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0년(우왕 6) 9월에 이성계(李成桂) 등이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에서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
14세기 후반에 극심하던 왜구의 노략질은 1376년 홍산(鴻山)에서 최영(崔瑩)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하였다. 그러나 1380년 8월에 5백척의 대선단으로 진포(鎭浦: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상륙해 충청·전라·경상 3도 연안의 주(州)·군(郡)을 약탈·방화·살육하였다. 이 때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로,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로 하여 왜적을 치도록 하였다.
경과와 결과
진포싸움은 최무선이 만든 신무기인 화포를 처음 사용해 묶어놓은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어 격렬했던 왜구의 만행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목숨을 구한 360여 명의 적들은 옥주(沃州)주 02)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했는데, 선박이 소실당하고 퇴로를 잃게 되자 상주·영동·옥주 등지로 진출해 약탈을 자행하였다.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의 주력부대는 다시 경산(京山)주 03)을 침략하고, 사근내역(沙斤乃驛)주 04)에 집결, 반격하였다. 이때 왜구를 추격하던 9원수[배극렴(裵克廉)·김용휘(金用輝)·지용기(池勇奇)·오언(吳彦)·정지(鄭地)·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도흥(都興)·하을지(河乙址)] 가운데 박수경과 배언을 포함, 5백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9월 왜구는 남원 운봉현(雲峰縣)을 방화하고, 인월역(引月驛)주 05)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하겠다고 하여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지리산과 해주 방면에서 왜구 토벌에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양광(楊廣)·전라·경상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體察使)에, 우인열(禹仁烈)·이원계(李元桂)·박임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을 원수로 삼아 이성계를 도와 왜구대토벌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양측은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들이 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죽음을 각오한 이성계가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하여 일대격전을 벌여 아지발도(阿只拔都)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고려사』열전 변안열(邊安烈)전에 의하면, 처음에는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고 한다(왜구 부대의 규모나 이성계의 군공이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음).
의의와 평가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 뒤부터 왜구의 세력은 약화되고, 고려의 왜구대책은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현황
1577년(선조 10)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황산대첩비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어 파편만 남은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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