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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62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 독도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1667)이 두 섬(울릉도, 독도)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고려를 보는 것이 운슈(雲州 - 현재 시마네현의 동부)에서 온슈(隱州- 오키섬)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일본의 서북쪽 경계는 이 주(此州 - 오키섬)를 한계로 한다. 「은주시청합기」는 운주(雲州)의 관원인 사이토 호센(齊藤豊仙)이 마쯔에번주(松江藩主)의 명으로 1967년 8월 부터약 2개월 동안 은주(隱州)를 순시하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상부에 보고한 지방관찬서이다.  은주란 현재의 오키섬을 말하고 당시에는 오키국(隱州国)을 말한다. (당시 일본에서의 국( 国 1)은 주(州 )와 같은 개념이다.)운주란 이즈모국을 말하며 현재 시마네현의 일부인 이즈모시를 말한다.    독도가 기록된 일본 최초의 문..

중원 고구려비, 中原高句麗碑, 충주 고구려비, 장수왕, 한반도 유일 고구려비. 5~6세기경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중원 고구려비, 中原高句麗碑 충주 고구려비 한반도 안의 유일한 고구려비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는 충청북도 충주시(忠州市) 중앙탑면(中央塔面) 용전리(龍田里)에 있는 사각 기둥 형태의 고구려비이다. 발견된 곳의 당시 행정 구역이 중원군(中原郡)이어서 중원고구려비라고 명명하였으나, 중원군이 충주시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충주고구려비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글자의 마모가 심하여 판독에 어려움이 있지만 5~6세기경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충주고구려비의 발견과 그 형태 충주고구려비는 1979년 단국대학교 박물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 조사되었다. 충주고구려비는 오랫동안 선돌[立石]로 여겨졌기에 비가 서 있던 마을 이름도 입석 마을이었고, 비를 조사할 당시에도 일부 주..

진흥왕순수비, 555년, 북한산비, 김정희, 신라 진흥왕, 한강 하류 영토 확장, 순수비(巡狩碑) 의미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555년에 세워진 북한산비는 조선 후기의 금석학자인 김정희에 의해 고증되었다. 북한산비의 비문을 통해 진흥왕이 한강 하류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고, 561년에 세워진 창녕비는 신라의 대가야 정복 사실을 증명하는 순수비이며, 568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신라가 오늘날의 함경도 지방까지 진출 했음을 밝혀 주는 비문이다. 또한 진흥왕의 연호인 대창(大昌)이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에 새겨져있다. 일제강점기에 최남선이 조사하였다.  배경 진흥왕은 정복 전쟁으로 새로 편입한 지역에 기념비를 세웠다. 비석이 세워진 순서를 따라가면 진흥왕의 영토 정복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550년 남한강 상류의 단양에는 단양 적성비를 세웠다. 555년 한강 하류..

영릉가 전투, 1932, 양세봉, 조선 혁명군

1932년 4월 조선 혁명군(朝鮮革命軍)이 요령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영릉가(永陵街)에서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물리친 전투.남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선 혁명군은 1932년 3월경부터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을 본격화하여, 4월부터 6월 사이에 신빈현성 등지의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공격하였다. 당시 신빈현에는 만주국군 1개 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중 일부가 영릉가에 있었다.1932년 4월 양세봉(梁世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소자하(蘇子河)를 건너 영릉가로 들어갔다. 밤 12시경 조선 혁명군은 영릉가를 정면에서 기습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신호총 3발을 발사함과 동시에 시내로 진격하였다.함께 합동 작전을 펴기로 했던 요령 민중 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의 이춘윤(李春潤)이 이끄는..

제주 4·3 사건, 발단, 1947년 3월 1일 삼일절 발포 사건,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 반란, 특별법

제주 4·3사건, 1947년, 남로당, 토벌대, 30,000명 학살, 3·1절 발포사건, 무장봉기, 강경진압작전, 주민희생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

국민대표회의, 1923년, 상해 임시정부, 창조파, 개조파

1923년 중국 상해에서 열린 국민의 대표회의.당시 임시정부는 내부적인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 개편이 필요했다. 그래서 1921년부터 각지의 국민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협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2년 동안의 준비 과정을 거쳐 1923년 1월 개최되었다.1921년 2월 국민대표회의 소집 주장한 박은식(朴殷植)·김창숙(金昌淑) 등의 촉진선언문이 상해에서 발표되고, 그해 4월북경의 군사통일회가 적극적으로 소집을 추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는 각지의 동포들로부터 호응 속에서 마침내 국민대표회의주비회를 결성하는 데 이르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은 1921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에 걸친 태평양회의 및 극동인민대표대회로 인해 조금 늦추어졌다. 그러나 1922년..

식읍(食邑), 수조권, 토지제도

식읍(食邑) 식읍은 고대에서 조선 초기까지 시행된 우리나라 토지제도의 하나이다. 고조선 말기 연맹국가 ‧ 열국기에 제가(諸加)의 읍락(邑落) ‧ 하호(下戶) 지배 현실을 바탕으로 성립한 제도로, 삼국시대~고려 초기까지 관료제와 군현제의 변화에 맞추어 체계적으로 개편 ‧ 운영되었다. 고려 전기에 형식상 봉작제(封爵制)와 결부되어 대부분 왕족이나 관료에게 수여되었고, 고려 후기에는 왕족에 대한 식읍 수여조차 중단되었다. 조선 단종 때 수양대군의 식읍을 마지막으로 역사적 역할을 다하였다. 고대에서 조선 초기까지 시행된 우리나라 토지제도의 하나. 제정 목적 고대국가가 주변 소국을 정복하거나 자발적으로 신속(臣屬)하도록 회유하는 과정에서 얻은 피정복 지역 · 신속 지역의 민호(民戶)를 헤아려(식읍민) 공로자(식읍..

민적법, 民籍法, 호적제도 보완, 1909년

민적법, 民籍法 대한제국 말기에 제정, 공포된 호적에 관한 법률. 1909년 3월 법률 제8호로 공포되어 실시되었다. 조선시대에 인구수를 조사·파악하고 신분을 공시하는 제도로서는 식년호적제도(式年戶籍制度)와 이를 보완하는 인보정장법(隣保正長法)·호패법(號牌法) 등이 있었다. 1896년의 갑오개혁 입법으로 호구 조사 규칙과 같은 세칙을 마련하여 시행했으나, 이 법은 부역(賦役)과 징세(徵稅)의 행정 편의를 위한 것으로서, 인민의 모든 가족적 신분 변동을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 순수한 호적제도로 개혁하기 위해 제정 실시된 것이 민적법이다. 이 법은 인민의 가족신분 관계를 법률상 명확히 함과 동시에 전국의 호구수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종래의 호적제도가 가지고 있는 결함을 보완한 것이다...

사성, 賜姓, 사성정책, 태조 왕건

사성 (賜姓)  임금이 내린 성 또는 임금이 신하에게 성을 내리는 행위 사성(賜姓)이란 ‘성(姓)을 내린다(賜)’는 의미로, 동아시아권에서 공을 크게 세운 장수 등에게 왕이 성씨, 특히 '국성(國姓)'을 하사하는 제도였다.고구려, 조선처럼 국성 외에 별도의 성씨를 하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성정책은 태조 왕건이 후삼국 시기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을 고려에 포섭하기 위해 그들에게 자신의 성이었던 개성 왕씨 혹은 아주 새로운 성씨를 내려주었던 정책을 일컫는 말이다.우리나라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성을 바꾸지 않는다는 성불역(姓不易)의 원칙이 있다. 그러나 임금이 성을 내리는 경우에는 그러한 제약을 받지 않았다. 임금이 성을 내리게 되는 계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원래 지금과 같은 우리식의 한자 성이 없어..

공명첩, 空名帖, 임진왜란, 폐단, 조선 후기 신분 제도 문란

공명첩, 空名帖조선시대 수취자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고 관직을 제수하거나, 면역 · 면천 등을 허가한 문서. 관직 · 관작의 임명장인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 양역(良役)의 면제를 인정하는 공명면역첩(空名免役帖), 천인에게 천역을 면제하고 양인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공명면천첩(空名免賤帖), 향리에게 향리의 역을 면제해주는 공명면향첩(空名免鄕帖) 등이 있다. 이 제도는 임진왜란 중에 나타난 것으로, 군공을 세운 사람 또는 납속(納粟)을 한 사람들에게 그 대가로서 주어졌다. 그러나 그 뒤 국가의 재정이나 군량이 부족할 때, 또는 진휼(賑恤)을 위해, 심지어는 사찰을 중수하는 비용을 얻기 위해 남발하였다. 그 폐단은 처음 발급될 때부터 나타났다. 예컨대, 모속관(募粟官)들이 공명고신을 사사로이 주고받기도 하였다..

노비, 奴婢, 노奴 남자종, 비婢 여자종, 고려시대 노비, 노비 신분 세습, 조선시대 노비, 공노비, 사노비, 선상노비, 납공노비, 솔거노비, 신공, 종모법, 속량

노비, 奴婢노비는 전근대 신분제 사회의 최하층 신분이다. 노는 남자종, 비는 여자종을 말한다. 전쟁, 형벌, 부채 등으로 충원되었으며 대대로 세습되었다. 국가 소유의 공노비와 개인 소유의 사노비로 구분되며, 노동력 제공이나 신공 납부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노비의 유산, 도망이 증가하는 가운데 신공 부담은 감소하였으며 합법적인 면천의 길은 확대되었다. 내시노비 혁파와 노비 세습제 폐지, 신분제 혁파를 차례로 거치면서 노비제도는 소멸하였다. 노비의 발생과 고대의 노비 원시 공동체 사회가 해체되고 초기 국가가 성장하면서 정치권력의 형성과 함께 금속제 농기구에 의한 생산력 발달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이 분화하고 지배 집단의 사적 소유도 확대되었다. 반복된 정복 전쟁을..

발해 멸망, 거란족에 의해 멸망(926), 발해부흥운동, 후발해, 정안국, 연파국, 올야국(오사국), 흥료국, 고욕국, 대발해(대원국)

발해의 성장과 발전무왕'인안'이라는 연호 사용 → 중국과 대등하다는 것을 내세움영토 확장 → 만주 북부 지역 장악당이 흑수 말갈, 신라를 이용하여 발해 견제 → 일본과 친선 관계 맺음, 당의 산둥 반도 공격(장문휴)문왕상경 용천부로 천도, 통치 체제 정비당과 친선 관계 수립 → 당 문물과 제도 수용돌궐, 일본과도 긴밀히 교류, 신라와 신라도를 통해 교류'대흥', '보력' 연호 사용, '황상' 칭호 사용, 일본 외교 문서에 '하늘의 자손'이라 일컬음선왕대외 정복: 대부분의 말갈 부족 흡수, 옛 고구려 영토 대부분 차지, 최대 영토 확보발해의 전성기(9세기 전반) → 당에서 해동성국이라 칭함멸망9세기 후반부터 귀족들 간 내분으로 국력 약화 → 거란족에 의해 멸망(926)여러 차례 발해 부흥 운동 전개 → 발..

가야, 육가야, 加耶, 삼한시대, 변한, 弁韓, 12국, 김해 금관국(金官國), 고령 대가야국, 낙동강, 황강, 남강, 포상팔국(浦上八國),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

가야는 서기전 1세기~서기 6세기,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일부에서 형성된 작은 나라들의 연합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존속하였다. 근래에는 전북특별자치도 동남부 일부 지역 혹은 전라남도 동부 일부까지 가야의 범주에 넣는 견해도 제기되며, 고대 한반도의 삼국에 이은 제4의 나라로 사국시대론이 주장되기도 한다. 가야의 기원은 삼한시대 변한 혹은 변진 12국 중 구야국이다. 해로상의 요충지로서 대방군에서 한반도 남부, 나아가 일본 열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해상 교통의 결절지였다.  육가야국가금관가야대가야아라가야소가야성산가야고령가야성립기원전 2세기1세기 중반기원전 1세기2세기 초반1세기 중반 발전2세기 초반5세기 중반3세기 후반3세기 초반  전성기285년479년529년   쇠퇴400년554년5..

광복, 독립, 해방, 8·15, 광복절

광복, 독립, 해방, 8·15 , 광복절 독립 독립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유사 이래 우리의 모든 역사가 예속의 역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노태우 정부 때 천안에 ‘독립기념관’을 지을 때에도 큰 논란이 있었다. 우리의 국권을 우리 스스로 행사하기 위해 싸운 선열들을 ‘독립투사’라고 부르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본래부터 독립국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독립국인 우리의 주권을 일제가 강탈했으므로 독립투사들은 그것을 되찾기 위해 피 흘려 싸워 마침내 주권을 회복했다. 이 ‘회복’을 마치 우리의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을 얻은 것으로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중문대사전》은 한국의 ‘한’에 대해 “1897년에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국호를 ‘한국’이라고 고쳤다. ..

흥화진전투, 양규, 강감찬, 강동6주, 거란침입

고려 전기 거란침입 때 흥화진(興化鎭, 평안북도 의주)에서 벌어진 전투. 흥화진은 서희(徐熙)가 거란과 담판하여 강동6주(江東六州)를 확보한 이후, 995년(성종 14) 구축한 압록강 방면의 요충지이다. 거란은 흥화진을 선점하기 위해 고려 현종대에 수 차례에 걸쳐 침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010년(현종 1), 1017년(현종 8), 1018년(현종 9)에 전투가 벌어졌다. 경과 및 결과 1010년(현종 1) 거란 제2차 침입 당시 거란의 성종(聖宗)이 40만 대군으로 직접 고려에 침입하였다. 같은 해 11월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을 포위하고 고려의 항복을 종용하면서 전투는 11월 17일부터 23일까지 1주일 간 전개되었다. 흥화진에는 순검사(巡檢使) 양규(楊規)가 거란의 압박에 조금도 굴하지 ..

자유시 참변, 홍범도,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1921, 러시아 자유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 교전, 흑하(黑河)사변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을 감행한 일본군을 피해 만주 일대 독립군 부대는 항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을 대한독립군단으로 규합하고 연해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1921년 3월 부대별 이동을..

제주 4·3사건, 서북청년단, 1947년, 남로당, 토벌대, 30,000명 학살, 3·1절 발포사건, 무장봉기, 강경진압작전, 주민희생

제주 4·3사건, 1947년, 남로당, 토벌대, 30,000명 학살, 3·1절 발포사건, 무장봉기, 강경진압작전, 주민희생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광복 직후 제주사회는 6만여 명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등으로 겹친 악재와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 경찰의 군정 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謀利) 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했던 이들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

여순사건, 1948년,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송호성, 백선엽, 김지회, 지창수, 제주4·3사건

여순사건, 1948년,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송호성, 백선엽, 김지회, 지창수, 제주4·3사건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점거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하여 일주일여 만에 전 지역을 수복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인명·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국가보안법」 제정과 강력한 숙군 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여순사건의 배경은 그 주체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살펴보아야 하는..

일진회, 일진회 ‘합방’ 운동, 윤시병, 이용구, 송병준, 독립협회 (원)일진회, 동학 진보회 결합

일진회는 독립협회와 동학에 소속된 인물들이 친일과 반정부를 표방하면서 1904년 12월 2일에 결성된 단체 일진회의 결성 1905년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 체결이 체결되자 한국에서는 국권 회복운동이 일어났다. 이 시기 국권 회복운동은 한편으로는 계몽운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으나 일진회는 일본에 협력한 반민족단체였다. 일진회는 독립협회의 흐름을 이어받은 (원)일진회와 동학의 일파인 진보회가 결합하여 창립되었다. (원)일진회는 유신회(維新會)라는 이름으로 1904년 8월 18일 서울에서 조직되었고 바로 일진회로 개명하였다 . (원)일진회의 회장은 윤길병(尹吉炳)이었으나 실제 (원)일진회를 조직한 자는 송병준(宋秉畯)이었다. 송병준은 일본에 망명해 있다가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주한일본군 사령..

미소공동위원회, 1차 회담, 2차 회담, 신탁통치 반대운동 단체 협의대상

미소공동위원회 ▪카이로회담(1943.11) 미영중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 한국 자유독립국가 해방 결의 ▪얄타회담(1945.2) 미영소 ▪신탁통치 밀약(공산화 두려워 미국이 제안) ▪38선분할 결정(소련참전, 국내진입요청, 미국이 공산화 두려워 요청) ▪포츠담선언(1945.7) 미영소중 ▪한국독립 재확인 ▪모스크바3상회의(45.12) 미영소 ▪임시조선민주주의 정부수립 강조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미영소중 최고 5년간 신탁통치 ▪미소공동위원회 ▪협의대상 선정문제: 미(모든 단체) vs 소(반탁단체 제외) ▪제1차(1946.3) 임시정부의 협의대상 ▪제2차(1947.5) 9월에 한국문제 UN에 제출 1 개요 미소공동위원회는 1945년 12월 발표된 모스크바 결정에 따라 한국 문제를 해결하기 ..

중국 팔로군, 八路军, 조선의용군 연합 작전

조선의용군, 중국 팔로군 연합 작전 수행 팔로군(중국어 간체자: 八路军, bālù-jūn, 바루쥔)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공산당 휘하 독립적 성향을 가진 부대로 중국 국민혁명군 예하 제8로군(1937.8)으로 편성됐고, 얼마 뒤 제18집단군(1937.9)으로 개편됐지만 팔로군이라고 계속 불리었다. 이로써 1937년 9월 제2차 국공합작이 형성됐고, 팔로군은 신사군(1937.10)과 함께 화베이 지방에서 항일전의 유격전을 담당했다. 이후 국공내전 기간에 중국 공산당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팔로군은 조선의용군이라고 하는 조선인들도 포함. 이들은 중국 화북지방에서 중국 공산당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사회주의세력으로 화북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그 산하에 조선의용군을 조직하여 항일..

애국계몽운동, 1905∼1910년, 개화자강파, 실력양성운동, 사회운동, 국권회복운동

1905∼1910년 사이에 전개된 개화자강파(開化自强派)의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총칭하는 역사적 개념. 한국 민족은 1905년 11월 이른바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의 일부를 빼앗기자 새로이 당면한 민족적 과제로서 국권회복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당시 한국 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양면에서 전개되었다. 개항 후 한국 민족이 상당 기간 열강의 침입에 대해 완강한 항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박탈당한 것은 ‘힘’과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는 것은 힘을 기르지 않는 한 어려운 과제였고, 당시 한국 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은 처음부터 장기전을 전..

무오사화(戊午士禍),1498년,연산군,김일손,유자광,훈구파,사초문제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조선은 성종대에 이르러 집권적 관인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유교문화가 그 성숙기에 도달하였다. 세종·문종대에 융성했던 유학은 세조의 무단정치와 불교 숭상으로 한 때 저조했으나 성종대에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성종은 원래 학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구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등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사림파의 종사(宗師)로 명성이 높았던 김종직(金宗直)을 중용하였다. 아울러 그 제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 등 영남 출신의 신진사류를 대거 불러들이게 되었다. 중앙에 진출한 신진사류는..

4군 6진, 세종대왕, 최윤덕, 김종서

시대적 배경 조선 건국 초기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고 있던 시기였다. 중국에서는 새로 건국된 명(明)이 기존의 중국의 지배자였던 원(元)과 각축을 벌이며 서서히 세력을 성장시켜 마침내 대륙의 패자로 등장하였다. 원은 비록 대륙에서의 패권을 상실하였으나 아직 강력한 세력을 유지한 채 몽골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조선이 건국되었고, 일본에서는 무로마치의 막부가 점차 영향력을 잃어 가면서 지방 세력들이 힘을 얻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처럼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개국한 조선은 왕조의 개창과 동시에 대외관계 수립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그와 함께 고려 말 피폐해진 군사력을 복구하여 국가의 방어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준동하는 왜구들을 방어하기 위한 해안 방어 체제를 정비함과 동시에 대륙정..

삼강행실도(三綱行實道), 성종, 설순, 열녀, 충신, 효자

조선전기 직제학 설순 등이 왕명으로 삼강(三綱)의 모범이 될 만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모아 만든 언행록.교훈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 종이에 목판 인쇄. 관판본(官版本). 4권. 각 권 세로 36.4~38.4㎝, 가로 19.6~22.1㎝.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세로 24.4~25.3㎝, 가로 16.5~17.8㎝. 유계(有界). 반엽(半葉) 13행(行) 22자(字).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양산시립박물관 소장. 내용 1431년(세종 13)에 직제학 설순(偰循)에 의해 완성된 『삼강행실도』를 성종 연간에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각 35인씩 선별하여 개찬(改撰)한 판본의 재간본(再刊本)이다. 1권과 2권은 열녀, 3권은 충신·효자, 4권은 효..

훈련도감(訓鍊都監), 조선 후기, 중앙군영

조선 후기에 설치되었던 중앙군영. 훈국(訓局)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8월에 임시기구로 설치되어 점차 상설기구로 변모한 뒤 1746년(영조 22)『속대전』에 올라 법전에 규정되었다. 조선 전기의 양인 의무 군역을 바탕으로 한 중앙 군사 조직인 오위(五衛)는 일찍부터 군인으로 복무하는 대신 포(布)를 내는 사람이 늘어나는 등 여러 모순을 드러내어 16세기말에는 그 조직이 허구화되어 있었다. 그 결과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왜군에 참패함으로써 당장의 전쟁을 수행하고, 나아가서는 발전된 사회상에 맞는 군사 제도를 갖추기 위해 군사 조직의 재정비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에 급료병으로써 새 군사 편제에 의해 설치한 것이 훈련도감이다. 이 기구의 창설은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

흥남 철수, 미 제10군단, 국군 제1군단, 1950년, 장진호 전투, 해상 철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1950년 12월 15일(출항 기준)부터 23일까지 흥남항구를 통해 해상 철수한 작전. 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원산이 적중에 넘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흥남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흥남주변에 몰려든 10만 명의 북한주민들도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선박으로 월남하였다. 한국정부는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밀려 평양을 포기하게 되자, 1950년 12월 4일 평양시의 전 행정기관을 철수시키고 38선 접경 및 그 이북 전역에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아울러 정부는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50여만 명에 달하는 이북 피난민동포 구출을 위한 긴급조치를 취하였다. 1951년 1·4후퇴를 전후하여 많은 북한 주민들이 북한을 탈출하여 월남했다...

흥왕사의 변, 1363년, 공민왕, 김용, 홍건적

1363년(공민왕 12)에 김용(金鏞)이 왕을 살해하려고 흥왕사 행궁(行宮)을 침범한 사건. 1359년에 뒤이어 1361년에 홍건적(紅巾賊) 10여 만의 무리가 재차 침입하였다. 이 때 정세운(鄭世雲)이 총병관(摠兵官)이 되어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김용·최영(崔瑩) 등과 함께 싸워 적을 물리쳤다. 이렇게 외적을 물리친 지 며칠이 안 되어 고려의 장신(將臣) 사이에는 왕의 신임과 군공(軍功)을 시기하여 서로 싸우는 비극이 일어났다. 김용은 평소에 사이가 나쁜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나머지 왕지(王旨)를 위조하여 안우·이방실·김득배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그 죄를 뒤집어씌워 모두 죽였다. 그리고 복주(福州)에서 돌아와 흥왕사의 행궁에서 거처하던 공민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결국 공..

휴전반대국민대회, 1951년, 포로석방, 한미상호방위조약

6·25전쟁의 당사자인 한국의 주장과 의지를 전적으로 무시한 채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에 자극받은 국민이 궐기한 대회. 통일에 대한 한국 국민의 기백과 의지를 전세계에 일깨워 주고, 휴전이 성립된 이후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경우 이에 대처할 수 있는 미국의 보장을 받기 위한 목적을 달성한 범국민적인 운동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전쟁의 확전을 우려한 유엔과 자유진영이 휴전을 모색하게 되면서부터 통일의 가망성은 희박해졌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미국은 1951년 5월 17일에 한국전쟁의 목적을 정치 목표와 군사 목표로 분리하여 먼저 군사 목표부터 추구함으로써 휴전협상을 통하여 쌍방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뒤를 이어 6월 1일에는 유엔이 ‘38도선 부근에서 휴전한다는 것..

윤봉길 투탄의거, 훙커우공원의거,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투탄의거. 1932년 4월 29일 일본은 상해사변(上海事變)을 일으켜 상해를 점령한 뒤 전승기념 및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을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하였다. 이때 비밀항일결사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단원인 윤봉길이 사열대 위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요인을 폭살시켰다. 당시 사상자는 일본군사령관 대장 시라카와(白川義則), 해군중장 노무라(野村吉三郎), 육군중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 등과 다수의 간부들이었다. 이 중 시라카와는 중상을 입은 뒤 5월 24일 사망하였고 가와바타는 즉사하였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한국독립운동계를 활성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일제의 침략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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