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63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1898년,열강 이권 침탈 대항,민중 대회

1898년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여 자주 독립의 수호와 자유 민권의 신장을 위해 조직, 개최되었던 민중 대회. 19세기 말 한국에 들어온 열강은 한국의 광산·철도·전선·삼림·어장 등의 이권을 침탈하고 한국을 식민지 종속국으로 만들려고 획책하였다. 1896년 2월 11일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에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가지 폐해가 나타났다. 정권을 장악한 친러파들은 갑오개혁 당시의 내각 제도를 의정부 제도로 복구시켜 국왕의 전제권 제한 조치를 풀어 전제 군주제를 부활시켰으며, 러시아를 비롯한 구미 열강에게 광산·철도·삼림·어장 등의 각종 이권을 양여하였다. 특히 열강의 이권 침탈과 깊숙한 내정 간섭으로 한국의 자주 독립은 심각하게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러시아는 극동에서..

마도산전투,733년,발해,당군

733년 발해가 이민족과 더불어 당군(唐軍)을 마도산(馬都山)에서 격파한 전투. 733년 윤3월 발해가 거란(契丹)의 가돌우(可突于)를 후원하여 당군을 하북성 천안현 북쪽에서 궤멸시킨 전투이다. 이때 가돌우는 돌궐(突厥)의 병력을 동원했고, 당군을 돕던 해(奚)는 변심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돌아섰다. 발해와 당 이외에도 거란·돌궐·해가 개입된 국제적인 전투였으며 발해가 국제정세를 잘 활용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역사적 배경 732년 9월 5일경 발해가 당의 등주(登州)주 01)를 급습하였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733년 정월 18일 당 현종은 발해를 공격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다. 그는 발해국왕 대무예의 동생 대문예(大文藝)를 유주(幽州)주 02)로 보내 군대를 발동케 했다. 한편, 같은 달 21일에 ..

리우선언,리우데자네이루,지구 정상회담,환경과 개발에 관한 기본원칙,국제연합헌장,스톡홀름선언,어젠더21,인간환경선언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 지구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환경과 개발에 관한 기본원칙을 담은 선언문. 1992년 6월 3일부터 14일까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지구를 건강하게, 미래를 풍요롭게’라는 슬로우건 아래 지구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은 악화되어가는 지구환경을 지키기 위해 지속 가능한 개발 및 지구동반자관계(Global Partnership)를 형성하기로 약속하였다. 역사적 배경 1972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국제연합인간환경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1969년 로마클럽이 발표하여 세계인을 긴장시켰던 ‘로마클럽 보고서’의 충격에 따라 지구환경의 위기를 새롭게 인식한 유엔이 주최하여 전 세계 대표적 국가들을 불러 모아 개최된 것이었다. 이 스톡홀름 회의는 국..

러일전쟁,1904∼1905년,러시아,일본,제국주의 전쟁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 청일전쟁 결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이 요동반도(遼東半島) 영유를 확정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주도함으로써 이를 좌절시키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러·청비밀동맹을 체결함과 아울러 동청철도부설권(東淸鐵道敷設權)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독일의 자오저우만(膠州灣) 조차를 계기로 1898년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25년간 조차, 만주를 세력권화하려 하였다. 한국에서도 을미사변 이후 4개월 만에 아관파천을 성공시켜 친러정권이 수립되기는 하였지만,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될 때까지는 일본과의 타협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폈다. 한국 문제를 둘러싸고 러·일이 1896∼1898년 사이에 맺은 베베르·..

두만강개발계획,유엔개발계획(UNDP),두만강 하구유역,국제경제특구 개발구상

유엔개발계획(UNDP) 주도하에 두만강 하구유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국가들의 국제경제특구 개발구상. 1991년 10월 15∼21일 평양에서 열린 UNDP 주최 두만강지역 개발회의에서 UNDP보고서가 발표됐다. 이에 따르면 두만강 개발계획은 나진(북한)∼훈춘(琿春, 중국)∼포시에트(러시아)를 연결하는 소삼각지역(1000㎢) 개발이 기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지역을 20년 내에 국제적 투자지역으로 개발하기 위해 총 300억 달러의 자금을 투자, 북한·러시아 등 관련지역에 10여 개의 현대적 부두시설과 50만명 거주의 신산업도시 및 관련 공업시설·배후시설 등을 조성하는 계획이다. 현재 두만강개발사업에는 한국, 북한, 중국, 러시아, 몽골, 일본 등 6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역사적 배경 두만강개발계획은 19..

동학운동(東學運動,1894년,고종,전봉준(全琫準)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이 운동은 처음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통하여 정치운동으로 성장하고 뒤에 민란과 결합하여 동학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황현(黃玹)이 “동학이 난민과 합쳐졌다”라고 표현한 것은 이 경우를 가리킨 것이다. 역사적 배경 동학농민운동에 있어서 동학은 농민의 요구를 횡적으로 연결시킨 조직적 매개체의 역할 또는 단순한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사상적 계기 또는 농민운동의 지도원리로서의 동학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데서 나온 학설에 지나지 않다. 동학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내면적 구제에서 구하려고 하는 종교적 성격과, 국가의 보위와 농민구제활동을 ..

동의대사건(東義大事件),1989년,동의대 도서관,경찰 희생

1989년 5월 3일 동의대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들을 진압하던 경찰들이 화재로 희생된 사건. 1989년 3월 21일부터 동의대학교 총학생회 간부 등 30여 명은 학교 내 입시부정 문제의 진상규명 요구하며 총장실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또한 학생들은 점거 농성 기간 동안 각종 학내외 문제와 관련한 가두시위도 함께 전개하였다. 5월 1일에도 학생들은 교문 밖으로 진출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시위를 막기 위해 경찰이 24발의 공포탄을 발사하였다. 흥분한 학생들은 다음날인 2일에 교문 앞 삼거리로 진출하여 공포탄 발포에 대한 항의시위를 벌이다 사복경찰 5명을 붙잡아 학교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리고 도서관 7층 농성장 옆 세미나실에 이들 경찰들을 감금하였다. 이에 5월 3일 오전 5시 10분경 경..

동양척식주식회사투탄의거,1926년,의열단,나석주,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1926년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가 일제의 한국 경제 침략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습격하여 폭탄을 던진 의거. 1926년 의열단원으로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나석주는 유림계의 대표이며 민족 지도자인 김창숙(金昌淑)의 권유를 받고, 조국의 옥토를 강탈하고 농민을 착취하는 대표적 일제 침략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은행·조선식산은행을 습격, 파괴하기로 결심하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나석주는 인천을 경유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먼저 남대문통에 있는 식산은행에 폭탄 1개를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자, 그길로 즉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습격하였다. 먼저 수위실을 기습하여 일본인 다카기(高木吉江)를 사살하고 이층으로 뛰어올라 가던 중 뒤따라 올라오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사원 다케(武智光..

동백림사건,동베를린,1967년,중앙정보부,공안사건,윤이상,이응로

1967년 7월 8일에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공안사건.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 8일부터 17일까지 7차에 걸쳐 ‘동백림(당시 동독의 수도인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 공작단’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문화예술계의 윤이상·이응로, 학계의 황성모·임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따르면 사건 관계자들은 1958년 9월부터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利敵)활동을 한 데 이어 일부는 입북 또는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도 여기에 관련된 반국가단체라고 발표했다. 이후 사법부는 동백림 및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을..

동래전투(東萊戰鬪),1592년,선조,송상현,소서행장,동래성

1592년(선조 25) 4월 15일 송상현 등이 경상도 동래에서 일본군과의 싸운 전투. 동래전투는 1592년(선조 25) 4월 15일 동래성을 지키던 조선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함락당한 전투이다.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을 중심으로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등과 수많은 군사·백성이 전사하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3천여 명 이상이 전사하고 5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경과 1592년(선조 25) 4월 14일 부산진성(釜山鎭城)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4월 15일 동래성에 침입하였다. 이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은 동래성의 백성과 운명을 같이할 것을 결의하고 그들을 모두 불러들여 성을 지키기로 결의하였다. 적군은 3대(隊)로 나누어 ..

동녕현전투,1933년,한국 독립군,중국 의용군,동만주 동녕현성

1933년 한국 독립군이 중국 의용군과 중국 공산당 계열의 혼춘(琿春)·왕청(汪淸) 유격대 등과 연합, 동만주 동녕현성에 주둔한 일본군과 만주군을 공략한 전투. 지청천(池靑天)·조경한(趙擎韓) 등이 거느리는 500여 명의 한국 독립군은 6월 말 간도의 대전자령(大甸子嶺)에서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의 스스잉(柴世榮)부대와 합동작전을 전개, 막대한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해 8월 하순경 스스잉부대가 우이청(吳義成) 휘하로 통합된 뒤 한국 독립군도 우이청이 지휘하는 길림구국군부대와 연대하게 되었다. 중소국경 지대에 있는 동녕현성에는 500여 명의 일본군과 1,500여 명의 만주국군, 기타 다수의 관헌이 주둔하고 있었다. 정치·군사상의 요충지로서 일·만군의 군수품이 다량 비축되어 의용군과 독립..

동경성전투(東京城戰鬪),1933년,한국 독립군,한중연합

1933년 6월 한국 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군 점령 하의 동경성(東京城)을 탈환한 전투. 지청천(池靑天)이 지휘하는 한국 독립군은 1932년 중국호로군(中國護路軍) 사령관 겸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총사령관 정초(丁超)와 협의한 뒤 한·중 연합군인 중한연군(中韓聯軍)을 조직하였고 중국 의용군이 분화함에 따라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여 중한연군토일군(中韓聯軍討日軍)을 조직하였다. 각지에서 일본군과 만주군을 공격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33년 4월 사도하자(四道河子)에서 일·만연합부대 1개 사단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영안현성(寧安縣城)을 점령할 계책으로 6월 3일 전 병력을 동원해 공격하기로 하였다. 기병으로 구성된 제1로군은 동모란강(東牡丹江) 부근의 산간으로 진격해 적의 후방 부대를 공격하게 하고..

데라우치암살미수사건,1910년,안명근(安明根),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신민회

1910년 12월 안명근(安明根)이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를 사살하려던 항일투쟁. 1910년 10월 1일부터 위압을 떨치기 시작한 조선총독부는 이 의거를 계기로 105인 사건을 일으켜 민족지도자 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이승훈(李昇薰) 등을 전국에 수배, 일제히 검거하였다. 경과와 결과 이 의거에 주동적 임무를 띤 안명근은 종형 안중근(安重根)의 쾌거를 본받아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안씨 일족에 대한 감시가 혹심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동지를 규합하여 총독 등 일제의 침략 수뇌부를 폭살, 제거할 계획을 수립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한 뒤 서간도에 잠시 이주하였다. 그 일대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건립하여 무장독립군을 양성할 원대한 계획도 병행시..

대한인자유대회(大韓人自由大會),1919년,1942년,미국,독립운동후원대회

1919년과 1942년 미국에서 개최되었던 독립운동후원대회. 첫번째 대회는 일명 ‘한인자유대회’라고도 한다.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선전하기 위해 열렸던 한국인의 대대적 모임이었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 통신부 외교고문인 서재필(徐載弼)의 주선으로 열렸다. 상업·교육·언론·종교 등 각계의 유력한 미국인사들을 초청해 독립운동의 진상과 일제의 탄압 사실을 낱낱이 선전하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첫째, 임시정부를 후원한다. 둘째, 구미에 외교사무소를 설치한다. 셋째,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독립선언과 국내 실정을 이해시킨다. 넷째, 일본의 실책을 깨닫게 한다. 다섯째, 임시정부의 승인을 미국과 국제연맹에 요구한다.” 등이었다. 대회가 끝날..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1933년,지청천,한국독립군,중국군 연합 작전

1933년 지청천(池靑天)이 지휘하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대전자령을 지나는 일본군을 격파한 전투. 1930년 홍진(洪震)·지청천·신숙(申肅) 등은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소속 독립군으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여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1931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은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중국호로군 사령관(中國護路軍司令官)과 협의하여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였다. 이후 중국 의용군이 분화함에 따라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여 중한연군토일군(中韓聯軍討日軍)을 조직하기도 했다. 1932년 독립군과 중국 의용군은 연합하여 쌍성보(雙城堡)·사도하자(四道河子)·동경성(東京城) 등지에서 전개된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동경성전투 이후 한국독립군과..

대야성전투(大耶城戰鬪),642년,선덕여왕,신라,백제,의자왕,윤충,김품석

642년(선덕여왕 11) 대야성(大耶城)을 둘러싸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투. 640년대 접어들면서 백제는 신라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642년(의자왕 2) 7월 백제 의자왕(義慈王)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의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8월에는 고구려 군사와 연합해 신라의 대중국교통 거점인 당항성(黨項城)주 02)을 공격하였다. 대야성전투는 이러한 백제의 공세가 절정에 달한 사건이었다. 경과 642년 8월의자왕은 장군 윤충(允忠)에게 군사 1만인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야성 도독(都督)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김품석은 재지세력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를 빼앗음으로써 대야성 지방의 상당한 재지세력들이 이탈하였다. 검일은 이 일을 원..

대마도정벌(對馬島征伐),고려 말, 조선 초,왜구 근절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 대마도를 정벌한 일.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집단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여말선초 약 70년간 우리 나라 연안 각지에 침입하였다. 특히 고려 말의 약 40년간은 왜구가 창궐해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에 고려는 사절 파견, 성보(城堡) 수축, 수군 증강, 화기 개발 등의 왜구의 근절책을 세웠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고려 말의 장군출신이었던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왜구의 피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위 초부터 왜구대책에 부심해 이를 방어하는 한편, 흥리왜인(興利倭人)주 01)과 귀화왜인을 우대하는 등 유화정책을 썼다. 그러나 침입이 계속되자 그들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되었다. 대마도는 본래 신라에..

대공의 난(大恭의亂),신라 혜공왕,대렴(大廉),각간(角干)

신라 혜공왕(惠恭王) 초기 대공(大恭)이 아우 대렴(大廉)과 함께 일으킨 반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대공의 난이 발발한 시점을 768년 7월이라고 했으나,『삼국유사(三國遺事)』및『신당서(新唐書)』의 기록에 따르면 767년으로 되어 있다. 혜공왕은 강력한 왕권을 구사하던 경덕왕(景德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게다가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어머니인 태후(太后)의 섭정을 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즉위 사정은 기존의 진골귀족(眞骨貴族)들에게 불만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혜공왕 즉위 직후 일어난 대공의 난을 시작으로 혜공왕 대는 96각간(角干)의 난으로 상징되는 진골귀족들의 수많은 반란을 겪어야만 했다. 결국 혜공왕은 난중에 피살되었고,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중대(中代)가 하대(下代)로 전환되기에 이..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임진왜란,1592년,이순신(李舜臣),고성(固城) 당항리,원균,이억기,어영담

임진왜란 때인 1592년 6월 5일이순신(李舜臣) 등 조선 수군이 고성(固城)의 당항리 앞바다에서 왜선을 격파한 해전. ① 제1차해전 : 1592년(선조 25) 6월 앞서 있었던 당포해전 때 도주한 왜선이 당항포에 머무르고 있음을 탐지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이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51척으로 공격, 왜선 26척을 격파하고 적수(賊首) 50여급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② 제2차해전 :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된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왜적의 동향을 살피던 중 1594년 3월 왜선 31척이 당항포로 이동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이에 삼도수군을 먼저 견내량(見乃梁)과 증도(甑島) 근해에 배치, 왜선의 퇴로를 막고 조방장(助防將) 어영담(魚泳譚)에게 군사 ..

달구벌천도계획,689년,신라 신문왕,도읍지,달구벌(達句伐)

689년 신라신문왕이 도읍지를 달구벌(達句伐)로 옮기려 했던 계획. 신문왕은 진골귀족세력을 대표하는 김흠돌(金欽突)의 난을 진압한 후 전제정치를 뒷받침하는 정치·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681년 10월에 시위부(侍衛府)를 개편하여 장군 6명을 두었고, 이어 국왕의 직속부대인 9서당(九誓幢)을 설치하였다. 682년에는 국학(國學)을 설치하여 관료의 양성을 통해 왕권의 세력기반을 보다 확충시켜 나갔다. 그밖에 왕족 김씨의 족내혼(族內婚) 실시, 9주(九州) 5소경(五小京)의 정비, 문·무 관료전(官僚田)의 시행(687)과 녹읍의 혁파(689) 등을 통해 전제왕권을 확립해 나갔다. 이러한 정치개혁을 추진하는데 뒷받침이 된 세력은 무열왕계 왕족과 김유신계, 그리고 통일 후 지배층에 새로 편입된 구고구려인, 구백제..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단종,수양대군,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사육신(死六臣)

조선 제6대 왕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폐위되자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복위를 시도했던 거사.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죽고 12세의 어린 왕세자가 즉위하자, 이 때부터 조정 안에는 불안한 공기가 감돌게 되었다. 어린 왕의 보필을 맡은 이는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은 원로대신과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학사 출신의 소장문신이었다. 하지만 원로대신들은 이미 칠순 고령이어서 정치 문제에 왕성한 정력을 경주할 수가 없었고, 소장문신들은 아직 관위가 낮아 국가 대사에 직접 참결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때 왕의 작은아버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심복 대신을 제거하고 정권 찬탈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14..

단장의능선전투(斷腸─稜線戰鬪),1951년, 6·25전쟁,양구군 ,UN군,공산군,고지전

1951년 6·25전쟁 당시 강원도 양구군 일대의 연봉에서 UN군과 공산군 간에 벌어진 전투. 내용 전투기간은 1951년 9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이다. 북한 공산군과 중공군은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에도 실세(失勢)를 되찾으려는 의도에서 협상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이에 UN군측은 전쟁을 확대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로 하고, 그 해 8월 18일부터 일련의 제한적인 목표에 대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 공세의 일환으로 미 제2사단은 9월 5일양구 동북방 ‘피의 능선’을 빼앗고 9월 13일부터는 그 북쪽에 있는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였다. ‘단장의 능선’은 양구와 인제의 중간에서 남북으로 뻗어 있는 양구 북방 문등리 일대의 연봉들로, 능선 동쪽의 사태리계곡과 능선 서..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1950년,국군 제1사단

국군 제1사단이 낙동강선 다부동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전투.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추격해 1950년 8월 1일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수안보에, 제1군단과 제2군단은 김천과 안동에 각각 사령부를 두고 있었고, 당시는 7월 20일 김일성이 수안보까지 내려와 “8월 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했던 직후였다. 따라서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매우 초조한 상태였다. 7월 말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방어선을 공격하게 된 북한군의 작전개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부도로를 따라 대구를 공격, 둘째, 동해안 도로를 따라 포항∼경주 방향으로 공격, 셋째, 창녕 서쪽의 낙동강 돌출부를 공격해 유엔군의 병참선 차단, 넷째, 남해안을 따..

다루가치살해사건, 1232년, 몽고, 고려

1232년(고종 19) 몽고가 고려에 배치한 다루가치(荅嚕噶齊, darughachi)를 고려인이 살해한 사건. 다루가치는 몽고어로서, 그들이 경략(經略)한 지역의 민정을 감시하는 관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1231년 몽고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 등 북방요지를 휩쓸고, 서경을 거쳐 개경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별동부대를 남하시켜 광주(廣州)·충주·청주 등지를 유린하였다. 이것이 바로 몽고의 제1차 침입이다. 고려는 왕족 회안공 정(淮安公侹)을 몽고의 살리타(撒禮塔, 薩里台)가 주둔하고 있던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주 01)에 보내어 강화를 맺었다. 이 때 살리타는 개경과 그들이 경략한 주군(州郡)에 다루가치 72인을 두고 물러갔다. 그런데 그들이 이듬해 고려에서 모두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내용은 모두 원..

농지개혁(農地改革), 1949년 농지개혁법, 1950년 실시

농업경영의 합리화와 농촌의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토지소유권을 경작자에게 이양하여 경작인의 보호에 중점을 두는 개혁조처. 농지개혁은 1949년 6월 21일에 제정, 공포된 「농지개혁법」에 의거 1950년에 실시한 것이다. 당시 농지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가피한 이유는 첫째, 8·15광복 직후의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고 민주국가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데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우리 나라 농지의 소작비율은 전농지 222만6000㏊의 65%인 144만7000㏊가 소작지였다. 그와 같은 많은 소작지에서 가혹한 소작료를 지불하고 있던 농촌경제는 매년 빈곤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민주의식과 평등의식이 고조되면서 사회적 혼란이 적지 않던 때에 일본인 소유농지였던 29만1..

노인정회담(老人亭會談),1894년,고종,일본,조선의 내정 개혁 요구,속방론,청일전쟁

1894년(고종 31) 대군을 출병시킨 일본이 조선측의 철병 요구를 거부하면서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한 회담. 1894년 봄, 일본은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조선에 7천여 명의 대병을 출동시켰다. 그러나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은 동학 농민군이 자진 해산함으로써 일본군이 계속 조선에 주둔할 명목이 상실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에서의 이권 획득을 도모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을 촉발시키려는 속셈에서 조선의 내정 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일본측은 청나라를 상대로 조선의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며 협력을 거부하였다. 그 뒤 조선은 6월 26일 이래 일본측이 끈질기게 개혁을 요구해 오자, 7월 7일 내아문독판..

노량해전(露梁海戰),정유재란,1598년,선조,이순신(李舜臣),진린(陳璘),조·명 연합함대,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이순신 전사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李舜臣)과 진린(陳璘)이 이끄는 조·명 연합함대가 노량(경상남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해협)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임진왜란 중 바다에서의 마지막 싸움이며, 이순신이 승리와 함께 전사한 해전이다.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古今島)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倭橋)에 주둔하고 있는 ..

냅코프로젝트,OSS(전략첩보국),1944년,한인 공작원,한반도침투작전

미국의 특수공작기관인 OSS(전략첩보국)이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에 걸쳐 한인 공작원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미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했던 한반도침투작전. 한반도침투계획을 기획한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전략첩보국)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중이던 1941년 7월 11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령으로 설립된 COI(Coordinator of Information: 정보조정국)를 발전시켜 1943년 6월 13일 조직된 미국 정보기관이다. OSS는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럽과 아시아에서 활약하였고 종전 후에는 일시적으로 기능이 군과 국무성에 분할되었다가 1947년 다시 CIA(중앙정보국)로 재현되었다. OSS는 재미 한인 중 민간인과 군인, 미국 내 포로..

남해민란(南海民亂),1862년,철종,경상도 남해현

1862년(철종 13) 12월 21일 경상도 남해현(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일어난 민란. 직접적인 원인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12월 23일 난민들이 읍 창고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환곡 16석을 향청으로 옮겨가고 문부(文簿)를 불태웠는데, 7개 면민이 낸 등장(等狀)주 01)에 의하면 환곡의 폐단이 원인이었던 것 같다. 28일 남해현령의 첩정(牒呈)주 02)에 의하면 난민들은 흰 수건을 쓰고 몽둥이를 들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집을 부수거나 불지르거나 하였다. 22일에는 각 면이 일제히 일어나 그 수가 몇 천 명인지 모를 정도였다. 고현면(古縣面)의 향민인 이민형(李敏馨)의 집을 불지르고 곧 성에 들어가 지난날 서리였던 김대일(金大鎰)·정직모(鄭直謨)·박의록(朴義祿) 등의 집과 말단향리인 김약조(..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건(南韓社會主義勞動者同盟事件),1991년,백태웅,박노해,조국,사노맹

19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조직원들이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체포된 사건.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최대의 비합법 사회주의 혁명조직이었다. 사노맹의 탄생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정치투쟁의 중심 기축 이동과 관련이 있다. 1970년대까지 정치투쟁의 중심은 학생운동이었으나, 광주항생 이후 학생운동 출신들이 노동현장으로 들어가거나 노동운동의 성장을 지원하게 되었으며, 그 성과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구성되었다. 1985년 말 학생운동은 변혁론을 바탕으로 NL(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 진영)과 CA(제헌의회그룹)가 대립하게 되면서 이후 변혁운동진영은 NL진영과 반 NL진영으로 양분되었다. 다양한 전위조직 중의 하나이자 1986년 초부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