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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63

남한대토벌작전,대한제국,일제,의병

대한제국기 일제가 국내의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펼친 군사작전. 일제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할 목적으로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2개월에 걸쳐 의병세력의 주요 근거지인 전라남도 및 그 외곽지대에 일본군 등을 배치하여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이로 인해 근거지를 상실한 국내 의병세력은 중국 만주 및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에 따라 의병의 조직과 역량이 더욱 강화되었다. 의병의 활동지역은 충북과 강원도 접경지역을 넘어 1908년에는 지리산 서쪽의 호남지역으로 확대되었다. 1908년 전라도의 전투 횟수는 전국 대비 25%였고, 전투의병수는 25%를 차지했다. 1909년에는 이런 상황이 더욱..

남조선민족해방전선사건,1976년,반유신 민주화,민족해방,비합법 지하 조직

1976년 반유신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비합법 지하 조직. 남민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약칭으로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결성한 비밀 지하조직이다. 1979년 10월 9일과 16일 그리고 11월 3일 등 3차례에 걸쳐 구자춘 내무장관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남민전 결성을 주도한 이재문은 경북대를 졸업하고 민족일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가담해왔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1974년 민청학련과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수배자 신분이 된 상황 하에서 남민전을 결성한 것이었다. 남민전은 1977년 1월 반(半)합법 전술조직으로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를 결성하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및 기관지 ‘민중의..

남북협상(南北協商),1948년,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단독정부수립

1948년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등 단독정부수립노선에 대항한 일련의 정치회담. 1947년 5월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미국과 소련 대표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이에 미국은 한국문제를 국제연합으로 이관하였고, 그 해 11월 국제연합 총회는 미국이 제안한 한국통일안을 통과시켰다. 1948년 1월 이 결의에 의한 국제연합 임시한국위원단 방문을 소련과 북한측이 거부함으로써 남북의 통일선거 실시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민족내부적으로는 남북협상을 통해 자주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종래부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남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한 뒤에 ..

남북한동시유엔가입(南北韓同時─加入),1991년

1991년 남한과 북한이 각각 유엔 회원국이 된 사건.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1991년 9월 17일(18일, 한국시간) 남·북한은 동시에 그리고 각각 유엔 가입국이 되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며 단독 가입을 추구했다. 한편 동시 가입이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것이라며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냉전체제가 이완되자 남북 간에 고위급회담이 진행되는 등 적대적 대립관계에도 변화가 초래되었다. 남한은 소련과의 국교 수립(1990년 9월), 중국과의 무역대표부 설치 합의(1990년 10월) 등 북방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91년 8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남·북한 유엔 가입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같은 해 9월 17일 유엔총회는 남북한과 마셜군도 등 7개국의 유..

나제동맹(羅濟同盟),433년,신라,백제,고구려남진정책,비유왕,눌지왕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맺은 동맹. 최초 나제동맹이 형성된 것은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이 소멸된 뒤 삼국이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4세기 초 전연(前燕)의 공격을 받아 요동(遼東)방면으로의 진출이 좌절된 고구려는 한반도 쪽으로의 팽창을 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남하는 당시 북진정책을 전개하고 있던 백제와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하였다. 한편, 내물왕(奈勿王, 356∼402)이 즉위해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된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366년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은 신라의 내물왕에게 사신을 파견해 화호(和好)를 도모하였다. 이리하여 양국의 관계는 형제관계처..

나선정벌(羅禪征伐),1654년,조선 효종,청의 요청,러시아 공격

조선 효종 때 조선이 청의 요청으로 러시아를 공격한 사건. 나선은 러시아 사람들, 즉 러시안(Russian)을 한자음으로 옮긴 것이다. 이들은 흑룡강(黑龍江) 방면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서, 1651년(효종 2) 흑룡강 우안(右岸)의 알바진(雅克薩)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부근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생기고 청나라 군사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듬 해 러시아인들이 다시 오소리강(烏蘇里江) 하구에 내려가 성을 쌓고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영고탑(寧古塔)에 있는 군사를 보내어 공격, 축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구식 장비의 청군으로서는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을 당하지 못해 번번이 패배하였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조선 ..

나당전쟁(羅唐戰爭),백제 고구려 멸망,신라, 당나라,7년 전쟁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신라와 당나라가 7년간 싸운 전쟁. 나당연합군에 의해 660년 백제가 멸망하였고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 한반도의 영토 문제로 신라와 당이 대립하게 되었고, 결국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나당전쟁(羅唐戰爭)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이어졌다. 670년 3월 신라의 오골성 선제 공격으로 시작되어, 672년 8월 석문 전투에서 신라가 크게 패하였다. 나당전쟁의 분수령은 675년 9월에 발생한 매소성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전세는 신라로 기울었다. 이후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역사적 배경 7세기 삼국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특히 642년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함락하면서, 신라의 위기감이 고..

김헌창의 난(金憲昌─亂),822년,헌덕왕,웅천주(熊川州) 도독(都督) 김헌창,제2차왕위계승전

822년(헌덕왕 14) 3월에 신라 웅천주(熊川州)의 도독(都督) 김헌창이 일으킨 반란. 반란 세력은 신라 조정에 항거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지금의 충청·전라·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 세력에게 장악된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이었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게 반란의 중요 거점인 웅진성(熊津城)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한 달이 못 되어 진압되었다. 역사적 배경 김헌창의 난은 작게는 원성왕(元聖王, 785∼798)계 귀족들과 무열왕(武烈王, 654∼661)계 귀족들 간의 제2차 왕위계승전이었고, 크게는 신라 하대에 계속된 크고 작은 왕위계승전들 가운데 하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위에 오르지..

김지정의 난(金志貞─亂),780년,혜공왕,이찬(伊飡) 김지정

780년(혜공왕 16) 2월 이찬(伊飡) 김지정(金志貞)이 일으킨 반란. 『삼국사기(三國史記)』혜공왕(惠恭王) 16년조에 “왕이 어려서 즉위해 장성했는데 성색(聲色)주 01)에 음란하고 순류(巡遊)에 절도가 없어 강기(綱紀)가 문란했으며, 재이(災異)가 자주 일어나 인심이 반칙하고 사직(社稷)이 위태롭게 되어,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모반(謀叛)해 무리를 거느리고 궁궐을 포위해 이를 범하였다. 그런데 4월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이찬 김경신(金敬信)이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을 주살하고 혜공왕(惠恭王)과 그 후비(后妃)까지도 난중에 시해되었다”라고 하였다. 역사적 배경 혜공왕 대는 신라 중대(中代)의 전제 왕권이 한계점에 도달한 시기로, 진골(眞骨) 귀족들의 대대적인 모반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대..

김자점의 옥(金自點─獄),1651년,효종,인조반정,김자점 역모

1651년(효종 2) 김자점의 역모로 일어난 옥사(獄事). 이귀(李貴)·김류(金瑬) 등과 더불어 광해군과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주도한 김자점은 인조가 즉위하자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훈녹되었다. 그리고 집권 공서파(功西派)의 영수가 되어 김상헌(金尙憲) 등 유림을 배경으로 한 청서파(淸西派)를 탄압하였다. 또한, 손자인 김세룡(金世龍)을 효명옹주(孝明翁主)주 01)와 혼인시켜 외척이 된 뒤, 영의정에 올라 국권을 전횡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649년효종이 즉위하자 평소 김자점의 독주를 비판하던 대사간 김여경(金餘慶)과 집의 송준길(宋浚吉) 및 장령 이상일(李尙逸) 등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몰래 청나라에 보내 조선이 장차 청나라..

김옥균암살사건(金玉均暗殺事件),1894년,상해(上海),홍종우(洪鍾宇),청일전쟁시발점

1894년 3월 28일 김옥균이 상해(上海)에서 홍종우(洪鍾宇)에 의해 저격, 피살된 사건. 갑신정변으로 일대 타격을 받은 민씨척족정권은 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의 주모자들을 대역 죄인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조선 정부는 그들의 체포 및 송환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와 범죄인도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만국 공법상 망명 정치범을 송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 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1885년 말 망명 중인 김옥균이 일본의 구자유당계(舊自由黨系) 불평정객 및 낭인들과 결탁해 한국을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자, 조선 정부는 그의 송환을 다시 요구하는 한편 1886년 5월 통리군국사무아문(統..

김사미의 난(金沙彌─亂),1193년,명종,무신정권기민란,신라부흥운동

1193년(명종 23) 경상북도 청도 운문에서 김사미가 일으킨 반란. 12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려의 귀족지배체제는 점차 동요하기 시작해, 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수립되자 문신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정치는 일단 종식되었다. 무신정권은 약 1백년간(1170∼1270) 존속하지만 무신 집권 초기의 정국은 매우 혼란하고 불안정해, 과중한 수탈과 고된 생활에 지친 농민과 천민들은 이 틈을 타서 전국적으로 큰 민란을 일으켰다. 민란은 무신정권의 전기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발생했으나, 그 규모나 양상이 가장 크고 격렬한 것은 무신정권 초기의 약 30여 년간에 걸쳐 일어난 삼남(三南) 각지의 민란이었다. 김사미의 난은 이 시기에 삼남지역에서 발생한 수많은 민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특징적인 민란의 하나였다. ..

김보당의 난(金甫當─亂),고려 명종,동북면병마사,반무신란(反武臣亂)

고려 명종 때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김보당이 일으킨 반란. 계사년(1173)에 일어났으므로 계사난이라고도 한다. 김보당은 정중부(鄭仲夫)의 무신란이 일어난 지 3년 후인 1173년(명종 3) 8월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동북면병마사로 있으면서 앞서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정중부·이의방(李義方) 등을 토벌하고 전왕(前王) 의종(毅宗)을 세우고자 하여 병마녹사(兵馬錄事) 이경직(李敬直) 및 장순석(張純錫) 등과 모의해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장순석·유인준(柳寅俊)을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로 삼고, 내시 배윤재(裵允材)를 서해도병마사로 삼아 동시에 군사를 발하게 하니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韓彦國)도 이에 합세하였다. 장순석 등은 거제(巨濟)에 이르러 유배되었던 의종을 받들고, 경주로 나와..

기해박해(己亥迫害),1839년,헌종,제2차 천주교 박해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제2차 천주교 박해. 기해사옥이라고도 한다. 1839년 3월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시작되어 10월까지 계속되었다. 신유박해와 마찬가지로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면적으로는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의 세도를 빼앗으려는 벽파(僻派)의 풍양 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신유박해를 일으켰던 김대왕대비는 순조의 계증조모(繼曾祖母)이며 벽파에 속하였는데, 1802년 안동 김씨로 시파에 속했던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순조의 비로 삼자 정권을 빼앗겼다. 이 후 36년간에 걸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시작하게 되었다. 순조는 1827년 2월 28일에 아들 효명세자에게 정사를 대신 맡아보게 하였다. 그런데 효명세자의 장인이 조만영(趙萬永)이었고 당시 어영대장의 자리에 있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선조,정여립, 동인, 서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동인이 다수 처벌된 사건. 1589년(己丑年) 10월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3년여에 걸쳐 그와 관련된 1,000여명의 동인계(東人系)가 피해를 입은 사건이다. 발단은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군수 이축(李軸),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전 홍문관수찬이었던 전주사람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의 고변에서 열거된 정여립의 역모죄상은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는 것이다. 또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시킨 뒤, 기..

기유약조(己酉約條),1609년,광해군, 에도막부,강화조약,통신사

1609년(광해군 1) 일본과 통교를 위해 에도막부[江戶幕府]와 맺은 강화조약. 임진왜란으로 서로 적대시하고 있던 우리나라와 일본은 전쟁 뒤 10년 만에 그들의 지속적인 요청을 받아들여 이 조약이 성립되었고,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598년(선조 31) 조선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고 그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가 에도[江戶] 막부(幕府)를 세워 정권을 장악하자 조선 측에 통교 허용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이에 앞서 우리나라 사정에 밝은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외교권을 주어 1599년부터 160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외교 교섭을 요청해왔다. 이러한 끈질긴 요청에 우리 측도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고, 국교를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 아래 허용할 계획을 세웠..

기사환국(己巳換局),1689년,숙종,인현왕후,소의 장씨(昭儀張氏),서인,남인

1689년(숙종 15) 후궁 소의 장씨(昭儀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사건. 숙종은 1680년 10월에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서거하자,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繼妃)로 맞았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張氏)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 아들을 원자로 삼아 정호할 것을 명하였으나,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다. 즉,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한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 호조판서 유상운(柳尙運), 병조판서 윤지완(尹趾完), 공조판서 심재(沈榟), 대사간 최규서(崔奎瑞) 등 노론계는 한결같이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두 달 만에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함은 부당하..

기벌포전투,676년,문무왕,기벌포(伎伐浦),신라,당나라,대당전쟁

676년(문무왕 16) 11월에 기벌포(伎伐浦)에서 신라의 해군이 당나라 해군을 크게 깨뜨린 전투.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강(白江)은 곧 지금의 금강이고, 금강의 하구가 곧 기벌포라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신라·백제가 서로 자국의 발전을 노려 싸우던 중 553년에 신라·백제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와해되어 더욱 상호항쟁이 격화되었다. 이에 648년에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신라와 당나라 군대는 660년에 기벌포에서 연합해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켰고, 다시 668년에는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평양 근처에서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직접 지배하고 신라까지 복속시키려 하면서 신라의 자주..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중종,조광조,,주초위왕(走肖爲王),김정(金淨),김식(金湜),남곤(南袞),심정(沈貞)

1519년(중종 14) 11월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김식(金湜) 등 신진사류가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 재상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사류를 등용해 파괴된 유교적 정치 질서의 회복과 교학, 즉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성리학의 장려에 힘썼다. 이러한 새 기운 속에서 점차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조광조 등 신진사류였다. 조광조는 신진사류의 대표적 존재였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자, 성리학에 조예가 매우 깊었던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였다. 그는 유숭조(柳崇祖)의 도학정치론에 감화된 당시 성리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예 학자였다. 조광조는 1515년 성균관유생 200인의 ..

금성전투,후삼국, 왕건(王建),후백제(後百濟),견훤(甄萱),나주싸움,금성(錦城),나주성(羅州城)

후삼국시대 초기에 궁예(弓裔)의 장수였던 왕건(王建)이 나주 일대에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 군에게 크게 이긴 싸움으로서 금성(錦城)이 전라남도 나주의 옛 이름인 데에서 ‘나주싸움’이라고도 함. 견훤은 전라도 지방과 충청도 일부를 차지해 후백제라 칭하고, 궁예는 경기·황해·강원도 등 중부 지방을 장악해 후고구려라 하였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중부 지방을 공략하는 데 공을 세웠다. 왕건의 선조는 대대로 해상 무역에 종사하면서 부를 쌓아 상당한 세력을 키웠으며, 이 지방의 일부 해상 세력과 궁예 휘하의 왕건 세력이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궁예·왕건의 세력은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을 장악해, 후백제가 중국과 통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고립시키고 구백제 세력의 분열을 노렸다. 금성전투가 ..

국채보상운동,1907년,국채보상기성회,단연회,베델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우리나라에 대해 적극적으로 차관공여(借款供與)를 제기하여 두 차례에 걸쳐 각 30만 원과 3백만 원의 차관을 성립시켰다. 이러한 일본의 차관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더욱 노골화되었다. 이때 일본이 우리나라에 차관 공세를 펴는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한국의 재정을 일본 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차관으로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정지 작업(整地作業)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에 의하여 제1차 한일협약 이후 우리나라에 재정 고문으로 부임한 메카타(目賀田種太郎)는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하였다. 제1차 차..

국민방위군사건, 1951, 1·4후퇴, 국민방위군, 대한청년단

1·4후퇴 시기 국민방위군의 간부들이 방위군 예산을 부정 착복한 결과 철수 도중에 많은 병력들을 병사시킨 사건. 국민방위군사건 1·4후퇴 시기 방위군 예산을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약 25억 원의 국고금과 물자를 부정 착복함으로써 야기된 것이었다. 식량 및 피복 등 보급품을 지급하지 못하였고 방위군 수 만여 명의 아사자와 병자를 발생시켰다. 이 사건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이기붕이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며, 사건의 직접 책임자인 김윤근, 윤익헌 등 국민방위군 주요 간부 5명이 사형 선고되었다. 대한청년단은 1953년 9월 10일 이승만의 명령에 의해 공식 해산되었다. 역사적 배경 1949년 12월 19일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청년단 등 각종의 청년 정치단체를 해산시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했다..

구주대첩(龜州大捷),1019년,현종,거란3차침입,고려거란전투,강감찬,강민첨

1019년(현종 10) 고려에 침입한 거란군을 구주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 앞서 1010년(헌종 1) 흥화진(興化鎭)의 수장 양규(楊規)가 거란 성종(聖宗)이 거느린 40만 대군을 구주 남쪽의 산악지대에서 대파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구주대첩이라 하면 1018년 12월소배압(蕭排押)을 총지휘관으로 한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10만의 거란대군을 상원수 강감찬(姜邯贊) 등이 구주에서 크게 무찔러 거란군의 전의를 완전히 잃게 한 전쟁을 말한다. 경과 구주는 993년(성종 12) 10월 거란의 제1차 침입 후 체결된 강화조약에서 서희(徐熙)의 외교적인 수완으로 고려의 점유를 인정받은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입구까지의 강동지방에 설치된 행정구역인 강동육주의 하나이다. 그 뒤 1010년 11월 거란의 제2차 침..

구십육각간의 난(九十六角干─亂),768년,혜공왕, 신라 반란, 신라 관직명 각간(角干)

신라의 관직명 중에 친족공동체의 장(長)을 의미하는 각간(角干) 768년(혜공왕 4)에 일어난 신라시대의 전국적인 반란. 『삼국사기』에 의하면, 혜공왕이 765년에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해 모후인 만월부인(滿月夫人)이 수렴청정을 했는데, 실정(失政)을 거듭하자, 즉위 이래 불길한 징조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768년 7월 3일에 각간 대공(大恭)의 난이 도화선이 되어 구십육각간이 서로 싸우는 대반란으로 확대되었다. 원인에 대해서 『삼국유사』에는 “태후가 조정에 임하니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도둑이 봉기해도 막을 겨를이 없었다. 임금이 여자될 사람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晬] 때부터 임금이 되기까지 항상 부녀자의 놀이를 하고, 비단주머니를 차고 도류(道流)들과 놀았으므로 나라에 큰 난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교토의정서(京都議定書),선진국 온실가스 감축,기후변화에 관한 국제연합 규약의 교토의정서, 파리협정 비교

선진국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규정한 국제협약. 1997년 일본 교토에서 개최된 기후변화협약 제3차 당사국 총회에서 채택되고 2005년 2월 16일 공식 발효된, 지구온난화의 규제와 방지를 위한 기후변화협약의 구체적 이행 방안으로, 정식명칭은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연합 규약의 교토의정서(Kyoto Protocol to the 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이다. 지구온난화를 유도하는 온실가스는 이산화탄소(CO₂), 메탄(CH₄), 아산화질소(N₂O), 불화탄소(PFC), 수소화불화탄소(HFC), 불화유황(SF6) 등 6가지로 배출량을 감축해야 하며, 배출량을 줄이지 않는 국가에 대해서는 비관세 장벽을 적용하게 된다. 의무이행 당사국의 온실..

관미령전투,387년,진사왕,백제,말갈,청목산,청석동

387년(진사왕 3)에 있었던 백제와 말갈(靺鞨)의 싸움. 백제는 개국 초기부터 동예(東濊)로 추정되는 말갈의 부단한 침입을 받아왔다. 387년 백제군은 말갈군의 침입을 관미령에서 방어하다가 패하였다. 관미령의 위치에 관해서는 서기전 9년(온조왕 10) 말갈군을 곤미천(昆彌川)에서 방어하다 패한 백제군이 청목산(靑木山)으로 후퇴한 기록에서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청목산을 개성 송악산이라 했다. 이는 백제 초기의 영토상태로 보아 근사하다고 볼 수 있지만, 오히려 송악산 수십리 북쪽에 있는 청석동(靑石洞) 부근을 청목산으로 비정하는 게 더욱 적절하다. 청석동은 역사적으로 남북교통로요, 오래된 관방시설(關防施設)이 있는 곳이다. 청목산 혹은 청목령을 청석동으로 비정한다면, 곤미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GATT, 1948

관세 및 수입 제한, 기타 무역상의 여러 장해를 경감, 철폐하는 것을 목적으로 발족된 국제기구(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GATT). 본부는 스위스의 제네바에 있으며, 1985년 12월 현재 122개국(정회원국 90, 잠정회원국 1, 사실상 적용국 31)이 가입하고 있다. 가트는 제2차세계대전의 하나의 원인이었던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진지한 반성하에, 자유무역주의에 입각한 세계경제체제구축을 위하여 1948년 1월 1일 발족되었다. 그 기능은 대별하여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각국의 관세를 가능한 한 인하하는 데 있고, 또 하나는 무역상의 제한, 주로 수입제한을 철폐시키는 데 있다. 1973∼1979년까지 7차에 걸쳐 다자간 협상을 주관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관산성전투,554년,백제,신라,옥천,나제동맹결렬,성왕전사

554년에 관산성(管山城)에서 백제와 신라가 싸워 백제가 대패한 전투. 관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지방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함산성(函山城)으로 표기되어 있다. 5세기 중엽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개로왕(蓋鹵王, 455∼475)이 피살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웅진(熊津)주 01)으로 천도하였다. 웅진시대 초기 백제의 정세는 귀족들의 반란까지 겹쳐 불안한 상태였다. 그러나 동성왕(東城王, 479∼501)과 무령왕(武寧王, 501∼523)대를 거치면서 점차 안정되어갔고, 성왕(聖王, 523∼554)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제도의 정비와 왕권강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비(泗沘)주 02)로의 천도(遷都)가 단행되었다. 사비천도를 전후해 성왕은 내외의 제반 통치제도와 불교교단을..

관동대학살(關東大虐殺),1923년,관동대지진,한국인,일본인 사회주의자 학살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일본 관헌과 민간인들이 한국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를 학살한 사건. 1920년대 전반 일본은 하나의 큰 시대적 전환기에 직면하였다. 밖으로는 코민테른의 활동이 동아시아에 미쳐 한국·중국의 민족해방운동이 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안으로는 공황으로 노동운동·농민운동·부락해방운동이 사회의 저변을 뒤흔들었다. 여기에 일본의 군부와 국가주의자들은 ‘과격사회운동취체법’ 제정을 시도하고, 이들 운동에 대한 탄압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 일어난 대지진으로 민중이 공황 상태로 빠져 버리자,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은 당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민중의 보수적 감정을 이용하였다.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인 1923년 9월 1일 오후경시청(警視廳)은 정부에 출병을 요청함과 동시..

공창폐지운동(公娼廢止運動), 기독교계, 공창제도

일제강점기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공창제도 폐지를 위해 전개한 사회운동. 일제는 1916년 「대좌부창기취체규칙(貸座敷娼妓取締規則)」을 제정하면서 조선에 공창제(公娼制)를 확립시켰다. 공창제는 여성을 비인격화 하고 국가가 성매매를 공인한다는 것, 그것이 식민지 지배 통제 정책의 하나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또한 그 제도적 규칙과 운영 실태가 일본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이었다. 일제강점기 공창 폐지를 가장 먼저 주장한 집단은 선교사들이었다. 1919년 전조선선교사연합대회에서 공창 폐지를 포함한 종교 관련 요구 항목들을 총독부에 건의하였고, 1920년 선교사연합회는 공창 폐지 청원서를 총독에게 제출하였다. 또 1924년 공창 폐지 대회를 개최하여 공창제도의 폐해를 지적하는 계몽 활동을 벌이는 한편, 성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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