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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약조(壬申約條),1512년,중종,일본 대마도주

Jobs9 2021. 4. 1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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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년(중종 7) 조선과 일본 대마도주(對馬島主) 사이에 맺은 무역에 관한 조약.

 

1510년 삼포왜란이 있은 뒤 조선은 삼포를 폐쇄해 왜인과의 교통을 끊고 방비를 엄중히 하였다. 그 결과, 물자의 궁핍을 느낀 대마도주는 아시카가막부(足利幕府)를 통해 조선에 통교를 간청하게 되었다. 일본은 국왕사(國王使) 호추(弸中)를 2차에 걸쳐 조선에 파견해 강화를 시도하였다.

조선에서는 강화 반대론도 많았지만, 첫째 군사 방위 시설의 증가에 따른 국민의 부담 과중, 둘째 북방의 야인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또 다른 한편에 긴장 요인을 둘 수 없다는 점, 셋째 후추[胡椒]·단목(丹木) 등 약용품의 수입 필요성, 넷째 조선은 지리적으로 사실상 일본과 절교하기 힘들며, 특히 대마도는 생활 필수품인 식량 등이 궁핍하므로 필연적으로 왜구의 재발 가능이 증대될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실리적인 강화론에 따라 화해를 허용하게 되었다.

조선은 강화의 조건으로, 첫째 삼포왜란의 수괴자를 참수해 헌납할 것, 둘째 우리측 포로를 송환할 것, 셋째 모리치카(盛親)가 직접 와서 사죄할 것 등을 강화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이들 조건 중 포로 송환은 임신약조 후에 실행되었으나, 모리치카의 친래진사(親來陳謝)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수괴자의 목을 베어 헌납하는 일만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443년(세종 25)에 맺은 계해약조를 폐기하고 보다 엄격한 제한을 가해 임신약조를 체결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왜인의 3포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3포 중 제포(薺浦)만 개항한다. 둘째, 도주(島主)의 세견선(歲遣船)을 종전의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한다. 셋째, 종전의 세사미두(歲賜米豆) 200석을 반감해 100석으로 한다. 넷째, 특송선제(特送船制)를 폐지한다. 다섯째, 도주의 아들 및 대관(代官)의 수직인(受職人)·수도서인(受圖書人)들의 세사미와 세견선을 허락하지 않는다. 여섯째, 도주가 보낸 선박 이외의 배가 가덕도(加德島) 부근에 와서 정박하면 적선(賊船)으로 간주한다. 일곱째, 대마도에서 제포에 이르는 직선 항로 외의 항해자는 적왜(敵倭)로 규정한다. 여덟째, 상경 왜인(上京倭人)은 국왕 사신 외에는 도검(刀劍) 소지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삼포왜란의 주요한 동기였던 일본인에 대한 엄격한 규제는 그들이 바라던 대로 완화되기는커녕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 뒤 1544년(중종 39) 제포는 형세가 불리해 왜관을 부산포(富山浦)로 옮겼다. 이와 같은 조처로 일본의 소호족이나 상왜(商倭)들은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으나, 일본 막부의 사선(使船) 내왕은 16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고, 대호족들의 통교도 크게 쇠퇴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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