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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파(延安派), 김두봉, 무정, 조선의용군, 중국공산당, 종파사건

Jobs 9 2021. 3. 3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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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후 입북한 조선의용군 출신의 정치집단.

1936년 6월에 마오쩌둥이 인솔하는 중국공농홍군 섬감지대가 옌안에 들어갔다. 이후,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항일군정대학, 노신예술학원, 옌안대학 등 사상 면의 강화도 포함해 근거지 건설이 진행되었다. 공산당은 이 땅에서 「정풍운동」이라고 불리는 사상 통제 운동을 실시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중국 연안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 계열의 김두봉(金枓奉)·최창익(崔昌益)·무정(武亭)·김창만(金昌滿)·윤공흠(尹公欽) 등 연안파가 중국공산당의 후원 하에 입북하였다. 연안파 세력은 정치적 성격을 띤 무장 세력이었다. 입북 직후부터 빨치산파, 국내파, 소련파 등과 함께 북조선 5도행정국을 비롯하여 창군 과정에 관여하였으며, 소련 군정에 연립적인 형태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파에 의해 정치적 입지가 약해져, 6·25전쟁과 종파사건을 통해 북한지도부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설립목적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부는 1945년 10월 8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개최하였으며 1945년 10월 28일 소련군은 ‘북조선 5도행정국’(5도10국)을 정식으로 발족했다. 최초 각국의 책임자인 국장은 조선민주당과 공산당, 연안파를 모두 안배하여 연립적인 성격으로 구성하였다.

연안파 세력은 1946년 2월 16일 조선신민당을 창당하여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소시민, 인텔리, 중산층을 지지기반으로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고자 하였다. 북조선 공산당은 1946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합당대회를 개최하고, 당 명칭을 ‘북조선 노동당’으로 개칭하고 위원장에는 김두봉, 부위원장에는 김일성, 주영하를 선출했다.

연원 및 변천

해방직후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중국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출신들이 1945년 9월 중순경 입북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중국 연안(延安)연안에서 입북한 김두봉은 수하의 조선의용군 약 4,000명을 입북시키기 위해 신의주(新義州) 안동(安東)(지금의 丹東)에 이들을 대기시켜 놓고 소련 군정 당국과 교섭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 내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이라는 정치결사대를 조직하고 모택동(毛澤東)중국공산당의 비호를 받으면서 중국 연안에 그 거점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들은 군정학교를 설립하여 정치군사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간도(間島)와 남북 만주 일대에 공작원을 보내 모병과 아울러 지하조직을 결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소련군사령부의 보류로 입북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여러 가지 정치적인 고려로 동년 11월 중순 소련군 제25군 밴꼬프스키의 입국허가를 통해 입북하게 되었으나 이미 소련파와 빨치산파에 의해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기고 난 후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입북한 조선의용군은 공산당 평북도당이 지정하는 신의주 중학교에 숙소를 정하고 각계각층의 환영도 받았으나 그날 밤 평안북도 보안부장 한웅이 지휘하는 보안대에 의해 기습적으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다시 안동으로 축출되는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소련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북한을 장악하게 하려는 정치공작이 계획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김일성은 1946년초 각 도 철도보안대를 창설해 나가는 과정에서 빨치산파, 소련파 외에도 연안파인 주연, 유용구, 조소향, 백낙철, 김만영 등을 기용하였으며, 또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를 창설하는데 빨치산파가 중심이 되고, 연안파 출신 박효삼(朴孝三), 김강 등 30여명을 참가시켰다.

그러나 이들 연안파 세력들은 상당수가 6·25전쟁 기간 동안 김일성과 빨치산파에 의해 패전책임 전가로 제거되기 시작하였다. 무정, 김한중 등이 첫 대상이었다. 무정은 연안파의 거두로서 전략전술에 뛰어나 김일성에게는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결국 무정은 1950년에 패전의 책임으로 제거되었다.

기능과 역할

1956년 6월과 7월에 김일성이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방문하고 있는 동안에 국내에서는 최창익이 이끄는 연안파의 주도적 인물들이 김일성과 그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이들은 집체적 지도 체제를 수립할 것과 엄격하게 통제되어 온 당 기구를 완화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박창옥을 비롯한 상당수의 소련파와 김두봉, 최창익 등 다수의 연안파 인물들이 당대회에서 여전히 당 고위직에 선출되어 있었고, 김일성 일행의 방문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동년 8월 30일부터 당 중앙위 제3기 8월 전원회의가 개최되었고, 이 회의에서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등이 김일성 노선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연안파의 김일성에 대한 도전은 바로 이 회의를 통해 외부에 표출되었다. 직업 총동맹의 위원장인 연안파의 서휘는 직업 동맹의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정치적 자주성과 파업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발언하였고, 연안파의 윤공흠은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였고 최창익은 중공업의 치중을 비난하고 경제계획을 개편할 것을 촉구하였다. 김을규는 인민군의 전통이 빨치산이 아니라 농민운동에서 계승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연안파로서 조선 인민군 정치 국장이었던 최월종과 최종학 같은 군 주요 지휘관들도 최창익 일파의 움직임에 동조하였다.

현황

1956년 8월 연안파의 비판에 대해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파들은 대대적인 역공을 취하였다. 김일성은 최창익이 심지어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를 포기하고 중립화에 기초한 정치체제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고 비난했다. 김일성은 군부 안에서도 김을규와 같은 연안파들이 빨치산의 전통에 도전했다고 밝혔다. 최용건, 김창만, 이종옥 등이 윤공흠을 반박했고 회의장 중간 중간에 배치된 빨치산파 대의원들은 심하게 반발하면서 회의를 파장시켰다. 결국 윤공흠, 최창익, 김두봉 등의 공격은 무위로 끝나고 윤공흠을 비롯한 연안파들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8월 종파사건’으로 유명한 이 사건은 연안파가 권력에서 축출되고 김일성 등 빨치산파의 권력을 공고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후 연안파 중에는 유일하게 김창만이 생존하였다.

의의와 평가

종파사건시 연안파의 인물들은 국내파들의 경우와는 달리 기소되기는 하였지만 처형당하지는 않고 당과 정부로부터 축출되었다. 이 때 직접적인 가담자는 아니었지만 연안파의 최고지도자 김두봉도 그들과 함께 숙청되었다. 이로 인해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파에게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었고 파벌투쟁은 빨치산파의 일방적 승리로 귀결되었음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연안파 세력의 축출로 4차 당대회 이후 권력문제와 관련해서 김일성 앞에는 더 이상의 정적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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