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63

버마암살폭파사건, 1983년, 미얀마, 랭군, 아웅산묘소

버마(현재의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재의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북한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폭파사건. 1983년 10월 9일에 발생했으며, 이 사고로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현장에 있던 미얀마인 3명도 사망하였다. 사고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희생된 17명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석준(徐錫俊), 외무부장관 이범석(李範錫), 상공부장관 김동휘(金東輝), 동자부장관 서상철(徐相喆),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咸秉春),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심상우(沈相宇),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김재익(金在益), 재무부차관 이기욱(李基旭), 주 버마대사 이계..

백제부흥운동,나당연합군,유인궤,유인원,복신(福信),흑치상지(黑齒常之),도침(道琛)

백제가 멸망한 뒤 660년에서 663년까지 왕족·군인 등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던 부흥운동. 660년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5만군은 육로로,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10여만 군사는 해로를 통해 각각 백제를 공격해 왔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泗沘城)주 01)으로 쳐들어오자, 백제의자왕(義慈王, 641∼660)은 태자 효(孝)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주 02)으로 피난하고, 제2왕자 태(泰)가 남아서 사비성을 고수했으나 전사자 1만여 인을 내고 패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이어 웅진성을 공격, 함락시킨 뒤 당군은 왕과 왕자를 비롯해 정부고관 90여 인, 군인 약 2만 인을 포로로 삼아 해로를 통해 귀환하고,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54∼661)도 이 해 10월에 회군하였다. 백제..

백운평전투,1920년,길림성,청산리 독립전쟁 최초 전투

1920년 10월 21일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백운평에서 일본군과 독립군 간에 벌어진 청산리 독립전쟁 최초의 전투. 1920년 10월 피전책(避戰策)에 따라 안도현으로 이동 중이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부대는 일본군이 계속 추격해 오자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하였다. 이에 백운평 인근 골짜기 길목에 매복하여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한 허위 정보를 흘렸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경 일본군 야스가와(安川)소좌가 지휘하는 선발 보병 1개 중대가 매복한 지점까지 접근하자 독립군들은 기습적으로 일제히 사격하여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일본군은 야마타(山田)가 지휘하는 본대의 증원을 받아 계속 독립군을 공격하였으나 독립군이 지형적으로 유리한 지점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이후 매복에 참여..

백마고지전투,국군 제9사단,1952년,철원 백마고지,중공군

국군 제9사단이 1952년 10월 철원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한 전투. 백마고지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었다. 백마고지(395고지)전투는 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하였고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1952년 10월 6일 시작됐다. 이날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

방곡령사건,1884년,고종,곡물반출 금지령,조선 일본 외교 분쟁

1884년(고종 21) 이후 곡물반출 금지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적 분쟁사건.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이 증대되면서 곡물가격이 뛰고 품귀현상 마저 나타났다. 거기에 흉작까지 겹치게 되자, 지방관들은 자기 지방에서 생산된 미곡이 타지방 또는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른바 방곡령을 실시하였다. 더욱이 1883년 6월에는 개항 이후 일본에 의한 곡물 유출을 저지할 조약상의 명분이 없던 조선은, 한발·수해·병란 등으로 국내식량의 부족이 염려될 때 1개월 전에 사전통보로 방곡을 실시할 수 있다는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체결하여 제한적이나마 법제적인 장치를 가지게 되었다. 1) 1차 방곡령 사건(황해도) 1876년부터 1904년 사이에 일어난 100여 건에 달..

발해부흥운동,후발해,정안국,오씨발해,대발해국,천흥,고욕

926년 발해 멸망 후, 그 유민들이 발해를 계승해 국가를 세운 운동. 1. 부흥운동 전기 발해 멸망 후에 세워진 최초의 왕조는 동단국(東丹國)주 01)이다. 그러나 동단국은 거란 정복자들에 의해 세워진 괴뢰정권이었다. 동단국은 발해 유민들의 저항과 내부문제로 인해 927년 서쪽의 요양으로 옮겨갔다. 발해유민들의 실질적인 부흥왕조인 ‘발해’가 건국되어, ‘후발해(後渤海)’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후발해의 건국 연대는 고정사(高正詞)가 발해사신으로 후당에 갔던 929년경으로 보고 있으며, 멸망 시기는 후발해의 올야(兀惹)정권이 거란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1003년 정도로 본다. 후발해의 수도는 옛 발해 수도가 있던 홀한성(忽汗城)이었다고 보며, 그 시조는 발해국의 대씨(大氏)였을 것..

발췌개헌(拔萃改憲),1952년,부산,피난국회,헌법개정,이승만 재선

1952년 7월 4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첫번째의 헌법개정.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측 안과, 내각책임제와 국회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국회안을 절충해서 통과시켰다고 하여 발췌개헌이라 이름 붙였지만, 사실상 이승만(李承晩)의 대통령 재선을 위하여 실시된 개헌이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지세력이 대거 낙선하자, 이승만은 당시의 국회를 통한 대통령 간선제를 통해서는 자신의 재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1952년 실시될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임하고자, 이승만은 1951년 8·15기념사에서 새로운 정당의 필요성과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로의 개헌 필요성을 역설한 뒤, 한편으로는 신당의 조직을 추진하고, 같은..

반회사건(泮會事件),1787년,정조,반촌(泮村:명륜동),이승훈,정약용,천주교,서학서

1787년(정조 11) 반촌(泮村:지금의 서울 명륜동·혜화동)에서 이승훈(李承薰)이 정약용(丁若鏞) 등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하여 연구, 토론한 일을 유생들이 성토한 사건. 1784년 중국 북경(北京)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은 이벽(李蘗) 등과 한국천주교회를 창설하고 전교에 힘쓰던 중 1785년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으로 박해를 받아서 한때 교회활동이 주춤해졌으나, 1787년 10월경에 반촌에 있는 김석태(金錫泰)의 집에 소장반유(少壯泮儒)들과 천주교서적을 연구, 토론하게 된다. 그러한 사실을 안 이기경(李基慶)이 천주교 배척론자인 홍낙안(洪樂安)에게 폭로하니, 척사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랐다. 그로 인하여 직접적인 박해는 내려지지 않았으나, 서학서(西學書)의 도입과 유포가 문제되어 1788년에..

반혁명사건,5·16 군사정변,박정희,장도영,박창암,알래스카 토벌작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이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발표한 사건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세력은 단일한 세력이 아니었다. 김종필 중심의 육군사관학교 8기생 중심의 세력이 박정희 소장과 연합하여 주류를 이루고는 있었지만 비주류 세력의 힘과 영향력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주류 세력은 각종 반혁명 사건을 일으켜 반대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반혁명 사건은 5·16 군사정변 이후 불과 두 달도 되기 전인 1961년 7월 9일 발표된 장도영 제거 사건이었다. 장도영과 주요 관련자들의 고향이 평안도 일대였기 때문에 일명 ‘텍사스 토벌작전’으로 불리기도 하는 장도영 제거는 이미 군사정변 초기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장도영은 5·16 군사정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라는 요직에 ..

반기독교운동,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통일전선, 무신론

3·1운동 이후 한국 사회에 등장한 사회주의자들이 종교 비판론과 무신론적 세계관을 토대로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를 표방하며 기독교를 배척한 운동. 19세기 말 한국 사회에 수용된 기독교에 대한 공격은 초기부터 있었으나, 이념적이고 집단적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진행된 것은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이었다. 역사적 배경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세계 도처에서 유행하게 된 사회주의가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지 정책 변화와 더불어 짧은 기간에 청년지식인들 사이에 확산되었다. 이는 그동안 교육·의료 등의 사업을 통해 근대적 문화의 선도자로 자처하던 기독교 내부의 동요와 균열 현상을 낳게 하는 큰 배경이 되었다. 1923년 3월에 일어난 중국의 반기독교운동이 국내 언론에 소개되었고, 이는 중국혁명..

반종파투쟁(反縱波鬪爭),김일성,연안파,반김일성운동,숙청,박헌영,윤공흠

김일성 개인숭배와 1당 독재체제의 폐해에 비판하는 세력을 반당·반혁명적인 종파주의자로 매도하면서 이들을 제거하고자 무자비하게 전개한 정치투쟁.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 이후 스탈린 격하운동이 시작되자, 그 여파를 두려워한 김일성과 그 추종세력은 오히려 김일성 개인숭배와 1당 독재정권 수립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반대파들을 종파주의자로 몰아세우고, “반당·반혁명적 음모책동을 폭로 분쇄하며 그 사상여독을 뿌리빼기 위한 투쟁”이라며 국내파 거물인 박헌영을 필두로 연안파·소련파 거두들을 철저히 제거하는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다. 역사적 배경 1956년 2월에 개최된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 이후 소련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 내에서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과 스탈린 격하운동이 진행되었다. 북한에서도 반김일성..

반공포로석방,1953년,이승만,휴전회담

1953년 6월 18~19일 당시 부산, 광주, 논산 등 전국 8개 지역의 포로수용소에서 이승만 정권의 주도하에 반공포로 3만 5천여 명을 탈출시킨 사건.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서로 타협할 수 없는 몇 가지 휴전조건을 가지고 대립하고 있었을 때까지 한국정부는 유엔군과 보조를 같이 하였으나, 휴전협상에 진전이 있을 때에는 국민대회가 개최되고 군중들의 시위가 있었다. 휴전협정이 성립될 가능성이 짙어진 1953년 4월 이후부터는 한국의 휴전반대가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휴전회담 재개의 기운이 무르익어 갈 무렵, 신태영 국방부장관은 성명을 통해 평화수립 전제조건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① 북괴 반역군의 무장을 즉시 해제시킬 것, ② 한국 영토로부터 중공군은 즉시 철수할 것, ③ 국제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년,남영동 대공분실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 전두환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14일, 경찰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불법 체포하여 고문하다가 사망케 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되어 1987년 6월항쟁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 배경 전두환정권의 탄압과 그에 대한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에 더해가고 있었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불법으로 체포했다. 경과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같은 달 15..

박동선 사건,코리아게이트,1976년,김형욱,김상근,중앙정보부

박동선의 미국 정치계 로비활동이 문제가 되어 발생한 사건. 1976년 10월 25일『워싱턴포스트』지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은 워싱턴 거주 한국인 실업가와 공작원이 미국 의회의원들과 정부 관리들에게 매년 50만 달러 내지 100만 달러를 현금이나 선물 혹은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미국언론들은 닉슨 정권하의 불법도청 사건이었던 ‘워터게이트’에 빗대어 코리아게이트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보도통제를 통해 1976년 12월 정부가 이 사건을 발표할 때까지 일반에게 알리지 않았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주한미군 감축에 대한 보완책과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특별지원책이 미국 의회로부터 승인되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 의회에 대한 로비를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1920년,최수봉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崔壽鳳)이 경상남도 밀양시밀양경찰서 사무실 안에 폭탄을 던진 의거. 최수봉은 당시 나이 24세로서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1920년 11월 밀양군 상남면 기산리에 거주하는 김상윤(金相潤)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권유받고 응낙하였다. 이에 김상윤은 최수봉을 대구부(大邱府) 근처에 거주하는 김원석(金元錫)에게 소개하였다. 김원석은 최수봉에게 독립운동의 기세를 올리기 위하여 밀양경찰서를 파괴하고 일본경관을 살해할 것을 지시, 12월 26일 그에게 폭탄 2개를 줌으로써 이튿날 거사를 결행한 것이다.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경 최수봉은 먼저 서장의 훈시를 듣기 위하여 서원들이 모여 있던 밀양경찰서 사무실 안에 창문 밖에서 폭탄 1개를 던졌다. 이 ..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1985년,민주화추진위원회, 민주화투쟁위원회, 문용식, 김근태, 박종철

1984년 조직된 학생운동조직 ‘민주화추진위원회’의 주요 간부들이 1985년 구속된 사건. ‘민주화추진위원회(약칭 민추위)’의 결성 움직임은 1984년 상반기부터 시작되었다. 서울대의 일부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1984년 6월경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서 각각 전위적 기간조직을 건설하고 그것을 통일적으로 조직화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들은 우선 자신들의 투쟁노선을 선명하게 제시하여 학생운동 활동가들의 지지를 끌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조직을 건설하고자, 1984년 가을 기관지 『깃발』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깃발』을 통해 이들은 기존 학생운동을 개량주의, 대중추수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각각의 개별적 부문운동이 아닌 전체 혁명운동의 한 주체로 자리 잡아야 하며, 이를 위해 전체 혁명운동의 전..

박영효국왕폐위음모사건,1898년,박영효,고종

1898년과 1900년 박영효가 고종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려 꾀한 정변. 갑오개혁 시기 내무대신으로 개혁을 이끌던 박영효(朴泳孝)는 궁중 호위병 교체 시도를 둘러싼 역모 혐의로 실각하고 1895년 7월 조선을 떠났다. 박영효는 1896년 5월 이후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에 있던 조선인 망명자들을 규합하고, 이들과 조선내 동조자들의 협력을 얻어 고종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려는 정변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역사적 배경 1896년 2월 아관파천 시기부터 1897년 대한제국 성립 후 몇 년간 군주권을 위협한 정치세력은 독립협회와 일본에 있던 조선인 망명자들이었다. 독립협회를 구성하던 여러 정치세력은 일본의 망명자들을 끌어들여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고, 이런 움직임을 감지한 고종은 ..

민족유일독립당촉성운동, 1924년,중국 관내,민족유일당

1924년경부터 1930년까지 중국 관내에서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을 조직하기 위해 벌인 운동. 1920년대 중후반 중국의 북경·상해·광주·무한·남경 등지에서 흥사단, 의열단, 창조파 등의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단합하여 유일당촉성회와 유일당촉성회 연합회를 조직한 후 민족운동의 구심적 기관으로 민족유일당을 결성하려 하였다. 역사적 배경 1920년대 초반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의 분열, 개조파와 창조파의 분열로 인한 임시정부의 변혁 실패,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 등에 영향을 받았다. 이에 민족역량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한 구심적 기관으로 임시정부가 아닌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과 원세훈(元世勳)과 신숙(申肅) 등의 창조파(創造派)는 1924년 2월 블라디보스톡에서 ..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 1920년대 후반,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신간회

1920년대 후반 만주와 중국 지역에 분립되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기 위해 전개한 운동. 1920년대 초 만주에 산재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효율적인 항일 독립운동의 수행을 위해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 결과 우선 부분적인 통합이 이루어졌다. 1922년 8월 환인현(桓仁縣)에서 군정서(軍政署) 등 7개 단체들이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통의부는 주도 세력간의 분열로 일부 세력들이 1923년 분리되면서 의군부(義軍府)와 참의부(參議府)를 각각 조직하였다. 한편, 통의부 인사들은 공화주의를 지지하며 이주한인의 생존을 위한 통합 조직을 구성하려는 운동을 추진한다. 1924년 3월 전만통일회의주비회를 조직하고 10월 주비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

민립대학설립운동,1920년대 초,민립대학기성회

1920년대 초 우리의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고자 일어난 일제하의 문화 운동.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되자, 민족 지도자들은 실력 양성 운동을 벌여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벌려 나갔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이 맨 처음 일어난 것은 한말이었다. 당시 윤치호(尹致昊)·남궁억(南宮檍)·박은식(朴殷植)·양기탁(梁起鐸) 등이 600만 원을 모금하여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1운동 이후 다시 시도된 것이다. 경과 운동은 1920년 6월한규설(韓圭卨)·이상재(李商在)·윤치소(尹致昭) 등 100명이 조선교육회설립발기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모임에 참석한 인사들은 우리나라에 대학이 없음을 개탄하고 조속한 시일 내 민립대학을 설립할..

미소공동위원회,1946년,신탁통치,모스크바3상회의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할 목적으로 미소 점령군에 의하여 1946년에 설치되었던 공동위원회. 제2차세계대전의 종결 뒤 개최된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에서는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미·영·중·소에 의해 최장 5년 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고 결정하였다. 또한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고 남북 분단으로 인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양 점령군 사이에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46∼1947년 사이에 1차의 공동회담과 2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미국과 소련 간의 입장 차이로 인하여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내용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과 이를 원조하기 위한 미소 양국 간의 공동위원회 설치를 규정한 모스크바 삼국 ..

무고의옥(巫蠱─獄),1701년,숙종,희빈(禧嬪) 장씨(張氏),무고=주술

1701년(숙종 27) 희빈(禧嬪) 장씨(張氏)로 인하여 일어난 옥사. 1689년 왕비 민씨(閔氏)가 폐위되고 장씨가 왕비가 되었으나,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내려갔다. 이 때 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냈던 편지가 발각되었는데, 그 속에 폐비 민씨를 모해하려는 문구가 있어서 희재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소론인 남구만(南九萬)이 그가 세자의 친척임을 이유로 적극 변호하여 무사하였다. 당시 정국은 장씨 소생인 세자에 대한 지지여부를 쟁점으로 노·소론이 대립하였는데, 소론은 세자를 지지하였기 때문에 세자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죽은 뒤 희빈이 취선당(就善堂)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여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자신이 중궁으로 복위하기를 ..

묘청의 난,1135년,인종,서경천도,서경세력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에서 일으킨 반란. 1126년 이자겸(李資謙)의 난 이후 국내외 정세는 극도로 불안하였다.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고 정치기강이 해이해졌고, 밖으로는 여진족의 외교적인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 시기에 서경출신의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의거,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개경(開京)의 지덕(地德)이 쇠약한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어서 그는 인종의 총애와 함께 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知常) 등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인종은 1127년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했고, 그의 건의에 따라 서경의 명당인 임원역(林..

모스크바 3상회의,1945년,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한반도 신탁통치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 외상(外相)이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 회의.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 사이에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미국대표 번스(James F. Byrnes) 국무장관, 소련대표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 외무장관, 영국대표 베빈(Ernest Bevin) 외무장관이 모여 모두 7개 의제에 대해 토의하였다. 이때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기간의 신탁통치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사안이 결정되었다. 경과 흔히 모스크바의정서 한국조항은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실시에 관한 결정으로 간주되며, 이 의정서대로 따랐으면 통일민족국가가 건설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

명량대첩,정유재란,1597년,선조,이순신,명량(울돌목)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9월 16일 이순신(李舜臣)이 명량(울돌목)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대부분 패하였다. 이에 그 해 7월 22일유성룡(柳成龍)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 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중에 남아 있던 쓸만한 전선(戰船)은 칠천량해전에서 배설(裵楔) 장군이 탈출시킨 12척에 불과하였다. 여기에 일반 백성들이 나중에 가져온 한 척이 더해져서 13척이 되었다. 이때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면서, 육군의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 이진(利津..

매소성전투,675년,문무왕,나당전쟁

675년(문무왕 15) 나당전쟁(羅唐戰爭) 중에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맞아 매소성(買肖城)에서 싸워 승리를 거둔 큰 전투. 매소성의 위치는『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에 나오는 고구려 매성현(買省縣)으로 비정하나, 현지에서 실증된 위치는 알 수 없다.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편성해 660년에 백제를 패망시키고,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가 백제·고구려 양국을 직접 지배했으므로 신라는 장기간에 걸쳐 전쟁한 대가가 없었다. 더욱이 당나라는 663년부터 신라를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로, 신라왕을 계림주도독(鷄林州都督)으로 격하시켜 신라의 자주권마저 빼앗으려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를 패망시킨 뒤, 곧 대당전쟁(對唐戰爭)을 전개해 전쟁의 정당한 이권과 자주성을 찾..

망이 망소이의 난,고려 명종,고려농민반란,신분해방운동,공주 명학소의 난

고려 명종 때 신분제의 타파를 목적으로 충청도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과 소민(所民)들의 봉기. 공주 명학소(鳴鶴所)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으므로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역사적 배경 1174년(명종 4)에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 등 서북계(西北界) 지방의 민란을 ‘서적(西賊)’이라 하고, 남부지방의 민란을 ‘남적(南賊)’이라 하는데, 망이·망소이의 난은 남적의 대표적인 예이다. 무신집권기에 무신 상호간의 권력다툼으로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각지에서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한 하층민들의 반항, 즉 민란이 빈발하였다. 경과와 결과 1176년(명종 6) 정월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무리를 모아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를 자칭하고 봉기해 공주를 함락시켰다. 당시 조위총의 난을 진..

만적의 난(萬積─亂),1198년,개경,노비 반란,무신집권기반란

1198년(신종 1) 개경에서 만적(萬積) 등이 일으킨 노비 반란. 고려사회는 엄격한 신분질서가 강조되는 가운데, 특히 노비의 경우는 그 사회적 처지가 가장 열악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소수의 권신(權臣)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그에 기생하여 노비의 정치적·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무신란 이후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현저해져 천민들의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역사적 배경 무신집권기에 천민 출신의 인물이 관직에 오르고 출세하는 사례가 있었으므로 신분에 대한 전통적인 권위의식이 무너져갔다. 그리고 당시 농민들의 봉기 또한 빈발함으로써 천민들이 이에 합세하거나 독자적으로 향·소·부곡민이나 천민들이 신분해방을 위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1176년(명종 6)에 ..

만부교사건(萬夫橋事件),고려 태조,거란,낙타 50필,발해 멸망

고려 태조 때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 50필을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굶어 죽게 한 사건. 만부교는 개경의 보정문(保定門) 안에 있는 다리로, 이 일이 있은 뒤로는 탁타교(橐駝橋)라고 불렸다 한다. 926년(태조 9)에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주위의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어가던 중 942년(태조 25)에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낙타 50필을 바쳐왔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고 하여 그 사신들을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는 모두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였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으며, 고려에서는 거란에 대한 적대를 계속 유지하였다. 이듬해에 지어진 「훈요십조(訓要十條)」 가운데서도 거란을 ‘금수의 나라’로 지목하여 그 언어와 제도를 본받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1931년,길림성(吉林省),만보산,한인 농민,중국 농민 충돌

1931년 7월 2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장춘현(長春縣)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 사이에 일어났던 충돌 사건. 일제는 1910년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이후 우리 나라와 만주에 일본인을 이주시키고자 하였다. 일본인의 한국 이민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불이흥업 등의 설립을 통한 농토의 침탈과 함께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농토를 잃은 대다수의 한인 농민들은 만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제는 한국 농민의 만주 이주를 일본인 이주의 전위로서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렇듯 재만 한인이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에 이용되면서 재만 한인을 둘러싼 중일 양국의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즉, 중국 동북 지방에 이주한 재만 한인을 누가 지배하느냐 하는 침략과 저항의 상반된 저의가 중일 양국의 중요한 쟁점이 된 것이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