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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52

이시애의 난,1467년,세조

1467년(세조 13)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해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 이시애는 길주 출신으로, 함길도를 근거로 한 호족 토반(土班)이었다. 1458년 경흥진병마절제사, 1461년 행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463년 회령부사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원래 함길도는 조선의 왕실 발상지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북방 이민족과 접해 있는 특수 사정을 고려해 지방관은 인망 있는 호족 중에서 임명해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남방의 백성을 이주시켜 여진세력을 꺾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왕권을 장악한 세조는 중앙집권 체제 강화의 일환으로 북도 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서울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집권책은 북도인의 불만을 샀다. 호패법(號牌法)..

이수근 사건, 조선중앙통신사,이수근(李穗根), 1969년,중앙정보부,배경옥,간첩사건,위장귀순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이수근(李穗根)이 남측에 귀순하여 살다가 1969년 1월 여권을 위조하여 해외로 출국하여 체포된 후 간첩으로 몰리게 된 사건. 북한의 고위 언론인이었던 이수근은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남쪽으로 탈출하여 귀순하였다. 이후 그는 여교수와 새로 결혼도 하고, 중앙정보부 판단관으로 대우를 받으며 반공강연 등을 하면서 남쪽에 정착하였다. 그러던 중 이수근은 돌연 1969년 1월 27일, 북에 두고 온 원래 처의 조카 배경옥(裴慶玉)과 함께 여권을 위조하여 출국하였다. 이들은 홍콩을 거쳐 캄보디아로 향해가다가 베트남 사이공 공항에서 중앙정보부 직원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이수근이 애초부터 간첩활동을 목표로 위장귀순을 했고, 남측에서 수집한 정보를 북한에 전..

이등박문 추도회,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909년,장충단,총리대신 이완용, 친일파

1909년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각계각층에서 추진 또는 개최하였던 다양한 추도회.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하자 대한제국 왕실과 내각, 그리고 여러 사회 정치 세력은 충격을 받은 채 일본정부의 조선 병합정책을 예의 주시하였다. 곧이어 1909년 11월 이토를 기리는 추도회의 준비와 개최를 통해 권력 구도의 재편을 도모하면서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이토의 장례식은 11월 4일 거행되었다. 장례식을 전후해서 일부 배일적인 단체나 인물을 제외하고 대한제국 왕실 및 정부를 비롯한 상층 관리들이나 대부분의 계몽단체와 인물들은 이토를 기리는 크고 작은 추도회를 개최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관민추도회(官民追悼會)’였다. 이는 대한제국 정부 주도로 ..

의약분업사태, 1999년, 의약분업, 약사법

1999년 말부터 2000년 말까지 1년 여 동안 의약분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과정. 의약분업은 의사와 약사의 전문성에 따라 진단과 처방은 의사에게 맡기고, 처방된 의약품을 조제하는 것은 약사가 담당하는 제도이다. 구체적으로 환자에 대한 진찰과 처방, 조제를 의사와 약사 간에 직능별로 분담하고 전문화해서 불필요한 약물 투여를 방지하고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약분업사태는 의사와 약사의 기능과 역할이 분리되자 각자 여기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달라져 당사자들이 집단행동을 벌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의료대란과 의료공백 사태가 발생했던 1999년 말부터 2000년 말까지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역사적 배경 한국에서 의약분업이 처음으로 명시된 것은 1963년 「약사법」이었다. 하지..

을축년홍수, 1925년

1925년 즉, 을축년에 있었던 대홍수. 을축년에는 4번에 걸친 홍수가 있었는데, 1차 홍수는 7월 7일 대만 부근에서 발생한 열대성 저기압(태풍)이 11일과 12일에 중부지방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빠져나가면서 발생하였다. 그로 인하여 황해도 이남 지방에 300∼500㎜의 집중호우가 쏟아졌고, 한강·금강·만경강·낙동강 등이 범람하였다. 1차 홍수로 인한 피해가 복구되기도 전인 7월 14일 다시 대만 부근에서 발생한 열대성 저기압이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의 황해를 지나면서 그 우측 반경에 들어간 임진강과 한강 유역에 집중호우를 내렸다. 16·17·18일 계속 내린 비는 한강과 임진강의 분수계 부근에서 최고 650㎜에 달하였고, 이로 인하여 임진강과 한강이 크게 범람하였다. 18일 한강의 수위는 뚝섬 13.5..

사일삼호헌조치,4.13護憲措置,1987년,전두환,대통령직선제,개헌,6월항쟁,6·29선언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조치. 제5공화국의 대통령 간선제가 민주주의 원리를 위반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1987년 12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86년부터 직선제 개헌 요구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6년 1월 16일 국정연설을 통해 88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개헌을 유보하는 방침을 발표했고, 그에 대응해 신한민주당(신민당)은 1986년 2월 12일 1000만 개헌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여론화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미 직선제 개헌은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에 따라 1986년 7월 30일 여야 합의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발족해 헌법 개정 협상을 진행하지만,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의원내각제를..

5·16군사쿠데타,1961년,박정희,김종필,정군파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과 김종필 등 정군파(整軍派) 장교 중심으로 이루어진 군사쿠데타. 5·16은 국내적 배경과 국외적 배경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국내적 배경은 또한 군 내부 배경과 정치·사회적 배경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군 내부 배경을 보면 한국전쟁을 통한 군부의 급속한 비대화가 있다. 한국전쟁 이전 10만여 명 내외에서 60만 명 이상으로 확대된 군부는 미국의 집중 원조를 받았는가 하면 주요 군 간부들은 미국 유학을 통해 근대적 기술과 사고방식을 접하게 되어 여타 사회 분야에 비해 엘리트 의식이 매우 강화되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에 의한 군의 정치화 과정은 군부 엘리트 장교들 사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박정희와 같은 정치지향적 군인을 양산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전..

을사조약,1905년,외교권 박탈,한일협상조약, 제2차한일협약, 을사5조약, 을사늑약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원명은 한일협상조약이며, 제2차한일협약·을사5조약·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도 한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각의에서 대한방침(對韓方針)·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한 새로운 대한정책을 결정하였다. 이어서 그 해 8월 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을 체결, 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우리의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그 사이 러일전쟁이 일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은 국제관계를 주시하며 한국을 보호국가로 삼으려는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자면 한국과..

을사의병,1905년,을사오조약,신돌석,민종식,안병찬

1905·1906년 을사오조약 등 일련의 일제침략을 계기로 일어난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 특히 1906년(丙午)에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던 까닭에 병오의병(丙午義兵)이라고도 한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봉기한 을미의병은 1896년 10월을 고비로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의병항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동기만 유발되면 언제라도 재기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이 잇달아 체결되어 반일의식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어가던 중, 1905년 을사오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한국민의 반일감정은 극도에 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재기하였다. 을사의병이 가장 먼저 봉기한 곳은 을미의병 때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었던 원..

을사사화,1545년,명종,대윤,소윤,윤원형,윤임,문정왕후

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반목으로 일어나, 대윤이 소윤으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탄압.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후퇴한 사이에 신묘삼간(辛卯三奸 : 중종 20년 신묘년에 사형된 沈貞·李沆·金克愊을 말함.)과 김안로(金安老)와의 싸움과 같은 권신간의 치열한 정권다툼이 일어났다. 김안로는 심정 등의 탄핵으로 귀양중 정신(廷臣)과 내통해, 심정 등이 유배중인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몄다고 탄핵하였다. 이로써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과 결탁해 권세를 누리면서,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문정왕후(文定王后)주 01)를 폐출하려고 음모를 꾸..

을미사변, 명성황후시해사건, 1895년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새벽 일본의 공권력 집단이 서울에서 자행한 조선왕후(명성황후) 살해사건. 사건 당시 서울 현지에서 이를 지휘한 일본측 최고위 인물은 부임한지 37일밖에 안되는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였으며, 주요 무력은 서울 주둔의 일본군 수비대이고, 행동대는 일본공사관원, 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배 등이었다. 이들은 미우라의 직접 지시하에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기습하여, 고종의 왕후인 중전 민씨(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를 참혹히 살해하였다. 그리고 시신은 근처의 숲속으로 옮겨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 그런데 사건의 배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견이 분분하다. 당초부터 은밀히 진행된 사건인 데다가 사건 직후, 일본측이 철저히 자료를 인멸, ..

윤비폐출사건,성종 계비 윤비(尹妃) 폐비,숙의윤씨,윤필상,이세좌,임사홍,갑자사화

조선 성종의 계비 윤비(尹妃)를 폐비시킨 뒤 사약을 내려 죽인 사건. 윤씨의 아버지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이며,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다. 1473년(성종 4)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1474년에 왕비(王妃)가 죽은 뒤 숙의 윤씨가 왕의 총애를 받아 계비로 들어온 뒤 원자 융(㦕)을 낳았다. 왕의 총애가 두터워짐에 따라 제빈(諸嬪)을 투기할 뿐만 아니라, 1477년에는 비상을 사용해 왕과 후궁들을 독살하려는 등 갖가지 혐의가 드러나 왕과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미움을 샀다. 급기야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불손한 일까지 있게 되었다. 이에 1479년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좌의정 윤필상(尹弼商) 등의 의논에 따라 폐해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친정..

6·8부정선거 규탄시위,1968년,제7대 국회의원 선거,민주공화당,신민당

1968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정부와 여당의 부정으로 치러진 것에 대해 항의하여 벌인 시위. 1967년 6월 8일은 1963년 민정이양 이후 두 번째로 이루어진 총선거였다. 정부는 제7대 국회의원선거일을 6월 8일로 확정하고 5월 8일 공포하였다. 각 정당은 5월 3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체제를 풀고 총선거에 대비했다. 삼선개헌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정부와 여당은 최소 110석 확보를 목표로, 야당은 과반수 확보를 목표로 선거전에 임했다. 민주공화당 총재인 박정희 대통령은 5월 18일부터 행정시찰을 명목으로 지방유세전을 전개했다. 신민당은 대통령의 지원유세를 불법으로 고발했으나 5월 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대통령의 지원유세를 인정했다. 6월 8일 실시된 선거에서 공개투표, 대리투표, 빈대표,..

6·15공동선언, 2000년, 평양, 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방문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통일 노력을 위해 발표한 공동선언. 6·15남북공동선언은 1972년 ‘7·4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 정상들이 직접 만나 성사시킨 역사적인 사건이다. 1993년에 불거진 북한의 핵카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4년 김영삼대통령과 김일성주석은 당시 방북하고 있었던 전 미국 대통령 카터(Jimmy Carter)의 중개로 남북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김일성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 후 김일성주석의 대를 이어 북한을 통치하게 된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89년부터 찾아온 식량난으로 고난의 행군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극한적인 경제문제 해결과 남북대화 및 협력을 위해 김대중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6·23선언, 평화통일외교정책에관한특별선언, 1973년, 박정희, 공산권 문호개방,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의 기반조성을 위해 공산권에의 문호개방,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한국정부의 정책선언. 한국정부가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선언’(「6·23선언」)을 천명하게 된 것은 국제정세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1960년대 이후 비동맹국가들이 늘어나고 유엔에서 이들의 발언권이 강화되었으며, 세계적인 데탕트 물결 속에 유엔의 기존 중국 대표였던 중화민국이 경질되고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교체되자 유엔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북한의 대유엔 외교가 강화되고 상주대표부 개설, 유엔 산하기구 및 전문기구 가입 등이 예상되고 있었다. 이제 한반도 문제가 한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다루어질 수 없게 된 현실에서 한국은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대서방권 일변도..

육삼항쟁, 한일회담 반대운동, 6·3시위, 1964년

1964년 6월 3일에 일어난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관련된 일련의 항쟁. 6·3항쟁은 한일회담 반대운동, 6·3시위라고도 한다. 이 항쟁이 전개된 기간은 서울에서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최초로 벌어진 1964년 3월 24일부터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6월 3일까지를 지칭한다. 6·3항쟁은 이후 한일협정비준서가 조인된 1965년 12월까지 펼쳐진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일국교정상화는 1951년 10월 20일 예비회담에서 시작되었으나, 7차례 본회의를 거쳐 1965년 6월 22일에 조인될 때까지 14년이 소요되었다. 비타협적인 태도로 회담이 진전이 이뤄지지 못했던 이승만 정권 시기와 달리,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를 지상목표로 했기에 부족한 자금을 한일회담 성사를 통한 대일청구권으로 조달하고자 했다...

위화도회군,1388년,우왕,이성계정변,요동정벌

1388년(우왕 14)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李成桂)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위화도는 의주의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이다. 당시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명나라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해 매우 긴장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1388년에는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도사(遼東都司)의 관할 아래 두겠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고려가 크게 반발해 결국 요동정벌로 이어졌다. 요동정벌이 단행될 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할 뿐 아니라,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창궐할 것이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웨베르-고무라 각서,Waeber-Komura覺書,1896년,아관파천,러일전쟁

1896년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 웨베르와 서울 주재 일본공사 고무라 사이에 조선의 각종 사안을 놓고 교환한 각서. 「Waeber-Komura Memorandum」, 「경성의정서(京城議定書)」 혹은 「서울의정서」라고도 칭한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이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조선의 내정 문제에 관해 잠정적인 타협을 보기에 이른다. 주요 내용은 고종의 환궁과 조정대신의 임명 문제, 부산-서울 사이의 전신선 보호 등에 관한 것으로 전체 4개조로 구성되어 있고, 이를 서울 현지에서 수행한 것은 러시아공사 웨베르와 일본공사 고무라였다. 주요 내용은 고종의 신변 안전 및 조선 대신의 임명에 관한 문제, 조선 내의 전신선 보호 문제와 러·일의 경비병 배치 건 등이다.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

원종 애노의 난,889년,진성여왕,사벌주,원종·애노,농민 봉기

889년(진성여왕 3) 신라의 사벌주(沙伐州)에서 원종·애노가 일으킨 농민 봉기. 신라는 중대의 전성기를 지나 하대로 접어들면서 정치·사회적인 모순이 심화되어 갔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중앙 진골 귀족 간의 잦은 정쟁으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관(官)이나 귀족 및 사원의 토지 겸병 확대로 일반 농민들은 점차 토지로부터 유리되어 갔다. 국가 경제의 기반인 농민층이 분해된 반면, 사치와 향락의 풍조로 중앙 정부의 재정 수요는 점점 늘어만 갔다. 진성여왕 대에는 이러한 모순이 극도로 심화되었음에도 근본적인 개혁안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889년 지방의 주·군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 국고가 텅 비고 재정이 궁핍하게 되자, 중앙 정부는 사자를 파견해 오히려 조세를 독촉하였다. 이러한 조세 부담은..

원산총파업, 1929년, 노동조합원 2,200여 명, 일제시대 최대 규모 파업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한국노동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 원산총파업의 발단은 1928년 9월에 있었던 문평제유공장 노동자의 파업이었다. 당시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에는 영국인이 경영하는 문평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회사가 있었는데, 그 지배인과 주요 간부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들 일본인은 평소 조선인 노동자들을 민족적으로 멸시하고, 차별하였다. 그 중에서도 고타마(兒玉)라는 일본인 감독이 조선인에게 욕설과 구타를 일삼았는데, 1928년 9월 초 또 다시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120여 명의 노동자들이 고타마의 파면과 생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일으켰다. 20여일이 지난 후 9월 28일 ..

웅치전투,1592년,임진왜란,이복남,황박,정담,변응정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 이복남(李福男) 등이 웅치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 금산을 점거한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왜군은 험한 웅치를 넘어 전주방면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이에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璞), 김제군수 정담(鄭湛), 남해현감 변응정(邊應井) 등은 7월 8일 군대를 연합하여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왜군의 침입을 막았다. 그러나 우세한 대대적인 왜군의 재차 공세를 받아 우리 군대는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이복남은 퇴각하고, 정담과 변응정은 화살이 다 떨어질 때까지 용전하여 적병 수백명을 죽였으나, 마침내 포위되어 모두 죽었다. 전주를 보수(保守)함에 있어 이들의 공이 실로 크다고 하겠다. 싸움이 끝나자 왜군은 우리 군사의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고..

웅진천도,475년,한성,웅진,공주,개로왕,문주왕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漢城)을 빼앗기고 웅진(熊津, 충청남도 공주)으로 도읍지를 옮긴 사건. 백제의 웅진천도는 475년 9월 고구려의 한성 함락에서 발단이 되었다. 웅진천도는 고구려의 한성 공격이라는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 그것도 1개월 만에 황급히 이루어졌다. 웅진천도가 이루어지게 된 배경은 개로왕대에 당면한 대내외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안으로 개로왕대의 무모한 전제권력 행사로 인해 지배세력 사이의 대립과 분열이 일어났다. 밖으로는 백제가 고구려와 북위(北魏)를 둘러싼 외교전에서 실패한 것이다. 개로왕이 472년 북위와의 교섭을 통해 고구려 공격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러한 개로왕의 청병외교는 도리어 고구려를 크게 자극하여 백제 공격을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 웅진천도가 고구려의 한성 공..

운요호사건,1875년,강화해협,조일수호조규,강화조약,병자수호조약

1875년 9월 20일 일본군함 운요호(雲揚號)의 강화해협 불법침입으로 발생한 한일 간의 포격사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한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한 첫 단계로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우며, 한반도를 침략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이고(西鄕隆盛)와 같은 급진파는 당장 조선정벌을 주창하고 나섰다. 반면 이와쿠라견외사절(岩倉遣外使節)로 구미 각국을 순방하고 귀국한 기도(木戶孝允)·오쿠보(大久保利通)와 같은 온건파는 점진적 정한론을 내세우며 급진파를 견제하였다. 이에 일본정부는 조선정벌을 보류하고 호전적 무사계급의 불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1874년 5월 대만정벌을 단행하였다. 일본의 군국적 침략정벌을 당한 청나라는 일본이 장차 한국정벌을 단행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경고한..

우리말다듬기사업,북한,한자어를 한글로,북한 언어

북한에서 한자어를 한글로 전환시킨 어휘 정리 사업. 북한에서는 정권수립기부터 언어 분야의 부르주아적 요소를 없애고 한자말과 일본말을 고유어로 바꿔 쓰는 방침을 시행해왔다. 1966년 평양말을 표준어로 제정하면서 문화어라 명명하였고, 문화어를 다듬기 위해 한자어를 고유어로 전환시키는 말다듬기사업을 전개하였다. 북한에서는 한자어와 외래어 어휘들이 민족적 사상 교양의 수단으로서 언어의 사회적 기능을 높일 수 없게 하며, 사람들 속에 사대주의를 비롯한 낡은 사상을 침투시키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말다듬기사업이라는 어휘정리사업을 실시하여 이를 시정하고자 하였다. 역사적 배경 및 경과 북한은 1949년부터는 한글전용정책을 시행하였고, 1966년 5월에는 평양말을 새로운 표준어인 ‘문화어’로 삼게 되었..

우금치전투,1894년,동학농민군,전봉준, 손병희, 모리야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이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치른 전투. 삼례에서 제2차로 기포한 전봉준(全琫準) 등 남접과 보은에 집결한 손병희(孫秉熙) 등 북접은 협력해 충청감영 소재지이며 서울로의 북상 길목인 공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10월 9일논산에서 합류한 4만 명의 양측 주력부대는 노성(魯城)을 거쳐 공주에서 30리 떨어진 경천(敬川)에 주둔하였다. 여기에는 낙오한 청군(淸軍)도 40∼50명 가량 가담하였다. 이에 대항해 구상조(具相祖)·성하영(成夏永)이 이끄는 경리청(經理廳) 병정과 장용진(張容鎭) 등의 통위영(統衛營) 병정을 중심으로 한 관군 810명과 우영장(右營將) 이기동(李基東)이 지휘하는 감영병이 주둔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은 공주를 부여와 논산 양 방면에서 협공한다는 작전계..

용암포사건,1903년,러시아,대청7개조,용암포조차

1903년 러시아가 용암포 및 압록강 하구를 점령하고 조차를 요구한 사건.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과 을미사변을 거쳐 고종의 아관파천이 이뤄지면서, 조선정부 내에는 친러파가 득세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러시아는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그 결과 1896년 4월 러시아인 니시첸스키(Nisichensky)가 함경북도 경원과 경성의 광산채굴권을 차지하였고, 그해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던 상인 브린너(Bryner, Y.I.)가 두만강유역·압록강유역·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획득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1898년에 뤼순(旅順)·다롄만(大連灣)을 조차한 다음, 이미 확보한 동청철도부설권(東淸鐵道敷設權)을 활용, 하얼빈역에서 뤼순에 이르는 남만주지선(南滿洲支線)의 부설권까지 차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0년 부..

왕규의 난,고려 혜종,고려시대반란,고려왕위쟁탈전

고려 혜종 때 왕규가 왕위쟁탈을 위해 일으킨 난. 943년에 태조가 죽고 혜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은 극도로 불안하였다. 혜종은 태자 때부터 강력한 호족출신인 박술희(朴述熙)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었으나, 왕권을 노리는 적대세력은 많았고, 더 강력하였다. 왕규(王規)는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 세력을 제압하고, 왕위를 탈취하기 위해 노골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요컨대, 혜종대의 정정(政情)불안과 왕위쟁탈전의 원인은 혜종의 세력기반이 미약한 데 있었다. 왕규는 광주(廣州)를 기반으로 한 호족출신으로 태조를 섬겨 대광(大匡)까지 되었다. 또한 두 딸을 태조의 제15·16비(妃)로 들였는데, 제16비는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았다. 이처럼 왕규는 강력한 호족으로, 왕실의 외척으로서 태조 만년에는 막강한 실력..

YH사건, 1979년, 신민당 당사, 부마항쟁, 노동운동

1979년 8월 9일∼11일 회사 폐업조치에 항의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 시위를 벌이던 와이에이치(YH)무역 여성노동자들 중 1인이 경찰의 강제 진압에 의해 사망한 사건. 1966년 설립된 YH무역주식회사는 1970년대 초반에는 종업원 4천여 명에 수출 순위가 15위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한 회사였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고, 수 차례 노조 결성 시도가 실패한 후인 1975년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 가발산업이 사양산업이 되자 YH무역의 경영주는 경영부실 상황에서 자금을 해외로 유출했으며, 노동자 인원 감축, 위장 휴업, 하청화 등을 단행하였다. YH노조는 1978년 5월, 1979년 4월에 회사측의 폐업 철회 등을 요구하며 농성..

와우아파트붕괴사고,1970년,33명 사망,무허가주택,서민아파트,부실공사

1970년 4월 8일 오전 8시 경, 마포구 창천동에 위치한 와우아파트 한 개동(제15동)이 붕괴하여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고. 와우아파트는 서울시의 고민이었던 무허가 건물을 줄이고, 그 대신 서민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취지 하에 건립된 아파트였다. 즉 와우아파트는 무허가 건물을 줄여나가기 위한 대책으로 내놓은 서민아파트 건설 계획의 하나였던 것이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는 한국사회의 전시행정, 부정부패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고였다. 건설사의 비리와 감독기관의 비리가 서로 결합되어 만들어낸 인재(人災)였다. 너무 빠른 시간에, 충분하지 않은 예산으로, 그리고 건설사의 부실공사와 감독기관 공무원의 부실감사의 합작에 의한, 이미 예고되어 있는 사고였다. 서울로 밀려드는 인구로 무허가 ..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사건,1868년,고종,독일인 오페르트,프랑스 신부 페롱

1868년(고종 5)의 남연군묘 도굴미수사건. 독일인 오페르트(Oppert,E.J., 載拔)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하자 기회를 노리다가, 병인사옥 때 탈출하여 프랑스 제독 로스의 강화도 침범 당시 향토 및 수로 안내인 역할을 했던 프랑스 신부 페롱(Feron)과 조선인 천주교도와 함께,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구(球)의 묘를 발굴해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대원군과 통상문제를 흥정하고자 하였다. 이에 오페르트는 배후인물로 자금을 전담하였던 미국인 젠킨스(Jenkins,F.), 페롱, 선장 묄러(Moeller), 조선인 모리배 2명, 유럽·필리핀·중국선원 등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하였던 것이다. 경과와 결과 오페르트 일행은 1868년 5월 차이나호(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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