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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63

임수경 평양축전참가사건,1989년,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임수경,전대협,판문점,문익환

임수경이 1989년 평양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여했다가 판문점으로 귀환하다가 체포된 사건.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반제 자주와 반전 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건 축전이었다. 제13회 축전은 1989년 7월평양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불어과 4학년 학생이던 임수경은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 대표로 선발되었다. 형식상 일본 관광으로 출국했지만, 독일을 거쳐 1989년 6월 30일 북한에 입국했다. 축전에 참여하여 북한 인민들로부터 대대적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정의구현사제단의 대표로 파견된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걸어서 귀환했다. 임수경은 입국과 동시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국가안전기획부의 조사를 받았다. 징역 5년, 자격정지 ..

일장기말소사건,1936년,조선중앙일보,동아일보,베를린올림픽,손기정,남승룡

1936년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4면과 『동아일보』지방판 조간 2면 및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 베를린올림픽대회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禎)선수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없애버린 사건. 1936년 8월 독일 베를린에서 거행된 올림픽대회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소수의 우리 선수가 몇 개 종목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마라톤부문에서 손기정·남승룡(南昇龍) 두 선수가 우승후보로 지목되었다. 1935년 3월에 있었던 올림픽파견 마라톤예선대회에서 손기정은 2시간 26분 14초라는, 당시 세계기록 2시간 31분 37초보다 5분이나 앞서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 경기가 시작된 8월 9일 밤 11시(한국시간)에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일본인납북사건,북일정상회담,일본인납치,김정일, 고이즈미, 김현희, 이은혜,메구미

북한이 남파간첩의 일본어 교육 및 신분 도용을 위하여 일본인을 납치한 사건. 일본인 납북사건은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범 김현희(金賢姬)가 일본어 여교사인 ‘이은혜’(일본명 田口八重子)에게서 일본어를 배웠다고 폭로하면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은혜 사건’ 및 ‘일본인 납치의혹’에 대해 ‘남한의 조작극’, 또는 일본 당국이 과거청산을 피하기 위해 조작해 낸 ‘정치적 모략극’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열린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이즈미 일본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를 시인하고 공식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함으로써 명백한 사실로 확인되었다. 역사적 배경 북한당국은 냉전 시기에 북한이 남파 간첩들에게 일본인의 신분으로 위장시키고 일본어 교..

일본원정,1274년,1281년,충렬왕,여몽연합군,동로군,정동행성,태풍

1274년(원종 15, 충렬왕 즉위)과 1281년(충렬왕 7)의 2차에 걸쳐 원(元)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려 했던 사건. 고려와의 전쟁이 끝나고 강화가 성립됨에 따라 원은 일본지배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원(元)세조(世祖)는 일본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기 위해 모두 6차에 걸쳐 고려와 원의 사신을 일본에 파견했다. 당시 원이 일본초유의 의도에 대해서 남송(南宋) 정벌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원은 남송의 양양성(襄陽城) 공격(1268∼1273)을 전후하여 일본초유를 시도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해상으로 연결된 남송과 일본의 통교관계를 끊어 남송을 고립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원의 요구에 불응하자 원은 무력을 동원해 일본을 굴복시키기로 하고 대규모의 원정군을 파견했다. 1..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북한의 남침 이후 인천지역에 대한 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과 배후를 공격하여 전쟁을 반전시킨 상륙작전. 1950년 6월 29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는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할 경우 장차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복귀한 직후인 1950년 7월 첫주에 그의 참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에게 하달한 지시와 더불어 조기에 계획이 진척되었다. 이 계획은 작전참모부장 라이트(Edwin K. Wright) 준장이 이끄는 합동전략기획단(JSPOG: Joint Strategic Planning and Operations G..

인조반정,1623년,광해군,이귀,서인,이이첨,대북파,능양군 종(綾陽君倧)

1623년(광해군 15) 이귀(李貴)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倧)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임해군이 불궤(不軌)주 02)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 그 뒤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감 이직(李稷)에게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칠서지옥(七庶之獄)주 03)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

인민혁명당사건,1964년,1974년,1차 인혁당사건,2차 인혁당사건,사법살인

1964년 8월과 1974년 4월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민혁명당이 한국의 국가변란을 기도하였다고 발표된 사건. 1964년 8월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한 것으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된 ‘인민혁명당사건’(1차 인혁당사건)과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발표된 ‘인혁당재건위원회 사건’(2차 인혁당사건)을 말한다. 1. 1차 인혁당사건 1960년 4·19 이후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운동 단체인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등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쿠데타세력은 4·19 시기 조직..

안중근, 이토히로부미,이토포살의거,1909년 안중근,하얼빈

1909년 안중근(安重根)이 만주의 하얼빈(哈爾賓)에서 이토(伊藤博文)를 포살한 의거. 이토는 1905년 11월 특파대사로 서울에 와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다음 해 3월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친일내각을 조직하여, 정치·외교뿐만 아니라 재정·금융·화폐·체신·교통 등 제분야를 장악하여 조선의 식민지화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개된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항쟁 등 반일민족운동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장악한 뒤 군대까지 해산시켜 버렸다. 이와 같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병탄작업은 이토에 의해 완결되었 형식적 절차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래서 주권회복을 원하는 한국인들은 통감..

이탕개의 난,1583년,선조,회령,여진족

1583년(선조 16) 이탕개를 중심으로 회령 지방의 여진족(女眞族)이 일으킨 반란. 세종대의 육진 개척으로 동북 지방의 여진족에 대한 경략은 대체로 큰 문제가 없이 유지되어왔다. 그러나 중종 이후 내정이 문란해짐에 따라 북방에 대한 통제력도 차츰 기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틈을 타 여진족이 준동하기 시작해, 자주 국경을 침범하며 약탈행위를 자행해 변장(邊將)을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그들을 토벌하기 위한 출병론(出兵論)이 대두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반대론자에 의해 실행되지 못하고 계속 소극적인 회유책으로 일관해 오던 중 1583년 마침내 ‘이탕개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이탕개는 선조 초 우리 나라에 귀화한 여진인으로, 육진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관록과 여러 가지 후대를 받아온 자였다. 158..

이치전투,임진왜란,금산,이치,황진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 8일 황진(黃進), 권율(權慄) 등이 금산(錦山) 서평의 이치(梨峙)에서 일본군과 싸운 전투. 당시에 아군은 전라도도절제사 권율(權慄)과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거느린 관군 1,500명이었고, 일본군은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거느린 6번대소속의 별군이었다. 이 전투는 일본군의 전주 침입을 막기 위한 웅치전투(熊峙戰鬪) 및 금산전투와 거의 동시에 벌어졌는데, 웅치와 금산전투에서 아군이 비록 패하였지만, 이 전투에서는 끝내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온 종일의 전투 중에 황진이 총을 맞고 쓰러지자 한때 사기가 떨어졌으나 권율이 장병을 독전하여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전라도가 보존되어 후방병참기지로서의 역..

이철희장영자사건,1982년,전두환 인척,장영자,어음사기사건

1982년 당시 대통령 전두환의 인척이었던 장영자와 그의 남편 이철희가 일으킨 거액의 어음사기사건. 1982년 5월 4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외국환관리법 위반혐의로 이철희·장영자 부부를 구속했다. 검찰은 이들이 명동 암달러시장과 캘리포니아에서 80만 달러를 모았다고 발표했다. 검찰 조사가 이루어질수록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사기행각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 규모임이 드러났다. 전두환의 처삼촌 이규광의 처제였던 장영자는,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남편 이철희와 함께 권력을 배경으로 주로 자금압박에 시달리는 건설업체들에 접근하였다. 부부는 이들 업체에게 조건이 좋은 자금조달을 제시하였고, 그 담보로 대여액의 2∼9배에 달하는 약속어음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약속어음을 할인해 또 다른 회사에 빌려주거나..

이자겸의 난,1126년,인종,이자겸,척준경,최사전,인주이씨

1126년(인종 4) 왕실의 외척이었던 이자겸(李資謙)이 왕위를 찬탈하려고 일으킨 반란. 이자겸의 난은 척준경(拓俊京)과 그의 군사적 배경이 연계되었기 때문에 이·척(李拓)의 난이라고도 한다. 예종과 인종에게 자신의 딸을 왕후로 들이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이자겸을 인종이 자신의 측근세력을 종용하여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이 척준경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켰다. 그는 왕궁을 침범하여 국왕파 신료들을 제거한 다음 왕을 유폐시키며 정치를 독단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척준경을 이자겸과 갈라서게 해야 된다는 최사전의 계략을 수용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얼마 안 있어 이자겸은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포박되어 유배되었으며 인주이씨의 발호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왕권을 견제하면서 그들의..

이인좌의 난,1728년,영조

1728년(영조 4)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의 과격파가 연합해 무력으로 정권탈취를 기도한 사건. 이인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며, 무신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경종이 세자 때부터 질환이 심했으므로, 숙종은 세자의 왕위계승을 우려해 이이명(李頤命)에게 연잉군(延礽君)주 01)을 은밀히 부탁하는 정유독대(丁酉獨對 ; 1717년 숙종과 이이명 두 사람만의 만남)를 하였다. 경종은 숙종 말년에 세자청정을 할 때도 정사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재위 중에도 국사를 제대로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에 노론측은 경종의 무자다병(無子多病)을 이유로 연잉군의 세제책봉(世弟冊封)과 세제대리청정을 서둘렀다. 그러자 소론측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

이시애의 난,1467년,세조

1467년(세조 13)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해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함길도를 근거로 한 호족 토반(土班)이었다. 1458년 경흥진병마절제사, 1461년 행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463년 회령부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원래 함길도는 조선의 왕실 발상지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북방 이민족과 접해 있는 특수 사정을 고려해 지방관은 인망 있는 호족 중에서 임명해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남방의 백성을 이주시켜 여진세력을 꺾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왕권을 장악한 세조는 중앙집권 체제 강화의 일환으로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서울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집권책은 북도인의 불만을 샀다. 호패법(號牌法)..

이수근 사건, 조선중앙통신사,이수근(李穗根), 1969년,중앙정보부,배경옥,간첩사건,위장귀순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이수근(李穗根)이 남측에 귀순하여 살다가 1969년 1월 여권을 위조하여 해외로 출국하여 체포된 후 간첩으로 몰리게 된 사건. 북한의 고위 언론인이었던 이수근은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남쪽으로 탈출하여 귀순하였다. 이후 그는 여교수와 새로 결혼도 하고, 중앙정보부 판단관으로 대우를 받으며 반공강연 등을 하면서 남쪽에 정착하였다. 그러던 중 이수근은 돌연 1969년 1월 27일, 북에 두고 온 원래 처의 조카 배경옥(裴慶玉)과 함께 여권을 위조하여 출국하였다. 이들은 홍콩을 거쳐 캄보디아로 향해가다가 베트남 사이공 공항에서 중앙정보부 직원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이수근이 애초부터 간첩활동을 목표로 위장귀순을 했고, 남측에서 수집한 정보를 북한에 전..

이등박문 추도회,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909년,장충단,총리대신 이완용, 친일파

1909년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각계각층에서 추진 또는 개최하였던 다양한 추도회.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하자 대한제국 왕실과 내각, 그리고 여러 사회 정치 세력은 충격을 받은 채 일본정부의 조선 병합정책을 예의 주시하였다. 곧이어 1909년 11월 이토를 기리는 추도회의 준비와 개최를 통해 권력 구도의 재편을 도모하면서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이토의 장례식은 11월 4일 거행되었다. 장례식을 전후해서 일부 배일적인 단체나 인물을 제외하고 대한제국 왕실 및 정부를 비롯한 상층 관리들이나 대부분의 계몽단체와 인물들은 이토를 기리는 크고 작은 추도회를 개최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관민추도회(官民追悼會)’였다. 이는 대한제국 정부 주도로 ..

의약분업사태, 1999년, 의약분업, 약사법

1999년 말부터 2000년 말까지 1년 여 동안 의약분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과정. 의약분업은 의사와 약사의 전문성에 따라 진단과 처방은 의사에게 맡기고, 처방된 의약품을 조제하는 것은 약사가 담당하는 제도이다. 구체적으로 환자에 대한 진찰과 처방, 조제를 의사와 약사 간에 직능별로 분담하고 전문화해서 불필요한 약물 투여를 방지하고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약분업사태는 의사와 약사의 기능과 역할이 분리되자 각자 여기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달라져 당사자들이 집단행동을 벌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의료대란과 의료공백 사태가 발생했던 1999년 말부터 2000년 말까지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역사적 배경 한국에서 의약분업이 처음으로 명시된 것은 1963년 「약사법」이었다. 하지..

을축년홍수, 1925년

1925년 즉, 을축년에 있었던 대홍수. 을축년에는 4번에 걸친 홍수가 있었는데, 1차 홍수는 7월 7일 대만 부근에서 발생한 열대성 저기압(태풍)이 11일과 12일에 중부지방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빠져나가면서 발생하였다. 그로 인하여 황해도 이남 지방에 300∼500㎜의 집중호우가 쏟아졌고, 한강·금강·만경강·낙동강 등이 범람하였다. 1차 홍수로 인한 피해가 복구되기도 전인 7월 14일 다시 대만 부근에서 발생한 열대성 저기압이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의 황해를 지나면서 그 우측 반경에 들어간 임진강과 한강 유역에 집중호우를 내렸다. 16·17·18일 계속 내린 비는 한강과 임진강의 분수계 부근에서 최고 650㎜에 달하였고, 이로 인하여 임진강과 한강이 크게 범람하였다. 18일 한강의 수위는 뚝섬 13.5..

사일삼호헌조치,4.13護憲措置,1987년,전두환,대통령직선제,개헌,6월항쟁,6·29선언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조치. 제5공화국의 대통령 간선제가 민주주의 원리를 위반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1987년 12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86년부터 직선제 개헌 요구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6년 1월 16일 국정연설을 통해 88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개헌을 유보하는 방침을 발표했고, 그에 대응해 신한민주당(신민당)은 1986년 2월 12일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여론화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미 직선제 개헌은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에 따라 1986년 7월 30일 여야 합의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발족해 헌법 개정 협상을 진행하지만,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의원내각제를..

5·16군사쿠데타,1961년,박정희,김종필,정군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과 김종필 등 정군파(整軍派) 장교 중심으로 이루어진 군사쿠데타. 5·16은 국내적 배경과 국외적 배경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국내적 배경은 또한 군 내부 배경과 정치·사회적 배경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군 내부 배경을 보면 한국전쟁을 통한 군부의 급속한 비대화가 있다. 한국전쟁 이전 10만여 명 내외에서 60만 명 이상으로 확대된 군부는 미국의 집중 원조를 받았는가 하면 주요 군 간부들은 미국 유학을 통해 근대적 기술과 사고방식을 접하게 되어 여타 사회 분야에 비해 엘리트 의식이 매우 강화되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에 의한 군의 정치화 과정은 군부 엘리트 장교들 사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박정희와 같은 정치지향적 군인을 양산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전..

을사조약,1905년,외교권 박탈,한일협상조약, 제2차한일협약, 을사5조약, 을사늑약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원명은 한일협상조약이며, 제2차한일협약·을사5조약·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도 한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각의에서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대한정책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을 체결,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우리의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그 사이 러일전쟁이 일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은 국제관계를 주시하며 한국을 보호국가로 삼으려는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자면 한국과..

을사의병,1905년,을사오조약,신돌석,민종식,안병찬

1905·1906년 을사오조약 등 일련의 일제침략을 계기로 일어난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 특히 1906년(丙午)에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던 까닭에 병오의병(丙午義兵)이라고도 한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봉기한 을미의병은 1896년 10월을 고비로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의병항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동기만 유발되면 언제라도 재기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이 잇달아 체결되어 반일의식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어가던 중, 1905년 을사오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한국민의 반일감정은 극도에 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재기하였다. 을사의병이 가장 먼저 봉기한 곳은 을미의병 때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었던 원..

을사사화,1545년,명종,대윤,소윤,윤원형,윤임,문정왕후

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반목으로 일어나, 대윤이 소윤으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탄압.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후퇴한 사이에 신묘삼간(辛卯三奸 : 중종 20년 신묘년에 사형된 沈貞·李沆·金克愊을 말함.)과 김안로(金安老)와의 싸움과 같은 권신간의 치열한 정권다툼이 일어났다. 김안로는 심정 등의 탄핵으로 귀양중 정신(廷臣)과 내통해, 심정 등이 유배중인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몄다고 탄핵하였다. 이로써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과 결탁해 권세를 누리면서,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문정왕후(文定王后)주 01)를 폐출하려고 음모를 꾸..

을미사변, 명성황후시해사건, 1895년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명성황후) 살해사건. 사건 당시 서울 현지에서 이를 지휘한 일본측 최고위 인물은 부임한지 37일밖에 안되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였으며, 주요 무력은 서울 주둔의 일본군 수비대이고, 행동대는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 등이었다. 이들은 미우라의 직접 지시하에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기습하여, 고종의 왕후인 중전 민씨(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를 참혹히 살해하였다. 그리고 시신은 근처의 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 그런데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견이 분분하다. 당초부터 은밀히 진행된 사건인 데다가 사건 직후, 일본측이 철저히 자료를 인멸, ..

윤비폐출사건,성종 계비 윤비(尹妃) 폐비,숙의윤씨,윤필상,이세좌,임사홍,갑자사화

조선 성종의 계비 윤비(尹妃)를 폐비시킨 뒤 사약을 내려 죽인 사건. 윤씨의 아버지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1474년에 왕비(王妃)가 죽은 뒤 숙의 윤씨가 왕의 총애를 받아 계비로 들어온 뒤 원자 융(㦕)을 낳았다. 왕의 총애가 두터워짐에 따라 제빈(諸嬪)을 투기할 뿐만 아니라, 1477년에는 비상을 사용해 왕과 후궁들을 독살하려는 등 갖가지 혐의가 드러나 왕과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미움을 샀다. 급기야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불손한 일까지 있게 되었다. 이에 1479년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좌의정 윤필상(尹弼商) 등의 의논에 따라 폐해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친정..

6·8부정선거 규탄시위,1968년,제7대 국회의원 선거,민주공화당,신민당

1968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정부와 여당의 부정으로 치러진 것에 대해 항의하여 벌인 시위. 1967년 6월 8일은 1963년 민정이양 이후 두 번째로 이루어진 총선거였다. 정부는 제7대 국회의원선거일을 6월 8일로 확정하고 5월 8일 공포하였다. 각 정당은 5월 3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체제를 풀고 총선거에 대비했다. 삼선개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정부와 여당은 최소 110석 확보를 목표로, 야당은 과반수 확보를 목표로 선거전에 임했다. 민주공화당 총재인 박정희 대통령은 5월 18일부터 행정시찰을 명목으로 지방유세전을 전개했다. 신민당은 대통령의 지원유세를 불법으로 고발했으나 5월 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의 지원유세를 인정했다. 6월 8일 실시된 선거에서 공개투표, 대리투표, 빈대표,..

6·15공동선언, 2000년, 평양, 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방문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통일 노력을 위해 발표한 공동선언. 6·15남북공동선언은 1972년 ‘7·4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 정상들이 직접 만나 성사시킨 역사적인 사건이다. 1993년에 불거진 북한의 핵카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4년 김영삼대통령과 김일성주석은 당시 방북하고 있었던 전 미국 대통령 카터(Jimmy Carter)의 중개로 남북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김일성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 후 김일성주석의 대를 이어 북한을 통치하게 된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89년부터 찾아온 식량난으로 고난의 행군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극한적인 경제문제 해결과 남북대화 및 협력을 위해 김대중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6·23선언, 평화통일외교정책에관한특별선언, 1973년, 박정희, 공산권 문호개방,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의 기반조성을 위해 공산권에의 문호개방,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한국정부의 정책선언. 한국정부가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6·23선언」)을 천명하게 된 것은 국제정세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1960년대 이후 비동맹국가들이 늘어나고 유엔에서 이들의 발언권이 강화되었으며, 세계적인 데탕트 물결 속에 유엔의 기존 중국 대표였던 중화민국이 경질되고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교체되자 유엔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북한의 대유엔 외교가 강화되고 상주대표부 개설, 유엔 산하기구 및 전문기구 가입 등이 예상되고 있었다. 이제 한반도 문제가 한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다루어질 수 없게 된 현실에서 한국은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대서방권 일변도..

육삼항쟁, 한일회담 반대운동, 6·3시위, 1964년

1964년 6월 3일에 일어난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관련된 일련의 항쟁. 6·3항쟁은 한일회담 반대운동, 6·3시위라고도 한다. 이 항쟁이 전개된 기간은 서울에서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최초로 벌어진 1964년 3월 24일부터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6월 3일까지를 지칭한다. 6·3항쟁은 이후 한일협정비준서가 조인된 1965년 12월까지 펼쳐진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일국교정상화는 1951년 10월 20일 예비회담에서 시작되었으나, 7차례 본회의를 거쳐 1965년 6월 22일에 조인될 때까지 14년이 소요되었다. 비타협적인 태도로 회담이 진전이 이뤄지지 못했던 이승만 정권 시기와 달리,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를 지상목표로 했기에 부족한 자금을 한일회담 성사를 통한 대일청구권으로 조달하고자 했다...

위화도회군,1388년,우왕,이성계정변,요동정벌

1388년(우왕 14)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李成桂)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위화도는 의주의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이다. 당시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 매우 긴장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1388년에는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도사(遼東都司)의 관할 아래 두겠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고려가 크게 반발해 결국 요동정벌로 이어졌다. 요동정벌이 단행될 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할 뿐 아니라,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창궐할 것이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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