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52

오적필화사건,五賊筆禍事件,1970년,김지하,오적(五賊),사상계,필화,筆禍

필화(筆禍) 언론 매체 등에 당시의 집권 세력을 비판하거나 풍자한 창작물을 게시했을 때, 그 창작자가 처벌 등의 불이익을 받는 것 1970년 6월 김지하의 담시 「오적(五賊)」으로 인해 발생한 필화사건. 박정희정권 시기에는 필화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이영희필화사건’, ‘분지필화사건’ 등 다수의 필화사건이 발생했으며, 1970년대는 더욱 언론과 문인 통제를 강화하며 필화사건은 더욱 증가했다. 1970년대 대표적인 필화사건이 ‘오적필화사건’이다.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참여했던 김지하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을 ‘오적’이라 지칭하며, 그 치부를 신랄하게 비판한 담시 「오적」을 1970년 5월에『사상계』를 통해서 발표했다. 박정희 정부는 「오적」의 유포를 막을 요량으..

오일오서울역시위,1980년,서울역 회군,민주화투쟁,비상계엄

1980년 5월 15일 대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전개한 대규모 시위. 1979년 10·26사건 이후 맞이한 1980년 초 민주화 국면에서 대학생들은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시위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특히 대학생들은 5월부터 본격적으로 계엄해제와 신군부퇴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서울과 각 지방의 대학에서는 5월 2∼3일을 기해 일제히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5월 초순을 민주화투쟁 기간으로 정해 교내에서 계엄해제와 민주화 일정 촉진을 요구하는 시위와 강연 행사 등을 벌였다. 이러한 흐름은 5월 10일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5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은 그동안 자제해오던 도심에서의 시위를 전개하였다. 당시 각 대학 학생회 간부들은 몇 차례에 걸쳐 연석회의를 가졌는데, 당분간은 교외시위를 ..

오산전투,미군 최초 참전부대,스미스특수임무부대,오산 죽미령

미군 최초의 참전부대인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을 방어한 전투. 미국 정부는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여 한국정부의 지원요청이 있자,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장군에게 선발대를 파견하여 사태를 판단하도록 했다. 이에 맥아더는 일본에 주둔 중인 미 제24사단의 각 부대에서 병력을 선발하여 스미스특수임무부대를 편성했다. 스미스(Smith) 중령의 지휘 아래 편성된 스미스부대는 1950년 7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북한군이 남진하는 경부국도로 북상하였다. 7월 4일 오산 북방 죽미령 일대 양쪽고지에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2개 소총중대와 75미리 무반동총 4정 및 4.2인치 박격포 4문을 포함하여 모두 406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그 밖에 105미리 곡사포 6문으로 이루어진..

예송(禮訟),효종,효종비,조대비,복상기간,1659년(기해예송), 1674년(갑인예송)

조선 후기 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趙大妃)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두 차례에 걸친 논쟁.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왕실의 전례문제(典禮問題)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성리학의 핵심문제이면서 왕위계승의 원칙이자 사회 구성의 근간을 이루는 종법(宗法)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서인과 남인 사이에 일어난 성리학 이념논쟁이었다. 내용 인조에게는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소현세자에게도 석철(石鐵)·석린(石麟)·석견(石堅)의 세 아들이 있었으며, 봉림대군에게는 뒤에 현종이 되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지 석달 만에 죽으니, 당연히 원손(元孫)인 소..

연평해전,1999년,2002년,북방한계선(NLL)

1999년 6월 15일과 2002년 6월 29일, 2차례에 걸쳐 북방한계선(NLL) 남쪽의 연평도 인근에서 대한민국 해군 함정과 북한 경비정 간에 발생한 해상 전투. 1951년 11월 군사분계선 설정 당시 육상경계선에 대한 양측 합의는 이루어졌으나, 동서 해안의 해상경계선에 대해서는 남북한 사이에 명시적인 합의가 없었다. 이에 유엔군은 서해상에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영해 기준 3해리를 고려하고 연평도·백령도 등 5개 도서와 북한지역과 개략적인 중간선을 기준으로 북방한계선을 설정하였으나 북한측은 이를 유엔군의 일방적 조치라며 그 효력을 부인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전후에 해상에서 긴장은 계속되고 있다. 역사적 배경 1999년 6월 7일부터 14일까지 북한 경비정이 어선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여운형암살사건,1947년,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몽양(夢陽), 여운형,혜화동,한지근

1947년 7월 19일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 등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독립운동 조직을 만들어 해방에 대비했던 여운형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하지만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여운형과 같은 중도파 세력들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그는 1946년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간 후 김규식(金奎植)과 더불어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좌우합작운동 실패 후 잠시 정계를 떠났던 여운형은 1947년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정계에 복귀하여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성공에 힘을 기울였다. ..

언론통폐합사건,1980년,신군부,이상재,보안사,정보처

1980년 신군부 주도 하에 신문·방송·통신을 통폐합한 사건. 12·12사태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세력은 1980년 초에 보안사 정보처에 언론반(이상재)를 신설하고 권력장악에 필수적인 언론 통제를 위해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저항적이거나 비판적인 언론인을 해직했다. 경과 1980년 11월 14일 한국방송협회·신문협회 등은 건전 언론 육성과 창달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했다. 같은 달 15일에는 언론통폐합에 대한 구체적 시안과 언론통폐합 내용을 발표했다. 언론통폐합의 명분은 언론기관의 난립으로 언론 기업이 부실화되고 비위의 온상이 되면서 건전 언론풍토를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율 폐간이나 통폐합은 형식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신군부의 보안사 언론반이 이를 주도했다. 결과 전국의 언론기관 중 신문사 11개(중앙..

언론자유수호운동,1970년대,유신체제,언론통제,동아일보 백지광고

1970년대 3선개헌에 이어 유신체제를 구축한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언론통제에 대응하여 일선 기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운동. 박정희 정권은 ① 부정 부패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 정화를 명분으로 한 언론통폐합 단행, ② 언론기업 육성방침에 의한 언론기업 특혜 지원, ③ 언론기관에 정부 기관원을 상주시키거나 언론인에게 구속과 테러를 가하는 등의 직접적인 언론 탄압, ④ 복합적 언론매체 경영의 확대, ⑤ 재벌의 언론 소유 허용 등 언론을 통한 정권의 국민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언론을 근대화 추진을 위한 국민동원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소위 ‘채찍과 당근 정책’으로 불려지는 다양한 언론정책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언론정책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하의 언론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으며, 언론은 ..

어랑촌전투,1920년,김좌진,홍범도,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1920년 10월 22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어랑촌 일대에서 김좌진·홍범도 등이 이끄는 독립군과 일본군 간에 벌어진 청산리 독립전쟁 중 최대 규모의 전투. 1920년 10월 22일 새벽 천수평 전투에서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부대는 일본군 기병 부대를 기습 공격하여 섬멸하였다. 그러자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동지대의 예비대를 투입하고, 중포병 부대의 포병 화력을 이용하여 대규모 공격을 하였다. 김좌진 부대는 지리상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일본군의 공격으로 부담이 가중되어 전장을 이탈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이 어랑촌 전투에 가담하니 일본군의 공격이 분산되..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정미사화,을사사화,1547년,명종,윤원형, 윤임

양재역벽서사건은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도 한다. 1547년(명종 2) 9월 경기도 과천 양재역(良才驛)에 문정왕후가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세를 농락하고 있다는 내용의 벽서가 발견되었다. 이기 등은 이러한 벽서를 붙인 것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잔당이 행한 짓이라며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결국 대윤(大尹)의 잔당으로 지목된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 송인수(宋麟壽), 이약수(李若水) 등이 사형당하고, 권발(權撥), 이언적(李彥迪), 정자(鄭磁),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백인걸(白仁傑) 등 20여 명이 유배당하였다. 윤씨 집안의 피 터지는 싸움 중종은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를 폐출한 뒤 반정을 주도했던 윤임(尹任)의 여동생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와 결혼하였다. 그..

약소국동맹회,1917년,뉴욕,제1차세계대전,민족자결주의,파리평화회의,박용만,김헌식

1917년과 1918년 두 차례 미국 뉴욕에서 열렸던 세계약소민족회의. 제1차 소약속국동맹회의(小弱屬國同盟會議)는 1917년 10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 3일간 뉴욕의 맥알핀호텔(McAlpine Hotel)에서 열렸다. 이때의 회의는 세계의 약소국과 속국 그리고 억압받는 민족들의 ‘영원한 의회(a permanent congress)’로 성립된 것으로서, 이번 전쟁이 끝난 후 개최될 평화회의 및 각종 국제회의에 약소민족들의 대표가 출석하여 그들의 이해에 영향을 미칠 문제들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할 권한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다. 이 회의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파견한 박용만(朴容萬)이 참석했는데, 그의 역할과 활동상에 대하여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제2차 동..

암태도소작쟁의,1923년,소작농민항쟁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의 소작인들이 벌인 소작농민항쟁. 암태도의 소작인들은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해, 약 1년간에 걸쳐 암태도의 식민성 지주 문재철(文在喆)과 이를 비호하는 일제에 대항해 소작쟁의를 벌였다. 문재철은 암태도 수곡리 출신으로 일제의 식민수탈정책에 편승해 토지 소유를 확대한 전형적인 식민성 지주였다. 1920년대에는 암태도·자은도 등의 도서 지역을 비롯한 전라남도 일대와 전라북도 고창 등지에 755정보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그 가운데 암태도에는 1923년 쟁의 발발 당시 약 140정보[논 98정보, 밭 42정보]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문재철은 이들 소유지를 마름의 감독으로 경영하였다. 1910년대에는 지세(地稅)와 제 경비를 공동부담으..

안악사건,1910년,서간도무관학교설립, 안명근, 김구, 배경진, 박만준, 한순직

1910년 11월 안명근(安明根)이 서간도(西間島)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다가 황해도 신천지방에서 관련 인사 160명과 함께 검거된 사건. 안명근은 한일합방이 강제로 체결되자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그 곳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1910년 11월 입국하였다. 우선 황해도 부호들을 방문, 이원식(李元植)·신효석(申孝錫)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냈다. 신천 발산(鉢山)의 민병찬·민영설 등에게 보조금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위협하며 ‘조국광복의 큰 뜻을 모르는 자’라고 질책한 뒤 평양으로 떠났다. 민병찬·민영설 등은 즉시 재령헌병대에 밀고해 안명근은 1910년 12월 평양역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서울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어 심한 ..

안시성전투, 645년 ,보장왕,고구려,당나라,고연수, 고혜진, 양만춘,고당전쟁

645년(보장왕 4) 고구려가 당나라 군대와 안시성에서 벌인 공방전. 644년 당나라 태종(太宗)은 상당한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고구려 침공을 결심했다. 이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군량·선박·각종 공성구(攻城具) 등을 준비하는 한편, 소수의 병력을 파견해 고구려 변경지대의 형세를 정탐했다. 이어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영류왕과 대신들을 살해하고 집권했으므로 성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고구려 침공을 실천에 옮겼다. 경과 645년 4월 1일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당군의 선봉은 회원진(懷遠鎭)주 01) 쪽으로 진군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통정진(通定鎭)주 02)에서 요하(遼河)를 건너 고구려 침공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고구려의 방어체계를 혼란시키기 위해 신성(新城)주 03)·건안성(建安城)주 04..

안골포해전,임진왜란,이순신,원균,이억기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에 이순신(李舜臣)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안골포에서 일본 수군의 주력대를 격멸한 해전. 왜란이 발발한 그해 7월 8일 이순신은 원균(元均)ㆍ이억기(李億祺) 등과 합세해 한산섬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장 와키사카(脇坂安治)가 이끄는 주력대를 격멸한 뒤에 가덕(加德)으로 향하던 중 안골포에 일본 전선이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접수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10일 새벽 작전 계획을 수립, 전라우수사 이억기로 하여금 포구 바깥에 진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복병을 배치한 뒤에 달려와서 전투에 참가하도록 하는 한편, 자신의 함대는 학익진(鶴翼陣)을 펼쳐 선봉에 서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그 뒤를 따르게 하면서 일제히 안골포를 진격해 들어갔다. 이때 일본 전선들은 모두 4..

쌍성보전투,1932년,한국독립군,중국의용군,하얼빈

1932년 9월 20일과 11월 17일에서 22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한국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인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이 연합해 하얼빈[哈爾濱] 서남방의 쌍성보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 1차 전투에서는 대승했으나, 2차 전투에서는 패전하였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산하 한국독립군은 난관을 겪으면 서도 북만주 일대의 동포들을 기반으로 중국 측 항일의용군과 함께 각지에서 일본군 및 만주국군과 투쟁하였다. 쌍성보는 장춘(長春)∼하얼빈 간 철도 사이에 있는 도시로서 만주 물산이 집결되는 요충지였고, 친일부호와 고관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일제침략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곳에는 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 반만의용군을 탄압하려는 목적으로 설치..

아관파천,노관파천,1896년,고종,러시아 공사관

아관파천(俄館播遷) 俄館 아관 - 러시아 공사관 播遷 파천 - 임금이 피란을 가는것 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 노관파천(露館播遷)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하며 정동에 위치하였다. 이로 인해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고종이 아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청으로부터 랴오둥반도(遼東半島) 등지를 할양받아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열강, 즉 러시아가 주동하고 프랑스·독일이 연합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되어 조선에서는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그동..

실미도사건,1971년,북파공작원

1971년 8월 23일 북한침투작전을 위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에서 공작원 24명이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 1968년 ‘1·21사태’에 대한 대응으로 1968년 4월 1일 북한침투작전을 위해 창설된 실미도 부대에서 3년 4개월 동안 훈련을 받아 오던 공작원 24명이 1971년 8월 23일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여 서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군·경과 교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 민간인, 공작원 등 28명이 사망하고, 이후 생존 공작원 4명이 사형 집행되었다. 역사적 배경 실미도 부대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하는 이른바 ‘1·21사태’..

신해통공(辛亥通共),1791년,정조,채제공,통공발매정책,금난전권 폐지

1791년(정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채제공(蔡濟恭)의 건의로 시행된 통공발매정책(通共發賣政策). 조선 후기에 육의전(六矣廛)을 제외한 일반시전이 소유하고 있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하여 비시전계(非市廛系) 상인들의 활동을 용인한 상업정책이다.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 과정에서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들에게 금난전권이 부여되어 이들이 상품의 전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한 일부 난전상인을 비롯한 일반상인들도 새로운 시전을 조직, 금난전권을 부여받아 18세기 경 도시의 상업계는 특권적 금난전권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금난전권의 강화는 도시의 경제 질서를 경화시키는 한편, 물가 상승을 초래하여 영세상인 및 수공업자 그리고 도시빈민층의 생계에 위협을 주었다. 그리고 금..

신해박해(辛亥迫害),1791년,정조,천주교도 박해사건,윤지충

1791년(정조 15)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사건. 신해진산사건(辛亥珍山事件)이라고도 함.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천주교는 경기와 내포(內浦)지방,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유포되었다. 1791년전라도 진산의 양반 교인이던 윤지충(尹持忠) 집안에서 폐제분주(廢祭焚主)의 문제가 일어났다. 동양사회의 전통적인 조상제사 금지는 1742년, 교의적(敎義的)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율적(紀律的)인 잠정적 변법(暫定的辨法)에 의하여 교황청에서 금지조치가 취해진 바 있었다(이 조치는 1939년에 교의적 결정에 의하여 조상제사가 지니는 사회적 의의를 천주교회가 인정하게 됨으로써 실효되었다). 당시의 이 기율적 변법에 터전하여 독실한 천주교인이던 윤지충은 그의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 신주를 모시지 않았고,..

신탁통치반대운동,1945년,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우익 반대운동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한국 관련 결정 사항을 신탁통치로 규정하여 일어난 우익 세력의 반대운동. 연합국은 카이로, 얄타, 포츠담 회담 등을 연쇄적으로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전에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전후 처리문제에 대하여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결국 연합국의 전후 처리문제에 대한 합의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간의 3국 외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이 회담에서 3개국은 한국에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이 정부와 연합국이 협의하여 최장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결정서에 합의했다. 2차대전 내내 연합국 간에 합의가 실패한 이유는 30년 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미국의 제안에 소련과 영국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

신임사화(辛壬士禍),1721년,경종,사류(士類) 참변,노론, 소론, 이이명, 김창집

1721년(경종 1)부터 1722년에 걸쳐 일어난 사류(士類)들의 참변. 신축년(辛丑年)과 임인년(壬寅年)에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라 한다. 임인년에 주로 일어났으므로 ‘임인옥’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파싸움에서 소론이 노론을 역모(逆謀)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이다. 역사적 배경 숙종 말년에 소론은 세자인 균(昀)을 지지했으며, 노론은 연잉군(延礽君)을 지지하였다. 경종은 세자 때에 생모인 장희빈(張禧嬪)이 죽자 이상스러운 병의 징후가 나타났으므로 숙종은 이를 매우 걱정하였다. 한편 숙종은 1716년(숙종 42)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노론 정권이 실권을 잡은 이듬해 이이명(李頤命)을 불러 소위 정유독대(丁酉獨對)를 하였다. 이로써 소론은 경종 보호의 ..

신유박해(辛酉迫害),1801년,순조,천주교도,벽파,시파

1801년(순조 1)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도 박해사건. 천주교회는 1785년의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등으로 순교자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94년 말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인 교회활동으로 1800년에는 교인 1만 명으로 교세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천주신앙의 전파에 대하여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의 세력에 의한 성토·상소·박해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조는 “사교(邪敎)는 자기자멸(自起自滅)할 것이며 유학의 진흥에 의해 사학을 막을 수 있다.”고 적극적 박해를 회피하였다. 또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양반 남인 시파(時派)의 실권자인 재상 채제공(蔡濟恭)의 묵인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벽파(僻派)로 바뀌면서 박해가 ..

금산전투,임진왜란,1592년,의병장 고경명,조헌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부터 8월 사이에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이 거느린 의병이 왜군과 금산에서 싸운 두 차례의 전투. 승병장 영규(靈圭)가 거느린 승군과 합세해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한 조헌의 의병은 근왕(勤王)주 01)을 결의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충청도 아산에 이르렀을 때,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권유로, 때마침 금산을 점거하고 이어 호남 지방을 침범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隆景)의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공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순찰사는 조헌의 전공을 시기해 직권으로 의병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는 등 갖은 수단으로 방해하였다. 이에 의병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만 700명 가량의 의사(義士)만이 끝까지 남아 생사를 같이 하기를 원했다. 이 보다 앞서 전라도 의병..

신미양요,辛未洋擾,1871년,미국 아시아함대,강화도,제너럴셔먼호

1871년(고종 8)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 역사적 배경 미국은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의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개항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사건 발생 뒤 미국은 두 차례 탐문항행(探問航行)을 실시하였다. 또 셔먼호사건을 응징하고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조선과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두 차례나 조선원정계획을 수립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경과 그러다가 1871년, 미국은 전통적인 포함 외교에 의해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마침내 조선 원정을 결정하였다. 주청미국공사 로우(Low, F. F.)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J.)에게 해군함대를 동원, 조선 원정을 명하..

스티븐스 사살의거,1908,장인환,전명운,친일외교관 스티븐스

1908년 3월 23일 장인환과 전명운이 대한제국의 친일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독립의거. 1908년 3월 23일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으로 친일외교관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일본의 한국지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일삼자, 이에 공분(公憤)한 장인환과 전명운이 페리부두에서 그를 처단하여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는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는 데 온갖 노력을 경주한 인물이다. 그는 한국민의 의사와는 달리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을 선전하기 위해, 1908년 3월 21일 니폰마루[日本丸]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자 각 신문기자..

소급입법개헌,1960년,3·15부정선거

1960년 3·15부정선거 관련자 및 부정축재자들을 소급하여 처벌할 수 있도록 한 헌법개정. 소급입법개헌은 1960년 11월 29일 제4차 개헌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개정헌법에 따라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또한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가 설치되어 혁명재판이 진행되었다. 그 내용은, 첫째 4·19혁명의 계기가 된 3·15부정선거 관련자 및 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 제한과 부정축재자의 처벌에 관한 소급입법권의 부여, 둘째 그와 같은 자를 다룰 수 있는 특별재판부 및 특별검찰부의 설치를 규정한 것이다. 민주당정권이 소급입법개헌을 만든 배경은, 허정(許政) 과도정부가 3·15부정선거 관련자 및 부정축재자들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반혁명분자들을 다룰 수 있는 「정부통령선거법」이 대통령직선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개헌된 6월 15..

선교약조(宣敎約條),1904년,플랑시,이하영,교민약조,교민화의약정

1904년에 주조선 프랑스 공사 플랑시(Collin dePlancy)와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 사이에 체결된 조약. 한불수호조약 이후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고 그 결과 교인수가 늘어나자, 자연히 선교사와 지방관료 및 교인과 일반인 사이에 분쟁이 야기되어 한불 양국 간의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되는 이른바 교안(敎案)이 자주 일어났다. 이를 근본적으로 방지하기 위하여 1889년에 교민약조(敎民約條)를, 1901년에 교민화의약정(敎民和議約定)을 체결한 데 이어, 1904년 6월 9일자로 다시 선교약조를 체결하였다. 현재 약조서(約條書)의 원문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그해 6월 6일자 『제국신문(帝國新聞)』에 8개 조목의 내용만이 보도되어 있을 뿐이다. 그 내용은 “프랑스선교사들은 한국인을 ..

석유파동,오일쇼크,1973,1978,경제위기,자원민족주의,OPEC

두 차례에 걸친 석유 공급 부족과 석유 가격 폭등으로 세계 경제가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은 일. 1973∼1974년 중동 전쟁(아랍·이스라엘 분쟁) 당시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 정책과 1978∼1980년의 이란 혁명으로 인한 석유 생산의 대폭 감축으로 석유의 공급이 부족해지자, 국제 석유 가격이 급상승하고, 그 결과 전 세계가 경제적 위기와 혼란을 겪은 사건을 말한다. 오일쇼크 또는 유류파동이라고도 한다. 역사적 배경 / 경과 1974년 1월 1일의 석유수출국기구(OPEC: 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의 석유 수출 가격은 사우디아라비아 기본유종(아라비안 라이트 34도)을 기준으로 배럴당 11.65달러로 고시되었는데, 이는 1973년 10월 수준..

서울미문화원점거사건,1985년,전국학생총연합,삼민투위

1985년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지역 5개 대학의 학생 73명이 서울 미문화원을 기습적으로 점거하고 미국 정부를 규탄하며 농성한 사건. 1985년 4월 17일 고려대에서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의장 김민석 서울대총학생회장)을 결성하고, 그 산하에 전위적 투쟁조직인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삼민투위)를 각 대학에 조직했다. 삼민투위(위원장 허인회 고려대총학생회장)는, 5월 중 광주항쟁 계승기간에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폭로하고 규탄하기 위해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할 계획을 세우고 5월 23일에 기습적으로 미문화원을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은 서울 미문화원 도서관에서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죄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대자보를 창문에 붙이고, 주한 미대사 면담을 요구..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