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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통일, 10세기, 고려, 신라·후백제 통합, 발해 유민 포섭

Jobs 9 2021. 4. 17.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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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전반기에 고려가 신라·후백제를 통합하고 발해 유민을 포섭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한 일.

 

신라 말기에 등장한 후백제·후고구려(태봉·고려)와 신라를 우리 역사상 후삼국이라 하고,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건국한 892년(진성여왕 6)부터 고려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태종 19)까지의 45년간을 후삼국시대라고 한다.

신라는 이른바 하대에 이르러 왕권이 쇠약해지고 정치가 문란해졌다. 이는 골품제적 신분 질서에 바탕을 둔 신라 사회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그 운영 원리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귀족들의 대토지 사유화로 인하여 토지로부터 유리된 농민들은 점차 중앙 지배층의 가혹한 경제적 착취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서는 지방에서 중앙의 수취를 거부하고 나아가 정치적 지배에 저항하는 민란이 잇달아 일어나 중앙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일부 유학생이나 6두품 중 비판적이었던 일부 지식인, 또 당시 교종(敎宗) 중심의 불교계의 타락상과 교리를 비판하면서 성립된 선종(禪宗)의 교리를 공부한 선승과 이들이 개창한 9산선문(九山禪門) 중심의 선사들은 신라의 골품제사회를 비판하면서 지방에서 부상하는 새로운 지방 세력과 연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지방 세력은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내륙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해서 약탈로 무리를 구성해간 초적(草賊) 성격의 집단, ② 군진세력(軍鎭勢力)을 바탕으로 한 집단, ③ 해외무역 등으로 해상세력을 형성한 집단, ④ 촌주(村主)에서 성장하여 향촌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장악하여 지방에서 성주(城主)·장군(將軍) 등으로 불린 호족세력 등이다.

먼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과거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이었던 지역의 백성들이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신라는 진성여왕 이후 다섯 왕이 재위하는 동안 국토의 전체 영역을 다스리지 못하고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원만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는 중국에서도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가 907년에 망하고 오대(五代)가 교체되며, 북중국에서는 거란(契丹)이 등장하고, 남중국에서는 오월(吳越) 등이 등장하는, 이른바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였다. 중국이 혼란했던 이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우리 나라는 외세의 간섭을 비교적 적게 받을 수 있었고, 따라서 후삼국은 자주적으로 민족통일에 임할 수 있었다.

후백제의 건국자 견훤은 상주(尙州) 또는 광주(光州) 출신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농민 출신으로 체구가 건장하며 뛰어난 무사적 재능을 타고났다고 한다. 서남해안지역 방수(防戍)의 책임을 맡으면서 군인으로 출세하였다.

당시 서남해안지역은 옛 백제의 영역이었으므로 이 지역 백성들은 신라 중앙정부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견훤은 이를 이용해 신라에 멸망한 백제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자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백성들이 크게 호응을 해오자 892년 무주(武州)주 01)에서 반기를 들고 왕이 되었다.

900년(효공왕 4) 전주에 도읍하고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칭하며 관제를 정하였다. 후백제의 세력은 나주지역을 제외한 지금의 전라도 전부와 경상도 서부일대를 비롯하여 진주·합천까지 진출하고, 동으로 상주, 북으로는 청주·공주에까지 확대되었다.

견훤은 신라의 군인으로 출세한 까닭에 신라 관제를 고수했으며, 적극적인 사회개혁 의지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군사적으로는 고려와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오월이나 거란 등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국력을 과시하였다.

927년(경애왕 4) 신라 경주를 습격하여 경애왕과 관료들을 죽이고 왕비와 궁녀들을 욕보이며 약탈을 자행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오히려 고려와 신라의 관계를 밀접하게 만들어 경상도 일원의 세력이 왕건에게 귀부하는 결과를 빚었다. 안동지방의 고창(古昌)싸움에서 패배한 이후 군사적으로도 열세에 있다가 왕실의 내분으로 936년에 망하였다.

궁예(弓裔)는 신라의 왕자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후궁 소생의 버림받은 왕자로서 성장과정이 순탄하지 않은 듯하다. 지금의강원도 영월지방에서 승려가 되었다가 죽주(竹州)주 02)에서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다.

곧이어 북원(北原)주 03)의 도적의 괴수 양길(梁吉)에게 인정받아 장수로서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영월·강릉·인제 등의강원도 일대를 점령하면서 많은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산주(漢山州)주 04) 관내를 공략하고 나아가서 철원(鐵原,鐵圓)에 근거를 두면서 양길로부터 독립하였다.

898년 송악(松嶽)주 05)에 도읍하면서경기도·황해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북부까지 진출하면서 왕을 칭하였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원수를 갚는다고 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다 하여 처음에는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하였다. 이어 901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한편 청주(淸州)사람 1,000호(戶)를 철원으로 옮겨 수도를 삼았다가, 다음 해 천도하고 연호도 성책(聖冊)으로 바꾸었다. 911년에 또다시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삼았다가 914년에 정개(政開)로 고쳤다. 궁예는 왕건으로 하여금 나주지방을 경략하게 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외교를 차단하려 하였다.

또한 그의 영역은 북으로 평양에 이르고, 남으로는 지금의 강원도·경기도를 비롯하여 충청 북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고 미신적인 불교에 빠져 신하들을 의심하다가 인심을 잃어 918년 왕건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왕건은 조상 대대로 송악지방에 거주하면서 예성강 하구와 강화도 일대를 중심으로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세력을 형성하였다. 아버지 왕륭(王隆)은 송악 지방의 호족으로서 뒤에 궁예에게 귀속하였다. 이 때 왕건도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장군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충주·청주 등지를 점령하기도 하고 나주지방을 경략하여 궁예의 세력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며 궁예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궁예가 점차 포악해지고 의심이 많아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는 상황에 이르자, 918년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왕으로 즉위하였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며 정통성을 주장하려 한 것은 궁예와 마찬가지였다. 건국 이듬 해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다. 송악은 교통이 편리하고 왕건의 오랜 지지기반이었던 곳이다. 송악은 그 뒤 개경(開京)으로 바뀌어 고려 500년의 수도가 되었다.

내용

건국 당시 고려의 영역은 청주·웅진 이북으로부터 평양에까지 이르고 후백제의 배후인 나주를 차지하고 있었다. 왕건을 추대한 개국공신들은 주로 무장으로서 호족의 기반이 약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을 포섭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건국과 동시에 왕건에 대한 반발세력도 적지 않게 나타났다.

특히 청주 지방이 반기를 들었으니 환선길(桓宣吉)·임춘길(林春吉) 등의 난이 그것이다. 청주·웅주(熊州)주 06) 등지는 후백제에 귀속하기도 하였다.

고려태조는 후삼국을 통합하기 위한 정책으로, 대외적으로는 중국 오대와 외교관계를 맺어 대외관계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신라에 대한 적극적인 우호정책을 표방하고 후백제와는 대립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또 각 지방의 독립된 호족세력에게는 포섭과 회유정책을 취하였다.

고려가 건국하자 후백제의 견훤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는 등 평화정책을 폈다. 그러나 920년 후백제가 합천 지방을 점령하면서 고려와 후백제가 서로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고 두 나라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뒤에 경상도 북부지방 호족들 다수가 왕건에게로 내투하였다.

925년 조물성(曹物城)주 07)싸움에서 후백제와 고려는 쉽게 승부를 짓지 못하자 화의를 맺고 인질을 교환하였다. 왕건은 당제(堂弟) 왕신(王信)을 후백제에 보내고, 견훤은 외생(外甥) 진호(眞虎)를 고려에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 진호가 고려에서 병으로 죽자 견훤은 고려에서 고의로 죽였다 하여 왕신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공주지방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고려와 후백제의 본격적인 통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때 신라의 경애왕은 “견훤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키면 반드시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니 대왕이 군사의 위엄을 보이면 견훤은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왕건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왕건이 후백제를 칠 때 신라를 돕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약소국의 위치에 있던 신라의 활로를 모색하려는 경애왕의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927년까지 경상도 북부일대에서 심한 격전이 펼쳐졌는데, 9월에 견훤은 신라의 수도경주를 기습하였다.문경 지방을 공격하다가 갑자기 영천을 거쳐 경주를 습격한 것이다.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궁궐 등을 약탈한 뒤 김부(金傅)주 08)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견훤이 영천에 쳐들어 올 때 신라는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는데, 견훤의 군이 퇴각하다가 대구 공산(公山)에서 고려 왕건의 원군과 마주쳐 대결하게 되었다.

이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은 참패를 당하여 개국공신 신숭겸과 김락(金樂) 등이 전사하고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 후백제군은 경상도 서부일대까지 휩쓸고 약탈하였다.

견훤의 경주기습은 일시적인 무력시위로 위세를 떨쳤으나 신라의 민심은 대신라우호정책을 표방한 고려에 기울게 되었으며,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대거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결국 싸움에서는 견훤이 이겼지만 소득은 왕건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 해 12월과 다음 해 1월에 견훤과 왕건은 외교문서를 교환하면서 각각 중국과의 외교를 앞세워 상대방을 위협하는 등 서로 정책의 우월함을 과시하였다. 이후 경상도 북부 안동 지방에서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고려군이 극히 열세에 놓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930년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싸움은 고려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고려군이 열세에 놓여 곤경에 처하였을 때 유금필(庾黔弼)이 선전하여 후백제군 8,000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 싸움 이후 그 동안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고려는 군사적으로도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후백제는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서해안 일대를 노략하기도 하였다.

한편, 왕건은 견훤이 경주를 습격한 이후 경주를 방문하는 등 경순왕 이하 신라세력의 환심을 샀다. 그리하여 경상도 일대 호족세력의 대부분이 고려에 귀속하게 되었으며, 특히 강릉에서 울산까지의 지역에서 110여 성이 항복했다고 한다. 이 때 후백제 견훤가에는 형제간의 내분이 있었다.

견훤에게는 큰아들 신검(神劍)을 비롯하여 양검(良劍)·용검(龍劍)·금강(金剛) 등이 있었다. 이 중 넷째 금강은 신체가 건강하고 뛰어나 견훤의 총애를 받았다. 금강이 후계자로 유력해지자 세 형들은 이를 시기하여 935년 3월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시킨 뒤 신검이 왕이 되었다.

6월에 견훤이 금산사에서 나주로 탈출하자, 왕건은 유금필을 보내어 그를 개경으로 데리고 왔다. 한편, 경주 일원만을 다스리고 있던 신라의 경순왕도 계속 후백제의 위협을 받고 있던 터에,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여 환대를 받는 것을 보고 935년 11월 고려에 자진 항복하였다.

이렇게 되자 왕건은 후백제에 대한 대비와 경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충지인 천안지방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고 후백제 공격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936년 9월에 태조 왕건은 3군(三軍)을 이끌고 천안에 가서 군사를 집결하여 출전하였다.

왕건은천안을 출발하여 일선군(一善郡)주 09)으로 진격, 후백제 신검의 군사를 맞아 일리천(一利川)에서 대결전을 치러 승리하였다. 이 때 3군의 총수는 4만 3000명이었고, 지방호족과 북방민족의 부대를 합하면 고려의 총군사력은 8만 7500명에 달하였다.

여기에는 왕과 태자 무(武)주 10), 홍유·박수경(朴守卿)·왕순식(王順式)·유금필 등이 참여하였다.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추격하여 황산군(黃山郡)주 11) 탄령(炭嶺)을 넘자 후백제신검군은 항복하였다. 이에 태조 왕건은 후백제의 서울 완산(完山)주 12)에 들어가 항복을 받고 백성을 위무하였다.

이로써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던 민족이 재결합하는 통일을 이루었다. 고려태조의 후삼국 통일정책은 융화정책과 통일전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각지의 호족을 포섭하여 고려의 지배체제에 끌어들이는 것과 후백제와의 무력대결을 통하여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호족에 대해서는 정략혼인과 같은 유화정책을 썼고, 후백제와의 대결에 있어서는 일면 친신라정책을 쓰면서 후백제를 포위, 고립하게 하는 정책을 취했다. 태조는 후삼국통일을 최고의 과업으로 인식하여 남방으로 후백제·신라 방면에 시간과 정력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북방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것은 북진정책(北進政策)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계승자로서 고구려 고토의 회복을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삼고 패서호족(浿西豪族)의 일부를 이 곳으로 사민(徙民)하여 민호(民戶)를 채우고 관부(官府)를 설치하는 등, 도성으로서의 시설을 갖추었다.

또, 새로 개척한 북방 영토에 진(鎭)을 설치하여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러는 한편, 926년 거란에게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이 내투해 오자 이들을 동족으로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에게는 왕씨(王氏)의 성을 주는 등 민족융화정책을 폈다. 이리하여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까지도 포함한 민족통일을 이룩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7세기 중엽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여 이룩한 삼국통일이 종래 고구려의 영토 거의 전부를 상실하고 그 일부만을 가지게 된 불완전한 민족통일이라 한다면,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신라와 후백제의 영토와 문화 전부를 통합한 진정한 민족통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라의 통일은 당나라라는 외세를 이용한 것에 비하여 고려의 통일은 우리 민족의 자력에 의한 것이기에 더욱 의의가 있다.

또, 후삼국통일 이후 신라시대에는 영토의 한쪽에 치우쳐 있던 정치·문화의 중심지가 한반도의 중부지방인 개성으로 옮겨짐으로써 고구려·백제·신라의 옛 영토를 지배하기가 용이해져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한 큰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발해의 유민까지도 받아들임으로써 민족통일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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