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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62

후삼국통일, 10세기, 고려, 신라·후백제 통합, 발해 유민 포섭

10세기 전반기에 고려가 신라·후백제를 통합하고 발해 유민을 포섭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한 일. 신라 말기에 등장한 후백제·후고구려(태봉·고려)와 신라를 우리 역사상 후삼국이라 하고,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건국한 892년(진성여왕 6)부터 고려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태종 19)까지의 45년간을 후삼국시대라고 한다. 신라는 이른바 하대에 이르러 왕권이 쇠약해지고 정치가 문란해졌다. 이는 골품제적 신분 질서에 바탕을 둔 신라 사회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그 운영 원리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귀족들의 대토지 사유화로 인하여 토지로부터 유리된 농민들은 점차 중앙 지배층의 가혹한 경제적 착취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서는 지방에서 중앙의 수취를 거부하고 나아가 정치적 지배에 ..

회퇴변척(晦退辨斥), 1611년, 광해군, 정인홍, 조식, 이언적, 이황

1611년(광해군 3) 3월 정인홍이 무함을 받은 스승 조식의 변호를 위해 이언적과 이황의 행적을 거론하며 비판한 사건. 1611년(광해군 3) 3월에 우찬성 정인홍(鄭仁弘)이 스승 조식(曹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무함 받은 것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차자(箚子)를 올려 이황을 비판하고 아울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과오까지 지적하였다. 이에 이목(李楘) 등 500여 명의 유생이 단체로 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옹호하면서 정인홍의 ‘회퇴변척’을 공격하고, 그의 이름을 성균관의 유적(儒籍, 청금록)에서 삭제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유생들을 처벌하려 하자, 그들은 성균관을 나가 권당(捲堂)에 들어가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이후 관료들과 지방 유생들까지 양측으로 나뉘어 몇 달이나 시비 논쟁을..

황포탄의거(黃浦灘義擧), 1922년, 의열단, 항일의거

의열단(義烈團)에서 전개한 의열사들의 항일의거. 1922년 3월 28일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 마닐라로부터 귀국하는 도중에 상해(上海)에 도착하였다.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항일운동단체인 의열단에서는 다나카를 사살할 것을 결정하고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 오성륜(吳成崙, 또는 이정룡)은 다나카가 기선에서 내릴 때, 김익상(金益相)은 오성륜이 실패할 경우 다나카가 승용차로 향할 때 저격하기로 하였으며, 이 역시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이종암(李鍾巖)은 다나카가 승용차에 오를 때 저격하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 다나카가 도착하여 하선하면서 마중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 오성륜이 권총을 발사하였다. 그러나 발사 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온 영국인 신부가 다나카 앞을 지나다가 총탄에 맞..

황토현전투, 1894년, 동학농민군, 전라감영군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군을 맞아 크게 승리한 전투. 1894년 3월 20일전라도 무장에서 전봉준(全琫準)·손화중(孫化中)·김개남(金開男) 등의 남접계 동학지도자들을 중심으로 4,000여 명의 동학농민군들이 들고 일어섰다. 이들은 태인 주산리에서 태인접주 최경선(崔敬善)이 이끄는 300여 명의 농민군, 말목장터에 집결해 있던 수백 명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경과와 결과 고부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들은 4일간 머물며 화약고를 불태우는 등 폐정을 혁파한 뒤, 3월 25일경 백산(白山)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백산은 고부 관아로부터 북쪽에 있는 높이 50m도 되지 않는 작은 언덕이었으나 인근의 곡창지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요새지였다. 농민군이 백산에 진을 치고 ..

황산벌전투, 660년, 백제멸망전투, 삼국통일전쟁

660년 황산벌에서 있었던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의 큰 싸움. 황산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連山) 지방이다. 역사적 배경 의자왕 초, 왕권 중심의 지배 체제를 확립한 백제는 중국과 신라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하고 있던 고구려와 연결해 신라에 압박을 가하였다. 특히 642년(의자왕 2)에 대야성(大耶城)주 01)을 비롯한 신라 남부의 40여 성을 함락한 사건은 신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이에 신라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파견해 적극적인 외교 교섭을 벌인 결과,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에 이 나당연합군이 드디어 백제 공격을 단행하였다. 경과와 결과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내주(萊州)를 출발해 서해를 건너 백제로 진군했고, ..

황산대첩, 1380년, 우왕, 이성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 고려말왜구퇴치

1380년(우왕 6) 9월에 이성계(李成桂) 등이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 14세기 후반에 극심하던 왜구의 노략질은 1376년 홍산(鴻山)에서 최영(崔瑩)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하였다. 그러나 1380년 8월에 5백척의 대선단으로 진포(鎭浦: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상륙해 충청·전라·경상 3도 연안의 주(州)·군(郡)을 약탈·방화·살육하였다. 이 때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로,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로 하여 왜적을 치도록 하였다. 경과와 결과 진포싸움은 최무선이 만든 신무..

황무지 개간권 반대운동, 일본, 황무지개간권, 보안회의소

조선 말 일본이 한국주권침탈의 일환으로 황무지 개척권을 강제로 요구해오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항일운동을 일컫는 총칭.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이를 발판으로 1904년 5월 21일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의으로 옮겼다. 이에 일본은 우선 연해어업권, 내하(內河)·연해항해권, 철도부설·관리권, 통신기관 관리권 등의 이권을 강점하고, 또한 내정개혁이라는 구실 아래 재정권·외교권·내정권 등에까지 침략야욕을 드러냈다. 황무지개척권 요구 역시 이와 같은 일제의 대한경영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이다. 요구의 직접적인 동기가 일본인의 식민을 목적으로 다수의 일본인 농민을 한국에 이주시키고, 아울러 한국의 농지를 개방시켜 원료 및 식량공급기지로 삼으려는 데 있..

홍산대첩, 1376년, 우왕, 최영, 홍산, 부여, 왜구

1376년(우왕 2) 7월 최영(崔塋)이 홍산(지금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싸움. 이 싸움은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 등의 진포싸움, 이성계(李成桂)의 황산대첩, 정지(鄭地)의 남해대첩과 함께 왜구토벌에서 가장 빛나는 전적 중 하나이다. 고려때 왜구 침범은 충정왕 때부터 시작되어 공민왕과 우왕 때 가장 창궐했는데, 특히 우왕 14년 동안 378회에 걸쳐 쳐들어와 최고를 기록하였다. 1376년 7월 왜구가 부여에 침입했다가 공주에 이르렀는데, 이 때 목사 김사혁(金斯革)이 정현(鼎峴)에서 싸우다가 패전해 공주가 함락되었다. 왜구는 다시 연산현(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개태사(開泰寺)로 쳐들어와 이를 맞아 싸우던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도 전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영은 출정..

홍경래의 난, 1811년, 순조, 홍경래, 우군칙, 평안도, 서북민 차별

1811년(순조 11)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농민반란. 1811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약 5개월간에 걸쳐 일어난 반란이다. 조선 후기 봉건사회는 17, 18세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전되어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가 양적으로 팽창되어 갔다. 특히 이앙법(移秧法)·이모작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기술의 변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촉진되었다. 이 결과 지난날의 봉건지주와는 다른 서민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선된 농업 생산기술과 시장의 확대라는 유리한 여건 속에서 차경지(借耕地)의 확대를 통해 상업적 농업을 하는 경영형부농이 성장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수의 소농민들은 몰락해 ..

호락논쟁(湖洛論爭), 조선 후기 성리학, 인물성 동이(人物性同異) 논쟁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의 인물성 동이(人物性同異)에 관한 논쟁. 호락 시비 혹은 인물성 동이 논쟁이라고도 한다. 처음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발생하였다. 한원진(韓元震)은 인물성(人物性)의 이(異)를 주장하고, 이간(李柬)은 인물성(人物性)의 동(同)을 주장하였다. 권상하는 한원진의 이론(異論)을 지지했으므로 이간은 권상하·한원진을 상대로 논변하였다. 그러나 권상하는 더 이상의 논변은 무익하다고 생각, 한원진에게 중지하도록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한원진과 이간의 사이에는 두 차례의 왕복 논변을 끝으로 직접적인 논변은 없었지만 서로의 주장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이간의 인물성 동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낙하(洛下)주 01)에 살고 있었으므로 낙학(洛學) 또는 낙론(洛論)이라 불리게 되었고,..

호주제폐지(戶主制廢止), 2005년, 민법 개정, 가족법

2005년 3월 2일 민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와 같은 달 31일 법률 제7427호의 공포 과정을 거쳐 호주제를 폐지함. 호주제도는 호주를 중심으로 한 가(家) 구성, 호주권(戶主權), 호주승계에 대한 규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가족법에 있어 양성평등과 민주적 가족법을 구현하기 위한 가족법 개정운동의 결과 1977년·1990년·2002년에 부분적 개정이 이루어졌고, 2005년에 이르러 마침내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개정안이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 배경 호주제도는 한국사회의 가부장 의식과 악습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여성차별적 제도라는 비판 끝에 결국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폐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시된 비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선 호주제는 가족 구성원을 호주에게 종속시켜 개인의..

호가장 전투, 1941년, 조선의용대, 중국 하북성 호가장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 대원들이 중국 하북성(河北省) 호가장(胡家庄)에서 일본군의 습격에 맞서 싸운 전투. 1938년 10월 중국 무한(武漢)에서 중국 관내 지역 최초의 한인 무장 조직으로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김원봉(金元鳳)을 총대장으로 한 조선의용대는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대일본군 반전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 일본군 포로 심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 지구에 국한된 선전 활동은 조선의용대 내부의 불만을 야기하였다. 결국 화북 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을 요구하던 대원들은 1940년 말부터 이듬해 여름 사이 황하를 건너 태항산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태항산 지역에서 기존의 조선청년연합회 회원들과 합류한 조선의용대 주력은..

형평운동(衡平運動), 1923년, 백정(白丁), 신분 해방 운동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 운동. 형평운동은 백정의 계급적인 해방투쟁과 민족적인 해방투쟁의 두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백정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인 지배 관계를 유지시키려는 정책을 펴,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이력서 등에 반드시 신분을 명기하도록 했다. 때문에 당시 백정은 자신의 신분을 호적상 도한(屠漢)으로 기재하든지 붉은 점[赤點]으로 표시했으며,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또한 그대로 존속되었다. 당시 백정의 수효는 형평사 통계에 의하면 40여 만명이었고,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3만 3712명이었다. 이들은 일부가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본업이라 할 ..

헤이그특사, 1907년, 고종, 네덜란드, 만국평화회의, 을사조약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도발 이후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구미 열강이 일제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도록 조처한 뒤, 1905년 11월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해 ‘보호국’으로 삼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이 조약을 인준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내보냈다. 미국의 헐버트(Hulbert, H. B.) 박사에게 전보를 보내 그 곳에서 조약 반대운동을 벌이게 한 것도 이 즈음의 일이었으나, 별다..

행주대첩, 임진왜란, 1593년, 권율

임진왜란 때인 1593년 2월에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 권율은 왜란 초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1592년(선조 25) 7월 배티〔梨峙〕싸움에서 대승한 공으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관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한 뒤, 남쪽으로 내려온 명나라의 원군과 호응해 서울을 되찾기 위해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북상하던 중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그는 군대를 서울 근교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에게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도록 하였다. 조경은 양천(陽川)에서 한강을 건너 병력을 주둔시킬 만한 곳을 찾아내어 권율에게 보고하였다. 권율은 서울 주변인 안현(鞍峴)에 진을 치려고 했으나 막하 장수들..

해주옥사(海州獄事), 1616년, 광해군, 이이첨, 대북, 소북

1616년(광해군 8) 집권 세력의 압력으로 인해 빚어진 역모 혐의자 처리 사건. 이 사건은 전 해에 일어난 ‘신경희(辛景禧)의 옥사(獄事)’로 소북 세력으로부터 적지 않은 공세를 겪은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 세력이 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소북 세력을 누르려는 목적에서 조작한 것이라고 한다. 대북 세력과 소북 세력의 대립을 통해 대북이 정권을 독점해가던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빚어졌으며, 그 뒤 서인 세력이 집권한 뒤 사건의 전말이 재해석됨으로써 오늘날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대략 다음과 같이 사건이 전개되었다. 당시 대북 세력은 반대 세력에 속한 황신(黃愼)·남이공(南以恭)이 황해도로 귀양간 때에 “구월산에 큰 도적이 숨어 있다.”는 말을 퍼뜨리고, 해주민으로 행실이..

한칠레자유무역협정, 2004년, 최초 자유무역협정(FTA)

2004년 4월 1일칠레와 체결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무역협정(FTA). 한국과 칠레 간 자유무역협정을 통하여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수출 확대 및 안정적인 원자재의 확보에 그 목적이 있다. 역사적 배경 한·칠레 FTA는 5년이라는 긴 준비 과정을 거쳐 발효됐다. 1998년 11월에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한국과 칠레가 FTA 추진에 합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협상이 시작되어 2002년 10월제네바에서 열린 제16차 협상에서 타결되고, 2003년 2월에 정식 서명하였다. 2004년 2월에 한국 국회에서 비준동의가 통과됨으로써 2004년 4월 1일부터 한국·칠레 FTA가 발효되었다. 주요사업 한·칠레 FTA 협정문은 전문 및 21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내용은 상품 교역, 투자 및 서비스, 경쟁정책,..

한중어업협정(韓中漁業協定), 2000년, UN해양법협약, 어업분쟁

2000년 8월 3일 한국과 중국이 서해상에서 양국 사이의 어업분쟁을 조정하고자 체결한 협정. 한중 양국이 각각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선포한 이후 양국 간 수역 거리가 400해리 이내이기 때문에 해양경계획정은 장기적 사안이 되었다. 이에 서해 수역 획정과 어업협력을 위하여 1993년 12월부터 19차례의 회의를 진행하였다. 한중어업협정은 2000년 8월 3일 정식 서명이 이루어졌고, 국회 비준을 거쳐 2001년 6월 30일 공식 발효되었다. 역사적 배경 1994년 11월 ‘바다헌장’이라고 불리우는 유엔해양법 협약이 발효됨에 따라 각국은 200해리(360km)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포하였고, 우리나라는 1996년에, 중국은 1998년에 각각 배타적 경제수역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한·중 양국 간..

한중수교(韓中修交), 1992년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교.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에서 남북한 관계 개선과 사회주의권과의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바 있으며, 한중수교는 그 연장선에서 평가할 수 있다. 한중수교의 국제적 배경은 1989년 12월 미소 몰타정상회의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했고, 1989년 5월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으로 중소관계가 정상화되었으며, 1990년 9월 한소수교가 수립된 것 등이 한중수교의 디딤돌이 되었다. 중국인민공화국의 건설과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 양국간의 교류를 새롭게 개시하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한중수교 과정을 보면, 1991년 한국과 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해 영사 기능을 일부 ..

한일협정반대운동,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전개된 한일회담과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한 야당, 지식인, 학생,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 한일협정반대운동은 1964년 3·24시위에서 6·3시위까지 이르는 한일회담반대운동과 1965년 8·27시위까지의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과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4년 박정희 정부는 ‘3월 타결, 5월 조인’으로 조기타결 방침을 굳게 세웠다. 경과 이에 3월 9일 야당과 재야세력들은 ‘대일저자세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회담반대 강연회를 개최했다. 한편 대학가에서는 3월 24일서울대·고려대·연세대·대광고 등에서 한일회담 즉각 중지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고, 이후 전국으로 ..

한일의정서, 1904년, 조일공수동맹

1904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교환된 의정서. 러·일 간의 전운이 급박함을 알게 된 대한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 양국간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러·일 양국은 이 해 2월 6일 국교를 단절, 2월 8일여순(旅順)항에서 처음 포성으로 상대하게 되었다. 2월 9일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그날로 서울에 들어왔고, 2월 10일에는 정식으로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렇듯 순식간에 국토가 무서운 전쟁터로 변하여, 한국 정부로서는 국외중립을 견지할 방도가 거의 없게 되었다. 한편, 일본군의 서울 입성과 동시에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는 외부대신서리 이지용(李址鎔)을 통해 고종을 알현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전쟁의 불가피성과 일본에 ..

한일병합조약, 1910년, 경술국치, 강제병합, 데라우치 총독

1910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경술국치조약·일제병탄조약이라고도 한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한국의 주권을 침탈하기 위해 러일강화조약(포츠머스조약)에서 일본측 전권위원의 결의 표명으로, ‘일본국 전권위원은 일본국이 장래 한국에 있어서 취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조치가 동국의 주권을 침해하게 될 경우 한국 정부와 합의한 뒤 이를 집행할 것을 여기에 서명한다.’는 내용을 회의록에 넣었다. 이는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침탈할 경우 반드시 한국 정부의 동의를 얻고 집행하겠다고 국제적 약속을 하면서 열강의 양해를 구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일제는 무력으로 일거에 한국을 집어삼키지 못하고, 국제법상 한국의 황제와 정부의 동의가 있을 때에 한해 합법..

한소수교(韓蘇修交), 1990년, 노태우, 고르바초프, 해빙, 북방외교

1990년 9월 30일 수립된 한국과 소련의 국교. 1990년 6월 4일 한국 노태우 대통령과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정상회담을 갖고 한소수교 원칙에 합의함으로서 한소수교가 성사되었다. 이는 1904년 러일전쟁으로 단교한 이후 한국과 소련 간의 86년 만의 국교 정상화이다.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이 1904년 파기된 후에 공식 교류는 전무했으며, 미소 냉전체제에서 한국과 소련도 적대적 관계가 지속되어왔다. 1990년 9월 30일 한국의 최호중 외무장관과 소련의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유엔에서 수교합의 의정서에 서명하였다. 한소수교 이후 1990년 12월 31일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했고, 1991년 4월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하여 양국간의 우애를 확인했다. 한소수교는 노..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간에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되었으며 상호방위를 목적으로 체결된 조약. 1953년 10월 1일 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국(남한) 방위를 위하여 외국과 맺은 군사 동맹으로서, 이는 최초이며 지금까지 유일한 동맹조약이다. 이 조약의 체결배경을 보면 1950년 한국전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전면남침으로 개시된 한국전쟁은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 중공군(당시)이 참전하여 국제전쟁으로 확대되어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1951년 6월 미국과 구 소련을 비롯한 공산군측간에 휴전이 제의되어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에게 휴전을 반대하고 북진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19..

한글파동, 1954년, 한글 간이화안(簡易化案)

1954년 7월 공포된 정부의 「한글 간이화안(簡易化案)」을 중심으로 빚어진 일련의 문화적·사회적 파동. 1933년에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제정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종래의 음소주의적(音素主義的) 정서법의 전통을 도외시하고 당시의 문법연구의 정수를 모아 이룬 형태주의적(形態主義的) 정서법인 것이다. 그 결과 일반에게는 배우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져 기회 있을 때마다 음소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반격을 받아왔다. 그러던 차, 1954년 3월 27일 “신구약과 기타 국문서에 쓰던 방식을 따라 석달 안에 교정해서 써야 할 것”이라고 발표한 그 당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담화문이 한글파동의 동기가 된 것이다. 이 담화문이 있은 한 달 뒤인 그 해 4월 27일에 공포된 「현행 철자법의 폐지와 구식 기음법..

학생전위동맹사건, 1929년, 광주 학생, 맹휴시위운동(盟休示威運動), 광주학생독립운동

1929년 광주학생들의 항일운동 이후,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학생전위동맹을 중심으로 서울 시내 각 학교의 격문사건과 맹휴시위운동(盟休示威運動)을 벌인 사건. 학생전위동맹은 1926년 조국 광복을 목적으로 조직된 학생혁명당(學生革命黨)의 후신으로 1929년 3월 하순에 개칭된 비밀결사이다. 학생전위동맹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1929년 11월 7일부건(夫鍵)·권유근(權遺根) 등을 광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장석천(張錫天)·강영석(姜永錫) 등과 회합하고 광주사건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검거당한 학생의 석방과 나아가서는 ‘조선독립’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우선 서울시내 각 중등학생을 움직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여세를 몰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려..

학병동맹사건, 1946년, 신탁통치, 학병동맹, 반탁진영

1946년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학병동맹측과 반탁진영 간의 충돌을 계기로 벌어진 사건. 학병동맹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일제시기 강제로 징집됐던 학병 출신들이 만든 사설군사단체이다. 왕익권(王益權)과 이춘영(李春永) 등이 주도하고, 초기에는 이념의 구분 없이 학병 출신들을 대상으로 조직되어 8·15 직후 경찰서를 접수하거나 치안유지 등을 전개하고, 향후 국가 수립 이후 군대창설의 주역이 되겠다는 목표 아래 활동했다. 『학병』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1945년 12월 자신들의 경험으로 만든 연극 「피어린 기록」을 공연하여 얻어진 수입금 34,000원을 전재민 돕기 성금으로 서울신문사에 기탁하고 학병 징집일인 1월 20일을 ‘학병의 날’로 제정했다. 그러나 1945년 10월 중순경 좌익계 청년단..

피의능선전투, 6·25전쟁, 양구

6·25전쟁 당시 양구 북방의 피의 능선에서 벌인 진지(陣地) 공격전투. 전투기간은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3일까지이다. 피의 능선(稜線)이란 《Star and Stripes》지가 지은 이름으로 3개의 고지 즉, 983고지·940고지·773고지와 연결된 산맥으로 이루어진 능선을 말한다. 피의 능선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캔사스-와이오밍 선으로 진출한 후, 주 저항선 전방의 전초기지 확보를 위해 제한된 공격작전을 실시하고 있을 때,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가 양구 북방의 피의 능선을 공격하여 북한군 제12사단과 제24사단을 격퇴하고 목표를 점령한 공격전투이다. 피의 능선에 대한 공격은 1951년 8월 17일 아침 한국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8월 25일 10여 일에 달하는 공격으로 ..

푸에블로호납치사건, 1968년,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북한 원산항

1968년 1월 23일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Pueblo號)가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사건. 푸에블로호는 이날 1월 23일 1시 45분에 동경 127°54′3″, 북위 39°25′ 공해상에서 무장한 4척의 북한 초계정과 출동한 미그기 2대의 위협 아래 나포되어 원산항으로 강제 납치되었다. 함장 중령을 비롯한 6명의 해군장교와 수병 75명, 민간인 2명을 포함한 총 83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푸에블로호는 이 날 정오경 1척의 북한 초계정으로부터 첫 도전을 받았으며, 이 날 하오 2시 32분 “엔진이 모두 꺼졌으며 무전연락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원산항으로 끌려간다.”는 최종 보고를 보내 왔다. 해군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되기는 미해군사상 10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미국..

포츠머스 강화조약, 1905, 러일전쟁, 미국 루스벨트

1905년 9월, 러일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미국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간에 체결된 강화조약. 1905년 8월 9일부터 미국 뉴우햄프셔주에 있는 조그마한 군항 도시 포츠머스에서,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러시아가 러일전쟁의 종전협상을 거듭하여 1905년 9월 5일 크게 다섯 가지 사항을 합의한 강화회담이다. 사실상 일본의 승리를 확인한 조약이었다. 역사적 배경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일본군이 중국 여순(旅順)의 러시아 해군기지를 기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쟁은 1905년 1월 봉천(奉天)전투와 5월의 동해해전에서 일본군이 러시아군에 승리하면서 일본이 승세를 잡았다. 일본은 유리한 전쟁 상황을 활용하여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러시와의 강화를 알선해 주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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