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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대첩(龜州大捷),1019년,현종,거란3차침입,고려거란전투,강감찬,강민첨

Jobs 9 2021. 4. 1.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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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년(현종 10) 고려에 침입한 거란군을 구주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

앞서 1010년(헌종 1) 흥화진(興化鎭)의 수장 양규(楊規)가 거란 성종(聖宗)이 거느린 40만 대군을 구주 남쪽의 산악지대에서 대파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구주대첩이라 하면 1018년 12월소배압(蕭排押)을 총지휘관으로 한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10만의 거란대군을 상원수 강감찬(姜邯贊) 등이 구주에서 크게 무찔러 거란군의 전의를 완전히 잃게 한 전쟁을 말한다.

경과

구주는 993년(성종 12) 10월 거란의 제1차 침입 후 체결된 강화조약에서 서희(徐熙)의 외교적인 수완으로 고려의 점유를 인정받은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입구까지의 강동지방에 설치된 행정구역인 강동육주의 하나이다.

그 뒤 1010년 11월 거란의 제2차 침입 때 거란군이 가장 고전하였던 곳도 바로 ‘조공의 길’이라는 명분으로 고려가 개척한 강동육주의 성진(城鎭)에서의 싸움이었다. 이처럼 전략적 기능이 뛰어난 이 지역의 반환을 둘러싸고 양국관계는 더욱 험악해져, 결국 1018년 12월 고려는 거란의 제3차 침입을 받게 되었다.

이에 서북면행영도통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8천 대군으로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거란이 제3차 침입에서 가장 고전한 곳도 역시 강동육주의 하나인 흥화진 성의 전면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삼교천(三橋川)의 싸움이었다.

이 싸움의 패배로 용기를 잃고 남진하던 거란군은 자주(慈州) 남쪽에서 뒤쫓아온 강민첨의 공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서경의 동북 마탄(馬灘)에서 대동강을 건너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는 등 불운이 겹쳐 거란군은 거의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도의 신은현(新恩縣)에서 회군해 연주(漣州)주 01)와 위주(渭州)주 02) 사이에서 청천강을 건너려 하였다. 강감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였다.

다시 구주를 지날 때를 기다렸다가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에 몰려 북으로 달아나는 거란군을 뒤쫓아갔다. 그리하여 구주의 전면을 흐르는 석천(石川, 皇華川)을 지나 반령(盤嶺, 八營鎭)까지 강감찬의 추격을 받은 거란군은 겨우 수천 명만이 살아 돌아갔다.

결과

『고려사』에 “거란의 패함이 아직 이와 같이 심함이 없었다.”라고 전하고 있듯이, 당시 구주대첩의 성과는 우리나라 전쟁사상 길이 빛나는 것이었다.

『요사(遼史)』에서는 다하(茶河)와 타이하(陀二河)의 패전에서 천운(天雲)과 피실(皮室)의 2군(二軍)의 익사자가 많았으며, 거란의 최고 명문인 요련장(遙輦帳)의 상온(詳穩)주 03)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상온 고청명(高淸明), 천운군상온 해리(海里) 등과 같은 고위간부들이 전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기대에 어긋난 이 패전에 거란 성종은 크게 노하여 소배압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네가 적지에 너무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나를 만나려는가. 너의 낯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라고 책망하였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구주대첩이 지닌 가장 큰 의의는 거란의 성종으로 하여금 다시 무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려는 야망을 버리게 한 동시에, 거란이 끈질기게 요구하여 왔던 국왕의 친조(親朝)와 강동육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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