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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都賈)-조선 후기 상품 매점매석

Jobs 9 2020. 10. 5.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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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상품을 매점매석해 가격 상승과 매매 조작을 노리던 상행위의 한 형태, 혹은 그러한 상행위를 하던 상인 또는 상인 조직.   

도고(都庫)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본래 공인(貢人)들이 공납품을 미리 사서 쌓아두던 창고로 뒤에는 위와 같은 뜻의 도고(都賈)와 혼동되어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도고 상인을 도아(都兒)·외목(外目)장수라고 불렀다.

도고는 18세기 이전부터 나타난 대외 무역의 증대, 금속 화폐의 유통, 상품 경제의 발달 등을 배경으로 발생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서울과 지방의 농·수공업 생산력 증가와 그에 상응하는 활발한 상품 생산은 상업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고, 도고도 그와 함께 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했더라도, 아직 생산력 수준이 본격적인 상품 생산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다. 또 상품 수송이 매우 불편했으므로 상품 유통과정에서 매점성과 독점성을 본질로 하는 도고는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시전(市廛) 상인·공인들은 국역을 부담하는 대가로 조정으로부터 상업상의 특권, 즉 특정물품의 독점권을 부여받은 상인으로서 상업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의 독점권도 일종의 합법적인 도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가 더욱 발전하면서 비특권 상인인 사상(私商)들이 자본력과 상술을 밑천으로 도고를 하였다. 도고를 하던 사상에는 부상(富商)이 많았고, 계(契)를 조직한 상인들도 있었다.

또한, 그들은 자유로운 영업 활동을 추구하며 난전(亂廛)을 벌여 특권 상인의 독점권에 대항하고 있던 직접생산자·소상인과 이해가 일치하였다. 그들이 함께 근거하고 있던 기반은 점차 발달하던 상품 경제였으므로, 특권 상인의 횡포를 피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상이 어느 정도 독점을 이루게 되면 직접생산자·소상인의 이익을 무시했던 면도 있었다. 그 결과 이들은 상품을 헐값에 강제적으로 사들이기도 하고, 정부의 인정을 받아 시전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사상도고는 개성·동래·의주와 같은 대외 무역지역, 서울과 지방 도시 근방의 상품 집산지, 상품 생산지 등에 근거를 마련하고 있었다. 특히, 특권 상인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이 미치지 못하는 서울 성밖의 경강(京江)·송파(松坡)·누원점(樓院店)과 같은 상업 요충지에는 상당한 실력을 가진 사상이 도고를 하였다.

그들은 직접생산자·소상인들이 생산지에서 상품을 서울로 반입하는 길목에 터를 잡고 대량으로 매점하거나, 아예 대리인에게 자본금을 주고 생산지에 보내어 상품을 직접 매점하였다. 심지어는 생산도 되기 전에 선매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지방에서 도고를 하는 여각(旅閣)·객주(客主)·선주인(船主人) 등이 매점한 상품을 다시 매석하였다.

이렇게 도고의 활동 영역은 소비지와 생산지에 퍼져 있었다. 그들이 이와 같이 도고와 불법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감독 기관인 한성부·평시서(平市署)의 관리에게 여러 면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각 궁방(宮房)·사대부·토호 등이 직접 간접으로 도고와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상들은 매점한 상품을 자기 집의 창고나 시장, 혹은 주막에 쌓아두고 직접 소매하기도 하고, 서울 성안에 있는 중간상인인 중도아(中都兒)를 불러 처분하기도 하였다. 이 중도아는 그 상품을 다시 이현(梨峴)·칠패(七牌)와 같은 시장의 난전이나 심지어는 시전에 비밀리에 팔아 특권 상인의 금난전권을 피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사상과 시전이 분쟁을 하고, 칼부림도 할 만큼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도고 때문에 특정 물품의 공급이 부족하게 된 지방에도 물건을 되팔았다.

이와 같은 도고는 실제로 가격 상승과 매매 조작을 통한 이득의 극대화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18세기 중엽은 사상이나 특권 상인의 도고가 극히 성행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사상인 경강상인과 개성상인의 도고는 전국에 걸쳐 행해졌고, 규모도 대단해 그 폐단이 심하였다.

이런 도고는 상품의 공급 부족과 그에 따르는 물가 상승을 야기했으므로 서울에 사는 영세민들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지방에서도 영저리(營邸吏)가 감영의 이서(吏胥)와 결탁해 도고를 조장하거나, 상납 물품의 도고가 성행해 지방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따라서, 세금의 징수나 국역의 부담만 원활하다면 특권 상인이나 사상 어느 쪽의 상업 활동도 용인하던 정부도 더 이상 도고를 좌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791년(정조 15)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단행, 육주비전[六矣廛]을 제외한 모든 도고를 혁파하였다.

그 뒤 19세기에도 강력한 도고혁파령을 여러 차례 내렸지만, 도고는 오히려 더욱 번창하였다. 1833년(순조 33) 경강상인들이 미곡을 도고해 가격 상승을 노리다가, 영세민들의 쌀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도고의 자본력은 광업·조지업·조선업에 투자되어 생산 지배의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도고는 상품화폐경제가 일정 수준까지 오를 때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고의 기본적인 성격인 매점성과 독점성이 해소되지 않는 한 근대적인 상업과 상업자본으로 전화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도고는 한계성을 가지는 것이며, 개항 이후에 전개된 새로운 상업 질서에 대응하기 위한 자기 혁신이 불가피하였다.

외국 상인의 거대한 자본력과 우월한 수송력에 눌릴 수밖에 없던 도고는 정부·개화파·외국상인 등의 도고 혁파 압력을 받으면서 점차 상회사(商會社)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종래의 도고가 구성원의 합자 방식을 주식제로 바꾸고 자본 규모를 늘리면 상회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고의 본질은 상회사가 특권회사적 성격을 가지도록 하였다. 결국, 이러한 도고 전통의 존속은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발전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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