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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52

6·10만세운동 1926 - 순종 인산일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因山日)]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 1919년 3·1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해외 각지에서 움텄던 독립운동도 미국이나 서구열강의 원조가 소극적이고 일제의 교묘한 술책과 탄압에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上海]에 모인 청년정객들의 이상주의에 불과하여 처음부터 많은 분란과 오해의 요인을 안고 수립된 망명정부였다. 그런데 1921년 레닌정부에서 보내온 독립원조자금문제와 1925년 이승만(李承晩)대통령 면직결의 등의 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결정적으로 난파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의 무장독립투쟁도 1920년 청산리대첩으로 절정을 이룬 뒤, 일제의 대토벌로 인해 러시아방면으로 밀려났다가, 1921년..

정우회(正友會) 선언 1926 - 사회주의 단체

1926년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 단체. 4개의 사회주의단체로 성립된 4단체합동위원회의 발전적 해체로 성립되었다. 1925년에 들어서자 민족주의자들은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을 희망하는 태도를 밝히기 시작하였다. 이는 사회주의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사회주의 내부의 극심한 파쟁에서 기인하였다. 같은 해 5월 일제가 「치안유지법」(4월 공포)을 실행하자, 사회주의자들도 파벌을 초월해 민족협동전선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민족협동전선론이 대두되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은 이에 대비, 각각 자체 내에서 조직적인 통일을 시도하였다. 이 결과 먼저 사회주의 단체인 화요회(火曜會)·북풍회(北風會)·조선노동당(朝鮮勞動黨)·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가 결합, 4단체합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청구학회 1930 - 친일 어용 학술단체, 최남선, 이능화, 이병도

1930년에 한국, 만주 등을 중심으로 한 극동의 문화를 연구하기 위하여 조직한 어용 학술 단체. 경성 제국 대학 법문학부, 조선 총독부, 조선사 편수회의 간부들로 구성되었는데 한국인으로는 최남선, 이능화, 이병도, 신석호 등이 참여하였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 책 구매 없이 PDF 제공 가능 ✽ adipoman@gmail.com 문의 공무원 국어 PDF 다운로드 공무원 영어 PDF 다운로드 공무원 한국사 PDF 다운로드 공무원 행정학 PDF 다운로드 공무원 행정법 PDF 다운로드 경찰학, 헌법, 형법, 형소법 PDF 다운로드 경영학, 경제학, 회계학 PDF 다운로드

한국독립당 1930- 상해, 민족주의, 이동녕, 조소앙, 김구, 안창호, 김두봉, 지청천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창립한 독립운동단체이자 광복 이후 건국운동에 참여하고 제1공화국 때 몰락하였다가 1962년에 재건된 보수정당. 약칭 한독당이라고도 한다. 1930년 당의 결성식에 조완구(趙琬九)·윤기섭(尹琦燮)·김구(金九)·엄항섭(嚴恒燮)·김홍숙(金弘叔)·이시영(李始榮)·옥성빈(玉成彬)·김철(金澈)·안공근(安恭根)·한진교(韓鎭敎)·김갑(金甲)·김두봉(金枓奉)·선우 혁(鮮于赫)·송병조(宋秉祚)·조상섭(趙尙燮)·이유필(李裕弼)·차이석(車利錫)·김붕준(金朋濬)·백기준(白基俊)·박창세(朴昌世)·최석순(崔錫淳)·장덕로(張德櫓)·이탁(李鐸)·강창제(姜昌濟)·박찬익(朴翊翊) 등 26명이 참석하여 독립투쟁전선 통일과 지방파벌 청산을 목표로 내세웠다. 당의 조직으로는..

흥경성전투, 1933, 조선혁명군, 한중연합군

1933년 한중연합군이 전개한 항일전투. 1932년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은 중국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인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항전하기로 하고 한중연합군을 편성, 이듬해 5월 8일영릉가(永陵街)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패전한 일본군은 같은 해 6월 15일 양대령(楊臺嶺)을 넘어 흥경(興京)·청원(淸原) 지방으로 공격하여 왔는데,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조선혁명군은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의 지휘하에 1,000명의 병력으로 청원지방을 수비하고, 중국군은 1만 명의 병력으로 흥경성을 사수하도록 작전계획을 세웠다. 조선혁명군은 기습공격으로 비행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을 저지하였으나 중국군이 패전함으로써 남산성(南山城)으로 퇴각하게 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30여 명의 희생자를 내었..

영릉가 전투, 1932, 양세봉, 조선 혁명군

1932년 4월 조선 혁명군(朝鮮革命軍)이 요령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영릉가(永陵街)에서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물리친 전투. 남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선 혁명군은 1932년 3월경부터 일제의 만주 침략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을 본격화하여, 4월부터 6월 사이에 신빈현성 등지의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공격하였다. 당시 신빈현에는 만주국군 1개 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중 일부가 영릉가에 있었다. 1932년 4월 양세봉(梁世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소자하(蘇子河)를 건너 영릉가로 들어갔다. 밤 12시경 조선 혁명군은 영릉가를 정면에서 기습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신호총 3발을 발사함과 동시에 시내로 진격하였다. 함께 합동 작전을 펴기로 했던 요령 민중 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의 이춘윤(李春潤)이 ..

국민부(國民府)1929-남만주 3부 통합 항일독립운동단체

1929년 4월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독립운동단체. 1925년 이래 남북만주 일대에서 분산적으로 활약하던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의 3부가 통합해 요령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흥경(興京)에 본부를 두고 조직되었다. 1928년 5월 정의부 소속 김동삼(金東三)이 중심이 되어 길장연로(吉長沿路) 서쪽 30리에 있는 신안둔(新安屯)에 집결, 3부의 통일을 위한 유일당을 형성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15일 정의부의 김동삼·지청천(池靑天) 계열과 신민부의 군정위원회측, 그리고 참의부의 김승학(金承學) 계열이 모여 혁신의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대해 신민부의 민정위원회측과 참의부의 심용준(沈龍俊) 계열, 정의부의 현익철(玄益哲)·고활신[高豁信, 일명: 고할신(高轄信..

민족유일당운동 -1920년대 독립운동 단체 통합 전개

1920년대 후반 만주와 중국 지역에 분립되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기 위해 전개한 운동. 1920년대 초 만주에 산재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효율적인 항일 독립운동의 수행을 위해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 우선 부분적인 통합이 이루어졌다. 1922년 8월환인현(桓仁縣)에서 군정서(軍政署) 등 7개 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는 주도 세력간의 분열로 일부 세력들이 1923년 분리되면서 의군부(義軍府)와 참의부(參議府)를 각각 조직하였다. 한편, 통의부 인사들은 공화주의를 지지하며 이주한인의 생존을 위한 통합 조직을 구성하려는 운동을 추진한다. 1924년 3월 전만통일회의주비회를 조직하고 10월 주비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

미쓰야 협정-재중한국인 단속에 관한 협정

1925년 6월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와 중국 펑톈성(奉天省) 경무처장 위전(于珍) 사이에 체결된 재중한국인 단속에 관한 협정. 중국의 동북3성(東北三省), 곧 만주에는 일찍부터 많은 한인이 거주했고, 이를 배경으로 한인의 항일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이에 일본은 1920년 간도를 침공하여 만주 일대 한인 거주지를 초토화하고 독립군과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독립군 활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제는 압록강과 두만강변의 병력을 증강시키고 간도 지역의 경찰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또한 한국 민족 해방 운동에 근본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만주의 사실상 지배자였던 펑톈 군벌 장쭤린(張作霖, 1873~1928)을 상대로 만주 지역 한인 단..

훈춘 사건(琿春事件)1920-일제 사주 받은 마적단 훈춘(琿春) 습격

1920년 9월 만주 무장 독립군을 탄압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이 훈춘(琿春)을 습격한 사건. 1919년부터 1920년에 걸쳐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조선 총독부와 조선주둔군은 이른바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워 독립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뚜렷한 명분 없이 한중 국경을 넘어서 군사 행동을 하는 것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일제는 훈춘 사건을 일으켜 군사 행동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훈춘 사건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모두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의 소행이었다. 1920년 9월 12일 오전 5시경 마적 300여 명이 약 3시간에 걸쳐 훈춘 시가를 습격하여 약탈, 방화하고 ..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1920-홍범도, 최진동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일명 明錄)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전과 대안(對岸)의 독립군의 활발한 활동에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사령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烽火里)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도하였..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 1920, 홍범도, 독립군 최초 대승리, 봉오동전투

1920년 6월 독립군이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 1920년 6월만주에 근거를 두고 항일전투를 전개하던 홍범도(洪範圖)와 최진동(崔振東) 휘하의 독립군은 두만강을 도강하여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개소대를 격파한 독립군은 일몰 후 두만강을 건너 화룡현삼둔자(和龍縣三屯子)로 귀환하였다. 한편, 독립군의 기습작전으로 패배한 것을 안 일본군 39사단장은 곧 야스가와(安川)소좌의 1개대대 병력을 출동시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이 때 독립군사령부에서는 일본군 추격대를 안산(安山)촌락 후방까지 유인한 뒤 6월 6일 오후 이를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사살 120명, 중상 200명의 대전과를 올렸으며, 아울러 소총 160자루, 기관총 ..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1919-북간도 무장독립단체, 청산리전투, 중광단, 서일, 김좌진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창립 당시의 주요 인물은 서일·현천묵(玄天默)·계화(桂和)·이장녕(李章寧) 등으로, 이들은 무장독립운동을 위해 신민회(新民會)·광복회(光復會) 계열의 김좌진(金佐鎭)을 초빙하여 독립군의 조직과 훈련을 담당하게 하였다. 1919년 10월 대종교와 신민회 주도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과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가 통합되어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되었다. 그..

서일(徐一)-중광단,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종교인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종교인. 본관은 이천(利川). 함경북도 경원 출신. 본명은 서기학(徐夔學), 호는 백포(白圃).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 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12년 대종교(大倧敎)에..

중광단(重光團)1911-북간도 항일독립운동단체, 대종교, 서일, 북로군정서

1911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항일독립운동단체. 대종교도인 서일(徐一)·계화(桂和)·채오(蔡五)·양현(梁玄) 등이 국내에서 의병운동을 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조직하였다. 1911년 왕청현(汪淸縣)에 본부를 두고 단장으로 서일을 선출하였다. 주로 청년들에게 애국교육과 대종교교리를 통한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였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중광단은 공교회(公敎會) 등 다른 종교 단체와 합작해 대한정의단을 발족하였다. 같은 해 8월 대한정의단은 산하 독립군 무장단체로 대한군정회(독립군정회)를 조직하였고 10월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해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하였다. 대한군정부는 같은 해 12월 상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가 되었다. 이 단체는 만주에서 결성된 최초..

명동학교(明東學校)1908-만주 북간도 민족교육기관, 윤동주

1908년 만주 북간도에 세웠던 민족교육기관. 1906년에 설립되었다가 1년 만에 폐교된 서전서숙(瑞甸書塾)의 민족교육정신을 계승하여, 김약연(金躍淵)의 주도로 서전서숙을 나온 김학연(金學淵) 등 애국지사들이 1908년 4월 27일 화룡현 명동촌(和龍縣 明東村)에 설립하였다. 1908년 4월 명동촌(明東村)에 있던 사숙을 통합하여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세웠다. 숙장(塾長)에 박무림(朴茂林), 숙감(塾監)에 김약연, 재정에 문치정(文治政), 교사에 김학연·남위언(南葦彦) 등이 취임하였다. 1909년 명동서숙은 이름을 명동학교로 바꾸고 김약연이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0년 3월 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병설하고 교장에 김약연이 취임하였으며, 교사는 국사에 황의돈(黃義敦), 윤리에 박태환(朴泰煥), 한글..

서전서숙(瑞甸書塾)-1906 만주 용정 민족교육기관, 이상설, 박정서, 여준

서전서숙의 명칭은 북간도 용정 일대의 넓은 평야를 의미하는 ‘서전대야(瑞甸大野)’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塾 글방 숙 1910년대 국외 항일 운동 북간도 용정촌∙명동촌 등 건설, 밀산 한흥동(이상설, 이승희 등이 건설) 간민회(자치 단체), 명동 학교∙서전서숙(민족 교육 기관) 중광단(대종교에서 건립, 3∙1 운동 이후 북로 군정서로 발전) 서간도(남만주) 신민회에서 삼원보 건설 경학사(자치 조직), 신흥 학교(→ 신흥 무관 학교), 서로 군정서(독립군) 연해주 신한촌 건설, 권업회 조직(자치 단체), 대한 광복군 정부(1914, 이상설, 이동휘),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1917, 3∙1 운동 후 대한 국민 의회로 발전), 한인 사회당(1918, 이동휘, 사회주의 단체) 기타 미주 지역:대한인 국민회(1..

간민회(墾民會) 1913- 대한국민회, 북간도 독립운동단체, 이동춘, 김립, 간도대한국민회

1913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애초에는 회명을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라 하였으나 중국 당국이 ‘자치’라는 말을 삭제하도록 요구함으로써 간민회라 하였다. 1913년 1월 26일 이동춘(李同春), 김립(金立) 등 25인 발기인은 150여 명이 집회한 가운데 간민회설립협의회를 개최하였다. 4월 26일백옥보(白玉甫)가 간민회총회 임시회장으로 선출되어 간민회 성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회장에 김약연(金躍淵), 부회장에 백옥보가 선임되었다. 또 민적과(民籍課), 교육과, 법률과, 재무과, 식산흥업과(殖産興業課) 등등 9개 부서 임원을 임명하였다. 이후 연길·화룡·왕청 등 3개 현에 분회를 세웠고 분회 아래 많은 지회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교민에 관한 모든 사항들을 자치적으로 해결하여 중국 ..

외규장각 의궤(外奎章閣儀軌)-병인양요(1866년)

강화도 소재 외규장각(外奎章閣)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의 의궤.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이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內奎章閣, 내각)이라 하고, 각각의 규장각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른바 의궤는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을 줄여서 한 단어로 만든 것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국조오례의』가 국가와 왕실의 기본 의례를 규정한 의례서라면 의궤는 의례를 예법에 맞게 행하기 위한 전례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의궤 외규장각은 병인양요(1866년) 당..

배재학당(培材學堂)1885-중등과정 최초 외국인 설립 근대적 사학, 아펜젤러

1885년(고종 22) 서울에 설립되었던 중등과정의 사립학교. 미국의 북감리회(北監理會) 선교부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인이 설립한 근대적 사학(私學)이다. 아펜젤러는 1885년 6월 21일 인천에 두 번째 입국하여 7월 19일 서울에 들어와서 1개월 먼저 와 있던 의사 스크랜튼(Scranton,W.B)의 집 한 채를 산 다음 방 두 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 해 8월 3일에 이겸라(李謙羅)·고영필(高永弼)이라는 두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폴크 공사(公使)는 고종(高宗)에게 아펜젤러에 관하여 아뢰었고, 동시에 그가 영어학교를 설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 당시 고종은 아펜젤러가 열심히 두 학생에게 영어..

거문도사건1885-영국 러시아 조선 진출 견제

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 거문도는 전라남도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섬으로서 고도(古島)·동도·서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은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을 수용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고, 또한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한·일 양국간의 해상 통로로 이용되었으며, 러시아 동양 함대의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영국은 거문도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고 불렀다. 조선이 개항한 이후로 청나라 및 일본, 그리고 구미 열강은 동북 아시아의 요충지인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러시아는 크리미아전쟁 이후 영국·프랑스와 더불어 ..

원산학사(元山學舍)1883-최초 근대 민립 학교, 무예반

1883년(고종 20) 민간에 의해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되었던 중등학교. 종래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로 알려진 배재학당보다 2년 앞서 설립된 것이 밝혀져,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로 일컬어진다. 원산은 1880년 4월 개항과 동시에 일본인 거류지가 만들어지고, 일본 상인들의 상업활동이 시작되었다. 덕원·원산의 지방민들은 일본 상인의 침투에 대한 대응책을 세워야 할 것을 절감하였다. 이에 그들은 새로운 세대에게 신지식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여 외국의 도전에 근본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1883년 1월에 새로 부임한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 정현석(鄭顯奭)에게 학교설립기금을 모을 뜻을 밝히고 새로운 근대학교를 설립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정현석은 주민들의 이러한 뜻을 기꺼이 받아들여 당시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박문국(博文局)1883-한성순보

1883년(고종 20) 인쇄·출판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박영효(朴泳孝)의 건의에 따라 같은 해 8월에 설치되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직후 조선은 시대적 요구에 응하여 여러가지 부국책을 추진하였는데, 박문국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산하기관인 동문학(同文學)의 신문발행 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명칭은 유길준(兪吉濬)이 마련한 「한성부신문국장정 漢城府新聞局章程」의 제1조를 답습한 것이다. 초대총재는 민영목(閔泳穆), 부총재는 김만식(金晩植)이었다. 기자는 동문학과 각 사(司)에서 차출된 주사(主事) 또는 사사(司事)의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 저동의 영희전(永禧殿) 자리에 있었으며, 처음 『한성순보(漢城旬報)』는 한성..

광혜원(廣惠院)- 최초 서양식 국립병원, 알렌, 제중원, 세브란스병원

1885년(고종 22)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처음 명칭은 국립 광혜원(廣惠院)이었다.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고종과 조선 정부는 총체적인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의료 근대화도 구상하였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통해 서양식 병원을 탐색하고, 1884년 정부 신문인 『한성순보』의 사설을 통해 서양의학 교육기관의 설립과 양의(洋醫)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884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을 때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때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安蓮)이 우정국사건(郵征局事件) 당시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

진단학회(震檀學會)-유물사관, 민족주의 사관 거부, 실증주의 사학

1934년 한국 및 인근지역 문화의 연구를 위해 설립된 학술단체. 1934년 한국인 학자들이 조선총독부 또는 일본인 학자들이 주도하는 관변적 연구풍토에서 벗어나 한국 및 인근지역의 문화를 독자적인 연구풍토를 구축하기 위해 만든 학회로서, 이들 중 일부는 일제의 식민사관과 관변적 학풍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 현재까지 대학 강단을 중심으로 넓은 인맥을 유지하고 그 학술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한국인 스스로 한국문화의 개척·발전·향상을 위해 노력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34년 5월 7일 창립 당시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의 주도권은 일본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연구성과의 대부분은 일본인에 의해 일본어로 발표되었다. 연구자료도 대부분 일본..

간도협약(間島協約)1909-일본과 청국, 안봉철도

1909년 9월 4일 일본과 청국이 간도에 관해 체결한 협약. 간도 지역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이다. 발해 멸망 후에는 거란족이 건국한 요의 영역이었다가 원-명-청을 거치면서 그 지역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특히 여진족에 의해 청이 건국된 이후 청국 조정은 간도지역을 자국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역(封禁地域)으로 선포하고, 사람의 이주를 엄금하였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불모지처럼 방치되어 오다가 때로는 국경을 넘어 온 양국의 유이민이 몰래 땅을 개간하기도 하였고, 경계도 모호해지고 말았다.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도 지역에 대한 조선과 청의 교섭이 시작된 것은 1712년(숙종 38)이다. 당시 양국 대표들은 백두산을 답사하여 현지 조사를 마친 뒤 국경을 확정한다는 의미..

기유각서-한일신협약의 부대 각서, 사법권

1907년 한일신협약의 부대 각서(附帶覺書)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조인된 사법권의 위임에 관한 협약. 우리 나라의 사법 및 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각서이다. 1909년 7월 12일 총리 대신 이완용(李完用)과 제2대 통감 소네(曾禰荒助) 사이에 교환된 것으로 모두 5개조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국의 사법과 감옥 사무는 완비되었다고 인정되기까지 일본 정부에 위탁한다. ② 정부는 일정한 자격이 있는 일본인·한국인을 재한국일본재판소 및 감옥 관리로 임용한다. ③ 재한국일본재판소는 협약 또는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외에도 한국인에 대해 한국법을 적용한다. ④ 한국 지방 관청 및 공사(公使)는 각각 그 직무에 따라 사법·감옥사무에 있어서는 재한국 일본 당해 관청의 지휘,..

남한대토벌작전1909 - 국외 독립군 전환

대한제국기 일제가 국내의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펼친 군사작전. 일제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할 목적으로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2개월에 걸쳐 의병세력의 주요 근거지인 전라남도 및 그 외곽지대에 일본군 등을 배치하여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이로 인해 근거지를 상실한 국내 의병세력은 중국 만주 및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에 따라 의병의 조직과 역량이 더욱 강화되었다. 의병의 활동지역은 충북과 강원도 접경지역을 넘어 1908년에는 지리산 서쪽의 호남지역으로 확대되었다. 1908년 전라도의 전투 횟수는 전국 대비 25%였고, 전투의병수는 25%를 차지했다. 1909년에는 이런 상황이 더욱..

서울진공작전1908-13도 창의군, 이인영, 허위

1908년 1월 13도 의병연합군이 서울 탈환을 목표로 진행한 전투 작전. 1907년 한일 신협약(韓日新協約) 강제 체결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해산 군인 가운데 일부가 의병에 참여하여 대일 의병 항쟁은 더욱 체계화되었다. 분산되어 있던 의병 부대 간의 연계를 강화하고 일제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연합이 추진되었다. 관동 의병대장 이인영(李麟榮, 1868~1909)이 중심이 되어, 전라, 충청, 경기, 강원, 평안, 함경도 등 13도 의병 부대가 양주에 집결했다. 이들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삼고 13도 의병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의병 연합군은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타격하고 일본과 맺은 조약의 파기, 친일 정부의 축출 등을 목표로 내걸었다. 1908년 1월에 군사장 허위(許蔿, 1..

정미의병(丁未義兵)-고종의 강제 퇴위·정미7조약 체결·군대해산

1907∼1910년간에 일어난 고종의 강제 퇴위·정미칠조약 체결·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전개된 일련의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특사를 빌미로 배일의식이 강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무능한 순종을 즉위시켜 한국식민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일제 통감부는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통치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나아가 군대해산을 단행하여 한국의 무력저항세력을 제거하였다.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다소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은 규모면·전력면에서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성장을 하여, 거국적인 의병항일전인 정미의병으로 확대, 발전하게 되었다. 정미의병은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과 이에 반발한 해산군인들의 대일항전(對日抗戰)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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