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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63

사비천도,538년,성왕,웅진,사비,중흥정치

538년(성왕 16) 백제 성왕이 도읍지를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로 옮긴 사건. 웅진천도(熊津遷都)는 475년 고구려군에 의한 불시의 한성(漢城) 공격에서 비롯되어 1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방어에 유리한 군사적 측면은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천도 직후부터 일어난 일련의 정치불안으로 왕권이 쇠약해지고 금강의 범람 등으로 인한 자연재해 피해가 잇달았다. 또한 도성(都城)이 협소하여 왕도(王都)로서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웅진천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538년(성왕 16) 성왕이 단행한 사비천도(泗沘遷都)이다. 사비 지역은 금강을 통해 중국이나 왜국과 연결되는 해상교통로 상의 중요한 요지였고, 특정한 세력이 없는 미개발지역이 많았다. 그리고 비교..

사량진왜변,1544년,중종,통영 사량진

조선 1544년(중종 39) 4월 경상도 통영시 사량진에서 일어난 왜인들의 약탈사건.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이후 조선에서는 임신약조를 맺고 왜인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그러나 왜인들과의 충돌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왔다. 그러던 중 1544년 4월 20여 척의 왜선이 동쪽 강구(江口)로 쳐들어와서 200여명의 적이 성을 포위하고, 만호(萬戶) 유택(柳澤)과 접전하여 수군(水軍) 1인을 죽이고 10여인을 부상시킨 뒤 물러갔다. 이 사건은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삼포왜란과는 아주 다르지만 대일본관계에 있어서 또 하나의 커다란 고비였다. 이 무렵의 일본은 군웅할거의 전국시대(戰國時代)였다. 때문에 국내가 혼란하자 왜구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 왜변으로 인해 일본과의 통교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찬반..

사도하자전투,1933년, 한·중연합군

1933년 4월 한·중연합군이 일·만연합군을 격파한 전투.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중앙 회의를 개최하고,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과 합작하여 연합 작전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래서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의 시세영(柴世榮) 부대와 연합군을 편성하고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그 해 12월 경박호(鏡泊湖)에서 첫 번째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 뒤 사도하자에 주둔하며 병사 모집과 훈련에 열중하였다. 그런데 1933년 4월 연합군의 군세가 증강되어 가고 있음을 탐지한 일본군과 만주군의 연합 부대는 사도하자를 공격하였다. 이때 한·중연합군은 이 기회에 일·만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고 전군을 4개 부대로 편성하였다. 제1로군은 소수 정예부대로 구성하여 적을 유인하도..

브나로드운동,1931년,동아일보,농촌계몽운동

동아일보사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기 위해 일으킨 농촌계몽운동의 하나. 동아일보사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전국 규모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제3회까지 이 운동을 ‘브나로드’로 부르다가 민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라 하여 제4회부터 ‘계몽운동’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금지 조처로 계속하지 못하였다. 내용 원래 ‘브나로드(v narod)’는 제정(帝政)러시아 말기에 소련의 지식인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중을 깨우쳐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민중 속으로 가자.’는 뜻의 러시아말 구호이다. 이 구호를 내세우고 1874년 수백 명의 러시아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부터 이 말은 계몽운동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는데, 동아일보사는 뒤에 ..

붕당정치(朋黨政治), 조선 중기 정치

조선 중기의 정치 운영 형태. 근래까지 일반적으로 이 정치 형태는 사화(士禍) 당쟁(黨爭)을 중심으로 망국적인 정치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의 개략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의 왕정은 당초 중앙집권 관료제로 운영되었으나 15세기 말엽부터 훈구파로 불리는 기성 관료 집단을 비판하는 사림파(士林派)가 대두했다. 이후 양자의 충돌로 여러 차례 사화가 반복하던 끝에 정치적 이해 관계를 같이 하는 무리로서 붕당이 발생해 항구적인 당쟁이 시작되었다. 당쟁 발생의 직접적 원인으로는 선조대에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이조전랑(吏曹銓郎) 추천 문제로 생긴 양자의 반목이라고 한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조정의 인사들이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나뉘고 나아가 재야의 유생들까지도 어느 한쪽을 지..

북벌계획(北伐計劃),조선 효종,청나라 정벌,숭명반후금

조선 효종 때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 17세기 초 동아시아 3국, 즉 한(韓)·중(中)·일(日)에는 새로운 국제질서 체제가 편성되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명·청의 세력 교체가 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가(豊臣家)가 타도되고 에도막부(江戶幕府)가 개창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 정세에 대응하여 조선 사회는 왜란의 후유증을 치유하면서 다각적으로 중흥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광해군(1608∼1623)의 왕실 재건(王室再建)·전제 정리(田制整理)·군정 강화(軍政强化)·문화 사업(文化事業) 등의 내정 개혁이 그것이다. 또한, 광해군은 명·청 교체에 따른 위기를 맞이해 대명·후금 중립외교 정책을 추구, 현명하게 대처하였다. 이 때 서인세력은 광해군의 배명부후금(背明附後金)을 반정(反正)의 명분으..

사대의혹사건, 5·1군사정권 ,부정부패사건,증권파동,워커힐사건,새나라자동차사건,빠찡꼬사건

5·16군사정변 이후의 군사정권 밑에서 발생하였던 네 가지의 부정부패사건. 증권파동·워커힐사건·새나라자동차사건·빠찡꼬사건을 일컫는다. 이 사건들은 대개 군정의 고위층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으나 그 진상이 명백히 규명되지 못한 채 국민들에게 짙은 의혹만을 남겨 놓았다. 부정부패의 척결과 구악일소를 혁명공약으로 내걸었던 군사정부는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듭하여 신악(新惡)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행착오 가운데에서도, 1963년 2월 15일 군정의 제2인자였던 김종필(金鍾泌)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외유의 길로 떠나게 한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것이 바로 ‘4대의혹사건’이었다. 이 사건들은 1964년 초 제3공화국의 국회에서 야당 측의 정치공세로 국정감사까지 받았다...

북관대첩,1592년,임해군,정문부,가토 기요마사

1592년(선조 25)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정문부의 조선군에 의해 수행된 함경도 북부인 북관(北關) 지역 수복 전투.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함경도 북평사 정문부는 군사를 정비하여 경성, 장평, 임명, 백탑교 등 네 곳에서 승첩을 거두어 관북(關北) 지역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를 통칭하여 ‘북관대첩(北關大捷)’이라고 한다. 북관대첩을 통해 함경도에 주둔한 가토 휘하 일본군의 한성 철수를 강요하여 평양성 전투와 함께 전쟁의 국면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이끌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선조 25) 4월, 조선을 침공한 일본군은 5월 초 한성을 함락시킨 이후 곧바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藤淸正)]의 일본군은 6월 함경도로 진입하여 안변(安邊)에 본진을..

부차전투, 조선,명나라,만주 부차,후금,광해군,강홍립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만주 부차(富車)에서 후금군과 벌인 전투. 후금의 태조 누루하치가 만주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명나라에 대해 적대감정을 가지고 그 세력이 날로 팽창하자 명나라는 후금을 칠 계책을 세우고 조선에 원병을 청해 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출병에 대해 찬반양론이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왜병을 격퇴시키는데 협조했고, 임진왜란 때 참전했던 양호(楊鎬)가 요동경략(遼東經略)에 임명되었기에 명분상 거절할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 평안병사 김응서(金應瑞)를 부원수(副元帥), 정호서(丁好恕)·이민환(李民寏)·이정남(李珽男)·김응하(金應河)·정응정(鄭應井) 등을 문무종사관(文武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포수(砲手) 3,500명, ..

부산포해전,1592년,임진왜란,이순신,원균,정운,이언량

1592년(선조 25) 9월 1일 이순신(李舜臣) 등의 조선수군이 부산포에서 왜군과 싸운 전투. 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왜선 100여척을 무찔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바다에서 연전연승한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소굴로 되어 있는 부산포를 무찌르기 위하여 8월 24일 전라좌우도의 전선을 거느리고 출전, 중도에서 원균(元均)으로 하여금 조선수군을 정돈하게 하였다. 이어 29일 낙동강하구를 거쳐 9월 1일 부산포로 향하던 중 화준구미(花樽龜尾)·다대포(多大浦)·서평포(西平浦)·절영도(絶影島) 등지에서 적선 24척을 불태우고 부산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 때 왜군은 선창 동편에 470여척이 줄지어 있었고, 병사들은 주로 언덕을 이용하여 대응할 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어 이순신의 명령과 함께 160여척의 조선수군..

부산진전투,1592년,정발(鄭撥),고니시(小西行長)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정발(鄭撥) 등이 부산진에서 일본군과 싸운 전투. 1592년(선조 25) 4월 14일 고니시(小西行長) 휘하의 1군(軍) 1만 8,700여명의 일본군은 400여척의 병선으로 신시(申時)주 01)에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그 때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 정발은 전선 3척을 이끌고 포구를 나섰으나 적선은 이미 절영도(絶影島) 내외양에 들어와 있었다. 정발은 일진일퇴하면서 진성(鎭城)으로 들어와 동문루(東門樓) 앞에서 급히 군민을 소집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적장 소요시토시[宗義智]는 약간의 병사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성의 동정을 살피기도 하였으나 이 날 적군은 상륙하지 않았다. 다음날 이른 아침 적군은 우암(牛巖)쪽에서 상륙하여 성으로 향하고 세 방면에서 성을 공격하였..

부산정치파동,1952년,계엄령,제1차 개정헌법

1952년 5월 25일의 계엄령 선포로부터 같은 해 7월 7일의 제1차 개정헌법 공포에 이르기까지 전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소요사건.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 무소속이 의원정수의 60%에 해당하는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대한국민당·민주국민당 등 기존의 정당들은 원내 소수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원내 세력분포의 재구성은 대통령직의 연임을 노리던 이승만(李承晩)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이 형성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자신의 세력 기반을 형성하기 위하여 새로운 정당의 조직을 추진하였고, 이와 동시에 1951년 11월 28일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 중 신당, 즉 자유당..

부산일본간해저전신선조약,1883년,조선,일본,해저전선 부설,덴마크 대북부전신주식회사

1883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해저전선 부설에 관하여 전 5조로 된 조약.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은 양국 간의 신속한 교섭을 위한 통신수단 개설의 필요를 이유로 1882년 말부터 해저전선 부설에 관한 외교적 절충을 조선에 요청해왔다. 조선에서도 필요를 인식했으나, 일본 측이 전선시설을 위한 대지를 무제한 조차(租借)해 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협상이 타결되지 못하고 있었고, 외무독판(外務督辦) 조영하(趙寧夏) 역시 이러한 일본의 요구가 국권침해라 주장하면서 지조기한(地租期限)을 15년으로 할 것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외무독판이 민영목(閔泳穆)으로 교체되면서 양국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부산까지의 해저전선 부설에 합의하였고, 시공회사는 덴마크의 대북부전신주식회사(大北部電信株式會社)가..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1982년,5·18광주민주화운동,고신대

1982년 3월 18일 부산의 고신대 학생들이 미국 정부가 5·18 광주 학살을 용인했다고 비판하며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한 사건.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시기에 미국이 신군부의 군대 동원을 용인했다는 정황이 알려지고 있는 상황에서, 1981년 2월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의 지지와 공고한 한미동맹관계를 확인하고 제5공화국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일련의 과정은 민주화운동세력에게 미국 정부가 군사독재정권을 비호한다는 비판 의식을 확산시켰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의 고신대 학생들인 문부식, 김은숙, 김화석, 박정미 등은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를 방조하고 광주학살을 용인한 것을 비판하면서 부산미문화원에 잠입하여 방화하고 “미국은 더 이상 남조선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

부산경찰서폭탄투척의거,1920년,의열단,박재혁(朴載赫),진영사건

1920년 9월 14일 의열단원(義烈團員) 박재혁(朴載赫)이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서장에게 폭탄을 던진 의거. 의열단에서는 1920년 초 일명 ‘진영사건(進永事件)’ 등으로 인하여 많은 동지들이 계속 부산경찰서에 붙잡히자 이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하여 이를 계획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은 무역상인으로서 싱가포르에 와 있던 단원 박재혁을 상해(上海)로 소환하여 부산경찰서장을 죽일 것을 지시하였다. 박재혁은 1920년 9월 초상해를 떠나 나가사키(長崎)로 향하였다. 그는 상해를 떠나기 전 부산경찰서장이 고서수집가라는 사실을 탐지, 많은 중국고서를 사들여서 고서상으로 위장하였으며, 그 고서더미 속에 폭탄과 전단(傳單)을 감추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9월 13일 고향인 부산에 도착하..

부민관투탄의거,1945년,친일단체 대의당,아세아민족분격대회,조문기(趙文紀)

1945년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친일단체 대의당(大義黨)이 개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장에, 조문기(趙文紀) 등 애국 의사들이 폭탄을 설치, 일제 고위간부와 친일 민족반역자들의 제거를 기도한 의거. 1945년 5월 일제의 단말마적인 탄압정책과 수탈에 대항하기 위해 20세 안팎의 조문기·유만수(柳萬秀)·강윤국(康潤國)·우동학(禹東學)·권준(權俊) 등은 서울 관수동유만수 집에서 비밀결사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였다. 이들 애국청년당원들은 일제의 고위간부나 친일파를 제거, 민족의 정기를 드높이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마침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朴春琴)이 대의당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태평양전쟁에서 아시아민족의 전쟁 수행을 강조하기 위..

부마민주항쟁, 1979년, 부산, 마산, 유신체제, 민주화운동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경상남도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항쟁 사건.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다가 1979년에 한계에 이르렀다. ‘백두진(白斗鎭)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1979년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 강압책이 잇따른 가운데서도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고조되어 유신 정국은 긴장을 더해 갔다. 대표적으로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오원춘사건(吳元春事件)’에 이어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이 일어났고, 잇따라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로 정국은 갈등으로 치달았다. 더불어 1970년대 말 한국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라는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위기와 결합해 심각한 위..

복주천도(福州遷都),1361년,공민왕, 홍건적,제2차 침입,복주(福州),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1361년(공민왕 10) 11월 홍건적(紅巾賊)의 제2차 침입 때 공민왕이 개경에서 복주(福州)로 도읍을 옮긴 사건. 복주천도(福州遷都)는 원나라 말엽 홍건적의 발흥이라는 동아시아 정세의 변동과 연관되어 있다. 홍건적은 홍두적(紅頭賊)·홍적(紅賊)이라고도 하는데, 머리에 붉은 수건〔紅巾〕을 둘렀으므로 홍건적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13세기 전반 한족(漢族)이 중심이 되어 하북성(河北省) 영평(永平)에서 몽고족(원)의 지배에 대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당시 한산동(韓山童)·유복통(劉福通) 등이 홍건적의 유명한 지도자였으며 이들은 원의 통치질서를 크게 와해시켰다. 홍건적의 일부는 원나라 군사에 쫓겨 요동 지역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하였다. 홍건적의 고려 침공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13..

보천보전투,1937년,함경남도 갑산,양강도,김일성

1937년 6월 4일 항일 유격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천보(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 양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습격하여 승리했다는 전투.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 전투는 1937년 3월 서강회의에서 조선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이 국내 진공작전을 펴기로 결정함에 따라 김일성(金日成) 지휘 하에 수행된 것으로, 작전은 최현(崔賢)의 인솔 하에 한 부대를 무산 방향으로 진출시키고, 또 다른 한 부대를 국경 지대인 임강·장백으로 진출시켜 일본군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것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1937년 5월 하순 김일성이 주력 부대를 편성, 보천보 일대를 정찰하고 공격 준비를 마쳤을 때, 무산 지역에 진출한 부대가 적의 공격으로 포위될 상황이 되자 당초 예정된 작전 개시일을 앞당겨 보천보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

보은집회,1893년 ,동학교도,척왜양(斥倭洋)

1893년 3월과 4월 동학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척왜양(斥倭洋)’을 내걸고 충청북도 보은에서 개최한 집회. 동학지도부는 최제우(崔濟愚)의 신원만을 요구했던 복합상소(伏閤上疏)가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하고 끝나자, 다시 도소(都所)를 교통이 편리하며 근거지의 하나인 보은 장내(帳內)로 옮겼다. 그리고 복합상소 이후 신원운동 주동자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고, 관리들의 탐학이 심해지자 동학교도들은 새로운 길을 강구하게 되었다. 더욱이 동학 내부에서도 금구집회처럼 대정부 호소에만 매달리는 지도부의 노선에 회의적으로 반응하는 세력들이 불거져 나오면서 분열의 위험조차 존재하였다. 그리하여 지도부는 신원운동에 부정적 입장을 취해 오던 최시형(崔時亨)을 설득, 보은 장내에서 다시 집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보빙사절단,報聘使節團,1883∼1884년,최초 미국 유럽 외교사절단,민영익,홍영식,서광범,보빙사

1883∼1884년간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과 유럽국가에 파견된 외교사절단. 보빙 報聘 - 답례로서 외국을 방문하는 것. 보빙사절단은 미국의 공사파견에 대한 답례와 개화·자강정책 추진에 필요한 인적·물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최초로 미국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1883년 9월부터 1개월 여 동안 미국에서 자주외교를 전개하고 개화정책에 필요한 미국인의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근대식 시설과 제도·문물을 살펴보았다. 그들 중 민영익 등은 유럽의 각국을 시찰하였다. 그들의 시찰은 조선이 호의적인 미국관을 형성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역사적 배경 중국이 임오군란 후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간섭하는 상황에서 1883년 5월 미국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특명전권공사 푸트(Lucius H. Foote)..

보도지침(報道指針),제5공화국,문화공보부,홍보조정실,언론사 기사통제,말지,민주언론운동협의회

제5공화국시기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 언론사 기사통제를 위해 작성한 가이드라인. 전두환 정부는 효과적인 언론 통제를 위해 문화공보부 내에 홍보조정실의 상설기구를 설치했다. 계엄 해제 후 정부의 대언론 창구를 문화공보부로 일원화하고, 언론협조체제 구축을 통해 언론조정체제를 갖출 목적으로 이른바 ‘보도지침’을 마련했다. 제5공화국시기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 거의 매일 각 언론사에 기사보도를 위한 가이드라인인 보도지침을 작성해 시달했다. 홍보조정실은 협조를 명분으로 했으나 협조요청 사항은 실제 보도지침으로 작용했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와 ‘조선일보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는 1984년 10월 24일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10주년을 맞아’라는 성명서를 통해 언론의 보도태도를..

병인양요(丙寅洋擾),1866년,흥선대원군,강화도,천주교탄압,외규장각,정족산성전투,양헌수,로즈함대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1866년 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 천 명을 학살하였다. 이 박해 때 프랑스선교사는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되었으며 3명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3명 중, 리델(Ridel)이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P.G, 魯勢)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내침, 한불간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프랑스 공사 벨로네(Bellonett, H.D., 伯洛內)는 사전에 청국의 승인을 받고 조선이 병인박해를 단행하였으므로 ‘병인사옥의 공범자’라고 청국 정부를 규탄하였다. 조선에 대해 선..

병자호란(丙子胡亂),1636년,인조,척화배금(斥和排金),청 2차 침입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

병인박해(丙寅迫害),1866년,흥선대원군,최대 천주교 박해

1866년(고종 3)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이 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파동으로 전개되었다. 첫번째는 1866년 봄에, 두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번째는 1868년, 네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도합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1868년의 세번째를 무진사옥, 1871년의 네번째를 신미사옥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대원군에 의해 계속 추진된 것이므로 병인박해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丙寅年)인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이다. 역사적 배경 대원군은 원래 천주교에 대해 묵시적으로 이해를 지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장기..

병오박해(丙午迫害),1846년,헌종,김대건

1846년(헌종 12) 김대건(金大建)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천주교 박해의 옥사. 당시 우리 나라에 입국해 있던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인 주교 페레올(Ferreol,J.J.)은 김대건과 함께 포교에 힘쓰는 한편, 우리 나라에 입국할 기회만을 노리며 만주에 머물러 있던 신부 메스트르(Maistre)와 최양업(崔良業)을 맞아들일 방도를 강구하게 된다. 페레올은 종래의 잠입로였던 육로는 당국의 감시가 더욱 심해져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서해의 안전한 바닷길을 찾기 위해서 김대건을 황해도 서해안으로 보냈다. 김대건은 1846년 5월 13일서울을 떠나 황해도 연안의 백령도해역으로 나가 청나라 배에 지도와 서신을 탁송하고, 귀로에 순위도에 들렀다가 우연한 일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대건은 ..

벽제관전투,임진왜란,1593년,벽제관(경기도 고양 역관),명나라, 일본군,여석령전투

임진왜란 때인 1593년(선조 26) 1월 27일 벽제관(경기도 고양시에 있었던 역관)에서 명나라 군사와 일본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벽제관에서 남쪽 3㎞ 지점에 있는 여석령(礪石嶺)에서 일어났으므로 여석령전투라고도 한다. 평안도 방면으로 진격했던 일본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 1월 이여송(李如松)이 거느린 명나라 원병과 조선 관군에 의해 평양성에서 대패하였다. 그리고 평양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은 황해도에 주둔하고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도망해 돌아왔다. 이때 개성수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는 끝내 사수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수차에 걸친 우키다(宇喜多秀家)의 철수권유 때문에 퇴각하기는 했으나 서울 성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였다. 대신 다치바나(立..

베트남 전쟁 파병,1964년-1973년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한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에 전투 부대를 파병하여 참전한 사건. 자유 우방의 지원으로 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1964년 당시 미 지상군에게 안보의 한 축을 의탁하고 있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베트남의 사태를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박정희 정부는 존슨 대통령의 파병 요청 이전부터 베트남의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의 요청과 함께 남베트남 정부에서도 파병을 요청해 오자, 한국 정부는 “한국 전쟁시 참전한 우방국에 보답한다.”는 명분과 “베트남 전선은 한국 전선과 직결되어 있다.”는 국가 안보의 차원에서 국회의 동의를 얻어 파병을 결정하였다. 경과 정부의 파병 결정에 따라 제1차 파병으로 제1이동외과병원 요원 130..

범민족대회,1990년,남한,북한,해외동포,민간 통일행사,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한과 북한 및 해외동포가 참여한 민간 주도의 통일행사. 남한과 북한, 해외동포가 참여해 민간 주도의 통일운동 기틀을 다지기 위한 행사로 1988년 남측이 북한에 제안하고 북한이 이에 응하면서 논의가 진행되었다. 1990년 8월 15일 제1차 범민족대회가 열렸으나 남과 북에서 각각 진행되었고 이후 남한정부가 이를 반정부 행사로 규정해 대회가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역사적 배경 1980년대 말 국제적 긴장완화 분위기 속에서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개방과 동서독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국내에서도 정부와 시민사회 내에서 통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야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본부(범민족대회 추진본부)’를 발족하고 북한에 범민족대..

범대한인국민회기부금운동, 1941년, 멕시코 쿠바 한인 모금 운동

독립운동 지원과 난민 구제를 위해서 멕시코와 쿠바 한인이 펼친 모금 운동. 1909년에 멕시코 유카탄(Yucatán)의 에네켄(henequén)농장에서 나온 한인들이 여러 곳으로 이주하면서 메리다(Mérida), 멕시코시티(Mexico City), 코아트사코알코스(Coatzacoalcos) 등지에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지방회(地方會)가 설립되었다. 한편 쿠바에서도 멕시코에서 이민을 온 한인들에 의해서 마탄사스(Matanzas), 아바나(Habana), 카르데나스(Cardenas) 등지에 대한인국민회 지방회가 들어섰다. 지방회는 창립 이래 줄곧 미국의 대한인국민회 총회에 회비를 의무적으로 납부하였다. 1941년 4월 20일에 하와이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하와이지방총회 등 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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