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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화변(壬午禍變), 1762년, 사도세자, 영빈이씨, 영조, 한중록, 뒤주

Jobs 9 2021. 4. 13.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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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영조 38), 임오년에 발생한 정치적 화변.

 

임오화변(壬午禍變)은 1762년(영조 38) 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왕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경종대 이후 당쟁은 군주 혹은 예비 군주를 선택하는 상황과 결부되어 한층 파급력도 크고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실시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세자와 갈등을 일으켜 임오화변이 발생하였다. 임오화변은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갈등,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둘러싼 노·소론 당론의 대결 구도, 세자를 둘러싸고 궁중 세력과 연계된 당파 간 갈등 등 다양한 원인을 배경으로 한다.

 

임오화변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노·소론 당쟁설과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 갈등설이 대립하는 가운데 뚜렷한 설명이 제시되지 못하는 상태이다. 혜경궁(惠慶宮)의 『한중록(閑中錄)』 역시 양 극단의 설명을 오가고 있기 때문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정조는 현륭원(顯隆園) 「지문(誌文)」을 지어 임오화변을 종합적으로 설명하였지만, 이는 사도세자를 위한 사정(私情)에 치우쳐 서술되었다는 선입견 때문에 객관적 설명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지문」은 그전까지 대립하고 있던 이설들을 궁중의 비사까지 두루 탐문하여 알고 있던 국왕 정조의 시각에서 종합한 것이므로, 결코 어느 일방에 치우친 저작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지문」의 시각에 따라 임오화변을 정리한다.

사도세자가 어린 시절에 총명하고 영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세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정으로 인해 영조와 생모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친절한 훈육을 받지 못하여 부자간의 정이 도탑지 못하였던 것은 여러 문제를 낳았다. 게다가 대리청정을 맡은 이후 세자가 신임의리의 완전한 실현 문제와 관련하여 영조의 기대에 충실하게 부응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문녀(文女, 숙의 문씨)와 그 오빠 문성국(文聖國) 등 궁중 세력과 김상로(金尙魯)·홍계희(洪啓禧) 등 일부 노론 세력이 연합하여 세자의 지위를 흔들고자 각종 무함을 주도하였고, 여기에 일부 소론 탕평당도 호응하여 갈등 국면을 조성하는 등 세자의 지위가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

한편 1757년(영조 33)에 왕실 내에서 세자를 매우 아꼈던 조모 인원왕후(仁元王后)와 법모(法母)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연이어 사망하자, 세자는 이들의 상을 치르느라 건강이 손상되었을 뿐 아니라 왕실의 보호막이 사라짐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곤란에 빠졌다. 이 무렵 우물에 투신자살하는 소동을 벌인다든가 정신병 증세에 따라 심각한 과실을 저지르는 등 세자는 자질 면에서 심각한 결격 사유를 노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로는 궁중 내 무함 세력의 술책으로 인하여 세자가 영조를 알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는 등 부자간은 더욱 소원해졌고, 그 틈을 타 각종 무함이 난무하는 등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세자도 이제는 난국을 타개하기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너무 많았고, 노·소론 일부 대신들의 보호 노력만으로는 사태를 미봉하는 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1761년(영조 37)에는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이후(李 玉+厚) 등 보호론계 주요 대신마저 연이어 사망하였고, 세자는 평양까지 미행(微行)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중대 과실을 범하는 등 사태는 총체적 난국으로 치달았다. 영조는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결단의 방식을 궁리하였던 듯하다. 게다가 이제는 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장성해 있었고, 1762년(영조 38)에는 혼례까지 무사히 마친 상태였다. 이해 5월에 홍계희의 겸종(傔從) 출신인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비행을 고발한 일을 계기로 하여, 결국에는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가 세자의 심각한 병증과 예측 불가능한 변란 위험을 실토하게 되었다. 그러자 영조는 결국 윤5월에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화변(禍變)의 방식으로 세자를 폐위하였다. 그 후에 영조는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를 직접 주관한 후, 그 아들인 세손에게 동궁(東宮)의 지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임오화변의 결과, 공석이 된 동궁(東宮)의 지위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世孫)이 계승하였다. 그러나 세손은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서 종통(宗統)을 계승하였다.

 

임오화변은 대리청정 중인 왕세자를 비상식적 방식으로 폐위한 사건이어서 당대에는 물론 오늘날까지 관심이 집중되었고, 이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새롭게 정파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정조는 임오화변에 대한 재평가를 탕평 정치의 핵심 과제로 삼기도 하였다. 임오화변은 영조대 후반부터 순조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정치적 쟁점을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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