 국교를 단절, 2월 8일여순(旅順)항에서 처음 포성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2월 9일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그날로 서울에 들어왔고, 2월 10일에는 정식으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렇듯 순식간에 국토가 무서운 전쟁터로 변하여, 한국 정부로서는 국외중립을 견지할 방도가 거의 없게 되었다. 한편, 일본군의 서울 입성과 동시에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는 외부대신서리 이지용(李址鎔)을 통해 고종을 알현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전쟁의 불가피성과 일본에 ..

한일병합조약, 1910년, 경술국치, 강제병합, 데라우치 총독

1910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경술국치조약·일제병탄조약이라고도 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한국의 주권을 침탈하기 위해 러일강화조약(포츠머스조약)에서 일본측 전권위원의 결의 표명으로, ‘일본국 전권위원은 일본국이 장래 한국에 있어서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조치가 동국의 주권을 침해하게 될 경우 한국 정부와 합의한 뒤 이를 집행할 것을 여기에 서명한다.’는 내용을 회의록에 넣었다. 이는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침탈할 경우 반드시 한국 정부의 동의를 얻고 집행하겠다고 국제적 약속을 하면서 열강의 양해를 구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일제는 무력으로 일거에 한국을 집어삼키지 못하고, 국제법상 한국의 황제와 정부의 동의가 있을 때에 한해 합법..

한소수교(韓蘇修交), 1990년, 노태우, 고르바초프, 해빙, 북방외교

1990년 9월 30일 수립된 한국과 소련의 국교. 1990년 6월 4일 한국 노태우 대통령과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정상회담을 갖고 한소수교 원칙에 합의함으로서 한소수교가 성사되었다. 이는 1904년 러일전쟁으로 단교한 이후 한국과 소련 간의 86년 만의 국교 정상화이다.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이 1904년 파기된 후에 공식 교류는 전무했으며, 미소 냉전체제에서 한국과 소련도 적대적 관계가 지속되어왔다. 1990년 9월 30일 한국의 최호중 외무장관과 소련의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유엔에서 수교합의 의정서에 서명하였다. 한소수교 이후 1990년 12월 31일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했고, 1991년 4월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하여 양국간의 우애를 확인했다. 한소수교는 노..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간에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되었으며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체결된 조약. 1953년 10월 1일 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남한) 방위를 위하여 외국과 맺은 군사 동맹으로서, 이는 최초이며 지금까지 유일한 동맹조약이다. 이 조약의 체결배경을 보면 1950년 한국전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남침으로 개시된 한국전쟁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 중공군(당시)이 참전하여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어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1951년 6월 미국과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군측간에 휴전이 제의되어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에게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19..

한글파동, 1954년, 한글 간이화안(簡易化案)

1954년 7월 공포된 정부의 「한글 간이화안(簡易化案)」을 중심으로 빚어진 일련의 문화적·사회적 파동. 1933년에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종래의 음소주의적(音素主義的) 정서법의 전통을 도외시하고 당시의 문법연구의 정수를 모아 이룬 형태주의적(形態主義的) 정서법인 것이다. 그 결과 일반에게는 배우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져 기회 있을 때마다 음소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반격을 받아왔다. 그러던 차, 1954년 3월 27일 “신구약과 기타 국문서에 쓰던 방식을 따라 석달 안에 교정해서 써야 할 것”이라고 발표한 그 당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담화문이 한글파동의 동기가 된 것이다. 이 담화문이 있은 한 달 뒤인 그 해 4월 27일에 공포된 「현행 철자법의 폐지와 구식 기음법..

학생전위동맹사건, 1929년, 광주 학생, 맹휴시위운동(盟休示威運動), 광주학생독립운동

1929년 광주학생들의 항일운동 이후,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학생전위동맹을 중심으로 서울 시내 각 학교의 격문사건과 맹휴시위운동(盟休示威運動)을 벌인 사건. 학생전위동맹은 1926년 조국 광복을 목적으로 조직된 학생혁명당(學生革命黨)의 후신으로 1929년 3월 하순에 개칭된 비밀결사이다. 학생전위동맹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1929년 11월 7일부건(夫鍵)·권유근(權遺根) 등을 광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장석천(張錫天)·강영석(姜永錫) 등과 회합하고 광주사건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검거당한 학생의 석방과 나아가서는 ‘조선독립’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우선 서울시내 각 중등학생을 움직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여세를 몰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려..

학병동맹사건, 1946년, 신탁통치, 학병동맹, 반탁진영

1946년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학병동맹측과 반탁진영 간의 충돌을 계기로 벌어진 사건. 학병동맹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일제시기 강제로 징집됐던 학병 출신들이 만든 사설군사단체이다. 왕익권(王益權)과 이춘영(李春永) 등이 주도하고, 초기에는 이념의 구분 없이 학병 출신들을 대상으로 조직되어 8·15 직후 경찰서를 접수하거나 치안유지 등을 전개하고, 향후 국가 수립 이후 군대창설의 주역이 되겠다는 목표 아래 활동했다. 『학병』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1945년 12월 자신들의 경험으로 만든 연극 「피어린 기록」을 공연하여 얻어진 수입금 34,000원을 전재민 돕기 성금으로 서울신문사에 기탁하고 학병 징집일인 1월 20일을 ‘학병의 날’로 제정했다. 그러나 1945년 10월 중순경 좌익계 청년단..

피의능선전투, 6·25전쟁, 양구

6·25전쟁 당시 양구 북방의 피의 능선에서 벌인 진지(陣地) 공격전투. 전투기간은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3일까지이다. 피의 능선(稜線)이란 《Star and Stripes》지가 지은 이름으로 3개의 고지 즉, 983고지·940고지·773고지와 연결된 산맥으로 이루어진 능선을 말한다. 피의 능선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캔사스-와이오밍 선으로 진출한 후, 주 저항선 전방의 전초기지 확보를 위해 제한된 공격작전을 실시하고 있을 때,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가 양구 북방의 피의 능선을 공격하여 북한군 제12사단과 제24사단을 격퇴하고 목표를 점령한 공격전투이다. 피의 능선에 대한 공격은 1951년 8월 17일 아침 한국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8월 25일 10여 일에 달하는 공격으로 ..

푸에블로호납치사건, 1968년,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북한 원산항

1968년 1월 23일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Pueblo號)가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사건. 푸에블로호는 이날 1월 23일 1시 45분에 동경 127°54′3″, 북위 39°25′ 공해상에서 무장한 4척의 북한 초계정과 출동한 미그기 2대의 위협 아래 나포되어 원산항으로 강제 납치되었다. 함장 중령을 비롯한 6명의 해군장교와 수병 75명, 민간인 2명을 포함한 총 83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푸에블로호는 이 날 정오경 1척의 북한 초계정으로부터 첫 도전을 받았으며, 이 날 하오 2시 32분 “엔진이 모두 꺼졌으며 무전연락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원산항으로 끌려간다.”는 최종 보고를 보내 왔다. 해군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되기는 미해군사상 10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

포츠머스 강화조약, 1905, 러일전쟁, 미국 루스벨트

1905년 9월, 러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간에 체결된 강화조약. 1905년 8월 9일부터 미국 뉴우햄프셔주에 있는 조그마한 군항 도시 포츠머스에서,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종전협상을 거듭하여 1905년 9월 5일 크게 다섯 가지 사항을 합의한 강화회담이다. 사실상 일본의 승리를 확인한 조약이었다. 역사적 배경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일본군이 중국 여순(旅順)의 러시아 해군기지를 기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쟁은 1905년 1월 봉천(奉天)전투와 5월의 동해해전에서 일본군이 러시아군에 승리하면서 일본이 승세를 잡았다. 일본은 유리한 전쟁 상황을 활용하여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러시와의 강화를 알선해 주도록 ..

포츠담선언, 1945년, 연합국 정상회담, 대일(對日) 공동선언

1945년 7월 26일,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 중 발표한 연합국의 대일(對日) 공동선언. 연합국 정상들은 이 선언에서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고, 또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대일처리방침을 밝혔다. 역사적 배경 포츠담 회담(Potsdam Conference)은 1945년 5월 8일 독일이 항복한 뒤, 일본의 항복 문제와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의 세 번째 전시회담이다. 회담은 1945년 7월 17일에 시작하여, 8월 2일 종결되었다. 회담의 주요 의제는 패전국 독일의 통치방침, 해방국 폴란드의 서부 국경 결정, 패전국 오스트리아의 점령방침, 동유럽에서 러시아의 역할, 패전국의 배상금문제, 대일(對日..

포상팔국의난, 남해안, 8개 소국, 가야

남해안 일대에 있었던 8개의 소국이 가야를 침략하여 일어났던 사건. 포상팔국은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의 내해니사금 14년조와 같은 책 권48의 물계자전, 『삼국유사』 권5 물계자조에 등장한다. 8국이라 하였으니 모두 여덟 나라이겠지만 사료 상 보이는 나라는 골포국(骨浦國), 칠포국(柒浦國), 보라국(保羅國), 고자국(古自國), 사물국(史勿國) 등 다섯 나라이다. 이들이 힘을 합하여 가라(加羅) 또는 아라(阿羅)를 침범하니 신라가 도와 팔국의 병사들을 물리친다는 것이 내용의 대략이다. ‘포상팔국의 난(亂)’이란 명칭은 신라사 중심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라 하여, 최근에는 ‘포상팔국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점들이 논란이 되고 있다. 첫째는 포상팔국 전쟁이 일어난 시기와 성..

폐비윤씨사사사건, 성종, 폐비윤씨, 정의왕후, 소혜왕후, 연산군

조선 성종의 계비 윤씨가 부덕한 소치로 폐비가 되고 그 뒤 사약을 받아 죽은 사건. 윤씨의 아버지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무(起畝)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이후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1476년 왕비로 책봉되고 이 해 세자 융(0xF92C : 뒤의 연산군)을 낳았다. 왕비가 된 뒤 투기가 매우 심해 국모로서 부덕한 일을 자주 일으켰다. 1477년에 비상(砒霜)을 숨겨 왕과 왕 주위의 후궁을 독살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아 빈(嬪)으로 강등되려는 수모를 겪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일로 왕과 모후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격분을 유발해 이 해 여러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비..

폐가입진, 廢假立眞, 가왕(假王)을 몰아내고 진왕(眞王)을 세운다, 고려 말, 이성계, 창왕, 공양왕, 역성혁명

가왕(假王)을 몰아내고 진왕(眞王)을 세운다는 말로,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 등이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사건. 창왕과 그 아버지 우왕(禑王)이 왕족이 아니라는 의심은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恭愍王)이 최만생(崔萬生)·홍륜(洪倫) 등에 의해 시해된 뒤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되었다. 이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辛旽)과 그의 비첩(婢妾) 반야(般若)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역사적 배경 당시 태후와 시중 경복흥(慶復興) 등은 종친으로써 왕위를 잇게 할 것을 주장했으나, 이인임(李仁任) 등이 이미 대군에 봉해져 있던 우왕의 옹립을 고집해 결국 우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직후에 이성계측의 윤소종(尹..

평양 천도, 고구려, 장수왕, 427년, 국내성, 평양성,

고구려가 도읍을 압록강변의 국내성(國內城)에서 대동강변의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긴 사건. 4세기대 국력이 비약적으로 신장된 고구려는 대폭 늘어난 인구와 영토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였다. 국내성에서 대대로 뿌리를 내린 귀족들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고 왕실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왕도(王都)의 건설이 요청되었다. 이와 같은 필요성은 광개토왕 이후 점차 대두되었다. 한편 장수왕의 재위 기간(412∼491) 동안 국제정세는 복잡하였다. 북연(北燕)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쪽으로부터의 압박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서쪽에서 새로 일어난 북위(北魏)는 고구려에게 위협적인 강적이었다. 한편「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 의하면, 왜가..

평양성 전투, 1592년, 임진왜란, 이여송, 고니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 조선과 일본의 군대와 벌인 네 차례의 전투. 제1차 전투는 1592년(선조 25) 5월에 있었다. 즉,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5월 2일 서울에 진입, 새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고니시에게 평안도를 침입하게 하였다. 임진강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침을 계속하던 고니시의 군대는 6월 1일 개성을 출발, 평양으로 향하였다. 이에 선조는 11일 평양을 떠나 의주로 피난하고 평양성을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등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성중에는 군민(軍民)을 포함 3,000∼4,000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나누어 성을 지키게 했으나, 항오(行伍)가 분명하지 못하고 치밀한 작전 계획도 없었다. 다만, ..

팔칠년체제, 1987년 기점, 6월 항쟁, 6·29선언, 민주화, 대통령직선제

1987년을 기점으로 한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정치변동과 특질을 통칭하는 개념이자 담론. 1987년은 6월 민주항쟁과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고 노동진영을 비롯한 시민사회의 힘이 성장하면서 표면적으로는 급속도로 민주화가 이루어져 정치·경제·사회적 변화와 변형을 겪게 된 기점이었다. ‘87년 체제’는 한국사회의 현재 모습을 형성하는데 87년의 민주화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인식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87년 체제는 1987년을 기점으로 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이행과 민주개혁의 시기를 거쳐 형성된 체제로서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출현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체제의 복합적 특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87년 체제’라는 용어가 쓰이는 일차적인 이유는 현재 우리의 직접적 뿌리가 87년에..

8·15선언, 1970년, 박정희, 닉슨독트린, 체제경쟁

1970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 제25주년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대북선언. ‘닉슨 독트린’ 선언 이후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변화하자 1970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 제25주년 기념식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전기를 새로이 마련하고자 대북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 전복을 기도해온 종전의 태도를 포기한다고 대외에 공표하고, 이를 행동으로 실증해야만 한다. 이러한 요구를 북한이 수락·실천한다면 인도적 견지와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는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갈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 둘째, 북한이 한국의 민주·통일·독립..

판문점도끼만행사건, 1976년, 공동경비구역,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유엔사 경비병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방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사 경비병들을 북한군 수십 명이 도끼 및 흉기로 구타, 살해한 사건. 북한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일으킨 핵심적인 대외적 동기는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한은 남북 간의 긴장상태를 ‘북침 위협’으로 역선전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는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미국과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키는 법적 효력을 지닌 대미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유엔군사령부의 존재 명분을 제거하여 유엔군사령부의 해체를 실현하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북한의 대내적 동기는 긴장상..

통일축전, 2000년, 6·15 남북공동 선언문, 남북 공동행사

2000년 '6·15 남북공동 선언문' 발표 이후 개최되었던 남·북한 공동행사. 2000년 6월 남북한 정상회담 이후 축적된 남북한 교류와 협력의 분위기는 민간 차원의 다양한 교류와 협력의 실천을 통해서 공고해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남북한 간의 공동행사를 통해 통일문화를 창출하는 ‘통일축전’이다. 2001년에 민족통일대축전(평양)이 처음으로 개최된 이래 2002년 8·15민족통일대회(서울), 2003년 8·15민족대회(평양), 2004년 우리민족대회(인천) 등의 행사가 민간주도로 이루어지다, 2005년 민족통일대축전(평양)부터는 남북한 정부당국자들의 참석이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경색으로 인해 2008년 이후부터 남북 공동행사 차원에서는 개최되지 않고 있다. 역사적 배경 2000년 6월 13일..

탄금대전투, 임진왜란, 신립, 김여물, 충주, 조령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을 주장으로 한 조선군과 왜군이 충주에서 벌인 전투. 1592년 4월부산에 상륙한 왜군 대병력이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북방 방비에서 용맹을 떨친 신립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임명, 이를 막게 하였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한 뒤 4월 24일 부장 몇 사람과 조령(鳥嶺)으로 달려가 형세를 살필 때, 먼저 경상도로 남하했던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해 돌아왔다. 이 때 종사관(從事官) 김여물(金汝岉) 등이 “적은 군대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마땅히 지형이 험한 조령뿐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이곳에서는 기병(騎兵)을 쓸 수 없으니 마땅히 평원에서 일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6일 그는 드디어 충주의 서북..

칼기폭파사건, 대한항공(KAL) 858기, 1987년, 김현희

대한항공(KAL) 858기가 1987년 11월 29일 북한공작원 김현희 등에 의해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파된 사건. 북한은 1987년 11월을 전후하여 대한민국 내부가 개헌 문제, 대통령 선거 등 극도로 복잡해진 정치일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한국 국내정국을 더욱 혼란시키고 사회 불안을 더욱 가증시켜 민주발전을 저해시킨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었다. 대한항공 폭파사건은 국제적으로 고립된 북한이 서울올림픽의 안전문제를 세계 여론화하여 참가 예상국을 위축시키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서울올림픽 자체를 개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 한 반인륜적인 사건이었다. 경과 북한은 사건 발생 오래전부터 미리 공작원을 선발하여 용의주도하게 준비시켰다. 1984년 7월 마침내 북한의 김현희, 김승일 등 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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