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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미의 난(金沙彌─亂),1193년,명종,무신정권기민란,신라부흥운동

Jobs 9 2021. 4. 3.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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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3년(명종 23) 경상북도 청도 운문에서 김사미가 일으킨 반란.

 

12세기에 접어들면서 고려의 귀족지배체제는 점차 동요하기 시작해, 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수립되자 문신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정치는 일단 종식되었다.

무신정권은 약 1백년간(1170∼1270) 존속하지만 무신 집권 초기의 정국은 매우 혼란하고 불안정해, 과중한 수탈과 고된 생활에 지친 농민과 천민들은 이 틈을 타서 전국적으로 큰 민란을 일으켰다.

민란은 무신정권의 전기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발생했으나, 그 규모나 양상이 가장 크고 격렬한 것은 무신정권 초기의 약 30여 년간에 걸쳐 일어난 삼남(三南) 각지의 민란이었다. 김사미의 난은 이 시기에 삼남지역에서 발생한 수많은 민란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특징적인 민란의 하나였다.

김사미의 출신성분을 알 수가 없으나, 경상도 청도의 농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민출신으로서 농민반란군의 지휘자가 된 그는 1193년 청도군 내의 운문(雲門)에 본거를 두고 부근의 농민, 특히 유망농민(流亡農民)을 규합해 강력한 반란군을 조직하여 당시의 정부인 무인정권에 반대하는 큰 민란으로 치닫게 하였다.

이 무렵에 경상도·전라도·양광도에서는 기근으로 민심이 매우 소란하였고, 1190년부터는 동경(東京)주 01)에서 일어난 민란을 비롯해서 이른바 ‘남적(南賊)’의 폭동이 남부지역에서 널리 확산되어가고 있었다.

김사미의 난은 이렇게 확산된 남적에 의한 민란의 일환이었다. 그 동기에 있어서는 다른 여러 민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억압자인 무인정권에 반대해 농민과 천민이 그들의 압제와 수탈에서 해방되기를 기대하고, 또한 그것을 모색하는 매우 소박한 것이었다.

경과와 결과

김사미가 지휘하는 농민반란군은 초전(草田)주 02)을 근거로 한 효심(孝心)의 농민반란군들과 정보도 교환하고 작전도 상의해 연합전선의 태세를 갖춘 일면도 있었던 것 같다.

남적 특히 김사미와 효심이 지휘하는 농민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정부는 대장군 전존걸(全存傑)로 하여금 장군 이지순(李至純)·이공정(李公靖)·김척후(金陟侯)·김경부(金慶夫)·노식(盧植) 등을 인솔하여 현지에 출정하게 하였다.

당시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이의민(李義旼)이며, 장군 이지순은 그의 아들이었다. 정부의 토벌군은 농민반란군과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해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고려사』 이의민전에 의하면 토벌작전의 실패는 이지순이 김사미·효심 등과 서로 통모(通謀)해서 작전의 기밀을 누설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란군에게 의복·식량·신발·버선 등 군수물자를 원조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토벌군 사령관 전존걸은 이지순의 통모행위를 알고 있었으나, “법에 따라 이지순을 처벌하면 그의 아비가 나를 죽일 것이고, 처벌하지 않으면 적의 세력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궁지에 몰려 자살하였다.

이지순의 이러한 행동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 그 배후에는 이의민이 고려왕조를 타도하고 스스로 새 왕조를 창립하려던 망상과 경주인(慶州人)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라의 부흥운동이 서로 얽히고설키어 조성된 매우 복잡한 정치적 술책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즉, 이의민은 신왕조 개창이라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김사미·효심 등 남적의 지도자들을 이용하였고, 또 경주인들과 가맥이 상통하는 남적세력의 일부는 비록 사비(寺婢)의 소생이기는 하나, 경주 출신이며 경주이씨의 일족인 이의민을 이용해 신라의 부흥을 실현하려고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의 목적은 서로 달랐으나, 고려왕조에 반대하는 당면의 처지는 공통되었으므로 서로를 이용하려는 수단에서 일시적으로 손을 잡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다면 김사미의 난은 농민과 천민의 해방을 바라는 소박한 계급적인 문제와는 차원을 달리해, 그 배후에는 경주인의 신라부흥운동을 비롯, 당시의 지역감정문제 및 경주이씨의 족적(族的) 유대의식 등 상당히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난은 발생한 그 해 11월에 상장군 최인(崔仁)이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 장군 고용지(高湧之)가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로 임명되어 토벌에 가세한 결과 겨우 진압되어 이듬해 2월에 김사미는 투항하여 참수되었다. 이의민은 김사미 등의 형세가 불리하게 되자, 그들과 통모하려던 종래의 태도를 바꾸어 손을 떼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이 난이 발생·진행·진압되는 과정에는 이에 대처하는 정부와 이의민의 미묘한 처지가 매우 복잡하게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김사미를 포함한 당시의 농민반란군 지휘자들이 조직적 훈련이 부족한 농민과 천민을 규합해서 큰 저항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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