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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시대 구분, 공무원 한국사, 고대 삼국, 중세 고려, 근세 조선, 근대, 현대

Jobs 9 2021. 3. 13.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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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삼국, 중세 고려, 근세 조선, 근대, 현대

시대 구분 국가, 왕조 연도
고대 선사
고조선
부여, 옥저, 동예,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918
중세 고려 918~1392
근세 조선(개항 이전) 1392~1876
근대 대원군집권,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 1876~1945
현대 해방 이후 1945~현재

 

‘시대’라는 용어에는 세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 역사의 큰 전환기를 중심으로 같은 성향이 지속되는 기간을 뜻한다. 예컨대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등의 용례가 그것이다. 둘째 하나의 시대 중에서 시기를 구분하는 데 사용하는데, 이는 엄격히 말하면 ‘시기’라고 칭하여야 한다. 중세의 전기, 중기, 후기 등으로 나누는 것도 시대구분이라고 칭한다. 셋째, ‘협의 시대’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세종시대, 영조시대, 정조시대 등을 말한다. 시대라는 말은 영어로는 ‘Ages’, ‘Period’라고 쓴다.

역사에서 시대구분은 주로 통사를 서술할 때와 역사의 발전을 파악하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진다. 원래 역사는 끊임없이 연속되는 것이지만 수천 년의 역사 중 어떤 시기에 가장 큰 변화가 있었는가를 중심으로 시대를 나눈다. 한국사의 시대구분론은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나누는 방식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지만 왕조별로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나누는 방식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를 세계사의 일환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도 시대구분이 필요하다. 각 시대의 특징을 찾는 것은 한국사의 특수성을 확인하는 길이나 그 방법은 보편성을 띠어야 한다.

시대구분을 하는 목적은 역사 서술에서 모든 사건과 인물을 모두 다룰 수 없으므로 각 시대의 특성을 추상화함으로써 그 일반적 성격을 파악하고, 역사의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인식하여 서술하는 데에 있다.

시대구분의 방식은 역사 인식의 방법과 이론, 개인이 역사에서 중시하는 분야, 그리고 개인의 역사관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시대구분은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며 역사가의 관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비록 역사적 관점이 주관적인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동의를 받으려면, 그 관점이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며 자료에 의하여 입증되는 타당성이 갖추어져야 한다. 역사학이 개별적이고 일회적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이란 공통점을 가지기 때문에 역사학도 유형화·일반화를 무시할 수 없다. 역사학에서 가장 대표적인 유형화·일반화가 시대구분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시대구분은 통사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각 분야사를 서술하는 경우도 반드시 시대구분의 필요성을 느낀다. 각 분야사는 역사 일반의 시대구분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 일반의 시대구분은 각 분야사의 시대구분을 통괄할 수 있어야하며 분야사의 시대구분은 역사 일반의 시대구분에도 중요한 하나의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 한국사는 일국의 역사이지만 종국에는 인류의 세계사를 씀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세계사와의 관련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구분은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변화기를 어디로 보느냐 하는 점에 따라 이루어진다. 변혁기는 두 개, 또는 세 개나 네 개, 다섯 개로 나눌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시대를 다시 세분할 수도 있고, 세분된 시대를 다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명칭을 시대에 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이 한 시대의 모든 특징적인 현상을 모두 표현할 수 없는 경우에는, 시대 명칭의 일반적 명칭을 붙여 구분하고 그 시대적 특징을 설명할 수도 있다. 한 시대의 특성을 규정함에는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시대 명을 사용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시대구분의 연원과 변천

시대구분은 그리스의 헤시오도스(Hesiodos)에 의하여 인간의 역사를 황금의 시대, 은의 시대, 청동의 시대, 영웅시대, 철의 시대로 구분한 것이 최초의 시대구분이다. 중국사에서는 주나라에서 봉건 제후가 칭왕(稱王) 한 것을 기준으로 춘추시대, 전국시대로 구분하는 것과 왕조별로 기전체의 정사를 편찬함으로써 왕조사적인 시대구분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1000년의 신라왕조사를 『삼국사기』에는 나라 사람들이 신라사를 상대(上代), 중대(中代), 하대(下代)주로 구분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상고(上古)와 중고(中古), 하고(下古)로 기록하였고, 그 후 왕조별로 역사편찬을 하는 전통이 있어 왔다.

또한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역사를 선사시대(先史時代: Prehistoric Period)로 칭하고 있지만, 이는 문자 이전의 시대(Preliterary Period)로 칭해야 옳다. 문자 이전의 시대는 500만 년의 역사를 가졌으나 이는 고고학의 연구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인간이 사용한 도구의 소재에 따라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 구분한다.

서양의 역사학이 수용됨에 따라 기(器)의 시대구분에 대한 용어는 주로 서양의 용어를 번역하여 사용되었다. 시대라는 용어도 뚜렷한 개념 정의가 없이 사용되고 있다. 서양에서의 시대구분은 불른두스(Flavius Blondus, 1388~1463)에 의해 고대와 중세로 구분해 보는 견해가 나온 이후, 네덜란드의 인문주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켈러(Christoper Keller)에 의해 고대사(콘스탄티누스대제까지), 중세사(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까지), 근대사(1453년 이후)로 구분되었다. 이 시대 구분은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나 인류문화사에 전체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이다.

중세라는 말은 처음 근대와 고대의 중간 시대로서 암흑시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중세의 특징은 새롭게 변하였다. 이런 시대구분론이 역사학계에서 많이 통용된 데에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론에 의한 시대구분론의 기여가 있었다. 유물사관에서는 전 세계의 역사에서 고대는 노예제 사회, 중세는 농노적 봉건사회, 근대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특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런 시대의 특징을 전 세계사에 보편화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리고 유물사관론은 현재 폐기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학계와 북한 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 그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학에서는 자기 나라의 역사 중 근대 이전의 역사를 모두 고대사로 파악하여 중세라는 시대구분을 설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사와 한국사에서는 중세와 근대 사이에 근세라는 시대구분을 추가하고 있다. ‘근세’라 함은 근대적인 성향은 아직 뚜렷이 나타나지 않으나 그렇다고 중세의 사회와 역사와는 많은 변화가 있다는 의미에서 설정된 것이다.

한국사의 시대구분은 네 시대구분법 이외에 왕조별 시대구분을 하고 있는 성향이 강하다. 삼국시대, 신라통일시대, 남북조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이 그것이다. 이는 새로운 왕조의 개창으로 인하여 통치제도의 변화, 신분제도의 변화, 문화와 사상의 변화가 있었으며, 역사자료가 왕조 중심으로 구분되어 편찬되었기 때문에 편의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왕조가 500년 정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것도 시대구분에 왕조별 구분을 하게 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왕조사로 시대구분을 하던 네 시대구분법으로 시대구분을 하던 왕조사적인 시대구분이 적용됨이 특징이다. 고대, 또는 중세라고 하면서도 그 안에서 작은 시기구분에는 왕조명의 구분이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근대의 전통적인 역사 서술에서는 주로 왕조별 시대구분이 있어왔다. 예컨대 『동국통감(東國通鑑)』이나 『동사강목(東史綱目)』, 김택영(金澤榮)의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에서, 삼국기(三國紀), 신라기(新羅紀), 고려기(高麗紀)로 구분한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근대 초기에 서양사학이 수용되면서 중등 교과서로 간행된 현채(玄采)의 『동국사략(東國史略)』(1906년)에서 시대구분론이 최초로 적용되었다. 즉 태고사(단군~삼한), 상고사(삼국~후삼국), 중고사(고려), 근세사(조선)로 구분되었는데, 이는 그의 창의적인 구분이 아니라 일본인 역사학자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조선사(朝鮮史)』에서 그대로 취한 것이다. 이는 역사의 변화와 발전이라는 의식 위에 구분된 것이 아니라 시간의 원근을 왕조의 변혁과 연결시켜 구분했을 뿐이었다.

황의돈(黃義敦)은 1909년에 저술한 『대동청사(大東靑史)』(필사본)에서 상고(단군~삼국이전), 중고(삼국시대~몽골족의 침입), 근고(몽골족의 압제~조선시대말기)로 구분하였다. 이를 수정한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1923년)와 『중등조선역사』(1926년)에서는 상고(단군~열국시대), 중고(삼국시대~남북조시대), 근고(고려시대), 근세(조선시대), 최근세(대원군 집권 이후)로 구분하였다. 전자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한민족의 대외항쟁을 시대구분의 관점으로 삼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수정 본에서는 국가의 발달이라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생각된다.

장도빈(張道斌)은 1916년에 『국사(國史)』(필사본)를 집필했고, 이를 수정 보완해 1923년에 『조선역사요령(朝鮮歷史要領)』, 『조선역사대전(朝鮮歷史大全)』을 저술하였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시대구분을 했다. 고대(고조선~고려시대), 근세(조선시대), 최근(대원군 집권이후)로 크게 세시대로 구분하고, 고대를 다시 상고(고조선~삼한시대), 중고(삼국시대~남북조시대), 근고(고려시대)로 세분하였다.

안확(安廓)은 한국정치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했는데, 『조선문명사』(1923)에서 최초로 역사발전이란 관점에서 시대구분을 시도하였고, 시대의 특징을 시대명칭에 부쳤다는 점에서 시대구분을 심각하게 고민한 최초의 역사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정치사를 소분립정치시대(상고~고조선~삼한시대), 대분립정치시대(중고,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귀족정치시대(근고~고려시대), 군주독재정치시대(근세~조선시대)로 구분하였다. 그는 한국사에는 봉건제가 박약한 점이 특징이라 지적하고, 한국의 가장 중요한 변모로 지방자치제도의 발달에 착안한 점, 조선시대의 군주권이 고려시대에 비해 훨씬 강한 군주 독재정치이면서도 입법과정에 신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점과 정당(붕당)이 발달해 쟁의를 일으킴으로써 군주권을 제약하고 있다는 참신한 학설을 내놓은 바 있다.

최남선(崔南善)은 『조선역사(朝鮮歷史)』에서 왕조사의 관점으로 상고(고려 이전), 중고(고려시대), 근세(조선시대), 최근(대원군∼한국병합)의 네 시기로 구분했고, 문화사 관계 항목을 대폭 추가시켰다. 1943년의 『고사통(故事通)』이나 해방 직후에 나온 『국민조선역사』(1946)에서도 시대구분은 변함이 없었다.

1945년은 민족의 광복과 더불어 좌우익의 투쟁이 격렬한 상황이었다. 이때 신민족주의의 역사관이 유행하였다. 신민족주의 역사관은 일제강점기로부터 신채호(申采浩)의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계승하면서도 배타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민족 간의 상호 협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는 역사관이다. 손진태(孫晉泰)는 『조선민족사개론(朝鮮民族史槪論)』(1948)에서 한국사의 체계화를 시도했으나, 신라 말기에서 그치고 말았다. 국민들의 사상적 분열과 투쟁이 극심해지자, 『국사대요(國史大要)』(1949)를 써서 이념보다 민족이 우선되어야함을 강조하였다. 이여서 손진태는 민족의 발전이라는 관점으로 민족형성 태동기(선사시대), 민족형성 시초기(고조선~삼한), 민족통일 추진기(삼국시대), 민족결정기(통일신라시대), 민족의식 왕성기(고려시대), 민족의식 침체기(조선), 민족운동 전개기(일제강점기)로 구분하였다. 그는 민족 전체의 균등한 행복을 기준으로 한 사회형태의 변화 발전에 따라 씨족공동사회(선사시대), 부족국가시대(고조선~삼한시대), 귀족국가시대(삼국시대~조선시대)의 세 단계로 나누기도 하였다.

신민족주의 학자 이인영(李仁榮)도 『국사요론(國史要論)』(1950)에서 민족태동기(원시씨족사회~삼국시대), 민족성장기(통일신라~조선 세종대왕), 민족침체기(세종대왕 이후~갑오경장), 민족각성기(갑오경장~일제강점기)로 구분해 민족 중심적인 시대구분을 시도한 바 있다.

이병도(李丙燾)는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1948)을 집필한 후 수정본인 『국사대관(國史大觀)』(1954),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에서 일관되게 상대(고조선~신라 말), 중세(고려시대), 근세(조선 왕조시대), 최근으로 시대구분을 하였다. 이는 왕조사 중심의 역사서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중심이 되어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한국사(韓國史)』6책(1959~1965)에서 고대편(통일신라 말까지), 중세편(고려시대), 근세편(조선시대), 최근세편(대원군 집정 후) 현대편(갑오경장 이후)로 시대구분한 바 있다.

1950년대의 대부분 한국사 개설 등이 왕조에 따른 시대구분에서 탈피하지 못한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이기백(李基白)은 『국사신론(國史新論)』(1960)에서 한국사를 7개편으로 나누어 서술했다가 이를 개정한 『한국사신론(韓國史新論)』(1967)에서는 사회 세력으로서 지배층의 변동에 따라 18장으로 나누어 시대를 구분하였고, 이후 개정판(1976)·신수판(1990)에서는 16장으로 수정하였다.

한우근(韓㳓劤)의 『한국통사(韓國通史)』(1970)와 변태섭(邊太燮)의 『한국사통론(韓國史通論)』(1986)에서는 종래의 삼분법적인 구분에 비해 시대를 좀 더 세분하였다. 즉 『한국통사』에서는 원시사회, 부족사회, 부족연맹사회, 고대(삼국시대), 고대통일국가(통일신라, 발해), 중세(고려시대), 근세(조선시대), 근대(대원군 집정~갑오개혁), 현대(독립협회 이후)로 구분하였다.

반면 변태섭의 『한국사통론』에서는 원시사회, 고대사회(고조선~신라 말), 중세사회(고려시대), 근세사회(조선시대), 근대사회(대원군 집정~일제강점기), 현대(1945년 광복 이후)로 시대구분했다. 이는 대체로 진단학회의 한국사 체제를 원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 이론에 의거해 삼 시대 구분법을 적용한 개설서로 한국민중사연구회의 『한국민중사』2책(1986)과 한국역사연구회의 『한국사강의』(1989), 이를 개정한 『한국역사』(1992)가 있다.

『한국민중사』에서는 원시·고대사회(삼국시대까지), 중세 1기(삼국통일 이후 고려시대까지), 중세 2기(조선시대), 근대 1기(개항 이후 일제강점까지), 근대 2기(일제강점기), 현대(해방 이후)로 구분하였다. 『한국역사』에서는 원시사회, 고대사회(고조선~삼국시대), 중세사회(통일신라~19세기 후반), 근대사회(개항 이후∼일제강점기), 현대사회(해방이후)로 구분하고 있다. 이들의 이론은 결과적으로 북한의 『조선전사(朝鮮全史)』와 시대구분이 일치하고 있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한국사 시대구분론이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공동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4·19혁명과 1961년의 5·16 군사혁명으로 근대화가 제창되면서 우리 역사의 변화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부터다. 1962년 5월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와 진단학회의 공동 주최로 열린 제1회 동양학 심포지엄에서 ‘한국근대화문제’가 주제로 택해졌다. 여기에서 천관우(千寬宇)는 개항이 근대화의 계기는 되었으나 근대화의 기점은 갑오경장으로 본다는 견해를 폈다.

1963년 6월 한국사학회 주최로 ‘조선 후기에 있어서 사회적 변동’이라는 제목으로 학술토론대회가 열려 최영희(崔永禧)·김용섭(金容燮)·유교성(劉敎聖, 후에 유원동으로 개명)·김용덕(金容德) 등은 각각 신분제의 변동, 농촌경제, 상공업, 실학과 동학이라는 부문에서 각자 새로운 변화를 지적해 근대로 지향하는 새로운 변화의 시기로 파악하였다.

1965년 중세사회의 기점으로 새로운 견해가 나왔다. 강진철(姜晉哲)은 고려조의 토지제도를 연구한 결과 국가의 수취가 인신의 노동력 수취에서 토지의 생산물 수취로 전향하는 계기를 무신난으로 보고, 이에서 중세의 기점으로 파악하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러나 이를 수용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이 무렵 일본의 조선사연구회(朝鮮史硏究會)에서 출간된 『조선사입문』에서는 그간 북한에서 논의된 시대구분론에 대한 상세한 보고가 수록되어 국내학계의 시대구분론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967년 12월과 1968년 3월에 있었던 한국경제사학회에서 ‘한국사 시대구분 문제’라는 주제 하에 학계의 토론이 있었고, 그 결과는 『한국사시대구분론』(1970)으로 출간되었다. 이 발표회에서 김철준(金哲埈)은 「한국고대사회의 성격과 나말려초의 전환기에 대하여」에서 나말려초의 사회변혁을 경계로 하여 친족집단의 규모가 크게 축소되고, 농민이 고대 예민적인 성격에서 농노적 성격으로 변질되는 등 총체적인 사회관계의 전환과정과 궤도를 같이 하여 골품제적인 조직 원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유교정치이념이 표방되고 불교사상이 중세적 지성으로서 성격적인 변동을 겪는 등 큰 사회적 전환이 있었음을 들어 이때를 고대사회로부터 중세사회로의 전환기로 파악했다.

또한 천관우는 「한국사상 중세·근세의 계선(界線)」에서 실학, 대동법, 노비해방의 근대적 요소를 지적해 17세기 초 혹은 18세기 후반으로부터 엄격한 의미에서 근대의 기점으로 볼 수 있는 1919년 3·1운동 혹은 1945년에 이르는 수백 년간을 중세·근대 사이의 과도기로 ‘근세’라는 시대를 설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근대이전의 시대(Premodern)라는 의미를 가진 것임을 분명히 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에 한국사 시대구분론이 더욱 진전을 가져왔다. 그 중 1970년대에 정치적 자유가 크게 규제되었던 유신체제가 풀리고 냉전체제의 한 주축이었던 소련이 붕괴되면서 남북한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젊은 역사학자들은 사회변혁의 실천적 방략을 모색하는 가운데 사회구성체론에 입각해 새로운 역사해석을 시도한 민중사학을 제기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사회구성체란 생산양식과 상부구조의 총화라고 하고, 근대화의 테제(These: 정립)와 안티테제(Anti-These: 반정립)로 종속이론과 세계시스팀 이론을 들고 나왔다.

1992년 10월 국사편찬위원회 주관으로 ‘한국사 시대구분의 제문제’라는 학술회의가 개최되고, 1993년 2월 한국고대사학회 주최로 ‘한국사의 고대와 중세의 분기점’을 주제로 합동토론회가 열렸다. 1994년에 출간된 단국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의 『한국학연구』제1집에서는 한국학의 시대구분을 분류사적인 견지에서 정리하였다. 1994년 4월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역사연구부에서는 한국사 시대구분론이라는 공동세미나를 개최하고 그 연구결과물을 『한국사 시대구분론』(1995)으로 출간하였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역사연구실에서는 각 분류사적인 견지에서 시대구분론을 연구하고, 각 시대의 특징을 추출하는 노력을 했으며, 한편으로는 각 시대내의 변화 시기를 좀 더 세분하는 연구를 했고, 서양사·중국사의 시대구분론에 관한 연구도 합쳐 이를 『한국사의 시대구분에 관한 연구』(1995)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다.

한국사의 시대구분론은 대체로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① 고대·고려·조선·근대·현대로 시대구분을 하는 방식이 있다. 고려·조선은 왕조로 구분하는 방식이다. 이는 현재 학계에서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방식이다. 고려와 조선이라는 용어를 시대구분으로 하는 방식은 주로 편의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각각 5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조선 건국으로 정치·경제·사상·문화면에서 고려왕조와 커다란 변혁이 일어났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리고 두 왕조의 역사자료가 각각 이루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고려왕조와 조선왕조가 고대나 근대처럼 이질적인 사회였는가에 대해 충분히 고려된 시대구분이라 할 수 없다.

② 고대·중세·근세·근대·현대로 구분하고 고대 앞에 원시사회를 추가하는 방식이다. 이는 중세는 고려시대로, 근세는 조선시대로 적용시키고 있는데, 네 시대 구분법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다른 용어로 표현했을 뿐, 이 시대의 성격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없다. 이 역시 편의적인 시대구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근세의 기점을 역사의 변화를 중심으로 17세기~18세기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다.

③ 고대와 중세, 근대, 현대로 파악하는 시대구분이 있다. 이렇게 구분하는 시대구분론에도 두 가지 부류의 학풍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유물사관론에 근거해 고대는 노예제 사회, 중세는 봉건 사회, 근대는 자본주의 사회, 현대는 공산주의 사회라고 시대구분을 도식화하는 북한의 시대구분론을 들 수 있다. 이런 시대구분론은 역사 사실에 비추어볼 때, 한국사에 적용될 수 없다. 한국사에서는 노예제와 봉건제가 실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정권을 지키기 위한 교조주의적 이념으로 유물사관과 주체사상을 택하고 있다. 북한 사학의 공헌은 민중사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켰다는 점이다. 남한에서도 비록 유물사관을 그대로 고수하지는 않으나, 중세를 ‘봉건사회’로 지칭하는 일부의 학자들이 있다.

④ 한국사의 시대구분론이 서양의 삼시대 구분론, 또는 네 시대 구분론의 적용이 현재는 진부한 이론이라 하여 한국사의 시대를 18개로 나누는 성향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한국사의 변화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참신한 것이지만, 한국사의 변화의 커다란 분수령을 파악함에는 문제가 있다. 18개의 시대변화가 동질 또는 같은 비중의 것인가도 문제이지만, 이를 좀 더 크게 구분한다면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서술에서 편(篇: Part)과 장(章: Chapter)을 구분해 쓸 때에 편에 해당하는 것이 대 시대 구분이고 장은 각 시대를 다시 시기 구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유물사관론에 기초하면서도 주체사관이라는 관점에서 한국사를 시대구분하고 있다. 고대를 고조선, 부여, 진국, 삼한의 역사로 파악하고 중세는 삼국초기부터 1860년대까지로 파악하며, 현대는 1926년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 동맹을 제창한 것을 기점으로 그 이후를 다루고 있다. 1970년대의 『조선전사』에는 고대사 중 단군조선의 건국을 기원전 8세기 이후로 파악하였다. 이후 1990연대에 나온 『개정판 조선전사』에서는 주체사관을 빙자하고 단군릉의 발굴 등을 원용하여 기원전 3000년 설을 제기하고 신화로 인정했던 단군조선을 실제의 국가의 탄생으로 다루었다. 또한 평양에서 인류가 발생하였다는 설과 함께 평양 중심의 고조선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김일성, 김정일의 부자세습제를 옹호하기 위한 주체사관의 영향에 의해 정치적으로 조작된 학설이라고 평해지고 있다. 북한 역사학의 특징은 학문을 국가에서 주관함으로써 이설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한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 시대구분의 문제점

한국사의 시대구분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문제점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적할 수 있다. 한국사의 시대구분론은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해서 각 시대의 특징을 설명하는 노력이 미흡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각 시대의 특징을 서술하지 못한다면 시대구분의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각 시대의 특징을 서술하지 않는 개설서들의 시대구분은 단지 목차상의 분류에 그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문제점은 한국사의 시대구분에 있어 용어와 개념에 대한 통일적 기반이 없다는 점이다. ‘중세’라는 용어를 같이 사용하는 학자 간에도 그 개념의 차이는 크게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 3시대 구분법, 4시대 구분법이 서양사에서는 이미 지나간 낡은 구분법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서양사의 방법을 그대로 원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상 가장 커다란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시대로 구분하고, 각 시대 안에서 다시 작은 변화의 시기를 나누는 방법으로서 택해지고 있는 측면이 있으며 각 시대의 특징을 추출하는 작업이 남아 있다.

한국 고대사로부터 근세사까지의 각 시대적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문자이전의 시대는 인간과 문화의 교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활과 문화가 기초적인 것이었음으로 인간사회의 보편성이 많았다.

고대사는 기원 전 3세기로부터 10세기 초까지에 해당한다. 최초의 국가다운 국가가 출현하기 시작하여, 강역을 넓히기 위한 정복전쟁이 계속되고, 지배신분제가 최초로 확립되었다. 왕과 왕비족, 그리고 족장세력의 신분제가 형성된 이후 다른 사람의 진입이 어려운 폐쇄적인 신분제도가 구축 운영되었고, 중국의 선진문화인 유교와 불교가 수용되면서도 정치제도, 통치방식은 종래의 전통적인 체재를 기본적으로 유지했으며, 이는 제천대회의 부족적 전통을 계승하는 성격이 강했다. 고대사회는 50년간의 내란을 거쳐 해체되었다.

중세사(기원후 10세기~16세기)는 왕족의 정치적 간여를 배제하고 능력있는 지방인 관료가 새로이 충원되는 탄력 있는 신분제가 재편성되었으며 통치제도와 통치이념에서 유교적, 불교적 보편성이 실현되었다. 이 시기에는 전쟁보다는 외교에 의한 평화관계 구축되었고, 정복전쟁이 없어 강역이 거의 고정되고, 평화가 유지되었다. 사회친족제도는 부모 양계의 혈통을 중시하는 친족제도가 발달했고, 통치제도, 학문, 예제 등에서 선진적인 중국문화를 수용하여 우리문화를 발전시켰다.

근세사(17세기~19세기 전반)는 성리학적 도덕정치를 주장하는 사림집단이 정국을 주도하였고, 경제적으로는 장시의 발달과 화폐경제의 유통으로 전국이 유통망이 연계되는 변화를 가져왔고, 친족제도는 부계친족제도로 전환되었으며, 정통과 명분을 숭상하면서도 자국의 지리와 역사, 언어, 문자를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고, 민중문화가 표면에 부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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