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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 錢荒, 荒, 거칠 황, 조선 후기, 동전 유통 부족 현상

Jobs9 2021. 4. 1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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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특히 1700년대 초부터 181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일반 유통계에 거의 만성적으로 나타났던 동전 유통량 부족현상.
荒. 거칠 황, 돈이 마르다.

 

봉건 조선정부는 1600년대에 들어, 그 당시 급진전하는 사회경제 발전에 대응하는 한편, 거의 파탄에 직면한 국가경제를 되살려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국가경제 재건책의 일환으로 미(米)·포(布) 등 물품화폐와 칭량은화(稱量銀貨) 유통체제를 극복하고 명목화폐(名目貨幣)인 동전을 법화(法貨)로 유통, 보급하기 위해 화폐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화폐정책은 1600년대 전반기에는 사회경제의 미숙성, 화폐 원료의 공급난, 정책 운용의 불합리성 및 호란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시행착오를 되풀이했다. 

그러나 국가의 화폐정책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중에도 동전은 1640년대에 개성을 중심으로 한 인근지방에서 원활히 유통되고, 1650년대 말에는 평안도 일부 지역에서도 통용되었다. 1670년대 말부터는 동전, 즉 상평통보가 국가의 유일한 법화로 계속 유통되어, 1690년대 말에는 법화로서의 유통 기반을 이룩하게 되었다. 

 

동전이 초기의 유통보급 단계를 지나서 공(公)·사(私) 유통계에서 일반적 가치척도·교환수단·지불수단 및 가치저장 수단 등 제반 화폐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러자 각 계층은 화폐가치를 인식하게 되고 유통영역은 전국 각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화폐경제의 확대발전은 조선사회에서 성리학 중심의 가치체계와 농업중심의 생산양식 등 제반 중세적 사회질서의 해체를 촉진하였다. 이로써 1700년대 초부터 174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에는 국왕을 비롯한 대다수 당로자들은 물론 실학자 등 지식계층이 동전 유통을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 인식했다. 

이익(李瀷)은 동전 유통이 백해무익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부당국은 동전의 증발을 억제하거나 유통범위를 제한하는 등 동전 통용을 금지하기 위한 제반 조처를 모색, 시도하였다.

동전유통량 부족현상으로서의 전황은 바로 이러한 동전 유통에 대한 반동기(1700년대 초∼1740년대 초)에 일어나기 시작하여 대체로 1810년대까지 심각한 사회경제 문제로 제기되고 논의되었다.

당시의 일반 유통계에 전황이 일어나게 된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 수 있다. 첫째, 동전의 유통은 조선 봉건사회의 해체를 촉진했다. 이에 정부 당로자들은 동전 유통을 비판 내지 부정하는 정책적 고려에서 동전의 주조·발행을 억제했다.

그러나 동전의 주조·발행이 억제된 상황에서도 동전 유통은 계속되었고, 유통영역이 점차 확대되었다. 따라서 일반 유통계에서는 자연히 동전 유통량의 부족을 느끼게 되었다.

둘째, 봉건정부의 소극적인 광업개발정책으로 동광(銅鑛) 개발이 부진했다. 더욱이 일본 동(銅)의 수입 실적마저 저조해지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동전 원료의 공급난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에 정부당국은 일반 유통계에서 필요로 하는 수량의 동전을 충분히 주조, 발행할 수 없게 되어 동전 유통량 부족현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셋째, 왜란(1592∼1598) 때부터 공·사 유통계에서 중요한 통화 기능을 담당해 온 칭량은화의 유통량은 일본 은(銀)의 수입이 어렵고 다량의 은이 중국으로 유출됨으로써 격감했다. 칭량은화의 유통량 감소는 상대적으로 동전의 유통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자연히 동전 유통량 부족현상, 즉 전황을 조장하게 되었다.

넷째, 중앙 및 지방관청이나 군영에서 동전을 다량 비축하거나, 부상대고(富商大賈) 등이 고리대업을 목적으로 다량의 동전을 개인이 소지하여 국가가 주조, 발행한 동전의 상당량이 통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 등이 원인이 되어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초부터 1810년대까지 일반 유통계에서 일어난 전황이 당시의 화폐경제 내지 사회경제면에 끼친 영향은 폭 넓고 심각한 것이었다. 전황이 그 당시의 사회경제면에 끼친 영향은 대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다량의 동전을 갖고 있는 부상대고나 중앙 및 지방관청 등 국가기관의 고리대 행위는 더욱 극심해졌다. 이에 고리대업의 착취대상이 된 농민이 몰락하여 농촌사회의 분화는 촉진되었다.

둘째, 동전이 발휘하는 가치이전 기능과 가치저장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도둑질이 조장되어 도둑으로 인한 사회불안이 심각해졌다.

셋째, 동전의 가치이전 기능과 가치저장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지방 수령과 서리들의 농민 수탈이 심해졌다. 이로 말미암아 관기가 문란해지고 농민의 궁핍화 내지 몰락이 촉진되었다.

넷째, 전황으로 조장된 고리대업은 농민의 몰락 내지 농촌사회의 분화를 촉진했을 뿐만 아니라, 동전의 유통으로 급격히 활발해진 상업의 발달추세를 둔화시켰다.

다섯째, 동전의 유통 내지 전황은 봉건 조선사회의 전통적 사회경제 윤리, 즉 성리학 중심 사회윤리와 농업 중심 경제윤리의 변질을 촉진하였다.

여섯째, 동전의 유통 내지 전황은 봉건 조선사회의 전통적인 가정윤리의 변질을 촉진했다. 즉, 효도와 우애 등 성리학적 가정윤리에 기반을 둔 가부장적 대가족제도의 해체가 촉진되어 부자·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1700년대 초부터 일반 유통계에 거의 만성적으로 나타난 동전 유통량 부족현상은 그 당시의 화폐경제와 사회경제 발전을 저해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전황은 동전의 유통 보급으로 촉진된 봉건 조선사회의 성리학 중심 가치체계와 농업 중심의 생산양식, 즉 중세적 제반 사회질서의 해체과정을 촉진한 원인이 되었다.

전황으로 촉진된 제반 사회질서의 변화는, 그 당시의 정부 당로자들을 비롯한 지식계층에게 심각한 사회경제적 모순 내지 폐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전황의 해소, 극복을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 논의되어 정부당국은 그 방안을 실시하기도 했다.

첫째, 봉건 조선정부는 동전을 개인 용도에만 쓰고 국가를 상대로 하는 공거래에서는 사용을 허락하지 않음으로로써 동전의 공신력을 떨어뜨리려고 했다. 이러한 국가 시책의 한 예로서, 1727년(영조 3)에 종래까지 동전과 면포(綿布)를 절반씩 섞어 수납했던 대동(大同)·군포(軍布) 및 노비신공을 면포만으로 징수하려 한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공거래에서 동전 사용을 제한한 조처는 공·사경제 간 상호 유통이 원활하지 못해 그 폐해가 심각하다는 이유로 대동·군포와 노비신포의 전목참반법(錢木參半法)을 부활시킴으로써 곧 중단되고 말았다.

둘째, 저화(楮貨)나 상목(常木)을 동전 대신 법화로 사용하는 등 화폐제도를 개혁해 일반 유통계에 만연한 전황을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저화는 조선 초기에 이미 법화로 사용해본 것으로서, 보존하기 힘들고 쉽게 위조할 수 있으며 원료의 공급이 어렵다는 단점이 많은 지폐(紙幣)였다.

상목도 길이가 짧고 너비가 좁으면서 성긴, 품질이 나쁜 물품화폐였다. 저화나 상목은 보편적이고 일반화한 법화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동전 대신 그것들을 법화로 사용해 전황을 극복하자는 논의는 실현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셋째, 봉건 조선정부는 고리대업을 목적으로 한 부상대고나 관청 등의 동전 퇴장(退藏) 행위로 조장된 전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공채·사채의 이자율을 일정한 선에서 규제하려 했다. 사채는 이자를 연 5할(동전일 경우는 연 2할), 공채는 동전이나 곡식을 막론하고 모두 연 1할로 규제하였다.

그러나 채권자는 법의 규제가 두려웠고 채무자는 고리채의 길이 막히면 생계가 위협을 받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고리대 관계가 음성적으로 이뤄졌다. 그리하여 고리채 이자율을 규제해 부상대고 등이 동전을 퇴장하는 것을 억제하거나, 퇴장한 동전의 유출을 유도하려는 정부당국의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넷째,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국가가 일반 유통계에서 필요로 하는 동전을 충분히 주조, 발행하지 못한 데 전황의 중요한 요인이 있다. 따라서 다량의 동전을 계속 발행하려면 무엇보다도 화폐 원료의 공급난을 타개해야 한다.

그리하여 동전 원료의 공급난도 해결하면서 전황을 극복하기 위해 동전과 원료가 다른 칭량은화를 동전과 함께 법화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국내에는 은의 절대량이 부족했고, 은화를 법화로 사용할 경우 은은 귀금속이므로 위조하는 폐단이 일어날 것은 물론, 악화(惡貨)에 구축되어 원활한 화폐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 등이 이유가 되어 실현될 수 없었다.

다섯째, 은화를 동전과 함께 법화로 사용할 것을 제의한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동기에서, 전황의 극복방안으로 중국동전을 싼값으로 수입해 국내에서 법화로 유통시킬 것을 주장했다.

다량의 중국동전을 싼값으로 수입, 유통하면 적은 비용으로 훨씬 많은 유통가치를 조성할 수 있을 것이므로 동전 원료의 공급난을 해결하면서 전황도 극복하는 등 일석이조의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나 시도에 대해서는 중국동전을 국내에서 사용하면 국가의 화폐권이 중국으로 넘어갈 염려가 있고, 중국동전을 국내동전과 함께 쓰면 유통계에 혼란이 일어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론이 일어났다. 또한 중국측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했다.

여섯째, 전황을 해소, 극복하는 방안의 하나로서 당이(當二)·당오(當五)·당십(當十) 및 당백전(當百錢)과 같은 각종 고액전을 주조, 유통하자는 주장이 정부 당로자를 비롯한 각 계층에서 제기, 논의되었다. 즉, 각종 고액전의 주조·유통을 주장한 것은, 한정된 적은 수량의 동전 원료로 보다 많은 유통가치를 조성해 동전 유통량 부족현상을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개혁을 꺼리는 봉건 조선왕조의 보수적 가치관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화폐가치를 실용성에서 찾는 화폐관이 완전히 불식되지 못한 당시의 사회현실로서는 명목가치만을 고액화한 각종 고액전이 수용되기 어렵다고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일곱째, 봉건 조선정부는 부상대고 등 민간인에게 동전 주조를 도급해 많은 동전을 주조, 유통시킴으로써 전황을 해소, 극복하고자 했다. 즉, 정부당국이 재정 궁핍으로 동전 원료를 마련해 동전을 계속 주조, 발행하지 못해 전황이 일어났다면, 국가는 부상대고 등에게 동전 주조의 도급을 허가해 다량의 동전을 주조하게 하고 그들로부터 일정 액수의 세금을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동전 주조에 도급제를 활용할 경우 국가는 재정 부담 없이 세금으로 다량의 동전을 취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일반 유통계는 화폐 유통량이 증가해 부상대고나 관청 등에 퇴장해 있는 다량의 동전이 유출되어 자연히 전황을 해소, 극복할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일찍부터 조선 후기에는 공공연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부상대고 등 민간인이 국가의 동전 주조과정에 관여하거나 이해관계를 가질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1800년대 중엽에는 동전 주조의 도급제가 활용되어 전황의 해소, 극복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한편, 동전 주조의 도급제가 활용된 시기에는 갑산동광(甲山銅鑛)을 비롯한 국내 동광의 개발이 더욱 활성화되어 동전 원료의 공급난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또한 당시의 일반 유통계에 일어나고 있던 전황 극복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와 같은 만성적인 전황의 극복은 화폐경제와 사회경제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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