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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종파투쟁(反縱波鬪爭),김일성,연안파,반김일성운동,숙청,박헌영,윤공흠

Jobs 9 2021. 4. 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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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개인숭배와 1당 독재체제의 폐해에 비판하는 세력을 반당·반혁명적인 종파주의자로 매도하면서 이들을 제거하고자 무자비하게 전개한 정치투쟁.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 이후 스탈린 격하운동이 시작되자, 그 여파를 두려워한 김일성과 그 추종세력은 오히려 김일성 개인숭배와 1당 독재정권 수립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반대파들을 종파주의자로 몰아세우고, “반당·반혁명적 음모책동을 폭로 분쇄하며 그 사상여독을 뿌리빼기 위한 투쟁”이라며 국내파 거물인 박헌영을 필두로 연안파·소련파 거두들을 철저히 제거하는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다.

역사적 배경

1956년 2월에 개최된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 이후 소련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 내에서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과 스탈린 격하운동이 진행되었다. 북한에서도 반김일성 운동이 고조되었는데, 개인숭배는 물론, 군수공업을 위주로 한 중공업 우선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발이 일자, 김일성은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고자 반종파투쟁을 전개했다.

경과

우선 국내파 거물인 박헌영에 대한 숙청 계획을 1953년 여름부터 시작하였고, 이후 1955년 12월 15일의 재판에서 박헌영을 미국 첩자로서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몰았다. 이리하여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가을에 박헌영은 처형되었다. 국내파 숙청 이후 연안파 숙청이 시작되었다. 1956년 8월에 개최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직업총동맹위원장 서휘(徐輝), 상업상 윤공흠(尹公欽),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장 허학송 등 연안파 정치인이 김일성의 유일사상과 독재권력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러나 중앙위원을 장악하고 있는 김일성파는 즉각 반격을 가해, 1956년 8월윤공흠, 서휘, 이필규를 출당시키고, 최창익(崔昌益), 박창옥(朴昌玉)의 당중앙위원직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1956년 9월 반종파투쟁을 벌여 연안파에 대한 공격과 제거를 병행하였고, 특히 1956년 말에는 연안파를 목표로 한 ‘사상검열’을 시작하여 숙청하였다.

연안파 숙청 이후 마지막 제거대상이었던 소련파의 숙청은 1958년 후반부터 시작되었고, 1959년에는 거의 모든 소련파가 제거되었다. 1958년 3월 개최된 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의에서 ‘종파청산’을 공식적으로 선언 개최된 노동당 제1차 대표자회의에서 ‘종파청산’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고, 1961년 9월 제4차 대회에서 김일성파의 승리를 공식화하였다.

결과

김일성 파는 반종파투쟁으로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반대세력 제거를 일단락하면서 1인 독재체제를 강화하며, 수령제를 확립하는 계기로 삼았다. 북한은 “반종파투쟁을 수령을 옹호보위하는 데 기본을 두고 진행하여야 공산주의운동에 큰 해독을 끼치는 종파주의를 비롯한 모든 분파적 요소들을 제때에 식별하고 철저히 극복할 수 있으며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당의 통일과 단결을 철옹성 같이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북한은 종파주의는 당의 통일단결을 실현하는 데서 주되는 투쟁대상이었으며, 종파주의와의 투쟁을 떠나서는 당의 통일단결에 대하여 말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은 노동계급의 당발전의 일반적 합법칙성과 당 건설의 특수성을 과학적으로 통찰한 데 기초하여 종파주의를 반대하여 적극 투쟁할 데 대한 혁명적인 방침을 제시하고 혁명발전의 매 시기마다 반종파투쟁을 현명하게 조직영도하였다고 선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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