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잡스 한국사/한국사 사전 463

배재학당(培材學堂)1885-중등과정 최초 외국인 설립 근대적 사학, 아펜젤러

1885년(고종 22) 서울에 설립되었던 중등과정의 사립학교. 미국의 북감리회(北監理會) 선교부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H.G.)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로 외국인이 설립한 근대적 사학(私學)이다. 아펜젤러는 1885년 6월 21일 인천에 두 번째 입국하여 7월 19일 서울에 들어와서 1개월 먼저 와 있던 의사 스크랜튼(Scranton,W.B)의 집 한 채를 산 다음 방 두 칸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이 해 8월 3일에 이겸라(李謙羅)·고영필(高永弼)이라는 두 학생을 얻어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폴크 공사(公使)는 고종(高宗)에게 아펜젤러에 관하여 아뢰었고, 동시에 그가 영어학교를 설립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 당시 고종은 아펜젤러가 열심히 두 학생에게 영어..

거문도사건1885-영국 러시아 조선 진출 견제

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 거문도는 전라남도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섬으로서 고도(古島)·동도·서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은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을 수용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고, 또한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한·일 양국간의 해상 통로로 이용되었으며, 러시아 동양 함대의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영국은 거문도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고 불렀다. 조선이 개항한 이후로 청나라 및 일본, 그리고 구미 열강은 동북 아시아의 요충지인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러시아는 크리미아전쟁 이후 영국·프랑스와 더불어 ..

원산학사(元山學舍)1883-최초 근대 민립 학교, 무예반

1883년(고종 20) 민간에 의해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되었던 중등학교. 종래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로 알려진 배재학당보다 2년 앞서 설립된 것이 밝혀져,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로 일컬어진다. 원산은 1880년 4월 개항과 동시에 일본인 거류지가 만들어지고, 일본 상인들의 상업활동이 시작되었다. 덕원·원산의 지방민들은 일본 상인의 침투에 대한 대응책을 세워야 할 것을 절감하였다. 이에 그들은 새로운 세대에게 신지식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여 외국의 도전에 근본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1883년 1월에 새로 부임한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 정현석(鄭顯奭)에게 학교설립기금을 모을 뜻을 밝히고 새로운 근대학교를 설립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정현석은 주민들의 이러한 뜻을 기꺼이 받아들여 당시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박문국(博文局)1883-한성순보

1883년(고종 20) 인쇄·출판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박영효(朴泳孝)의 건의에 따라 같은 해 8월에 설치되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직후 조선은 시대적 요구에 응하여 여러가지 부국책을 추진하였는데, 박문국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산하기관인 동문학(同文學)의 신문발행 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명칭은 유길준(兪吉濬)이 마련한 「한성부신문국장정 漢城府新聞局章程」의 제1조를 답습한 것이다. 초대총재는 민영목(閔泳穆), 부총재는 김만식(金晩植)이었다. 기자는 동문학과 각 사(司)에서 차출된 주사(主事) 또는 사사(司事)의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 저동의 영희전(永禧殿) 자리에 있었으며, 처음 『한성순보(漢城旬報)』는 한성..

광혜원(廣惠院)- 최초 서양식 국립병원, 알렌, 제중원, 세브란스병원

1885년(고종 22)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처음 명칭은 국립 광혜원(廣惠院)이었다.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고종과 조선 정부는 총체적인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의료 근대화도 구상하였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통해 서양식 병원을 탐색하고, 1884년 정부 신문인 『한성순보』의 사설을 통해 서양의학 교육기관의 설립과 양의(洋醫)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884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을 때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때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安蓮)이 우정국사건(郵征局事件) 당시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

진단학회(震檀學會)-유물사관, 민족주의 사관 거부, 실증주의 사학

1934년 한국 및 인근지역 문화의 연구를 위해 설립된 학술단체. 1934년 한국인 학자들이 조선총독부 또는 일본인 학자들이 주도하는 관변적 연구풍토에서 벗어나 한국 및 인근지역의 문화를 독자적인 연구풍토를 구축하기 위해 만든 학회로서, 이들 중 일부는 일제의 식민사관과 관변적 학풍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 현재까지 대학 강단을 중심으로 넓은 인맥을 유지하고 그 학술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한국인 스스로 한국문화의 개척·발전·향상을 위해 노력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34년 5월 7일 창립 당시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의 주도권은 일본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연구성과의 대부분은 일본인에 의해 일본어로 발표되었다. 연구자료도 대부분 일본..

간도협약(間島協約)1909-일본과 청국, 안봉철도

1909년 9월 4일 일본과 청국이 간도에 관해 체결한 협약. 간도 지역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이다. 발해 멸망 후에는 거란족이 건국한 요의 영역이었다가 원-명-청을 거치면서 그 지역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특히 여진족에 의해 청이 건국된 이후 청국 조정은 간도지역을 자국의 발상지라 하여 봉금지역(封禁地域)으로 선포하고, 사람의 이주를 엄금하였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불모지처럼 방치되어 오다가 때로는 국경을 넘어 온 양국의 유이민이 몰래 땅을 개간하기도 하였고, 경계도 모호해지고 말았다.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도 지역에 대한 조선과 청의 교섭이 시작된 것은 1712년(숙종 38)이다. 당시 양국 대표들은 백두산을 답사하여 현지 조사를 마친 뒤 국경을 확정한다는 의미..

기유각서-한일신협약의 부대 각서, 사법권

1907년 한일신협약의 부대 각서(附帶覺書)로, 일제의 강압에 의해 조인된 사법권의 위임에 관한 협약. 우리 나라의 사법 및 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각서이다. 1909년 7월 12일 총리 대신 이완용(李完用)과 제2대 통감 소네(曾禰荒助) 사이에 교환된 것으로 모두 5개조로 되어 있으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한국의 사법과 감옥 사무는 완비되었다고 인정되기까지 일본 정부에 위탁한다. ② 정부는 일정한 자격이 있는 일본인·한국인을 재한국일본재판소 및 감옥 관리로 임용한다. ③ 재한국일본재판소는 협약 또는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외에도 한국인에 대해 한국법을 적용한다. ④ 한국 지방 관청 및 공사(公使)는 각각 그 직무에 따라 사법·감옥사무에 있어서는 재한국 일본 당해 관청의 지휘,..

남한대토벌작전1909 - 국외 독립군 전환

대한제국기 일제가 국내의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펼친 군사작전. 일제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할 목적으로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2개월에 걸쳐 의병세력의 주요 근거지인 전라남도 및 그 외곽지대에 일본군 등을 배치하여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이로 인해 근거지를 상실한 국내 의병세력은 중국 만주 및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에 따라 의병의 조직과 역량이 더욱 강화되었다. 의병의 활동지역은 충북과 강원도 접경지역을 넘어 1908년에는 지리산 서쪽의 호남지역으로 확대되었다. 1908년 전라도의 전투 횟수는 전국 대비 25%였고, 전투의병수는 25%를 차지했다. 1909년에는 이런 상황이 더욱..

서울진공작전, 1908, 13도 창의군, 이인영, 허위

1908년 1월 13도 의병연합군이 서울 탈환을 목표로 진행한 전투 작전.1907년 한일 신협약(韓日新協約) 강제 체결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해산 군인 가운데 일부가 의병에 참여하여 대일 의병 항쟁은 더욱 체계화되었다. 분산되어 있던 의병 부대 간의 연계를 강화하고 일제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한 연합이 추진되었다. 관동 의병대장 이인영(李麟榮, 1868~1909)이 중심이 되어, 전라, 충청, 경기, 강원, 평안, 함경도 등 13도 의병 부대가 양주에 집결했다. 이들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삼고 13도 의병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의병 연합군은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타격하고 일본과 맺은 조약의 파기, 친일 정부의 축출 등을 목표로 내걸었다.1908년 1월에 군사장 허위(許蔿, 185..

정미의병(丁未義兵)-고종의 강제 퇴위·정미7조약 체결·군대해산

1907∼1910년간에 일어난 고종의 강제 퇴위·정미칠조약 체결·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전개된 일련의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특사를 빌미로 배일의식이 강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무능한 순종을 즉위시켜 한국식민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일제 통감부는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통치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나아가 군대해산을 단행하여 한국의 무력저항세력을 제거하였다.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다소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은 규모면·전력면에서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성장을 하여, 거국적인 의병항일전인 정미의병으로 확대, 발전하게 되었다. 정미의병은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과 이에 반발한 해산군인들의 대일항전(對日抗戰)에서 비롯되었다...

을사의병(乙巳義兵)-신돌석, 최익현, 민종식, 안병찬

1905·1906년 을사5조약 등 일련의 일제침략을 계기로 일어난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 특히 1906년(丙午)에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던 까닭에 병오의병(丙午義兵)이라고도 한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봉기한 을미의병은 1896년 10월을 고비로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의병항쟁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동기만 유발되면 언제라도 재기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한일의정서·한일협약이 잇달아 체결되어 반일의식이 전국적으로 고조되어가던 중, 1905년 을사오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한국민의 반일감정은 극도에 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재기하였다. 을사의병이 가장 먼저 봉기한 곳은 을미의병 때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었던 원..

을미의병(乙未義兵), 허위, 기우만, 이소응, 유인석, 근왕창의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 청일전쟁 후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 시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제시행에 분격한 유생들이 근왕창의(勤王倡義)의 기치 아래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구축을 목표로 일으켰다. 1895년(고종 32) 8월 20일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뒤이어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보수유생들은 ‘토역소(討逆疏)’ 등을 바쳐 친일정부의 폐위조처에 반대함은 물론, 일본군을 토벌, 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하였다. 8월 22일 서울 창의소(倡義所)에는 고시문이 나붙기 시작하고, 10월 중순을 전후로 충청남도 회덕·유성·진잠 등지에서는 문석봉(文錫鳳) 등이 토적(討賊)의 뜻을 선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친일정권이 공포, 시행한 단발령은 유생들과 일반백성의 반일·반정부 ..

한일신협약 1907-정미7조약(丁未七條約), 헤이그특사, 고종퇴위, 한국군 해산

1907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예비 조처로서 체결한 7개 항목의 조약.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도 부른다.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統監部)를 설치, 여러 가지 내정을 간섭해 오던 일본은, 헤이그특사파견사건(Hague, 海牙特使派遣事件)을 계기로 한층 강력한 침략 행위를 강행할 방법을 강구하였다. 일본은 외무대신 하야시(林董)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 하여금 우선 사건의 책임을 고종에게 물어 퇴위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순종이 즉위한 4일 후인 1907년 7월 24일 전격적으로 흉계를 꾸며,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내용의 원안(原案)을 제시하였다. 이완용(李完用) 내각은 즉시 각의를 열고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 순종의 재..

대한인국민회-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하와이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 통합

1910년 미국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1908년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에 의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저격의거를 계기로 일어난 재미 한인단체 통합운동의 결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였다. 그 이듬해 2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국민회에 흡수됨으로써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하였다. 이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로 구성하기 위하여 미주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를, 멕시코에도 멕시코지방회를 조직하였다. 멕시코 지방회는 1909년 5월 9일 국민회 북미총회 산하로 조직되었으며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로 변천하자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로 자리매김하였다. 191..

공립협회(共立協會)-샌프란시스코, 미주항일운동단체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되었던 항일운동단체. 1903년 9월 안창호(安昌浩)·박선겸(朴善謙)·이대위(李大爲)·김성무(金聖武) 등이 상호 친목을 목적으로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를 조직하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재류 한인 20여 명 중에 친목 회원은 9명에 불과하였다. 그 뒤 1904년 하와이로 한국인 이주가 이뤄지고, 그 중 일부가 미국 본토로 이주함에 따라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교민의 수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당시 본국에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5년 4월 조직을 확대, 개편하여 공립협회라 개칭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목적을 확대하여 애국 운동의 전개, 동족간의 상부 상조, 환난상구(患難相救) 등으로 정하였다. 초대 회장은 안창호였으며 송석준(宋錫峻)·정재관(鄭在寬)이 각각 제2대·제..

흥사단(興士團) (1917년) 샌프란시스코

민족통일, 민주주의 발전, 시민사회 성장, 건전한 청소년 육성을 위한 사회교육·국민훈련기관. 우리 민족이 세계 최고의 일등국민이 되고, 인류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모범 민족이 되기 위하여 국민 개개인의 인격혁명을 통하여 민성혁신(民性革新)과 민력증강(民力增强)을 도모함으로써 민족 앞길에 번영의 기초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경기도홍언(洪焉), 강원도염만석(廉萬石), 충청도조병옥(趙炳玉), 황해도민찬호(閔燦鎬), 경상도송종익(宋鍾翊), 평안도강영소(姜永韶), 함경도김종림(金宗林), 전라도정원도(鄭源道) 등 8도 대표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초창기에는 이민교포 및 유학생을 중심으로 학업과 인격수양, 생활개선, 경제력 증진에 주력하다가 1919년..

대조선국민군단-하와이 군사교육, 박용만

1914년 6월 10일 하와이에서 독립군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만든 군사교육단체. 국민군단의 편성과 설치에 대한 주무(主務)는 하와이 각 지방에서 군사훈련을 추진해 온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연무부(練武部)가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을 주도한 주역 인물은 박용만이었다. 국민군단은 박용만이 1909년 6월 네브라스카 헤스팅스에서 시작한 한인소년병학교의 군사운동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미주한인사회에 항일독립전쟁론을 구현하고자 만든 단체였다. 이에 따라 국민군단의 핵심 사업은 ‘산넘어병학교’라 불리는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설립을 통한 독립군사관 양성이었다. 국민군단과 사관학교 설립에 참여한 주요 인물은 박종수·구종곤·이호·안원규·김세은·이정권·노훈·임응천·한태경·한치운·이치영 등이었다. 국민군단의 군사교육 ..

혜상공국(惠商公局)-갑신정변 14개조

1883년(고종 20) 보부상(褓負商)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상인조합. 보부청을 설치해 전국 8도의 보부상단을 통합한 대원군은, 자신이 도반수(都班首)가 되고 맏아들 재면(載冕)을 총리로 하여 전국에 있는 3,000여 개의 시장을 장악하였다. 이후 이 단체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철혈국수당(鐵血國粹黨)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이어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인천·원산·부산 3개 항이 개항되어 일본 상인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또한 1882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구미 상인의 조선 침입도 본격화되었다. 대원군의 보호를 받으며 활동했던 보부청으로서는 이들 외상(外商)의 침투를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1883년 8월김병국(金炳國)의 건의를..

청일전쟁(淸日戰爭)-동학농민, 경복궁

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국 중심 세계질서(Sino-centric world order)’에 종지부를 찍고 신흥 일본을 이 지역의 패자로 등장시킨 동양 사상 획기적인 전쟁이었다. 또한 당시 아시아에서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들간의 영토분할경쟁을 촉발시킨 계기로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 전쟁 결과, 조선은 뿌리깊은 청국의 종주권에서는 벗어났으나,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대상으로 바뀌어 인적·물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수난을 당하였다. 역사적 배경 1894년 봄 전라도에서 제1차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이 봉기하자 조선 정부는 양력 5월 7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

교조신원운동, 최제우, 동학, 교조의 원을 풀어 줌

1864년(고종 1) 동학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이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을 풀어 줌으로써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운동. 운동의 성격은 동학 상층부의 순수 종교적인 측면과 동학 하층부 농민들의 반봉건적·반외세적이라는 정치적인 측면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 성격의 움직임은 교조 최제우가 생존해 있을 때부터 있었으나, 최제우가 사형 당한 뒤 교조 신원 운동으로 통일되어 더욱 성장·발전되어 갔다. 개항 후 반봉건·반외세운동으로서의 농민들의 요구가 보다 절박해져 가는 상황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이 요구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때 일어난 교조 신원 운동은 종교적 성격 외에도 강한 정치성을 띠게 되었다. 나아가 1894년..

방곡령사건(防穀令事件)-조병철, 조병식, 오준영

1884년(고종 21) 이후 곡물반출 금지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적 분쟁사건.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이 증대되면서 곡물가격이 뛰고 품귀현상 마저 나타났다. 거기에 흉작까지 겹치게 되자, 지방관들은 자기 지방에서 생산된 미곡이 타지방 또는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른바 방곡령을 실시하였다. 더욱이 1883년 6월에는 개항 이후 일본에 의한 곡물 유출을 저지할 조약상의 명분이 없던 조선은, 한발·수해·병란 등으로 국내식량의 부족이 염려될 때 1개월 전에 사전통보로 방곡을 실시할 수 있다는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을 체결하여 제한적이나마 법제적인 장치를 가지게 되었다. 1) 1차 방곡령 사건(황해도) 1876년부터 1904년 사이에 일어난 100여 건에 달..

톈진 조약(天津條約)- 청과 일본이 갑신정변 사후

1885년(고종 22)_ 4월 18일, 청과 일본이 갑신정변 사후 처리를 위해 체결한 조약. 1882년 청은 임오군란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킨 후,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다. 1884년 12월 4일, 급진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발발하자 청은 청국 군대를 출동시켜 정변 세력을 진압했다. 일본은 정변을 피하여 귀국한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공사를 다시 보내어 조선과 교섭하게 하였으나, 친청 세력이 재집권한 조선 정부는 일본이 정변 주동자들을 비호하였고, 그들을 일본으로 피신시킨 책임이 크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함께 2개 대대의 병력을 보내어 조선 정부가 협상에 응하도록 위협하였고, 오히려 갑신정변 과정에서 일본 측이 입은 피해..

부들러, 유길준, 한반도 중립화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중립론」을 집필한 것은 1885년(고종 22년) 말이다. 그는 미국 유학 중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소환 명령을 받고 귀국하자마자 유폐되었다. 그의 「중립론」은 이 시기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는 갑신정변 이후 1885년 3월 영국의 거문도 점령, 청일 간의 톈진 조약 체결과 그에 따른 공동 철병, 5월 제1차 조러 밀약 사건 폭로 등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팽팽한 긴장 속에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0월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조선에 부임했고, 조선에 대한 속방화 정책을 심화할 목적으로 조선의 안전을 청국에 의지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조선으로서는 독자적인 주권 수호를 도모할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야만 할 시기였다...

미쓰야 협정-미쓰야, 장쭤린

1925년 6월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와 중국 펑톈성(奉天省) 경무처장 위전(于珍) 사이에 체결된 재중한국인 단속에 관한 협정. 중국의 동북3성(東北三省), 곧 만주에는 일찍부터 많은 한인이 거주했고, 이를 배경으로 한인의 항일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이에 일본은 1920년 간도를 침공하여 만주 일대 한인 거주지를 초토화하고 독립군과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켰다. 그러나 여전히 독립군 활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제는 압록강과 두만강변의 병력을 증강시키고 간도 지역의 경찰력을 대폭 증강시켰다. 또한 한국 민족 해방 운동에 근본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 만주의 사실상 지배자였던 펑톈 군벌 장쭤린(張作霖, 1873~1928)을 상대로 만주 지역 한인 단..

이범윤(李範允)-간도관리사, 동의회 회장, 권업회 총재, 의군부 총재

일제강점기 권업회 총재, 의군부 총재, 신민부 고문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1902년 6월 간도시찰원, 1903년 7월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가 되어 간도지방의 한인보호에 힘썼다. 특히, 사포대(私砲隊)를 조직하고 연발총을 비치하여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모아산(帽兒山)·마안산(馬鞍山) 및 두도구(頭道溝) 등에 병영을 설치하였다. 그래서 한인의 지위는 향상되었고 청국의 조세징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중에는 5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범윤의 부대는 사포대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구한국군과 의병 출신들이 포함되어 있어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다. 1905년 청국측의 강력한 철수 요구를 받은 정부로부터 소환명령이 내려졌으나, 소환에 응하지 않고 청국령을 떠나 노령..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 독도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地圖) 일본 / 하야시 시헤이(林子平) 1785년 제작 / 96.4×74.1cm / 서정철 기증 소장 : 서울역사박물관 18세기 후반 일본의 실학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한국과 일본 주변 4국의 위치와 관계, 각 나라의 영역과 그 경계 및 주변 각국의 지리 및 풍속을 소개한 군사지리서『삼국통람도설』을 간행하면서 부록으로 첨부했던 지도이다. 울릉도와 독도 옆에 '朝鮮ノ持二(조선소유)'라고 적혀있어 당시 일본인 스스로 두 섬이 조선의 영토가 분명함을 강조하고 있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 울릉도 독도

칙령 제41호 울릉도를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도감(島監)을 군수로 개정하는 건 제1조 울릉도를 울도라고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의 등급은 5등으로 할 것 제2조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台霞洞)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竹島)⋅석도(石島)를 관할할 것 제3조 개국(開國) 504년(1895) 8월 16일자 〈관보〉 중 ‘관청 사항란’ 내에 울릉도 이하 19자를 삭제하고 개국 505년(1896) 칙령 제36호 제5조 ‘강원도 26군’의 ‘6’자는 ‘7’자로 개정하고 안협군(安峽郡) 아래에 울도군 ‘3’자를 추가해 넣을 것 제4조 경비는 5등군으로 마련하되 현재 아전의 정원도 갖추어지지지 못하고 제반 업무가 처음 만들어지므로 해당 도(島)가 거..

원수부(元帥府)-대한제국, 황제 직속 최고 군통수기관.

대한제국 때 설치되었던 황제 직속의 최고 군통수기관 1897년 2월아관(俄館)에서 경운궁(慶運宮)으로 돌아온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해 자강(自强)을 꾀하는 동시에 근대적 개혁을 추진해 갔다. 이러한 자강의 의지를 바탕으로 1899년 군통수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수부를 설치하였다. 즉, 군통수권자인 황제가 대원수로서 모든 군기(軍機)를 총괄하고 육해군을 통령하며, 황태자는 원수로서 육해군을 하나로 통솔하기 위해 황궁(皇宮) 안에 원수부를 둔 것이다. 내용 원수부는 국방·용병(用兵)·군사의 명령을 장악하고 군부(軍部)와 경외(京外) 각 대(隊)를 지휘, 감독하기 위해 원수부 안에 군무국(軍務局)·검사국(檢査局)·기록국·회계국을 두었다. 이들 각 국의 관장사무를 보면 대략 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갑오개혁

조선 말기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던 최고 정책결정 기관. 1894년(고종 31) 6월 25일부터 같은 해 12월 17일까지 존속하였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다음 흥선대원군을 추대한 친일파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에 이전부터 논의되어 오던 제도 개혁을 실시하고 새로운 정권의 탄생에 따른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합의체의 형식으로 구성된 초정부적(超政府的)인 입법·정책결정기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기구는 서울 주재 일본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杉村濬]가 발의하고 대원군과 친일파 개혁 관료들이 동의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1882∼1883년간에 존속하였던 기무처(機務處)의 이름을 따서 대원군이 명명한 것이다. 내용 1) 조직구성 발족 당시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