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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이 망소이의 난,고려 명종,고려농민반란,신분해방운동,공주 명학소의 난

Jobs 9 2021. 4. 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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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명종 때 신분제의 타파를 목적으로 충청도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과 소민(所民)들의 봉기.

공주 명학소(鳴鶴所)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으므로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역사적 배경

1174년(명종 4)에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 등 서북계(西北界) 지방의 민란을 ‘서적(西賊)’이라 하고, 남부지방의 민란을 ‘남적(南賊)’이라 하는데, 망이·망소이의 난은 남적의 대표적인 예이다.

무신집권기에 무신 상호간의 권력다툼으로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각지에서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한 하층민들의 반항, 즉 민란이 빈발하였다.

경과와 결과

1176년(명종 6) 정월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무리를 모아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를 자칭하고 봉기해 공주를 함락시켰다. 당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정부는 우선 지후(祗候) 채원부(蔡元富)와 낭장(郎將) 박강수(朴剛壽)를 보내 선유(宣諭)하였다. 그러나 난민들이 응하지 않음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에 대장군 정황재(丁黃載)와 장군 장박인(張博仁) 등에게 3천명의 군사를 주어 난을 진압하도록 했지만, 난민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다시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켜 현령(縣令)과 현위(縣尉)를 파견하고, 난민을 위무(慰撫)하게 하는 등 회유책을 썼다.

이때에도 망이 등은 이에 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산현(禮山縣)을 공략해 감무(監務)를 살해하고 충주(忠州)까지 점령하였다. 정부는 다시 대장군 정세유(鄭世猷)와 이부(李夫)를 남적처치병마사(南賊處置兵馬使)로 삼아 대대적인 토벌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주효해 1177년 정월에는 망이·망소이가 강화를 요청함으로써 난이 일단 진정되는 듯하였다. 정부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처형하지 않고 오히려 곡식을 주어 향리로 호송하였다.

그러나 한 달 뒤에 망이·망소이 등은 재차 봉기해 가야사(伽耶寺: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 德山에 있음)를 침구했고, 3월에는 홍경원(弘慶院)을 불태우고 개경까지 진격할 것임을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때 망이 등이 홍경원의 주지를 시켜서 개경 정부에 전달한 글에 의하면, 이들이 다시 봉기하게 된 이유는 난이 진정된 이후 정부에서 다시 군대를 보내 그들의 가족들을 가두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아주(牙州: 지금의 牙山)를 함락시키고, 청주를 제외한 청주목(淸州牧) 관내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였다. 이에 정부는 남적에 대해 강경책을 펼쳐, 같은 해 5월에 충순현에서 명학소로 강등시키고 군대를 파견해 이들을 토벌하였다.

그 결과 난민들은 큰 타격을 입어 6월에는 망이가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청해왔고, 7월 망이·망소이 등이 정세유에게 붙잡혀 청주옥(淸州獄)에 갇힘으로써 1년 반 동안의 반란이 완전히 진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망이·망소이의 난은 특수행정구역인 소(所)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일반 농민반란과 구별된다. 망이·망소이 등이 봉기한 원래 목적은 신량역천(身良役賤)에 해당하는 소민(所民) 신분에서 탈피해 국가의 직접적이고 과도한 수취를 모면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명학소 민만으로 이 같은 대규모의 봉기가 가능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난의 발발 초기에 공주 관아를 습격할 때부터 이미 주위의 일반 농민들도 적극 호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망이·망소이의 난은 향·소·부곡민(鄕所部曲民)의 신분해방운동과 농민반란의 두 가지 성격이 결합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난은 비록 실패했지만, 고려사회 신분질서를 타파하려는 신분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선구적인 의미가 인정되며, 실제로 이후 향·소·부곡 등 특수행정구역의 소멸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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