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1950년 12월 15일(출항 기준)부터 23일까지 흥남항구를 통해 해상 철수한 작전.
장진호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원산이 적중에 넘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흥남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흥남주변에 몰려든 10만 명의 북한주민들도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선박으로 월남하였다.
한국정부는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밀려 평양을 포기하게 되자, 1950년 12월 4일 평양시의 전 행정기관을 철수시키고 38선 접경 및 그 이북 전역에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아울러 정부는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50여만 명에 달하는 이북 피난민동포 구출을 위한 긴급조치를 취하였다. 1951년 1·4후퇴를 전후하여 많은 북한 주민들이 북한을 탈출하여 월남했다. 중공군의 역습으로 가장 위급한 상태에 있던 유엔군은 육로와 동해해안 방면으로 신속하게 후퇴하였다. 따라서 유엔 해군은 서해에서의 철수보다는 흥남에서의 대규모 철수작전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1950년 12월 당시 서부전선상으로 북진한 제8군은 육로로 후퇴할 수 있었지만 동부전선 장진호 방면으로 북진한 미 제10군단의 병력은 원산지역이 중공군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차단되는 지형특성상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장진호 전투 시 하갈우리에는 현지주민을 비롯하여 함흥 방면에서 올라온 주민들이 전투를 피해 주변 계곡이나 동굴에 숨어 있다가 미군이 진주하자 운집하고 있었다.
피난민들은 영하 27도의 추위 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작전기지인 함흥, 흥남으로 천신만고 끝에 후퇴하였으며, 원산에 주둔해 있던 미 제3사단도 중공군이 남쪽의 퇴로를 막아 이곳으로 이동해 왔다. 이때 집결 병력은 10만 5천여 명이었다.
1950년 12월 9일 맥아더 원수의 철수 명령이 하달되었고 곧 미합참의 철수를 승인함으로써 흥남철수작전이 개시되었다. 같은 해 12월 11일부로 미 제1해병사단의 병력과 장비가 탑재되기 시작하여 같은 달 14일 선적이 완료되었으며, 같은 달 15일 흥남부두에서 출항하였다. 이후 축차적으로 유엔군 부대와 국군 제1군단이 12월 23일(해군 기준으로는 24일)까지 흥남철수를 완료하였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처음에는 6백만 톤이나 되는 무기와 장비를 수송해야 했기에 피난민 수송이 어렵다고 하였으나,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통역인 현봉학의 설득으로 마지막에는 남는 공간에 피난민 수송을 허락하였다. 피난민 승선이 허락되자 부두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LST 한 척에는 정원의 10배가 넘는 5천여 명이 승선하였지만, 30만의 인파 중 마지막까지 배를 탄 피난민은 9만 1천여 명이었다. 피난민 승선으로 4백 톤의 폭약과 차량, 장비 등 5백 60만 톤의 장비가 유기되었으며, 승선이 끝난 후 해군 함대와 폭격기가 집중사격을 가하여 폭파시켰다.
흥남철수작전은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17,500대의 각종 차량, 35만 톤의 물자를 함정으로 완전하게 철수시켰다. 그 과정에서 한국군 지휘관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남행을 결심한 피난민 9만여 명까지 포함되었다. 이와 함께 항공기를 이용해 병력 3,600명과 차량 196대, 1,300톤의 물자를 철수시켰다.
흥남철수작전은 대규모적인 육해공 합동작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같은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상당한 전투력을 보존해 다음 단계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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