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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63

강조의 정변(康兆─政變), 고려, 1009년, 목종, 천추태후, 현종 옹립사건

고려 목종 때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고 현종을 옹립한 사건 고려 왕실에서는 근친 사이에 결혼이 널리 행해졌다. 목종의 아버지 경종은 두 왕후를 두었는데, 목종의 생모인 헌애왕후(獻哀王后)와 헌정왕후(獻貞王后)로서, 이들은 모두 태조의 아들인 욱(旭)주 01)의 딸로 경종과는 모두 사촌남매 간이었다. 그리고 경종의 숙부이며 태조의 아들인 욱(郁)주 02)은 경종이 죽은 뒤 그의 왕후이며 질녀가 되는 헌정왕후를 사간(私姦)해 대량원군 순(大良院君詢)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뒤의 현종이다. 한편, 목종의 생모인 헌애왕후는 경종이 죽은 뒤 천추궁(千秋宮)에 거처하였다. 이때 외척 김치양(金致陽)이 가짜 중이 되어 천추궁을 출입하면서 추한 소문이 나돌자, 성종이 김치양을 장배(杖配)주 03)하였다. 성..

강빈옥사(姜嬪獄事), 1646년, 인조, 소현세자(昭顯世子) 빈 강씨(姜氏)

1646년(인조 24)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인 강씨(姜氏)가 사사된 사건. 이 사건은 부군인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벌어진 일이다. 강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로 1627년 가례를 올렸다. 병자호란 후 1637년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갔다가 1645년 귀국하였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있으면서 본국의 반청명분론(反淸名分論)과 달리 현실적으로 처신할 수밖에 없었으며, 상당히 친청적인 태도를 띠게 되었다. 또, 세자 내외는 심관(瀋館)에서 영리 행위를 하여 과도한 축재를 하였다. 이에 대해 인조는 의구심을 가졌고 여기에 강빈과 반목하고 있던 후궁 조씨(趙氏)의 참언이 작용하였다. 또한, 당시의 세도가 김자점(金自點)이 일반적인 반청론을 누르고, 후궁 조씨와 연결하여 인조의 총애를 받고..

강동성전투(江東城戰鬪), 1218년, 고종, 거란

1218년(고종 5)부터 1219년에 걸쳐 강동성(江東城)에 침입한 거란(契丹)을 섬멸한 전투. 13세기 초 몽골의 흥기로 금나라의 세력이 위축되자, 금나라의 지배를 받아온 거란인은 각지에서 난을 일으켰다. 1216년 그 세력 중의 하나인 대요수국(大遼收國)의 걸노(乞奴)·금산(金山)·금시(金始) 등은 몽골군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새로운 생활근거지를 위해 압록강을 건너 의주 지방에 침입해왔다. 이에 고려에서는 군사를 보내 이들을 치게 했는데, 특히 대장군 김취려(金就礪)는 영변 지방과 묘향산에서 무찔러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들은 남하를 계속해 황주·연백 등지를 거쳐 개성 근처까지 이르렀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철원·춘천·원주·제천 등지를 휩쓸고 다시 강릉을 거쳐 북쪽 여진 땅으로 도망쳤다. 그..

갑자사화(甲子士禍), 연산군, 1504, 훈구사림파, 성종 후궁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 임사홍

1504년(연산군 10) 갑자년에 훈구사림파 중심의 부중 세력이 궁중 세력에게 받은 정치적인 탄압 사건.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 비 윤씨가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 하여, 1479년(성종 10) 윤씨를 폐했다가 다음 해에 사사(賜死)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이 사실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를 궁중 뜰에서 때려 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安陽君)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이봉(李㦀)도 귀양을 보낸 뒤 사사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왕비로 추숭(追崇)하고 성종 묘(成宗廟)에 배사(配祀)하려 했는데, 감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

갑인예송(甲寅禮訟), 효종 왕비, 인선왕후, 국상, 자의대비, 상복

1674년(현종 15) 효종 왕비 인선왕후의 국상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 사건. 갑인예송(甲寅禮訟)은 1674년(현종 15) 2월 효종(孝宗)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국상이 일어나자, 시어머니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禮訟) 사건이다. 일명, ‘제2차 예송’이라고도 한다. 초상 직후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은 대공복으로 결정하였으나, 7월 6일 남인계의 대구 유생 도신징이 상소하여 기년복의 복제(服制)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이에 현종은 조정의 대신과 중신들을 불러 대공복으로 정한 이유를 추궁하고 재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다. 서인들은 송시열의 ‘체이부정’ 논리에 따라 계속 대공복을 주장하였으나, 현종은 기해예송에서 장자와 차자를 구분하지 않는 ‘국..

소련파(蘇聯派),허가이,소련군,소련2세,빨치산파,연안파

해방이후 소련 점령군과 함께 입북하여 북한군과 정계에서 활동한 소련계 한인. 해방 후 북한에는 빨치산파 외에도 연안파, 국내파, 소련파 등 다양한 파벌들이 정권획득을 위한 명시적, 묵시적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소련파의 대부분은 소련에 귀화한 사람들로서 소련 점령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왔고, 초창기의 북한 정치에서 소련군을 도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국내에 뿌리가 없어 빨치산파나 국내파와 같이 정치 세력화하기에는 일정한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소련에 근거지를 갖고 있었으므로 언제든지 원하면 소련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고, 실제로 1948년 말 소련군이 철수할 때 많은 소련 계 한인들도 같이 귀국하였다. 소련파는 상당수가 북한정권에 참여하였으나 6.25전쟁과 8월 종파사건을 ..

연안파(延安派), 김두봉, 무정, 조선의용군, 중국공산당, 종파사건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후 입북한 조선의용군 출신의 정치집단. 1936년 6월에 마오쩌둥이 인솔하는 중국공농홍군 섬감지대가 옌안에 들어갔다. 이후,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항일군정대학, 노신예술학원, 옌안대학 등 사상 면의 강화도 포함해 근거지 건설이 진행되었다. 공산당은 이 땅에서 「정풍운동」이라고 불리는 사상 통제 운동을 실시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중국 연안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 계열의 김두봉(金枓奉)·최창익(崔昌益)·무정(武亭)·김창만(金昌滿)·윤공흠(尹公欽) 등 연안파가 중국공산당의 후원 하에 입북하였다. 연안파 세력은 정치적 성격을 띤 무장 세력이었다. 입북 직후부터 빨치산파, 국내파, 소련파 등과 함께 북조선 5도행정국을 비롯하여 창군 과정에 관여하였으며, ..

애치슨 라인, 미국 극동 방위선, 애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

1950년 1월 12일에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1893~1971)이 선언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이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소련과 중국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했다. 여기서 그는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결정한다고 발표한다. 미국 극동 방위선과 관련한 성명으로, 「애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이라고도 한다. 1949년 6월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고 6월 26일 외국군 철퇴와 남북협상을 주장하던 김구(金九, 1876~1949)가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자, 이승만..

이괄의 난(李适─亂), 1624년(인조 2), 인조반정, 병자호란

1624년(인조 2) 정월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이괄이 인조반정 때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더구나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지에 부임하게 된 데 앙심을 품고 사전에 치밀히 계획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북방 정세와 부원수 임명 경위 등으로 보아 미흡한 점이 많다. 당시는 후금의 강성으로 언제 침략을 받을지 모를 정도로 매우 긴박한 정세였다. 따라서 북방 경비는 가장 중대한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장만(張晩)의 도원수직 못지 않게 부원수직은 최전방의 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임무로서 전략에 밝고 통솔력이 있는 인물에게 합당한 것이었다. 이괄의 택정은 그만큼 신중한 배려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괄 역시 새 임무의..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 정동행성, 공민왕

원은 고려와 강화한 이후 한반도 서북면 일대에는 동녕부를 설치하고, 동북면 일대에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으며, 탐라에는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원의 직할 영역으로 삼아 직접 지배하였습니다. △ 원의 고려 간섭 쌍성총관부는 동녕부보다 앞선 1258년에 설치되었습니다. 동녕부는 고려에 곧 반환되었지만, 쌍성총관부는 약 100년 동안 원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여진족이 다수 거주하는 등 민족 구성과 역사가 복잡하고, 원이 고려를 침략할 때 길목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몽골과의 전쟁이 길어지자 동북면의 주민 조휘와 탁청이 병마사 등을 살해하고 고려를 배반, 몽골에 투항하는 자들도 늘어났으며, 여러 지역이 원에 항복하여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이에 원은 철령을 경계로 몽골에 항복한 조휘를 쌍성총관..

원간섭기(元干涉期), 몽골, 부원세력, 입성책동, 권문세족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전반까지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던 시기 고려는 1231년(고종 18)부터 몽골의 침략을 받아 약 30년 동안 항전을 벌인 뒤 1259년(고종 46)에 강화(講和)를 맺었고, 그로부터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의 반원운동(反元運動)이 성공할 때까지 원의 간섭을 받았다. 원간섭기(元干涉期)는 고려의 대몽항쟁(對蒙抗爭)이 끝나고 원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반원운동에 성공하여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을 때까지이므로 일반적으로는 1259년부터 1356년까지 97년간의 시기를 가리킨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1270년(원종 11)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개경환도(開京還都)가 이루어질 때까지 고려의 대몽항쟁이 계속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1273년(원종 14) 제주도에서 삼별초(三別..

남북연석회의(南北連席會議). 남북 정치지도자, 통일정부 수립,평양,김구,김규식,김두봉,김일성,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남북연석회의(南北連席會議) 1948년 4월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평양에서 개최한 정치회담. 1945년 8월 해방 이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동년 12월 연합국을 대표한 미국, 영국 그리고 소련의 외무상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한반도의 통일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였다(모스크바 3상회의). 이 회의의 결정에 따라 1946년 한반도에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미국과 소련의 대표들과 남북의 정치·사회단체 대표들은 이 위원회에서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참가단체의 자격 문제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대립하였고, 국내의 단체들 간에도 정치적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1947년 9월 한반도 문제의 유엔 상정을 주장하..

한국사 시대 구분, 공무원 한국사, 고대 삼국, 중세 고려, 근세 조선, 근대, 현대

고대 삼국, 중세 고려, 근세 조선, 근대, 현대 시대 구분 국가, 왕조 연도 고대 선사 고조선 부여, 옥저, 동예,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918 중세 고려 918~1392 근세 조선(개항 이전) 1392~1876 근대 대원군집권,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 1876~1945 현대 해방 이후 1945~현재 ‘시대’라는 용어에는 세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 역사의 큰 전환기를 중심으로 같은 성향이 지속되는 기간을 뜻한다. 예컨대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등의 용례가 그것이다. 둘째 하나의 시대 중에서 시기를 구분하는 데 사용하는데, 이는 엄격히 말하면 ‘시기’라고 칭하여야 한다. 중세의 전기, 중기, 후기 등으로 나누는 것도 시대구분이라고 칭한다. 셋째, ‘협의 시대’라는 용어를 쓰..

삼선개헌, 三選改憲, 제3공화국, 삼선개헌반대투쟁, 공화당, 신민당

제3공화국 시기 여당과 정부 기관이 대통령 3선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한 야당과 학생 등이 1969년 6월부터 12월까지 지속한 개헌 저지·규탄 활동.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재임과 관련해 4년 임기로 1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1967년 대통령 재선 이후 대통령의 계속 재임을 3기로 변경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3선 개헌은 차기 대권의 전망을 구상하고 있던 김종필과 그 지지자들을 비롯한 여당(민주공화당) 내부 인물들조차반대했지만, 1968년 국민복지회사건, 1969년 4·8항명파동 등을 통해 비판그룹이 무력화되면서 더욱 가시화되었다. 공화당은 부정적 여론을 무릅쓰고 준비한 개헌안을 1969년 9월 13일 국회..

범어(梵語), 고대 인도어, 아리안계 인도 제어의 조어(祖語), 산스크리트어

범어(梵語)는 고대 인도어, 아리안계 인도 제어의 조어(祖語).산스크리트어. 대승 불교의 전파와 함께 한반도에 유입되어 주로 불교의 불번어(不飜語) 전통 속에서 한자화된 음차어로 한국어의 어휘 체계에 남겨졌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진언집(眞言集)』 등에 범자로 기록되어 오랫동안 전승되었고 민간 불교의 염불 형식으로도 남겨져 있다. 원어명은 산스크리트어(संस्कृता, [saṃskṛtā]), Sanskrit)로, ‘같이’를 뜻하는 '삼', ‘두다’를 뜻하는 ‘크르타’의 합성어로 ‘같이 두어진 말’ 즉 ‘잘 정돈된 말’, ‘세련된 말’이라는 뜻이다. 고대 인도의 경전인 『리그 베다』에 쓰인 언어인 ‘베다 산스크리트어’의 발전형으로, 베다 산스크리트어와 구분하여 ‘고전 산스크리트어’라고도 한다. 기원전 4..

호족(豪族), 신라 말, 고려 초, 한대(漢代)·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귀족 반대, 지방 세력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지방세력. 호족이란 원래 중국의 남쪽에서 산출되는 털이 곧고 질 좋은 짐승을 뜻하는 호(豪)와 친족집단을 뜻하는 족(族)이 합쳐져 이루어진 말이다. 따라서 호족은 지방에 있는 뛰어나고 우수한 친족집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호족은 중국사에서 일찍이 등장했으나 일본사·한국사에서도 쓰여지고 있다. 중국사에서의 호족은 주로 한대(漢代)·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에 쓰여졌다. 그리고 중앙의 귀족과 대비되는 개념을 갖고 있다. 때문에 호족은 지방의 토착세력으로써 그 지역의 실력자였다. 호족은 대토지소유자로서 토지경영을 위해 다수의 노비·소작인을 소유하였다. 그러나 노비에 의한 노동의 비중은 크지 않았고, 대부분 소작인에 의한 생산이 주를 이루었다. ..

제2차 진주성전투, 황진 장군

1576년(선조9) 27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고향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례를 마치고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이 되어 1583년(선조16) 함경도 시전(時錢)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때 참획한 오랑캐의 수급(首級)을, 죄를 지어 충군(充軍)된 친구에게 양보하였다. 그 뒤에 경원부(慶源府)안원보(安原堡)권관(權管)을 거쳐, 다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1591년(선조24) 통신사(通信使) 정사(正使)황윤길(黃允吉)과 부사(副使)김성일(金誠一) 일행을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가 그 형세를 보고 일본군이 곧 조선으로 침략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노자를 털어 일본 보검(寶劍) 한 자루를 사가지고 돌아오면서, “왜적이 쳐들어올 때 내가 장차 ..

호포법(戶布法)-가호(家戶)를 기준으로 포(布)를 부과하는 군포(軍布) 징수, 흥선대원군

가호(家戶)를 기준으로 포(布)를 부과하는 군포(軍布) 징수 방식. 호포론은 군포를 거두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임진왜란 이전부터 혹은 병자호란 직전에 제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호포론은 처음에 재정 확보책으로 제기되었다. 국가 재정이 부족해지자 호당 1필(疋)의 포를 부과하여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1670년(현종 11) 대기근이 들자 엄청난 규모로 발생한 궐액(闕額)을 채우기 위해서 식구가 많은 가구에 폐가 될 수 있다며 호를 기준으로 호포를 걷자는 안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본격적인 논의 대상으로 부각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의 일환으로 제기된 호포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윤휴(尹鑴, 1617~1680)가 제기한 호포론은..

사창제(社倉制)-흥선대원군 환곡 문란 개혁, 리(里)단위 자치적으로 곡물 대여

사창제(社倉制)는 조선 시대 양반 지주들이 자치적으로 곡식을 저장해두고 백성들에게 대여해주던 제도이다. 관에서 관리하는 백성구휼기구인 환곡제와 다른 점은 민간에서 관리한 기구라는 점이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삼정의 문란 중 가장 극심했던 환곡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리(里)를 단위로 보릿고개 때 곡식을 빌려 주는 사창을 설치하여 운영한 제도다. 보통 보릿고개 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를 하는 가을 정도에 이자를 조금씩 붙여서 돌려받았다. 사창제(社倉制)는 조선 시대 양반 지주들이 자치적으로 곡식을 저장해두고 백성들에게 대여해주던 제도이다. 관에서 관리하는 백성구휼기구인 환곡제와 다른 점은 민간에서 관리한 기구라는 점이다. 향촌 자체의 민간 빈민 구호기관의 성격을 지녔다. [기 원] 사창..

노론(老論)-서인, 송시열

조선시대 붕당(朋黨)의 한 정파. 서인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정권을 잡고 정사공신(靖社功臣) 김류(金濫)가 영도한 훈서(勳西) 또는 공서(功西)와, 반정을 관망했던 김상헌(金尙憲)이 영도한 청서(淸西)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훈서는 노서(老西)로, 청서는 소서(少西)로 다시 개편되었다. 둘로 갈라진 서인세력은 인조 말에 이르러 훈서파는 원두표(元斗杓)의 당인 원당(元黨)과 김자점(金自點)의 당인 낙당(洛黨)으로 다시 분파되었다. 청서파는 사림의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사류들이 중심이 된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으로 분립되어 서인은 사분되었다. 그러나 효종·현종 때에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서인이 다시 규합되어 서인 일당이 되었다. 노론은 숙종 때 규합된 서인에서 분파된 것이다. 분당의 계기는 1680년..

도고(都賈)-조선 후기 상품 매점매석

조선 후기 상품을 매점매석해 가격 상승과 매매 조작을 노리던 상행위의 한 형태, 혹은 그러한 상행위를 하던 상인 또는 상인 조직. 도고(都庫)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본래 공인(貢人)들이 공납품을 미리 사서 쌓아두던 창고로 뒤에는 위와 같은 뜻의 도고(都賈)와 혼동되어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도고 상인을 도아(都兒)·외목(外目)장수라고 불렀다. 도고는 18세기 이전부터 나타난 대외 무역의 증대, 금속 화폐의 유통, 상품 경제의 발달 등을 배경으로 발생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서울과 지방의 농·수공업 생산력 증가와 그에 상응하는 활발한 상품 생산은 상업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고, 도고도 그와 함께 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더라도, 아직 생산력 수준이 본격적인 상품 ..

만동묘(萬東廟)-명 신종 사당. 송시열, 황하의 물이 만 번을 꺾여도 결국 동쪽(조선)으로 흐른다는 뜻.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조선후기 명나라의 신종을 위해 세운 사당 노론 영수 송시열 황하의 물이 만 번을 꺾여도 결국 동쪽(조선)으로 흐른다는 뜻 민정중(閔鼎重)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의 넉 자를 얻어다가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었다. 1674년(현종 15) 송시열은 이것을 화양리에 있는 절벽에 새기고 그 원본은 환장암(煥章庵)주 01) 옆에 운한각(雲漢閣)을 지어 보관하고, 그곳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또한 김수항(金壽恒)은 장편의 글을 지어 그 일을 기록하여 놓았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賜死)될 때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낼 것을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유명(遺命)으로 부탁하였다. 권상하는 이에 따라 1703..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1938-전시통제 기본법

1938년 4월에 일제가 인적·물적 자원의 총동원을 위해 제정·공포한 전시통제의 기본법. 전문 50조와 부칙으로 되어 있다. 1938년 4월 1일에 공포되어 그 해 5월 5일부터 일본에서 시행되었다. 조선에서는 ‘국가총동원법을 조선·대만 및 화태(樺太)주 01)에 시행하는 건’에 의하여 같은 날 이 법이 의용(依用)되었다. 이 법에서 국가총동원이라 함은 전시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의 경우에 이른바 국방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힘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적·물적 자원을 통제, 운용함을 말한다. 이 법은 이러한 입법 목적을 위해 이 법은 일체의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 물자와 총동원 업무로 양분하여 강력한 통제 밑에 있게 하였다. 총동원물자는 ① 병기·함정·탄약 기타 군용 물자, ②..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1918-상해 독립운동단체

1918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일명 신한청년당이라고도 한다. 1918년 11월 말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새로운 질서의 개편이 요청되었고, 이에 따라 한국의 독립 문제도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가 독립지사들 사이에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단체의 조직임을 알고, 이를 구체화시키기로 하였다. 당시 발기인으로 국내에서 망명해 온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김철(金澈)·서병호(徐丙浩)·선우혁(鮮于爀)·조동호(趙東祜)·문일평(文一平)·정인보(鄭寅普)·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조용은(趙鎔殷)·장덕수(張德秀) 등이 참여하였다. 마침 1918년 12월 15일경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T.W)이 중국 정부를 위해 파견한 특사 클레인(Clain)이 상해에..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1908- 국책회사(國策會社)

1908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국책회사(國策會社). 이 회사는 일반회사법에 의거해 창립된 것이 아니라 한일 양국에서 제정, 공포 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라는 특수법에 의거해 설립되었다. 따라서 이 회사는 일본 국적과 한국 국적을 가지는 이중 국적회사로 창립된 것이다. 일본은 1908년 3월 제24회 의회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이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한국에 설치된 일제통감부는 이 법안을 한국정부에 강요해, 1908년 8월 26일에 국왕의 재가를 얻어 그 해 8월 27일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공포하였다. 이 법률에 의거해 그 해 12월 28일에 한일합작회사로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이 회사 창립에는 한일 양국 정부로부터 116인의 창립위원이 임명되었다. 그 가운데 일본인측 위원은 83인, 한..

회사령(會社令), 1910, 조선총독부

1910년 12월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회사 설립에 관한 제령(制令). 조선을 강점한 1910년 이후의 10년간,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한반도 전역을 전율(戰慄)의 상태에 두면서 한반도 경제의 제국주의적 재편작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 작업에는 두 가지 큰 시책이 있었다. 그 중 하나인 토지조사사업은 농토의 약탈과 농민수탈의 농업정책을, 다른 하나인 이 「회사령」은 일제식민지 상공업정책을 집약하고 대표하였다. 1) 실시목적 이 「회사령」은 실시 목적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한반도 내에 한민족 자본의 발생을 처음부터 억제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일본자본·외국자본의 진출도 막아 한반도를 원시적인 원료공급지이면서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한다는 데 목적이 있었..

권업회(勸業會)1911-블라디보스토크 독립운동 단체.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단체. 이종호(李鍾浩)·김익용(金翼瑢)·강택희(姜宅熙)·엄인섭(嚴仁燮) 등 재연해주(在沿海州)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1911년 5월에 결성하였다. 초대 회장에 최재형(崔才亨), 부회장에 홍범도(洪範圖)가 선임되었으며,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얻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총회에서 회칙을 개정하여 회의조직을 의사부(議事部)와 집행부(執行部)로 나누었다. 의사부는 총회에서 선출한 3∼9명의 의사원으로 구성하며 의사부의 의장과 부의장이 회를 대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의장에 이상설(李相卨), 부의장에 이종호가 선임되어 회무를 총괄하였다. 집행부는 신문부(新聞部) 등 13개부로 나누어 업무를 분장하게 하였다. 창립 이후 회세를 확대한 결과 1913년 10..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1914- 블라디보스토크 망명 정부, 권업회

191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졌던 망명 정부 1911년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권업회(勸業會)가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해 1913년대전학교(大甸學校)라는 사관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러시아의 극동총독과 교섭하여 광복군 군영지(軍營地)를 조차하는 한편, 광복군 양성을 위한 비밀결사인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를 운영하였다. 그 결과 1914년 권업회 의사부 신임의장 이상설(李相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전역에 훈련받은 무장 병력 약 3만여 명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914년은 러일전쟁 10주년이 되는 해로, 러시아에서는 러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여, 개전설이 나돌았다. 이에 발 맞추어 권업회는 시베리아와 만주, 미주에 널리 퍼져 있는 무..

광무개혁(光武改革)1897 - 대한제국 근대적 개혁

✽광무개혁(대한제국) 제국긍지 광무굵지 1897 광양시 간식평 실무 광무 - 칭제건원 양전사업-지계발급 시위대, 원수부 간도, 울릉도 식산흥업정책 실시 평식원平式院(도량형) 실업 기술학교 설립 무관학교 설립 1897 고종 및 대한제국 정부의 개명(開明)된 집권층이 주도한 근대적 개혁. 1897년 고종이 황제에 등극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이 개혁이 집중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고종황제의 연호인 ‘광무(光武)’를 따서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부른다. 서재필 등 독립협회(獨立協會)세력이 주도한 아래로부터의 개혁과 자주 비교된다. 광무개혁은 1896년 아관파천 직후부터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주로 보수파가 주도하였다. 1894년의 갑오개혁과 1895년의 을미개혁은 비록 외세의 종용과 간..

임술 농민 봉기 1862 -철종, 삼정문란, 안핵사, 삼정이정청

1862년(철종 13)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 항쟁. 임술 농민 봉기(1862) 1. 원인 삼정의 문란 등 지배층의 탐학 2. 전개 진주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 3. 진주 농민 봉기 원인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 봉기 몰락 양반인 유계춘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봉기 → 자진 해산 영향 다른 지방의 농민 봉기 자극 → 삼남 지방의 70여 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남 → 전국으로 확대 세도 정치기인 19세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계속되었는데, 특히 1862년에는 함흥에서 제주까지 전국 72개 군현에서 개별적∙산발적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남 4. 정부의 대응 안핵사·암행어사 파견, 삼정이정청 설치 → 성과 미흡 18세기 이후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급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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