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8년(신종 1) 개경에서 만적(萬積) 등이 일으킨 노비 반란.
고려사회는 엄격한 신분질서가 강조되는 가운데, 특히 노비의 경우는 그 사회적 처지가 가장 열악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소수의 권신(權臣)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그에 기생하여 노비의 정치적·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무신란 이후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현저해져 천민들의 신분해방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역사적 배경
무신집권기에 천민 출신의 인물이 관직에 오르고 출세하는 사례가 있었으므로 신분에 대한 전통적인 권위의식이 무너져갔다. 그리고 당시 농민들의 봉기 또한 빈발함으로써 천민들이 이에 합세하거나 독자적으로 향·소·부곡민이나 천민들이 신분해방을 위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1176년(명종 6)에 신량역천(身良役賤)의 특수행정구역으로서 천시되었던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이나, 1182년(명종 12)전주에서 일어난 관노(官奴)들의 봉기가 그것이었다. 1196년(명종 26)에는 최충헌(崔忠獻)의 집권에 반발해 상장군 길인(吉仁)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노비들도 이에 참여한 사례가 있었다.
경과 및 결과
1198년 5월에 사동(私僮)주 01) 만적·미조이(味助伊)·연복(延福)·성복(成福)·소삼(小三)·효삼(孝三) 등 6명이 개경 북산(北山)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노예들을 불러모아 “무신란 이후에 고관이 천한 노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將相)이 어찌 종자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동하면서 반란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갑인일(甲寅日)에 흥국사(興國寺)에서 모여 궁중으로 몰려가 난을 일으키고, 환관과 궁노들의 호응을 받아 먼저 최충헌을 죽인 다음 각기 자기 주인들을 죽이고 천적(賤籍)을 불사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수백 명 밖에 모이지 않았으므로 4일 후에 다시 보제사(普濟寺)에 모여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때 율학박사(律學博士) 한충유(韓忠愈)의 종 순정(順貞)이 주인에게 고발함으로써 반란계획이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고, 만적 등 1백여 명은 죽임을 당하였다.
이 반란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무신집권기에 신분해방을 목표로 일어난 천민반란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1200년(신종 3)에도 진주에서 또다시 공·사노예들의 반란이 일어나 합주(陜州)의 민란에 가세한 일이 있었다.
또한 밀성(密城)에서 관노 50여 명이 운문(雲門)주 02)의 민란에 합세하는 등 천민들의 반란이 계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러한 천민반란은 당시의 농민반란과 마찬가지로 무인정권의 강경한 진압에 의해 모두 실패하였지만, 고려 전기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탈피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고려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소임을 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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