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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52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1971년,서울대 제적생 4명,사법연수원생 1명,중앙정보부,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국가보안법

1971년 11월 13일 서울대 제적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국가 전복을 위해 내란 음모를 모의했다고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사건. 1971년 10월 15일 박정희 정부는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 명령을 발표한다. 그에 따라서 서울지역 7개 학교에 위수군 진주, 전남대를 비롯한 8개 대학에 휴업령, 23개 대학에서 177명 제적, 7개 대학 74개 써클 해체, 5개 대학 14종 미등록 간행물 폐간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학생운동을 비롯해 민주화운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위수령이 발동된 직후 중앙정보부는 1971년 11월 13일에 서울대생 4명과 사법연구원생 1명이 국가 전복을 모의했으며, 그 가운데 4명이 국가보안법 제1조 반국가단체구성 위반과 형법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

서안평전투,고대,삼국,고구려,동천왕,미천왕,위나라

서안평을 둘러싼 고구려와 중국세력간의 전투. 서안평은 요동군(遼東郡)의 속현으로 지금의 구련성(九連城) 동북 안평하(安平河)유역에 있었다. 종래 서안평은 고구려가 압록강 하류방면으로 진출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던 곳이다. 146년(태조왕 94) 8월 장수를 파견하여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살해하고,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사로잡게 하였다. 242년(동천왕 16) 다시 서안평을 공격하였으며, 마침내 311년(미천왕 12) 완전히 탈취하였다. 서안평 탈취는 고구려가 한사군을 비롯한 중국세력을 축출하고, 요동지역을 장악함으로써 고조선의 옛 영역을 되찾게 되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m 문의 공무원..

삼포왜란,1510년,중종,일본거류민 폭동

1510년(중종 5) 삼포에서 일어난 일본거류민들의 폭동 사건. 경오년에 일어났으므로 ‘경오왜변(庚午倭變)’이라고도 한다. 조선은 건국 후 국방 문제를 감안, 무질서하게 입국하는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1407년(태종 7) 부산포(富山浦)주 01)와 내이포(乃而浦, 일명 薺浦 : 熊川), 1426년(세종 8) 염포(鹽浦)주 02) 등 삼포를 개항하고 왜관(倭館)을 설치, 교역 또는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이 삼포에 한하여 일본 무역선의 내왕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무역과 어로가 끝나면 곧 돌아가게 하되, 항거왜인(恒居倭人)이라 하여 거류한 지 오래된 자 60명만을 잠시 잔류할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은 이를 지키지 않고 계속 삼포에 들어와 거류했으며, 그 수가 해마다 증가하여 커다란 정치..

정약용(丁若鏞), 조선후기,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여유당전서

조선후기 『경세유표』, 『목민심서』, 『여유당전서』 등을 저술한 유학자.실학자.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익(李瀷)의 학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여 ‘묵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자’ 노력하였다. 정치·..

정약전(丁若銓), 조선후기, 전적, 병조좌랑, 자산어보, 논어난, 동역, 송정사의, 정약용 형

조선후기 전적, 병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庵)·연경재(硏經齋)·매심(每心).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 출신. 정항진(丁恒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지해(丁志諧)이고, 아버지는 진주목사 정재원(丁載遠)이다.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윤덕열(尹德烈)의 딸이다. 정약용(丁若鏞)의 형이다. 어릴 때부터 매우 재주가 있고 총명했으며 성격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거리낌이 없었다. 소년시절부터 서울에서 이윤하(李潤夏)·이승훈(李承薰)·김원성(金源星) 등과 깊이 사귀면서 이익(李瀷)의 학문에 접하여 심취하였다. 이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더 깊이있게 배웠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자, ..

자산어보(玆山魚譜),정약전,1814년,최초 해양생물학 전문 서적, 자(玆)산, 흑산,玆

조선후기 문신 정약전이 귀양가 있던 흑산도 연해의 수족(水族)을 취급하여 1814년에 저술한 실학서.어보. 3권 1책. 필사본. 정약전이 귀양가 있던 흑산도 연해의 수족(水族)을 취급한 어보이다. 책명을 ‘자산어보’라고 명명한 데 대하여 정약전은 자서의 서두에서 말하기를, ‘자(玆)’는 흑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으므로 자산은 곧 흑산과 같은 말이나, 흑산이라는 이름은 음침하고 어두워 두려운 데다가 가족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흑산 대신에 자산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자산이라는 말을 제명에 사용하게 되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이 책을 쓰게 된 경위를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흑산도 해중에는 어족이 극히 많으나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적어 박물자(博物者)가 마땅히 살펴야 할 바이다. 내가 ..

삼선개헌,1969년,제3공화국,박정희

1969년 제3공화국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삼선문호를 열어 주기 위해 단행된 개헌. 이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① 대통령의 3선연임 허용, ② 국회의원의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 겸직 허용, ③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결의 요건 강화, ④ 국회의원 정수 증가 등이다. 1962년 12월 26일 개정된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연임규정이 “1차에 한해서 중임할 수 있다.”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2차까지 연임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상 다시 출마할 수 없었다. 제6대 대통령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1969년 1월 6일민주공화당의 길재호(吉在號) 사무총장은 현행 「헌법」의 미비점을 보완, 개정하기 위한 문제가 여당 내에서 신중히 검토되고 있다는 비공식 발언을 하였다. 이어, 이튿날인 7일 윤치영(尹致..

삼별초항쟁,1270년,개경환도,좌별초,우별초,신의군,배중손,김통정

1270년 6월 삼별초 해산령에 불만을 가진 삼별초 장병들이 개경환도(開京還都)를 거부하고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에 대해 펼쳤던 3년간의 항쟁. 삼별초는 야별초(夜別抄)의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와 신의군(神義軍)으로 구성된 3개의 별초군(別抄軍)을 총칭한 것으로, 용맹한 군사를 선발해 조직한 특수한 군대조직이다. 별초(別抄)라는 임시적 군대조직의 편성은 명종 대의 조위총(趙位寵)의 반란 때 나타난다. 하지만, 역사상으로 주요한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최우(崔瑀) 집권기의 일이며, 특히 대몽항전기에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최우의 집권 초기에 도적[실제로는 농민항쟁]이 횡행하자, 이들을 잡기 위해 용사(勇士)를 선발, 경찰부대를 조직하고 이를 야별초라 하였다. 인원을 크게 늘리고 기구를 확대하여 좌..

삼례집회,1892년,최제우 신원운동

1892년 10월과 11월에 걸쳐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며 전라도 삼례에서 개최한 집회. 1890년대 초반 사회적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수많은 민중들이 새로운 이상세계를 약속하는 동학에 투신하였다. 반면 동학을 사교로 규정한 정부는 동학교도들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이렇게 되자 서인주(徐仁周)·서병학(徐丙鶴) 등 지도적 지위의 동학교도가 중심이 되어 최제우 신원운동을 전개해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려고 하였다. 삼례집회가 개최되기 전에 1,000여 명의 동학교도들은 이미 공주에서 집회해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에게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였다. 이 공주집회는 비록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조병식으로부터 동학교도에 대한 관리의 침탈을 금지한다는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에, 다시 전..

삼국통일,7세기 중엽,신라,백제,고구려,통일정부

7세기 중엽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멸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한 일. (1) 삼국의 항쟁 삼국의 분립은 성읍국가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고대국가로 발전한 고구려·백제·신라에게는 국력을 다져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각기 숙원사업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고대국가에 있어 공통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제국들은 대제국을 건설하기 이전에 먼저 민족을 통일하고, 그 통일된 힘으로 주위를 위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지배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백제·신라가 경쟁적으로 영토를 넓히려고 싸운 것이나 서로 동맹을 맺고 한쪽을 공격한 것, 주위 다른 민족국가와 동맹을 맺은 것들도 모두 우선은 자신을 보존하고, 나아가 민족을 통일하려는 궁극적인 목적..

살수대첩,612년,영양왕,수(隋)나라,살수(薩水),고수전쟁,우중문,우문술,신세웅

23) 중국 수(隋)나라의 군대를 고구려가 살수(薩水)에서 크게 격파한 싸움. 살수대첩을 비롯한 고구려와 수나라의 일련의 충돌은 4세기 이래로 분열을 거듭하던 중국을 수나라가 통일함에 따른, 동아시아 세력권의 재편성과정에서 나타난 충돌의 하나였다. 다시 말해 중국의 남북조와 북아시아 유목민세계의 돌궐, 그리고 고구려·백제·신라 등을 축으로 편성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589년(평원왕 31)수나라의 남북조통일과 팽창에 따라 파괴, 재편성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 편성되어야 할 국제질서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의 하나가 바로 고구려와 수나라의 충돌이었다. 역사적 배경 581년 북주(北周)에 대신해 수왕조가 개창되면서, 고구려와 수나라는 외교사절을 파견하는 등 표면적 평화적인 관계를 수립·..

이봉창 투탄의거,일본천황암살미수사건,사쿠라다문의거,1932년,한인애국단, 김구, 이봉창, 히로히토 일본천황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경, 한인애국단원(韓人愛國團員)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궁성 사쿠라다문을 나서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를 죽이려 했던 거사. 1931년 9월 군국주의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본격적인 대륙 침략전쟁을 기도하였다. 이는 남만주를 거점으로 활발히 전개되던 우리의 독립전쟁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계획된 행동으로, 자금 부족과 내부 분규로 침체 상태에 빠져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최후의 비상 대책을 세워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도모하게 되었다. 즉, 적은 경비와 인원으로 최대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의열 투쟁이었다. 경과 실행 책임자인 김구(金九)는 한인애국단을 창설하여 적임자를 물색했..

사천해전,이순신,원균,나대용,이설,임진왜란,거북선 처음 실전

1592년(선조 25) 이순신(李舜臣) 등의 조선 수군이 사천 앞바다에서 왜군과 벌인 전투. 이 해전에서 이순신이 지휘한 수군이 왜선을 크게 무찔렀다.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 이순신은 거북선을 포함한 전선 23척을 이끌고 5월 29일 본영(여수)을 출발,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이끌고 온 원균(元均)과 합세하였다. 그리고 곤양쪽에서 사천으로 향하는 왜선 1척을 발견하고 뒤쫓아 격파하였다. 그 때 사천선창에는 왜선 12척이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열박(列泊)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때마침 조수가 나가 전선의 활동이 좋지 못함을 판단하고 유인작전(誘引作戰)을 세워 퇴각할 기세를 보이게 하자, 적들은 외양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뒤 이순신은 조수가 밀려드는 것을 계기로 거북선을 선두에 세워 적함대..

사이토저격의거,1919년,강우규,사이토 암살,조선총독암살기도,노인동맹,대일폭력투쟁노선

1919년 9월 2일 강우규(姜宇奎)가 서울역에서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해 오던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일. 1910년 국권 강탈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무단통치로 한국민을 철저히 탄압하였는데, 그 결과 1919년 3·1운동이라는 거족적 항일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일제는 임시적인 미봉책으로 하세가와(長谷川好道)를 파면하고, 사이토를 새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현역 해군 대장인 사이토는 부임하기 전에 이미 한국민을 기만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내외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경과와 결과 국권 상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각지를 전전하던 강우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층 지사들이 조직한 노인동맹(老人同盟)에 가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사이토 신임 총독을 암살할 것을 결심하고, ..

사십대기수론,四十代旗手論,1971년,신민당 김영삼,김대중,이철승,삼선개헌

1971년 신민당 김영삼 의원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나설 것을 선언하며 내세운 논리. 1969년 11월 8일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 나설 신민당후보지명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이날 오전 서울 외교구락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김영삼은 “박정권의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삼선개헌 강행 이후 오늘의 내외정세를 냉정히 분석하고 수많은 당내외 동지들의 의견들을 종합한 끝에 71년선거에 신민당이 내세울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당시 김영삼은 ‘40대기수론’의 근거로 “첫째, 5·16군사쿠데타로 등장한 현 집권세력, 다시 말해서 71년 총선거에서 싸울 상대세력이 야당의 평균 연령보다 훨씬 젊다는 사실이다. 둘째, 해방 후 25년간의 야당의 법통을 이어온 오늘의 야당..

사카린밀수사건,1966년,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건설자재

1966년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가 정부 정치자금과 관련해 건설자재로 가장하여 사카린을 대량 밀수입한 사건. 삼성그룹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는 미쯔이 물산에서 상업차관을 도입하여 울산에 요소비료공장 건설을 계획했다. 당시 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한 이병철의 아들 이맹희의 회고에 의하면, 공장건설은 정권과의 합의사항이었다. 즉 1967년 대선준비에 대한 강박관념과 농촌인구가 절대적인 상황에서 비료공장 건설은 훌륭한 홍보용 업적으로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조건을 수락하는 대신에 이병철은 국민, 정부, 언론이 비료공장 건설을 지원할 것, 정부가 책임지고 10억 원의 은행 융자를 해줄 것, 공장건설에 필요한 인허가 등을 신속히 해줄 것, 공장건설과 관련하여 한 푼의 정치자금도 제공하지 않겠다는 ..

사사오입개헌,1954년,이승만,3선제한 철폐,제2차 헌법개정

1954년 제1공화국의 제3대 국회에서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에 대한 3선제한의 철폐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킨 제2차 헌법개정. 1952년의 발췌개헌(拔萃改憲)을 통하여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함으로써, 이 해 8월 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로 이승만의 중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중임하기 위하여 헌법의 장애요소를 제거할 필요를 느낀 자유당과 이승만은 헌법상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하고, 재선(再選)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만 있을 뿐인 이 3선금지조항을 고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서 자유당은 그와 같은 개헌의 복안을 가지고,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되는 민의원 선거에 이를 찬성, 추진한다는 서명을 받고 후보자를 공천하여 많은 당선자를 확보하였다. 또한 ..

사비천도,538년,성왕,웅진,사비,중흥정치

538년(성왕 16) 백제 성왕이 도읍지를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로 옮긴 사건. 웅진천도(熊津遷都)는 475년 고구려군에 의한 불시의 한성(漢城) 공격에서 비롯되어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방어에 유리한 군사적 측면은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천도 직후부터 일어난 일련의 정치불안으로 왕권이 쇠약해지고 금강의 범람 등으로 인한 자연재해 피해가 잇달았다. 또한 도성(都城)이 협소하여 왕도(王都)로서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웅진천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538년(성왕 16) 성왕이 단행한 사비천도(泗沘遷都)이다. 사비 지역은 금강을 통해 중국이나 왜국과 연결되는 해상교통로 상의 중요한 요지였고, 특정한 세력이 없는 미개발지역이 많았다. 그리고 비교..

사량진왜변,1544년,중종,통영 사량진

조선 1544년(중종 39) 4월 경상도 통영시 사량진에서 일어난 왜인들의 약탈사건.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조선에서는 임신약조를 맺고 왜인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그러나 왜인들과의 충돌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왔다. 그러던 중 1544년 4월 20여 척의 왜선이 동쪽 강구(江口)로 쳐들어와서 200여명의 적이 성을 포위하고, 만호(萬戶) 유택(柳澤)과 접전하여 수군(水軍) 1인을 죽이고 10여인을 부상시킨 뒤 물러갔다. 이 사건은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삼포왜란과는 아주 다르지만 대일본관계에 있어서 또 하나의 커다란 고비였다. 이 무렵의 일본은 군웅할거의 전국시대(戰國時代)였다. 때문에 국내가 혼란하자 왜구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왜변으로 인해 일본과의 통교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찬반..

사도하자전투,1933년, 한·중연합군

1933년 4월 한·중연합군이 일·만연합군을 격파한 전투.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중앙 회의를 개최하고,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과 합작하여 연합 작전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래서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의 시세영(柴世榮) 부대와 연합군을 편성하고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그 해 12월 경박호(鏡泊湖)에서 첫 번째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 뒤 사도하자에 주둔하며 병사 모집과 훈련에 열중하였다. 그런데 1933년 4월 연합군의 군세가 증강되어 가고 있음을 탐지한 일본군과 만주군의 연합 부대는 사도하자를 공격하였다. 이때 한·중연합군은 이 기회에 일·만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고 전군을 4개 부대로 편성하였다. 제1로군은 소수 정예부대로 구성하여 적을 유인하도..

브나로드운동,1931년,동아일보,농촌계몽운동

동아일보사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의 하나. 동아일보사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 규모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제3회까지 이 운동을 ‘브나로드’로 부르다가 민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라 하여 제4회부터 ‘계몽운동’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금지 조처로 계속하지 못하였다. 내용 원래 ‘브나로드(v narod)’는 제정(帝政)러시아 말기에 소련의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민중 속으로 가자.’는 뜻의 러시아말 구호이다. 이 구호를 내세우고 1874년 수백 명의 러시아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부터 이 말은 계몽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는데, 동아일보사는 뒤에 ..

붕당정치(朋黨政治), 조선 중기 정치

조선 중기의 정치 운영 형태. 근래까지 일반적으로 이 정치 형태는 사화(士禍) 당쟁(黨爭)을 중심으로 망국적인 정치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의 개략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의 왕정은 당초 중앙집권 관료제로 운영되었으나 15세기 말엽부터 훈구파로 불리는 기성 관료 집단을 비판하는 사림파(士林派)가 대두했다. 이후 양자의 충돌로 여러 차례 사화가 반복하던 끝에 정치적 이해 관계를 같이 하는 무리로서 붕당이 발생해 항구적인 당쟁이 시작되었다. 당쟁 발생의 직접적 원인으로는 선조대에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이조전랑(吏曹銓郎) 추천 문제로 생긴 양자의 반목이라고 한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조정의 인사들이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나뉘고 나아가 재야의 유생들까지도 어느 한쪽을 지..

북벌계획(北伐計劃),조선 효종,청나라 정벌,숭명반후금

조선 효종 때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 17세기 초 동아시아 3국, 즉 한(韓)·중(中)·일(日)에는 새로운 국제질서 체제가 편성되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명·청의 세력 교체가 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가(豊臣家)가 타도되고 에도막부(江戶幕府)가 개창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 정세에 대응하여 조선 사회는 왜란의 후유증을 치유하면서 다각적으로 중흥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광해군(1608∼1623)의 왕실 재건(王室再建)·전제 정리(田制整理)·군정 강화(軍政强化)·문화 사업(文化事業) 등의 내정 개혁이 그것이다. 또한, 광해군은 명·청 교체에 따른 위기를 맞이해 대명·후금 중립외교 정책을 추구, 현명하게 대처하였다. 이 때 서인세력은 광해군의 배명부후금(背明附後金)을 반정(反正)의 명분으..

사대의혹사건, 5·1군사정권 ,부정부패사건,증권파동,워커힐사건,새나라자동차사건,빠찡꼬사건

5·16군사정변 이후의 군사정권 밑에서 발생하였던 네 가지의 부정부패사건. 증권파동·워커힐사건·새나라자동차사건·빠찡꼬사건을 일컫는다. 이 사건들은 대개 군정의 고위층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으나 그 진상이 명백히 규명되지 못한 채 국민들에게 짙은 의혹만을 남겨 놓았다. 부정부패의 척결과 구악일소를 혁명공약으로 내걸었던 군사정부는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듭하여 신악(新惡)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행착오 가운데에서도, 1963년 2월 15일 군정의 제2인자였던 김종필(金鍾泌)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외유의 길로 떠나게 한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것이 바로 ‘4대의혹사건’이었다. 이 사건들은 1964년 초 제3공화국의 국회에서 야당 측의 정치공세로 국정감사까지 받았다...

북관대첩,1592년,임해군,정문부,가토 기요마사

1592년(선조 25)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정문부의 조선군에 의해 수행된 함경도 북부인 북관(北關) 지역 수복 전투.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는 군사를 정비하여 경성, 장평, 임명, 백탑교 등 네 곳에서 승첩을 거두어 관북(關北) 지역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를 통칭하여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고 한다.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한성 철수를 강요하여 평양성 전투와 함께 전쟁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4월,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5월 초 한성을 함락시킨 이후 곧바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의 일본군은 6월 함경도로 진입하여 안변(安邊)에 본진을..

부차전투, 조선,명나라,만주 부차,후금,광해군,강홍립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만주 부차(富車)에서 후금군과 벌인 전투. 후금의 태조 누루하치가 만주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명나라에 대해 적대감정을 가지고 그 세력이 날로 팽창하자 명나라는 후금을 칠 계책을 세우고 조선에 원병을 청해 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출병에 대해 찬반양론이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왜병을 격퇴시키는데 협조했고,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양호(楊鎬)가 요동경략(遼東經略)에 임명되었기에 명분상 거절할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 평안병사 김응서(金應瑞)를 부원수(副元帥), 정호서(丁好恕)·이민환(李民寏)·이정남(李珽男)·김응하(金應河)·정응정(鄭應井) 등을 문무종사관(文武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포수(砲手) 3,500명, ..

부산포해전,1592년,임진왜란,이순신,원균,정운,이언량

1592년(선조 25) 9월 1일 이순신(李舜臣) 등의 조선수군이 부산포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 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왜선 100여척을 무찔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바다에서 연전연승한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소굴로 되어 있는 부산포를 무찌르기 위하여 8월 24일 전라좌우도의 전선을 거느리고 출전, 중도에서 원균(元均)으로 하여금 조선수군을 정돈하게 하였다. 이어 29일 낙동강하구를 거쳐 9월 1일 부산포로 향하던 중 화준구미(花樽龜尾)·다대포(多大浦)·서평포(西平浦)·절영도(絶影島) 등지에서 적선 24척을 불태우고 부산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 때 왜군은 선창 동편에 470여척이 줄지어 있었고, 병사들은 주로 언덕을 이용하여 대응할 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어 이순신의 명령과 함께 160여척의 조선수군..

부산진전투,1592년,정발(鄭撥),고니시(小西行長)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정발(鄭撥) 등이 부산진에서 일본군과 싸운 전투. 1592년(선조 25) 4월 14일 고니시(小西行長) 휘하의 1군(軍) 1만 8,700여명의 일본군은 400여척의 병선으로 신시(申時)주 01)에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그 때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정발은 전선 3척을 이끌고 포구를 나섰으나 적선은 이미 절영도(絶影島) 내외양에 들어와 있었다. 정발은 일진일퇴하면서 진성(鎭城)으로 들어와 동문루(東門樓) 앞에서 급히 군민을 소집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적장 소요시토시[宗義智]는 약간의 병사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성의 동정을 살피기도 하였으나 이 날 적군은 상륙하지 않았다. 다음날 이른 아침 적군은 우암(牛巖)쪽에서 상륙하여 성으로 향하고 세 방면에서 성을 공격하였..

부산정치파동,1952년,계엄령,제1차 개정헌법

1952년 5월 25일의 계엄령 선포로부터 같은 해 7월 7일의 제1차 개정헌법 공포에 이르기까지 전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소요사건.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 무소속이 의원정수의 60%에 해당하는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대한국민당·민주국민당 등 기존의 정당들은 원내 소수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원내 세력분포의 재구성은 대통령직의 연임을 노리던 이승만(李承晩)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이 형성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형성하기 위하여 새로운 정당의 조직을 추진하였고, 이와 동시에 1951년 11월 28일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 중 신당, 즉 자유당..

부산일본간해저전신선조약,1883년,조선,일본,해저전선 부설,덴마크 대북부전신주식회사

1883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해저전선 부설에 관하여 전 5조로 된 조약.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은 양국 간의 신속한 교섭을 위한 통신수단 개설의 필요를 이유로 1882년 말부터 해저전선 부설에 관한 외교적 절충을 조선에 요청해왔다. 조선에서도 필요를 인식했으나, 일본 측이 전선시설을 위한 대지를 무제한 조차(租借)해 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협상이 타결되지 못하고 있었고, 외무독판(外務督辦) 조영하(趙寧夏) 역시 이러한 일본의 요구가 국권침해라 주장하면서 지조기한(地租期限)을 15년으로 할 것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외무독판이 민영목(閔泳穆)으로 교체되면서 양국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부산까지의 해저전선 부설에 합의하였고, 시공회사는 덴마크의 대북부전신주식회사(大北部電信株式會社)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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